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아이들의 계급투쟁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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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을 하고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좀 더 어렸고, 내 앞에는 나보다 어른들이 걷고 있었다. 등산로에는 좀 더 편안한 등산을 돕기 위해 나무를 덧댄 등산로가 생겨 있었다. 나를 앞서 걷던 어른들이 "못 걷겠으면 안 오면 되지, 이게 뭐야?"라고 투덜거렸다. 속으로 나는 조금씩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걸었다. 다시 조금 더 가다가 "외국에서는 부모한테 얘들을 뺏는데, 그게 말이 돼?"라고도 했다. 나는 역시 또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등산로 뒤에서 그 말들을 들을 때, 나는 반박하고 싶었었던가. 다리가 불편한 사람도 조금은 이 아름다운 산을 누려야 하지 않겠어요?나, 그럼 부모가 아이를 때리고 학대하고 방치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처럼. 그렇지만, 나도 다리가 불편한데도 산의 아름다움을 누리려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산이 흉물스러워진다면 그건 그저 인간의 욕심일 수도 있는 거 같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또 알 것도 같아서 그저 묵묵히 따라 걸었다. 조금은 출렁거리는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뀐다. 언제나 분명한 입장이란 없다. 

일본의 여성이 영국에서 보육교사를 하면서 쓴 글이다. 큰 이야기는 어렵다고 말하는 이 여성이, 살면서 겪는 모순들에 대해서 말한다. 보수화되는 유럽에서 아이들 보육을 위한 자원이 줄어드는 상황이 묘사된다. 계급분리가 극명한 나라, 도시의 슬럼에서 정부의 예산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는 보육원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부유나 풍요, 선택의 문제. 동양의 문화에서 자라 서양의 삶을 보는 방식들이 충돌한다. 영국의 노동당 시절과 보수당 집권 시절을 모두 겪고 있는 저자는 최근의 글들을 앞에 배치하고, 노동당 시절의 글들을 뒤에 배치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현실의 모순들은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도 들린다. 

계급 분리가 심각한 영국 도시의 삶을 나는 멀찍이 구경한다. 서울에 사는 나의 친구라면, 다르지 않잖아?라고 할 만한 내용들에도, 나는 뚱하게? 정말?이라고 되물을 거 같다. 살면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좁은지 나날이 실감하는 날들이라서 어떻게 그걸 바꿀 수 있다는 거야,라고 공연히 되묻는다. 어린이집에서 만든 종이조립 로봇에게 쇼핑가방도 조리도구도 바꿔 시킨다는 어린 딸에게, "이걸 다 로봇 시키고 너는 뭐하게"라고 물었더니, "폰 보지"라는 답을 들은 나는 부유하기 때문에 삶과 유리되는 그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생각한다.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정치가 힘써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점점 더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일본인 특유의 약하고 과장된 감수성이 껄끄럽게 걸리는 부분들을 가끔 만나고, 나는 역시 알 수 없다고 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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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온 글, 한글 - 훈민정음의 글자 짓기에 따른 새 한글 지도안
박규현 지음 / 수신제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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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유튜브를 보다가, 외국인이 한글을 배우면서 본다는 동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K53oCDZPPiw)을 보았다. 대개 모음이 천지인,을 의미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머지 자음들까지 여러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건 모르겠어서 이 책을 샀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샀지만, 그래도 처음 한글을 익히는 사람을 위해 쓴 책이니, 이해할 만한 대목도 있을 것이다, 기대했는데, 그걸 모두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의심이 너무 많다. 

백성을 위해 글자를 만들기로 결심한 우리의 위대한 왕은 자신의 세계관에 비추어 자신의 글자에 역할을 부여하셨다. 세계의 무늬가 이 글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오행을 각각의 자음에 부여한다. 각각의 자음이 가지는, 음양 오행과 모음이 가지는 하늘과 인간과 땅 사이의 조화 가운데, 표음적이고 표의적이기도 한 한글이 생긴다고 말한다. 잠재된 태극(ㅇ)에 사람이 개입하여(ㅣ) 운동이 일어나는(ㄹ) 게 '일'이라고 풀어준다. 그래서 한글은 자질문자라는 새로운 분류에 있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이미 말은 있었잖아?라고 의심한다. ㄱ이 나무의 기운이 있다고 ㄱ을 만들기 이미 전부터 말을 하고 있었잖아. ㄴ이 불의 기운이 있다고 ㄴ을 만들기 전부터 이미 ㄴ을 소리내고 있었잖아. 부여한 글자의 뜻과 부여한 의미의 값의 연결에 의심을 품는다. 

하늘이라는 대상을 하늘,이라고 쓸 때, 그리고 말할 때, 말과 글은 결국 자연의 무늬라고 말한다. 나는, 그럼 하늘을 스카이라고 하는 것은요? 하늘을 티옌(天)이라고 하는 것은요? 라고 의심한다.  한글이 있기 전부터 하늘,이라고 소리내어 말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파자해가 갖는 것은 결국은 사후적이고, 내가 이걸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무언가 굉장한 특별함을 믿어 의심치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왕의 깊은 사랑까지만, 자신의 글에 부여한 자신의 세계관이라는 데 까지만, 각각의 자음에도 모음의 천, 지, 인 처럼 세상을 부여했다고 받아들이고 덮는다. 한글이 좋은 글자인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늘에서 왔다'고는 이 글자가 '천지 만물의 무늬'라고는 못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 마음을 그 좋은 뜻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이 어질기를 바랬던 왕의 마음은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 때와 지금, 한자의 훈음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도, 얼마나 다른 말, 글을 쓰고 있는지도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대로, 아이들에게 가르치지는 못할 것 같다.  

서구와 달리 동양의 진리 개념은 어떤 실재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유교의 중(中), 불교의 공(空), 도교의 무(無)는 하나같이 이도 저도 아닌 상태라는 부정어법으로 진리를 말합니다. 실체가 아니며 고정되지 않으면서도 작용은 뚜렷하고 우주, 자연, 만물을 싸안고 있는 어떤 장(場)처럼 진리를 정의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찾는 방법도 인위적으로 어떤 애를 쓰기보다 통념, 패러다임, 카르마, 트라우마 등 무엇이라 부르든 감정과 사고에 집착 내지 고착되는 상태에서 벗어나 초연한 관찰자의 입장에 서는 것을 제시합니다. ‘있는 그대로‘가 도라는 것은 이런 태도에 충실할 때 얻어지는 어떤 안목, 관점에 인식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진리란 고정된 데이터 값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언제나 새롭게 보는 태도에서 일어나는 세계와의 동기감응의 체험입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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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d21 2020-03-07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박규현입니다. 책을 읽고 리뷰 남겨주셔 고맙습니다. 여러 의문점들이 있을텐데요, 고맙게도 해례본 자체에서 (그 중 정인서 후서) 별족님이 가진 의문에 자문자답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정으로 자세한 해설을 달지 못했습니다. 모자란 부분들을 추려 추가적인 작업을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https://blog.aladin.co.kr/wunderhorn/9750979

이걸 보고 내가 버지니아 울프를 못 읽는 이유가 이것인가, 생각해버렸다.

 

영 안 읽어지는 한나 아렌트도, 한나 아렌트의 기묘한 사생활을 보면서 그런 거였나, 이런 생각을 해 버렸다.  

 

 

최근에는 https://ygmh.skku.edu/ygmh/tradition/comment.do?mode=view&articleNo=89884&article.offset=0&articleLimit=10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주장을 찾아내고 납득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길을 버젓이 실행하여 그것으로 후세에 칭찬받고 기리는 대상이 된다고 한다. 나는 이런 짓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이걸 보고, 이게 얼마나 어려운 각오인가도 생각하고 있다.

 

무언가 산다,안에 보다,와 듣다가 더 많이 들어오면서, 모두가 해괴하고 납득하기 힘든 주장들이 더 커지는 것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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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백승주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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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MD의 통곡리스트(http://www.kyobobook.co.kr/eventRenewal/eventViewByPid.laf?eventPid=38372&classGb=KOR&orderClick=42d )를 보고, 교보에서 산 책이다. 회사의 단체구매 아이디가 있어서 샀는데, 이사한 주소도 전화번호도 옛날 거였고, 심지어 수신인 이름조차 회사이름이었어서, 한참이나 지난 다음 이미 다른 사람이 사는 집을 노크해서 받았다. 일주일도 더 지난 다음이었다. 붙박이 같은 나처럼 어디든 가려하지 않는 사람이, 어쩌다보니 상해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어 쓴 글들이다. 재미있다. 

언어를 가르치는 교사인 자신이 자신의 학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자처하여 택한 문맹의 삶이다. 중국어를 모르는 채로 간 상해에서, 더듬더듬 나아가는 삶의 이야기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고장나는 빌려사는 집의 물건들에 대하여, 혁명의 작은 집이 커다란 쇼핑몰로 둘러싸이고, 도살장이 신혼부부의 촬영지가 되는 도시에 남은 기억의 아이러니에 대하여 들려준다. 상하이,라는 영어동사가 사기치다,라는 의미라는 걸, 자신의 경험과 함께 들려주기도 하고, 하루라도 먼저 도착해서 가족들을 안내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고, '나는 한국인입니다'라고 밖에 말하지 못한 전화통화에 대해 들려준다. 

말을 하지 못하고 나를 둘러싼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은 바짝 긴장하고 나서야 하는 일이고, 어리숙해서 말하고 싶지 않은 상황들을 맞닥뜨리게 되는 일이다. 바보같았는데, 숨기고 싶었을 텐데, 숨기지 않는 글들이다. 그래서 재미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참 흠결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행했던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행동들을 떠올리면, 나는 나도 모르게 식은땀은 흘리기도 한다. 이제 나는 세상이 내게 준 상처보다는 나의 흠결을 더 부끄러워하는 남자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흠결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구로 제멋대로 위안을 받는 남자.

자기의 흠결이 보이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나의 흠결을 받아주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위악을 떨 때는 몰랐던 고마움 또한 생겨난다.
‘defaut‘라는 단어를 ‘상처‘에서 ‘흠결‘로 읽어내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아직도 위악을 떨 때가 있지만 그때마다 사람들이 흠결 많은 나를 어떻게 받아줬는지 떠올린다. 그 많은 흠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준 아내, 친구들, 동료들. 그래서 조금 더 웃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내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의 흠결도 이해해보려 노력한다. 아니,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이 흠결없는 영혼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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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공부를 한다. 미리 한 학기씩 두 학기씩 앞서서 문제집을 풀고 내년에 겨우 중 2인데, 스톱워치를 책상에 올려놓고 시간을 재면서 공부를 한다. 방학을 하고는 밤 열두시까지도 잠도 안 자고, 아침에 깨지도 않고 점심무렵에나 깬다. 그러지 말라고 건강하고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자꾸 자꾸 말하는데, 내가 혹시 행동으로는 그러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칭찬을 한 적도 야단을 친 적도 없는데, 그래서 그러는가도 생각한다. 학교에서는 시험도 성적표도 보내주지 않는데, 학원에서는 벼라별 말을 듣고 현대의 또래집단 학생이 된다. 과학공부를 앞서 하려니 지난 학원 방학 중에는 나에게 가져와서 뭘 물어본다. 원자핵에 양전하가 핵의 주위를 도는 전자에게 음전하가 있다는 설명을 하면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화시켜서 가르치는 각 단계에 대해 의구심이 생긴다. 처음 핵과 전자에 대해 배울 때는 이렇게 배웠지.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의 모습들을, 이러면서 보았다. 그러다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행성처럼 묘사되던 핵과 전자가, 구름처럼 묘사되고, 결국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되기까지 결국 이해하지 못 했던 현대물리의 어떤 순간까지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저 가르침은 옳은가, 이런 생각도 했나 보다. 

지난 블랙독,에서 학생은 자신이 틀렸다는 시험 문제가 현대 물리의 관점에서 오답이 아니라고, 학교 내에서 문제제기 하는 대신 학교 밖에서 문제제기해서 결국 정정을 받는다. 교과과정을 통해서는 오답이고, 교과과정을 벗어나 학문적으로는 오답이 아닌 그 상황에 내가 딸의 과학 요약집을 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서양의 학문이 나아가는 방식과 동양의 학문이 나아가는 방식이 이렇게 다른 건가, 싶기도 했다. 내가 교사고, 그 다음을 알고 있는데, 이해하기 쉬우라고 단순화시켜 가르치는 것은 어떤 불편한 느낌을 주지는 않을까, 같은 생각도. 동양의 학문이 그래서 신기한 말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계속 읽도록 한다면, 서양의 학문이 온갖 것들로 쪼개놓은 온갖 학문을 초보적인 형상화부터 시작해서 점점 점점 기존의 관념을 부정하면서 나아간 게 아닐까도 생각한다. 서양의 학문을 배우는 방식의 지금 학교는, 그러니까 초등학교의 어떤 배움이 중학교에서 부정되고, 중학교의 어떤 배움이 고등학교에서 부정되고, 고등학교의 어떤 배움이 대학교에서 부정될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라고도. 동양의 배움이 결국 알 수 없는 상태를 인정하게 되는 그래서 기이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라고도 생각했다.

가르치는 것이 어렵구나, 배우는 것도 역시 어렵다. 점점 모르는 것이 늘어나는 그 각각의 단계에서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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