어제 초3 딸과 아빠의 대화가 이상했다. 

"반려자가 뭐야"

"아빠한테 엄마같이 인생을 같이 가는 사람이야"

뭐 이상할 게 없는 대화인데, 남편이 아이가 보고 있는 폰을 안경까지 밀어올리면서 보고, 

"그런데 그건 그게 아니라, 반반 나눈다, 할 때 반에 려,라고 쓰는 거야."

라고 까지 하는 거다. 

옆에서 듣기에는 아무 문제 없는 대화이기는 한데, 실상 초3 딸은 공포의 맞춤법 모음캡처화면( https://www.bobaedream.co.kr/view?code=strange&No=4344955 -이건 아니고 폰 화면 하나에 가득차는 신기한 거였는데 못 찾았다) 보면서 말하는 거라. 발여자를 보면서 발려자라고 읽으면서 묻는데, 듣는 나나 남편은 '발려자'를 듣고 '반려자'를 생각하는 거였다. 

안 되겠다, 싶어서 내가 이건 다 맞춤법 잘 못 쓴 거니까, 제대로 써 줄게, 하고 써주려고 폰을 가져왔다. 그런데, 딸래미가 하는 짓을 내가 하고 있었다. 

덮집회의,를 보면서 아무래도 모르겠어서 남편에게 물어볼려고 소리를 내면 그 때 겨우 알게된다. 괴자번호,를 보면서도, 순합공간을 보면서도 그랬다. 그러면 엄청 웃겨서 안 웃을 수가 없었다. 

겨우 겨우, 그 틀린 맞춤법의 바른 맞춤법을 뒤죽박죽 써서 줬다. 46개나 되는데, 딱 하나는 설명하기부끄러워서 안 써 줬다.

글자를 볼 때 머릿 속으로 어떻게 소리가 날 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소리가 나는 건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다 싶은 지경이라, 놀라기도 했다. 

한글이 소리나는 대로 쓰는 소리글자라고 해도, 그 많은 말들은 한자에서 왔기 때문에 소리나는 대로 쓰면 이상해진다. 그러니까 소리는 가오캥이,라고 들려도, 머릿 속에서는 다시 가혹행위,로 정렬을 해야 의미를 알게 된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윤호가 회자정리,를 알아보겠다고 무수히 많은 말들을 검색하는 그 순간(https://blog.naver.com/tvntea/222295409940) 같은 거지. 

이렇게 소리난다는 게 재밌고, 소리나는 데로 이렇게 적는다는 게 재밌고, 아이랑 이렇게 낄낄대면서 이야기한다는 게 재밌었다. 

한자어가 많고, 오래되서 이제는 안 쓰는 말-외양간, 오라, 같은 말들-, 영어도 있다. 잘못 들을 수도 잘못 쓸 수도 있는 말들인데, 이렇게 소리나고 소리나는 대로 이렇게도 쓸 수 있어서 웃겼다.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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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iXAvkmaut5g&t=16s

미혼의 여성이 이 유튜브를 들어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글을 보았다. 이 유튜브의 제목 그대로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은 이상한 겁니다'와 초반 앞에 따 놓은 어그로 그대로 '그런 사람은 아이큐가 두 자리'라고. 아이가 셋인 나는 우선은 화가 많이 나서, 퇴근하는 차에서 남편에게 투덜거렸다. 남편이 그렇게 건너 들은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 되고 확인해야 한다고 해서 확인했다.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 


나는, 아빠가 '나는 되는 사람만 찍어'라고 말했을 때 믿었다. 

선거 다음날 누구를 찍었냐고 물으면 아빠는 언제나 저렇게 대답했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나는 한참 후에나 알았다. 

무서운 시대였고, 정치적 입장은 숨겨야 했다는 걸, 아주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나는, 주토피아,를 보고도 역시 왜 어른들은 이렇게 말할까, 의구심을 가졌었다. 

(쥬디의 부모가 자신의 직업(농업)을 묘사하는 방식에 뜨악해하고, -요새는 내가 너무 곧이 곧대로 듣는 성정이 문제인가 싶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더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까 그게 시니컬한 농담인 건가, 싶기도 하지만- https://blog.aladin.co.kr/hahayo/8604003 )

사람들은 순정하게 말하는 방식을 잊은 걸까. 


이런 나조차도, 아이를 막 키우기 시작했을 때,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나 어렸을 때 상처받았어요'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 때 내가 쓴 반어법은 음, 기억나지 않는다. 잘못을 한 아이에게 잘했다,고 했던가. 


나는 이야기,라는 것이 가지는 미묘한 왜곡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오즈의 마법사'는 '돌아갈 집에 대한 예찬'이지만, 뇌리에 남는 노래는 '오버 더 레인보우'고, '겨울왕국'은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지만, 또 뇌리에 남는 노래는 '렛잇고'같은 거다. 집의 소중함,에 대해 말하는 영화에서 '저기 무지개 너머에는 아름다운 것이 있을 거야,라는 노래가 남고, 사랑이 가장 힘이 세다고 말하는 영화에서 '가족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노래'가 남는 거다. 

교수님은 하고 싶은 말을 마지막에 했고, 그게 전하고 싶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건 결국 전해지지 않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역시, 나의 곧이 곧대로 듣는 성정이 문제인 건가. 


순정한 말들은 연약해서, 부끄럽고 깨지기 쉬워서 그런 걸까. 나의 부모가 나에게 했던 대답 같은 거였을까. 

상대가 더 잘 받아들일 만한 말들로 문을 열어야 상대가 듣기 시작하게 할 수 있어서 그런 걸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으니 그런 거였을까. 듣기 좋게 말하는 걸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아이에게 담백하고 정직하게 말하려고 노력하지만, 내 말은 내 뜻은 전해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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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루나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 옛날 옛적 판교에서 + 책이 된 남자 + 신께서는 아이들 + 후루룩 쩝접 맛있는
서윤빈 외 지음 / 허블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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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으로 받아서 읽었다. 순서대로 읽으려다가 관심이 가는 대로 목차에서 골라 읽었다. 

루나를 읽고, 후루룩 쩝쩝 맛있는,을 읽고, 책이 된 남자,를 읽은 다음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옛날 옛적 판교에서는 순으로 읽었다. 후루룩 쩝쩝 맛있는,까지는 작가의 말까지 읽었는데, 다음에는 뭐 굳이,라면서 읽지 않았다. 이렇게 다 읽었다고 김보영님 심사평을 읽었는데, 안 읽은 소설 이야기가 있는 거다. 뭐지 싶어서 다시 목차를 보고, 인터넷 서점에서 책 검색해서는 그 쯤 되는 페이지를 열어서 겨우 '신께서는 아이들을'을 읽었다.- 이북 목차에 빠졌다고 백자평에 올리고 나서, 알라딘 고객센터에서 출판사에 연락해서 수정해주셨다. 지금은 목차에 나오더라. 알라딘에서 받아 본 이북이 아닌데-_-;;; 무척 감사했다.- 나의 질문은 아닌 이야기들이었다.


루나,는 설정 자체가 신기했다. 바닷 속의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와 같은 묘사로 우주에서 광물을 채취하는 공동체에 대해 묘사한다. 


후루룩 쩝쩝 맛있는,은 인간이 동물을 먹는 것의 역지사지 같이, 외계생명체가 인간을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무언가 그런 이야기기는 했지만, 뭔가 개그처럼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읽고는, 작가의 말에 빈정이 상해서 다음부터는 작가의 말을 설렁설렁 읽었다. 


책이 된 남자,는 배경도 이야기도 여기는 아니다. 이야기는 두 가지 층위에서 굴러간다. 중세의 책 사냥꾼이 수도원에서 책을 필사하고, 그 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뇌가 절편처럼 썰려서는 책 속에 갇힌 남자와 책을 통해 대화하면서 그 남자가 책이 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전개된다. 테드 창의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생각이 많이 났다. 아예 모르는 세상 이야기라, 옛날 이야기 읽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다. 


블랙박스와의 인터뷰,는 전뇌화라는 설정으로 우주 식민지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미래의 인간은 이렇게까지 죽음이나 이별을 견디지 못할 것인가, 생각했다. 나는 인간이란 전인적 존재를  믿고 있어서 전뇌화한 존재들에 대한 묘사가 싫다. 뇌만이 살아있으면 나란 존재는 살아있다는 식의 어떤 묘사, 유심칩을 갈아끼우 듯이, 온 몸을 대체하는 미래가 무언가 싫어서 계속 화를 내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는 어디에 있는가, 싶은 이런 기술의 개발들은 누구에게 필요한가,라고 질문하기도 한다.


옛날옛적 판교에서는,은 뭐지 싶다. 


신께서는 아이들을,에 대해서도 뭐지, 싶었다. 작가의 말을 스치듯이 읽고는 아마도, 아이들에게는 심판이 기다리는 어른들의 저승말고 다른 저승을 주고 싶었나보다, 생각했다. 과학소설이라기 보다 환상소설이고 나는 무언가 내가 공격받는 인상을 받는다.  


내가 이야기의 쓸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마음 속에 품은 질문은 뭔지 열심히 찾는 사람이라서, 모든 이야기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어, 에 더하여 특별히 내가 싫어하는 주제들이라 그랬다. 블랙박스와의 인터뷰,나 후루룩 쩝쩝 맛있는,은 잘 읽히고 주제가 뭔지도 알겠는데 싫은 이야기였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영생을 추구하는 것은 끔찍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후루룩 쩝쩝 맛있는,은 이야기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작가의 말이 노골적이라 싫었다. 그 이야기는 우주 유머 같았다. 혈관만 교체해주겠다는 꽤 괜찮은 조건이 아닌가, 좀 키들거렸었거든. 그런데, 작가는 동물권에 대해서 말하면서 바꾸자고 덧붙였다. 아, 이야기는 그런 인상을 주지 않는데, 자신은 그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왜 쓰는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이 영생,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왜 나는 '책이 된 남자'에는 싫다는 감상이 덜할까 생각했다. 아마도 후회에 대한 말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배경이 이국적이라 그런 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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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루나 + 블랙박스와의 인터뷰 + 옛날 옛적 판교에서 + 책이 된 남자 + 신께서는 아이들 + 후루룩 쩝접 맛있는
서윤빈 외 지음 / 허블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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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 목차에 신께서는 아이들을,이 빠져 있었습니다. 관심가는데로 목차를 클릭해서 다 읽었다고 생각하고, 심사평을 읽는데 내가 하나 빠뜨린 걸 뒤늦게 알고, 겨우 페이지를 밀어서 읽었습니다. 어디에다 말해야 할 지 몰라서 여기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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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고객센터 2022-06-17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편드려 너무 죄송합니다. 출판사 전달하여 수정 파일로 교체되었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기존 파일 삭제 후 재다운로드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후 이용하시면서 불편하신 부분은 나의계정>1:1고객상담으로 연락주시면 신속하게 안내 드리고 있으니 참고해주십시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붓다 순례 -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인간 붓다의 위대한 발자취
자현 스님 지음, 하지권 사진 / 불광출판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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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https://blog.aladin.co.kr/hahayo/11489172) 을 머릿 속에 담은 인상대로 남기고, 역시 또 머릿속에 남은 대로 페이퍼(https://blog.aladin.co.kr/hahayo/13639264) 에도 남겨 놓고는 정말 책 속에는 뭐라고 써 있었는지 다시 읽었다. 

읽으면서 내가 좋았던 이야기를 뒤섞었다는 걸 알았다. 

살인자 제자의 이야기는 뒤 쪽에,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뜨는 인과론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 있었다. 그저 내 마음대로 섞어서, 페이퍼에 썼던 것이라, 다시 책 속에 있던 대로 써놓으려고 펼친다. 


어느 날 붓다가 갠지스 강변을 걷고 있을 때였다. 한 브라만교 사제가 신에게 올리는 기도를 통해 죽은 사람을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하며, 그 당위성을 붓다에게 역설한다. 그러자 붓다는 주변의 조약돌을 갠지스 강에 던지며, 신에게 기도하면서 그 돌을 '떠올라라, 떠올라라' 외친다고 해서 돌이 떠오르겠냐고 묻는다. 사제가 안 된다고 하자, 붓다는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떠오르는 것이지 신에게 기원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신을 숭배하며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행동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 중 하나이다. 그러나 붓다는, 인간은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행하던 업에 의해 선업이 많으면 가벼워서 하늘로 가고, 악업이 많으면 무거워서 지옥에 간다고 할 뿐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선인낙과 악인고과'의 인과법이다. - p23~24


이 대목을 겨우 찾아서 읽으면서, 이런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불자들의 강인함을 존경한다. 어차피 확인할 수 없는 죽음 뒤의 일들에 대해, 쉽게 위로하는 말들을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그걸 알면서도, 종교를 통해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종교에 삐딱한 태도가 있는데, 불교는 그런 태도가 없는 거다. 그래서 아마도, 토속종교의 관점에서 석가를 악신이라고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https://blog.aladin.co.kr/hahayo/13277966) 무언가 신이라기에 냉정한데, 마음에 든다. 


살인마 앙굴리말라를 굴복시키다. 

사위성은 신통을 통한 타 종교와의 충돌 극복 이외에도, 앙굴리말라와 관련된 '기쁜 비극'이 서려 있는 곳이다. 앙굴리말라는 젊고 준수한 수행자였는데, 스승의 젊은 부인이 그의 외모에 반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젊은 부인의 유혹을 앙굴리말라가 거절하면서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부인의 입장에서는 앙굴리말라가 먼저 스승에게 자신의 행실을 말하게 될 경우, 당시의 법률상 죽음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오히려 앙굴리말라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누명을 씌웠고, 스승은 제자의 행동에 분노하게 된다. 그 결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100명을 죽여서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면 된다는 기형적인 비방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스승을 의심하지 않았던 앙굴리말라는 이를 신뢰해서 무차별 살인을 하기에 이른다.(중략)

극적인 상황은 마지막 살인을 앞두고 앙굴라말라의 어머니가 아들을 말리기 위해서 오면서 발생한다. 그때 붓다께서 신통으로 이러한 내용을 아시고, 어머니를 해치려는 앙굴리말라의 앞으로 나서게 된다. 그러자 앙굴리말라는 어머니 대신 붓다를 쫓게 되는데, 여기에서 걸어가는 붓다를 뛰는 앙굴리말라가 따라잡지 못하는 이적이 발생한다. 

이때 뒤쫓던 앙굴리말라가 "사문아, 게 섰거라."라고 하자, 붓다는 "나는 멈추어 있는데 네가 오히려 멈추질 않는구나."라고 답하신다. 이는 붓다는 고요의 깨달음에 멈추어 있는데, 앙굴리말라는 혼란 속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붓다의 이 말은 앙굴리말라의 어리석음을 자각시켜, 결국 그가 불교로 들어와 진정한 수행자가 되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그러나 앙굴리말라가 마음을 고쳐먹었어도 그의 살인 행위는 지워지지 않아, 탁발을 나가면 사람들의 모진 돌팔매를 당하곤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앙굴리말라는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여 얼마 뒤 죽음에 이른다. -p277~278


여기까지가 내가 페이퍼에 이상하게 합쳐놓은 두 개의 이야기다. 부처님은 인과율을 말씀하시고, 깨달았다고 해도 깨달음은 오직 나에게만 미친다.  


비유리와 만난 마하남은 최대한의 저자세로 인근의 연못을 가리키면서, 자신이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만 포위를 풀고 도망치는 사람을 살려 달라고 부탁한다. '사람의 잠수 시간이 뭐 대단하랴'고 생각한 비유리는 외할아버지의 부탁을 수용한다. 그러나 마하남은 연못으로 들어간 직후 곧장 머리칼을 풀어서 물풀에 묶어 익사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로 인하여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체되면서 많은 석가족들이 탈출하게 된다. 이때 도망 나온 석가족들이 다시금 건립하게 되는 것이 인도의 가비라국, 즉 '피프리하와'이다. 두 개의 가비라국 문제는 바로 이러한 비극적 사연은 안고서 존재하는 것이다. -p316


석가족의 나라가 망하는 풍경이다. 나는 왜 이 이야기가 좋을까. 석가족은 교만하여, 공주를 원하는 대국에 첩의 딸을 속여 시집보냈다. 그 딸의 아이가 왔을 때 석가 귀족의 아이들은 그 아이를 피가 천하다 모욕해서 원한을 사고, 왕이 된 그 아이는 석가족의 나라를 침공해 온다. 그 아이가 비유리이고, 비유리의 외할아버지가 마하남이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라해도 악업이 쌓여 벌어지는 일을 막을 수 없다. 악업이 쌓여 벌어지는 비극 앞에서 스스로 물 속에서 죽기를 택하는 왕을 보는 것은 무언가 비장하다. 


실제로 이 기록에는 깨달아 아라한이 되고도, 다른 이를 위해서 단 한 차례도 설법하지 않은 박구라 존자의 부도에 대해서도 나온다. 여기에 아소카왕은 단지 1전만을 공양한다. 이를 보고 신하들이 동일한 깨달음을 얻은 분인데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왕은 "이 분은 세상에 무슨 이익을 주셨는가?"라고 대답한다. 이는 불교의 사회 포교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개인의 수행과 이익만을 위한 불교는 불교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왕이 떠나기 전 그 동전은 다시금 튀어 올라 왕에게로 되돌아간다. 1전도 받지 않으려는 청정한 원칙이 박구라에게는 존재했던 것아다. -p319


이 이야기도 왜 좋은지 모르겠다. 깨달음을 얻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주는 일이 불교에서 중요하지만, 가끔 너도 나도 가르치는 세상 가운데서 박구라 존자같은 사람이 있어도 좋지 않은가 싶어서 좋아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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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22-06-15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야기들 너무 좋습니다. 예전에 <죽음의 한 연구>를 읽을 때 내용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너무 흥미가 당겨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일단 장바구니에 ㅎㅎㅎ

별족 2022-06-15 09:51   좋아요 1 | URL
책에는 이 이야기들 말고도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밌어요!

별족 2022-06-16 08:24   좋아요 0 | URL
참 갑자기 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읽었던 책이 생각났습니다. 카자르 사전-검색했더니 하자르 사전이라고 있는데-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