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 내려간 시댁은 정규방송 화질만 깨끗했기 때문에 내내 틀어놓는 만화채널을 오랜만에 벗어나 연휴에 방송하는 파일럿 예능을 볼 수 있었다. 

아이돌 요리왕 본선에서 처음 탈락한 산들과 유아,의 요리를 시식하고 품평하는 시간이었다. 심사위원 자리에 앉은 식당의 전문 셰프 세 명이 시식을 하고 이야기한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에서 독설로 이름을 날린 요리사께서, '이걸 우리 먹으라고 준 거냐, 개도 못 줄 쓰레기'-아, 정확하지 않다-라고 품평했다. 차례차례 악평들 끝에, 연예인 판정단 중에 한 명이-성대현,이었다- 쭈뼛쭈뼛 '아, 저는 제일 제 입맛이예요. 다 먹고 양념에 밥도 비벼 먹을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니까, 이 독자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다고 겨우 말하는 게 그 말이 거기 들어가는 게 낯설었다. 그런 장면은 다음에도 한 번 쯤 더 나온다. 페이가 만든 등갈비튀김을 그 요리사는 책상에 치면서 '돌덩이'라고 품평했고, 이국주는 '아, 완전 좋아요'라고 했던가. 

권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어떤 독설이든 고개를 떨구고 듣고 복종해야 하는 식으로 묘사하는 방송을 보아왔던가, 독설 뒤에 오려붙인 그 장면이 어색했다. 그런 독설 뒤에 그런 상찬이 붙으면서 권위는 살짝 일그러졌다. 


권위는 물론 있어야 하지만, 권위에 항상 복종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게, 먹는 거, 입는 거, 사는 거,라면 개인의 기준으로 자기 안을 탐색해야 하는 거다. 티비는 결국, 기준을 통일하는 꽤나 폭력적인 매체고, 최근에는 요리나 책이나 그게 무엇이든 굉장히 취향을 타는 것들에까지 취향을 전시하고 안내하는 노릇을 하고 있다. 그게, 티비라고 티비에서 프로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한 사람의 취향이 만인의 취향으로 확산되기 쉬운 영향력 큰 매체,라는 걸 안다면, 저런 장면은 생소하다. 생소하다고 해도, 결국 여섯 중에 다섯이 맛있는 걸로 요리'왕'이 뽑히겠지만, 산들이나 유아가 성대현같은 사람의 요리사라면 뭐 그 사람에게는 요리'왕'이 될 게 아닌가, 싶었다. 삶에서 '왕'을 뽑아야 하는 순간은 얼마나 올까, 언제나 순위를 매기는 프로들을 보면서, 심사위원에 이입하여 구경하는 시청자인 나는, 그런 짓의 쓸모없음이 드러난 장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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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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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남편이 가장 미웠던 때는 첫 아이를 가지고, 낳아 기르던 그 몇 해였다. 임신으로 무거워진 몸을 하고는 돌아나오면 오줌이 마려운 나를 이해 못하는 남편, 아이를 낳기 전 후로 내 일상은 확 달라졌는데 여전히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어보이는 남편,을 나는 그래, 미워했다. 뱃 속에 열달을 품고, 그렇게 낳아서, 기르는 나도 아이와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남편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고, 나보다 남편이 더 큰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걸-그래, 남편의 기여는 추상적이니- 이해할 만큼 나는 넉넉하지 못했던 거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개인적인 체험 안에서 책 속의 남자를 미워하며 읽었다. 장애를 가진 자식을 키우고 돌본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묘사했다는 책 소개에, 그래, 나는 무언가 애틋한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책은 산통을 하는 아내를 두고 나와 아프리카 지도를 사는 남자를 시작으로 거리에서 십대와 싸움질을 하는 남자, 아이의 장애를 알고 아이를 죽일지 살릴지 심난한 와중에 술을 퍼먹는 남자, 술을 먹으러 자신이 강간했던 남편이 자살한 대학 동기 여자를 찾아가는 남자, 술을 퍼먹고 직장에서 토해가지고는 직장에서 짤리는 남자, 수술을 할 수 없을 만큼 아이를 허약하게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는 남자, 아이가 약해져서 죽었다는 전화를 이제는 애인이 된 대학동기 여자 집에서 기다리는 남자, 결국 실패했다는 전화에 아이를 죽여줄 다른 의사를 물색해서 차를 몰고 가는 남자, 그러다가 그러다가. 시간은 점프해서, 의젓한 아이의 아빠인 남자를 격려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사건들을 이야기들을 그 남자의 시점으로 읽으면서, 산통하는 아내에 이입하면서 분개하는 거다. 아, 썅, 죽을 똥 살 똥 아기를 낳고 있는 아내도 있는데, 지금 아프리카에 가고 싶은데 못 간다고 자기 젊음? 자유는 끝났다고 앓는 소리 하고 있는 거야! 아이가 죽으면 결혼은 끝이라고 말한 아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지금 병실에 있는데, 지금 술 퍼먹고 여자랑 저런다고, 아우, 이러면서. 자기를 다 이해한다고, 자기를 구속하지 않는다고, 그래 애인이 된 여자를 묘사하는 데는, 아, 미치겠다. 그래, 여자들이 다 그랬으면 좋겠냐, 이러면서. 내가 일본의 문인들의 여성혐오를 열거한 책을 봤는데, 이 작가도 틀림없이 있을 거야, 이러면서. 

작가의 결국, '개인적인' 체험이고, 모든 사람들은 결국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한다지만, 이런 '남성'의 이야기가 그 당시 대중적으로 꽤나 성공했다는 데 놀란다. 

명절에 엄마한테 줄거리를 중계했더니, 엄마가 '그래, 세상에 미친 놈들 쎘어'라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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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9-23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체험이 저런 내용이었군요;......
저도 애절한 내용으로 생각햇는데요...고난과 희생, 인간적인 고뇌, 인간의 나약함...감동도 있고........그런거 말이죠...
스포 덕분에 책을 안 읽어도 되는 돼지...ㅋㅋㅋ
설마 오에의 개인적인 체험은 아니겠죠????

별족 2016-09-23 12:56   좋아요 0 | URL
소설이니, 소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저런 상상을 하기는 했겠죠???
 
늑대가 들려주는 빨간 모자 이야기 내 얘기 좀 들어 봐 2
트리샤 스피드 샤스칸 글, 제럴드 게럴스 그림, 강형복 옮김 / 키즈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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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에서 주에 한 권 책을 들려보낸다. 가끔, 이런 어이없는 책을 가져오면 내가 이상한가, 싶어 남편에게 읽어보라고 준다. 다 읽은 남편이 한 말이다.

'쓴 사람이 여자네?'

'그래? 몰랐네.'

늑대에 잡아먹히는 할머니나 빨간 모자를 거울만 들여다보는 멍청이로 묘사한 그림책의 저자가 여자인 줄 몰랐다.

 

나는, 늑대가 빨간모자를 잡아먹는 게 나빠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빨간모자가 늑대에 잡아먹혔다고 해서, 또 이유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늑대와 빨간모자 이야기를 늑대이야기로 하면, 도대체 할 말이 하나도 없는 거다.

그러니, 책이 살짝은 궁금했던 거다. 그런데, 정말이지 할 얘기가 하나도 없이 이루어진 그림책은,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쓰러진 나무들과 이 책을 실어나를 사람들, 그걸 읽은 아이들까지 할 말 없게 만든다.

 

이야기는, 원래 채식주의자였던 늑대가 일주일도 넘게 굶어서 빨간 사과같은 빨간모자와 파란 사과같은 할머니를 잡아먹었단다. 그런 정도였어도, 도대체, 이 말들이 책이 되려면 도대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 어이없는 묘사로 가득찬다. 빨간 모자를 쓴 빨간 모자는 빨간 사과처럼 동그래서는 자신을 끊임없이 거울에 비춰보는 그런 존재로 묘사된다. 할머니도 마찬가지고. 이런 책을 도대체 왜 만든 걸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늑대가 채식주의자였을 필요도 없고, 늑대가 빨간모자나 할머니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그 둘이 멍청이처럼 거울만 쳐다보는 한심한 존재일 필요도 없는데, 뒤집어보자면서 왜 그런 식으로 묘사해야 했던 걸까, 싶은 거다. '야수가 들려주는 미녀와 야수'이야기도 시험에 들게 하는 사랑,이라는 면-그러니까, 야수는 죽지 않으면서, 미녀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죽은 체한다-에서 좋지 않았는데, 이 이야기는 도대체 어이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늑대에게 먹힌 사람들이 멍청했다,였던 걸까. 그런 이야기를 왜 하고 싶은 걸까. 자신이 하는 말이 그다지 바람직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런 책이 번역되어 아이 손에 들려온 걸 보면 나같은 사람보다 '늑대에 잡아먹히는 멍청한 존재들'을 묘사하는 게 그래 재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걸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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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다, 이것은
위험한 마음 - 썩어빠진 교육 현실을 유쾌하고 신랄하게 풀어낸 성장소설
호우원용 지음, 한정은 옮김 / 바우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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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교육이 문제,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건, 노동조합이 들고 선 피켓 때문이었다. 성과연봉제,를 반대하는 조합 간부가 정부청사 앞에 들고 선 피켓에는 여덟살 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뚱한 표정으로 '성과연봉제? 그럼 엄마, 아빠는 몇 점이고 몇 등이야?'라고 묻고 있었다. 투쟁소식을 알리는 메일에서 그 피켓을 보는 순간, 나는 죄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지금 내가 반대하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하는 그걸, 나의 아이는 학교에 들어선 순간 매일, 매일 받고 있구나 싶어서였다.

그 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교육을 바꾸자고. 그런데,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말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내가 성과연봉제를 반대하는 그 많은 이유 그대로, 가르치고 기르는 게 교육이라면 지금의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살아가는 법도, 살아가는 힘도 가르치지 못하는 그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해 줄까 하고 서점에서 새로 나온 노작가의 책을 펼쳐 봤었다.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기도 전에, 여성혐오를 만나는 바람에 그 책에 실망해서, 오래 전 이 책을 다시 펼친 거다. 심지어 여성혐오와 교육문제는 함께 나온 문제라고 까지 생각했다. 짱구를 봤을 때 뒷걸음치게 하던 여성혐오적 묘사까지 떠오르면서, 위계적이고 강압적인 동아시아의 교육이 문제다,라는 식으로까지.

 

이 소설은 고등학교 입시가 있는 대만에서 중3인 아이가 화자로 등장한다. 선생님이라고 해서, 인격적으로 완성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아이들도 안다. 위계적인 권력을 용인하고 입시만이 제일 중요한 교육제도 안에서 교사나 학생이나 학부모나 누구라도 공범이 된다. 우리나라라고 다르지 않다. 입시성과가 가장 좋은 선생의 반에 저자세로 아이를 밀어넣었던 엄마는, 싸움의 과정에서 아들의 성장을 본다. 늘 아이로 생각하던 아버지조차, 아들이 자랐다는 걸 깨닫는다. 승리할 수 없는 공범이 아주 많은 싸움의 끝에 아이는 말을 잃는다. 그렇지만 이건 성공이나 실패의 이야기는 아니다. 살아있고 살아간다. 교육은 교과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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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런 어드벤처 8 : 워싱턴 D.C - 쿠키들의 신나는 세계여행 쿠키런 어드벤처 8
송도수 글, 서정은 그림 / 서울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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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애가 게임으로 쿠키런을 열심으로 하고 있을 때, 출장 길에 터미널 책방에서 1권을 보고 사왔다. 출장가게 되면 또 사 줄께,라고 말하면서 주는 바람에, 책장 하나를 차지하고 하염없이 늘어나고 있다. 이 책은 우리집 책장에서 그렇게 쌓이기 시작한 쿠키런 어드벤처의 8권이고, 기억을 잃은 왕자인 용감한 쿠키군 브브가 명랑한 쿠키양 콜드와 함께 함정에 빠뜨린 자신의 적을 알아내면서 빼앗긴 왕좌를 되찾기 위한 모험 중에 미국의 워싱턴 DC가 배경인 이야기다. 나는 인디언의 문명을 파괴하고 세워진 개척이민의 나라, 미국의 수도라는 짧은 역사의 땅에 무슨 명승지가 있다고,라는 삐딱한 태도로 읽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브브가 만나고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지금의 미국 주류일 백인이 아니라 인디언들이다. 미국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말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그 땅의 원 주인인 인디언들의 설화,를 빌어, 브브가 힘을 구하는 거다.

거의 말미에 포토맥 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디언의 설화,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이건 어쩌면 내가 인디언 사회를 자연과 공존하는 이상적인 철학을 가진 공동체,로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그 설화는 인디언들이 두려워한 괴물 웬디고에 대한 것이었다. 숲속에서 길을 잃은 두 남자가 배고픔에 지쳐 쓰러질 즈음, 죽지 않겠다는 강경한 욕망을 가진 사람의 귓가에 '눈 앞에 먹이를 먹으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에 굴복하면서 웬디고가 탄생했다,고 한다. 그 웬디고가 포토맥 강의 안개 속에서 브브를 부르면서, 말하는 거다. '사냥을 참 많이도 했지, 물을 긷는 여자와, 조개줍는 아이를'이런 식으로. 북미 인디언들이 가장 무서워한 괴물이었다고 주석이 짧게 붙은 웬디고,는 나에게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도륙하는 현대의 사이코패쓰 살인자,를 연상시켰다. 나는  아, 그런 거였어. 어디라도, 문화나 철학이 훌륭하다고 해도-자연과 공존할 수 있고, 서로를 존중하도록 고양시키는 문화를 가졌다고 해도-, 그런 존재를, 피할 수는 없는 거였어.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상하게 안도했다.

인간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악도, 아무리 열심히 문화를 고양시킨다고 해도,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 존재를, 설화의 영역에 두고 두려워하도록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인디언 사회를 지금의 기술문명에 대척점으로 이상적이라고 상상한 것도 사실과는 다를지도 모르고,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이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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