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에 다닐 때 아빠랑 전교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가치가 돈으로 평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돈 더 달라고도 싸워야 한다'는 내게, 아빠는 '돈으로 교환되지 않는 가치'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참을 애쓰셨다. 아무리 노력해도 쉽지 않았던 아빠는 한숨을 쉬셨던가. 

그 때의 나는 내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되고 보니 조금은 아빠를 이해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지금의 나는 합리의 언어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과, 돈으로 교환함으로써 무가치해지는 것들에 대해 조금은 알 수도 있을 거 같다. 아빠처럼 역시 아이에게도 아이 없는 어른에게도 설명하기 힘들어 포기하고 말지만, 알 것도 같다. 법이나 제도, 이전에 마음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역시 말하지 못하고 말 거라고, 조롱당하고 말 거라고 쉽게 꺼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거다.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합리의 언어로 실존의 문제, 생존의 문제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데,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이를 셋이나 낳은 것, 그래서 행복한 걸, 설명하지 못하는 거다. 시스템과 재판과 변론, 자체가 그래서 한심하고,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살면서 결코 만나지 않는 게 최선이다,라고 생각하는 나는, 장애를 가진 변호사가 장애를 가진 아이를 태어나게 했다고 의사를 고소한 사례를 들어 '나의 존재는 실격인가'라고 질문하는 게 가슴 아팠다.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존재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모든 말들을 이미 하고 있는 그 무례함에 대해 생각하는 거다. 동양에서라면 못 했을 텐데, 이제 서양의 가치와 합리가 들어와서 누군가 '네가 잠깐의 슬픔을 참으면, 부모는 돈이 생기니 할 수도 있다'고도 생각하겠지. 억만금을 준대도 할 수 없어,라던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타협하는 거다. 모욕을 참기로 결심하고 다른 걸 취하기로 하는 가난한 자, 불행한 자, 장애를 가진 자,에 대해 생각한다.   

아이가 없을 때였던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길래 임신 중 기형아 검사는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직장선배의 말을 들었었다. 그때 속으로 지울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임신을 하고 그 선택지라는 것이 얼마나 회색인지 알게 되었다. 살고 죽는 것에 선택이란 얼마나 무서운가.이미 태어난 아이가 이미 뛰고 있는 심장을 두고, 그걸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가. 그렇게 유일한 선택지가 지워지고 나니, 검사할 이유가 사라졌다. 

이미 존재한다. 이유도 방법도 없다. 그 상태로 살아내야 한다. 존재의 조건들에 저울을 다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가치가 없다. 이미 존재하니,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 정체성 정치를 넘어
마크 릴라 지음, 전대호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단 몇 줄의 책 소개(https://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2084)로도 내용을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화나서 하고 싶었던 말들이다.

내가 가졌던 불만, 단정하고 단죄하고 법에 호소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드러난다. 양당제 미국, 종교적인 나라, 미국의 묘사가 걸리지만, 우리 나라라고 다를까 싶은 풍경들이다.


원자력발전소에 다니는 사람이랑 같이 활동은 못 하겠어,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렇게 관대하게 굴겠다니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선언하라,는 말도 들었었다. (http://blog.aladin.co.kr/hahayo/7620022)

'핵발전소'라는 '옳은' 표현을 택하라,는 말도 들었었다. (http://blog.aladin.co.kr/hahayo/7744179)

나에게 이 말들을 한 사람들이 누구보다 진지한 생태주의자, 여성주의자, 환경운동가였기 때문에 그때 더 화가 났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들은 짜증나고(http://blog.aladin.co.kr/hahayo/10093320)-나는 한글을 다 하대하는 말이라고 하다니, 이 무슨 사대주의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언어를 교정하려는 행위들은 교육수준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식으로만 작동한다. 

명백한 불법이야,라는 말은 지나치게 수동적이라 답답하다. 


불만은 많은데 아이디어가 없어서 내가 뭘 못하겠다. 

'사명감'이나, '책임감'에 대한 말들을 비웃을까봐, 내가 택한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롱할까봐. 

내 발언의 자격에 대해 문제 삼을까봐, 당연한 걸 모르다니 한심하다고 할까봐. 


돌이켜보면, 함께 대화나눌 공통의 가치를 모두 다 때려부순 게 공동체를 비웃고, 달아나려고 했던 나였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역시 또 할 말을 잘 못 찾겠다.

그리하여 과거라면 ‘나는 A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근거는 이러이러해.‘라는 식으로 시작되었을 학급 토론이 지금은 ‘X로서 말하는데, 네가 B라고 주장하는 것 은 나를 모욕하는 거야.‘라는 형태를 띤다. 만약에 정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이런 형태의 논쟁 전술은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정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은 공평한 대화의장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백인 남성들은 이런 인식론을 가지고, 흑인 여성들은 저런 인식론을 가진다. 그러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금기가 논쟁을 대체한다.-p94

관건은 대개 여러 상대적인 가치들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것인가이다. 평범한 민주 정치에서 집단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은 제각각 옹호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합의 도출에 필수적이라면 서로 견주어 균형 있게 조정될 수 있다. 반면에 의제를 법원 으로 가져간다면, 당신은 당신의 주장이 절대적인 법에 따라 옳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되고 당신의 사건을 배당받은 판사들 만 설득하면 된다.
이렇게 법원에 호소하는 것은 시민권 운동 초기에 필수 전 술의 하나였지만, 그때 이후 진보주의에 대한 대중의 평판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쳐왔다. -p1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어머니 이야기 세트 - 전4권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배틀,에는 불행배틀도 있다. 책들,이 조금은 그런 것도 같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이래로, 나는 나의 평탄한 삶을 원망했었다. 안다. 한심하다. 까짓 글이 뭐라고. 

뭐라도 쓰고 있는 그 순간들은 살고 있는 걸까,라고도 생각한다. 놀러 나가서 아이들의 사진을 찍을 때, 아, 나는 사진을 찍기보다는 쟤들이랑 웃고 싶어, 하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글을 쓸 때도 조금은 그렇다. 

게다가, 글이나 사진이나, 뭐든지,가끔 의도와 다르게 행복의 전시나 불행의 전시처럼 읽은 사람 안에서 남게 되는 것도 같다. 그게 내가 쓴 글이라도 그렇다. 


나는, 이 책 1권을 사서 읽고는 엄마의 삶을 기록하겠어,라고 결심했었다. 2권이나 3권이나 4권은 못 구했지만, 4권은 연재될 때 고그에서 봤다. 1권을 참 좋아했었지만, 4권이 연재될 때 글쓴이의 삶과 연결되는 현재는 그렇게까지 좋지 않아서, 결국 사지 않았던 것도 같다. 알쓸신잡에 소개되고 나서 전권을 사서 다시 읽으면서, 기록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좋았다가 싫어지는 길고 구불구불한 인생길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전쟁을 거치고,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내는 어머니의 삶을 보았다. 어머니와 함께 한 딸의 삶도 본다. 


부모님의 삶을 기록할 마음을 먹었을 때의 나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아도 괜찮아, 싶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다른 걸까,싶다. 

더 많이 기록하기 보다, 덜 기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혹은 더 많이 기록하고, 더 덜 읽히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기록을 보는 것은 모두 다 오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하세요,를 봤다. 아이를 가지고 싶은 여자가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남편이 고민이라고 출연했다. 

세 쌍둥이를 키우느라 애쓰는 여자가 남편의 무심함이 고민이라고 출연했다. 

안녕하세요,를 보고 본 콘택트, 속 언어학자는 아이의 삶과 죽음을 모두 아는 채로도 그 삶을 따라 걸어간다. 

사자소학,을 따라 쓸 때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너무 멀리 가지 마라'라는 글귀를 보며 쿵 가라앉았던 내가 생각났다. 

돈도 많이 들고, 키우기도 힘들고 차라리 강아지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겠다는 안녕하세요,의 남편을 보고 있자니, 내일의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되묻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내가 내일 과연 살아있을지를 나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상태로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는 거라고. 아이의 전부를 내가 책임지지 못한다고. 

세 쌍둥이를 아내가 키우는 동안, 자신의 어머니가 양육비에 보태라고 준 돈으로 자신의 장난감을 사들이는 남편에게는 시간이 지나가고 당신은 알 수 없는 깊은 사랑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다. 어려움 없이 취하는 행복 따위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새로운 기쁨에는 새로운 댓가가 필요하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콘택트 속 언어학자의 삶을 아프게 쫓으면서는 왜 여성일 수밖에 없는가 생각했다. 여성일 수밖에 없다. 혹은 여성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선택은 무모하기 때문에, 남성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 어리석다,는 것이 이런 거라면 여성은 어리석은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한 어리석음,이라고도 생각한다. 

사자소학,의 글귀는 나의 두려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 고마웠다. 세계를 여행하는 젊은이들의 말이 넘치는 순간에, 당장 내 눈 앞에서 멀어지는 아이 때문에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부모의 나약한 마음을, 아, 그래 알고들 있어, 싶었다. 알고 있고, 그 마음을 아이에게 가르쳐주다니 고맙구나, 이런 마음이 되었다. 

부모가 되는 것은 새롭고 놀라운 어쩌면 모험,이다. 길고 느리고, 시시각각 변화하고, 원한다고 해서, 늘 가능하지도 않은 두려운 모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블루레이] 컨택트 : 일반판
드니 빌뇌브 감독, 제레미 레너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http://blog.aladin.co.kr/hahayo/791600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원작을 굉장히 재미나게 읽었다. 그러고는, 영화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게 가능한가 생각했다. 이론물리학과 언어학에 대한 설명이 한 가득인데, 영화라는 그림으로 보여줄 만한 게 거의 없는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 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주말 아침 무료영화를 검색하다 궁금한데 봐 볼까, 싶어 보기 시작했다. 

역시나, 심심했다. 스펙터클,을 만들기 위한 상황은 허세를 떠는 젊은이 같았고, 나에겐 그저 병치이던 삶의 순간들은 영화 속에서는 나란히 미래를 보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 내가 책을 이상하게 읽었나, 싶어서 영화를 보고는 원작을 다시 읽었다.  

원작을 읽을 때 미래를 안다,나 결과를 안다,는 것이 나는 사후적이라고 생각했고, 소설 속의 병치는 그저 병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화에서 묘사된 미래를 보는 방식은 생경했다. 

질문 자체가 책 속에 있고, 영화처럼 해석할 여지가 분명히 있기는 하다. 그런데, 역시 나는, 다시 그럴 리가, 라고 생각하는 거다. 여전히 미래는 믿음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나의 이런 믿음이 강경해서 소설에서 그렇게 설명하던, 외계인의 사고를 내가 결국 이해하지 못한 걸 수도 있겠다. 

글자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언제나 오독의 여지가 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이, 이유를 안다는 것이, 그 다음 삶들을 어떻게 살게 할까,라는 질문도, 책은 나처럼 회한이 얽힌 사후적 이야기로 읽는 사람이 있을 테니 영화는 거대한 사건을 연결시킨 거다. 영화적이게 하려고, 사건은 커지고 악당은 만들어진다. 

영화를 보고 다시 읽은 책은 처음 읽었을 때만큼 훅 들어오지 않았다. 글 가운데 상상하던 아름다운 사람을 이미 영화로 봐 버렸기 때문에, 글자를 글자 가운데 여백으로 읽었는데 액면 그대로 읽은 사람이 구현한 걸 이미 봐 버렸기 때문에 시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하던 이야기가 변해 있었다. 아, 영화처럼 읽을 소지가 있긴 있었어. 나는 공연히 영화를 봐서, 나의 그 쓸쓸한 이야기를 잃었구나. 원작은 동양화처럼 여백이 많았는데, 영화는 그 여백에 무언가를 채워넣어 서양화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