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순례 -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인간 붓다의 위대한 발자취
자현 스님 지음, 하지권 사진 / 불광출판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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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https://blog.aladin.co.kr/hahayo/11489172) 을 머릿 속에 담은 인상대로 남기고, 역시 또 머릿속에 남은 대로 페이퍼(https://blog.aladin.co.kr/hahayo/13639264) 에도 남겨 놓고는 정말 책 속에는 뭐라고 써 있었는지 다시 읽었다. 

읽으면서 내가 좋았던 이야기를 뒤섞었다는 걸 알았다. 

살인자 제자의 이야기는 뒤 쪽에,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뜨는 인과론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 있었다. 그저 내 마음대로 섞어서, 페이퍼에 썼던 것이라, 다시 책 속에 있던 대로 써놓으려고 펼친다. 


어느 날 붓다가 갠지스 강변을 걷고 있을 때였다. 한 브라만교 사제가 신에게 올리는 기도를 통해 죽은 사람을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하며, 그 당위성을 붓다에게 역설한다. 그러자 붓다는 주변의 조약돌을 갠지스 강에 던지며, 신에게 기도하면서 그 돌을 '떠올라라, 떠올라라' 외친다고 해서 돌이 떠오르겠냐고 묻는다. 사제가 안 된다고 하자, 붓다는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떠오르는 것이지 신에게 기원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신을 숭배하며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행동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 중 하나이다. 그러나 붓다는, 인간은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행하던 업에 의해 선업이 많으면 가벼워서 하늘로 가고, 악업이 많으면 무거워서 지옥에 간다고 할 뿐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선인낙과 악인고과'의 인과법이다. - p23~24


이 대목을 겨우 찾아서 읽으면서, 이런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불자들의 강인함을 존경한다. 어차피 확인할 수 없는 죽음 뒤의 일들에 대해, 쉽게 위로하는 말들을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그걸 알면서도, 종교를 통해 위안을 받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종교에 삐딱한 태도가 있는데, 불교는 그런 태도가 없는 거다. 그래서 아마도, 토속종교의 관점에서 석가를 악신이라고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https://blog.aladin.co.kr/hahayo/13277966) 무언가 신이라기에 냉정한데, 마음에 든다. 


살인마 앙굴리말라를 굴복시키다. 

사위성은 신통을 통한 타 종교와의 충돌 극복 이외에도, 앙굴리말라와 관련된 '기쁜 비극'이 서려 있는 곳이다. 앙굴리말라는 젊고 준수한 수행자였는데, 스승의 젊은 부인이 그의 외모에 반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젊은 부인의 유혹을 앙굴리말라가 거절하면서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부인의 입장에서는 앙굴리말라가 먼저 스승에게 자신의 행실을 말하게 될 경우, 당시의 법률상 죽음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오히려 앙굴리말라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누명을 씌웠고, 스승은 제자의 행동에 분노하게 된다. 그 결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100명을 죽여서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면 된다는 기형적인 비방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스승을 의심하지 않았던 앙굴리말라는 이를 신뢰해서 무차별 살인을 하기에 이른다.(중략)

극적인 상황은 마지막 살인을 앞두고 앙굴라말라의 어머니가 아들을 말리기 위해서 오면서 발생한다. 그때 붓다께서 신통으로 이러한 내용을 아시고, 어머니를 해치려는 앙굴리말라의 앞으로 나서게 된다. 그러자 앙굴리말라는 어머니 대신 붓다를 쫓게 되는데, 여기에서 걸어가는 붓다를 뛰는 앙굴리말라가 따라잡지 못하는 이적이 발생한다. 

이때 뒤쫓던 앙굴리말라가 "사문아, 게 섰거라."라고 하자, 붓다는 "나는 멈추어 있는데 네가 오히려 멈추질 않는구나."라고 답하신다. 이는 붓다는 고요의 깨달음에 멈추어 있는데, 앙굴리말라는 혼란 속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붓다의 이 말은 앙굴리말라의 어리석음을 자각시켜, 결국 그가 불교로 들어와 진정한 수행자가 되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그러나 앙굴리말라가 마음을 고쳐먹었어도 그의 살인 행위는 지워지지 않아, 탁발을 나가면 사람들의 모진 돌팔매를 당하곤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앙굴리말라는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여 얼마 뒤 죽음에 이른다. -p277~278


여기까지가 내가 페이퍼에 이상하게 합쳐놓은 두 개의 이야기다. 부처님은 인과율을 말씀하시고, 깨달았다고 해도 깨달음은 오직 나에게만 미친다.  


비유리와 만난 마하남은 최대한의 저자세로 인근의 연못을 가리키면서, 자신이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만 포위를 풀고 도망치는 사람을 살려 달라고 부탁한다. '사람의 잠수 시간이 뭐 대단하랴'고 생각한 비유리는 외할아버지의 부탁을 수용한다. 그러나 마하남은 연못으로 들어간 직후 곧장 머리칼을 풀어서 물풀에 묶어 익사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로 인하여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체되면서 많은 석가족들이 탈출하게 된다. 이때 도망 나온 석가족들이 다시금 건립하게 되는 것이 인도의 가비라국, 즉 '피프리하와'이다. 두 개의 가비라국 문제는 바로 이러한 비극적 사연은 안고서 존재하는 것이다. -p316


석가족의 나라가 망하는 풍경이다. 나는 왜 이 이야기가 좋을까. 석가족은 교만하여, 공주를 원하는 대국에 첩의 딸을 속여 시집보냈다. 그 딸의 아이가 왔을 때 석가 귀족의 아이들은 그 아이를 피가 천하다 모욕해서 원한을 사고, 왕이 된 그 아이는 석가족의 나라를 침공해 온다. 그 아이가 비유리이고, 비유리의 외할아버지가 마하남이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라해도 악업이 쌓여 벌어지는 일을 막을 수 없다. 악업이 쌓여 벌어지는 비극 앞에서 스스로 물 속에서 죽기를 택하는 왕을 보는 것은 무언가 비장하다. 


실제로 이 기록에는 깨달아 아라한이 되고도, 다른 이를 위해서 단 한 차례도 설법하지 않은 박구라 존자의 부도에 대해서도 나온다. 여기에 아소카왕은 단지 1전만을 공양한다. 이를 보고 신하들이 동일한 깨달음을 얻은 분인데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왕은 "이 분은 세상에 무슨 이익을 주셨는가?"라고 대답한다. 이는 불교의 사회 포교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개인의 수행과 이익만을 위한 불교는 불교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왕이 떠나기 전 그 동전은 다시금 튀어 올라 왕에게로 되돌아간다. 1전도 받지 않으려는 청정한 원칙이 박구라에게는 존재했던 것아다. -p319


이 이야기도 왜 좋은지 모르겠다. 깨달음을 얻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주는 일이 불교에서 중요하지만, 가끔 너도 나도 가르치는 세상 가운데서 박구라 존자같은 사람이 있어도 좋지 않은가 싶어서 좋아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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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22-06-15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야기들 너무 좋습니다. 예전에 <죽음의 한 연구>를 읽을 때 내용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너무 흥미가 당겨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일단 장바구니에 ㅎㅎㅎ

별족 2022-06-15 09:51   좋아요 1 | URL
책에는 이 이야기들 말고도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밌어요!

별족 2022-06-16 08:24   좋아요 0 | URL
참 갑자기 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읽었던 책이 생각났습니다. 카자르 사전-검색했더니 하자르 사전이라고 있는데-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