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뭘까. 나는 내가 하는 말도 멀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심한다. 정부를 비판하는 말들의 거울에 나를 비췄을 때, 내가 그러지 않는가. 회사를 비판하는 말들의 거울에 나를 비췄을 때 나는 그러지 않는가. 아이들을 아직 가정보육해야 했을 때, 회사에 다니는 다른 엄마가 '선배, 너무 페이 올리지 말아요, 우리가 힘들어요'라고 했다. '우리'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 때문에, 나는 그 엄마와 나의 '우리'와 아이를 셋이나 계속 봐주고 계신 아주머니와 나의 '우리'를 저울에 달았다. 그 말을 듣고 '우리'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비약이 심한 나는, 그래서 아마도 사장님들은 노동자에게 그렇게 구는 거겠지,라고도 생각했다. 작은 회사라서 직원과 사장이 묶이는 우리,가 더 강경하다면, 사장님들끼리 모여앉아 가지는 '우리'라는 감각을 앞지를 수도 있겠지. 항상 노동자라고 내 스스로를 정의하면서 생각하던 방식이, 아이들을 맡기면서 어그러졌다. 나는 그 상황에서 고용한 사람이 되고, 내가 고용된 사람이었을 때 요구하고 주장하던 그 많은 걸, 나는 내가 고용한 사람에게 해 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걸 원하는 아주머니였다면, 욕했을 거야. 뭐 이런 생각도 하고, 그러면서 나의 요구는 괜찮은가, 또 생각했다. 5인 이상 사업장,이라는 노동법의 많은 단서 조항이 약한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말에 수긍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사업주,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사람이 보였다. 입장은 점점 흐릿해지고, 신문기사는 뭔가 잘못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가끔은 큰 회사의 노동자들이 압력을 행사해서, 작은 회사의 이문이 줄어들고 있다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한 번 다녀왔습니다'가 재밌다길래, 우선 짤들을 몇 개 보고, 지난 일요일에는 본방을 보았다. 오랜 물장사 이력을 접고 시장에 김밥집을 차린 이정은(극 중 이름을 모르겠다)이 문제적인 호객-헐벗은 여종업원을 동원해서 호객한다. 나는 그럴 수는 있지만, 맛도 없는 김밥을 그런 호객에 줄 서서 먹는다는 것이 남자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문제삼는 사람들이 많았고, 정리되고 있다-을 해서 대립하는 장면 다음에 시장 상인회 장면이 나왔다. 상인회 가입조건으로 여러가지를 시정하려는 시장의 여자들이 등장하고, 그렇다면 상인회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시장 쓰레기장 아닌 먼 데 쓰레기장에 가야 하고, 상인회 발급 상품권 교환도 불가능해지고, 방역에 제외되면서 김밥집은 조건을 수용하고 상인회에 들어간다. 나는 공연히 사람들이 김밥집에 이입할까 걱정하면서 본다. 김밥집 여자들이나 대립하는 시장의 여자들이나 묘사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 시장의 남자들은 여자들끼리 화해해야 할 기싸움으로 보고 뒤로 빠져있고, 여자들끼리 오직 여자들만 김밥집에 몰려가서 문제삼는다. 그건 흔히 하는 묘사처럼 여성혐오적이다. 김밥집의 호객행위가 시대에 뒤처진 묘사라고 생각하는 나도, 시장의 여자들처럼 굴었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다시 내가 해 온 많은 말들을 생각해보면, 그걸 원한다고 해서 조건을 달거나 배척하는 것에 반대해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라는 말 안에 단정한 사람을 원한다고 해서, 단정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도 찬성하지 않았다. 

'우리'라는 경계 안과 밖은 달라야 한다. 상인회 소속 상인들이 누리는 여러가지는 무엇때문에 가능한 걸까. 회비를 냈을 수도 있고, 회의에 참석해서 의견을 냈을 수도 있다. 상인회 바깥의 상인이 상인회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야 하지만, 그 많은 것들이 그냥 주어지는 것일 수는 없는 거다. 정치란 그런 부분들에 있다. 모임이란 그런 용도로 만들어지고, 모임에 속한 사람이 지는 책임과 얻는 이득의 균형사이에 모임은 자란다. 모임에 속하면서 크고 작은 정치를 훈련하게 된다. 학교나 직장, 국가 수많은 우리의 경계에서 '우리'의 조건을 걸고 의무를 요구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되는 거다. 속하고 싶지 않다면 감당해야 하는 불이익이 있고, 그건 어쩌면 당연하다. 누군가 선악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조건을 달고 상인회 가입을 찬성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보다 나는 차라리, 상인회에 가입하면 이득과 손실에 대해 묘사해주기를 원했다. 가입할 때 내야 하는 회비가 있다면 것도 설명해주고, 이용할 수 있는 것들과 해야 할 책임들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그런 과정에서 보는 사람들이 너무 부당하지는 않다고도 생각할 수 있게 했으면 좋았겠다 생각했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아니라, 무언가 선전물 같았겠지. 드라마는 묘사하고 있지만, 전부를 묘사하지는 못한다.

삶은 드라마의 묘사보다 복잡하고, 매 순간 내가 속한 '우리'를 저울질한다. 저울질하는 순간마다, 마음이 나의 단단한 마음이 중심을 잘 잡고 있어야 자기 자신을 감당할 수 있다. 내 마음을 내가 감당할 수가 있으려면, 좀 더 단단한 나의 중심이 늘 내 안에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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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트다운 - 도쿄전력과 일본정부는 어떻게 일본을 침몰시켰는가
오시카 야스아키 지음, 한승동 옮김 / 양철북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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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책을 읽고 서평을 썼었다(https://blog.aladin.co.kr/hahayo/10890367 ). 거기 달린 댓글을 보고, 이 책을 검색해서 읽어볼 마음이 되었다. 후쿠시마 사고의 정황이 궁금했다. 기술적인 문제들, 해결하지 못한 상황들이 궁금해서 읽었다. 나의 궁금증이 향하는 방향과 기자의 궁금증이 향하는 방향이 다르고, 나는 참 일없이 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기술적인 어떤 문제가 기술적인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책을 보면서 내내 거슬렸다. 조직 밖에서 조직을 비판하면서 가지는 우월하다고 느끼는 태도에 기득권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옳다는 태도가 느껴졌다. 나는 기술적인 부분들, 그래도 현장은 이라면서 책을 봤고, 현장은 그 상황에서 최선이었다고 느꼈다. 이미 벌어진 일들, 설계결함을 인지하고도 개선하지 않은 것, 민간기업이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규제하지 않은 것은 차곡차곡 끔찍한 사고의 원인이 된다. 내 관심사를 알아차리기 위해, 쓸데없는 정보 가운데 정렬을 시도해야 했다.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해서 썼겠지만, 정말 필요했을지 나에게 의심스러운 말들이 한 가득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다음의 과정은 어쩌면 나의 관심 밖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후속조치과정에서 보상문제, 사고 수습과정, 정부와 기업, 국가의 문제까지 드러나고, 정쟁 가운데 실각하는 정부에 대한 묘사가 한가득이다. 

기득권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출신이, 일본에도 한국에도 물론 있겠지만, 그게 그대로 부도덕과 등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했는가,와 어떻게 했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저자가 열거한 그 많은 연결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 이 책은 왜 썼을까,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이 생긴다. 다음의 더 나은 상황에 도움이 될까? 

저자는 원자력이 그 자체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칼처럼 생각하는 나와의 거리는 애초에 멀고, 일본과 우리나라도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권력을 바꿔본 적 없는 나라라서 그런가, 과하다 싶은 그 특유의 약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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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로버트 먼치 글, 안토니 루이스 그림, 김숙 옮김 / 북뱅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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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아이들도 나도 코로나 상황에 적응하고 있다. 올해 입학예정이던 막내는 학교에 안 가도 좋겠다고 하고, 초4가 되는 아들놈도 개학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엄마아빠 출근한 집에서 활개치고 노는 모양이다. 중2만 그래도 학교 가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나도 야단 못 치겠는 게,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쯤은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회사에 안 가게 되는 것에 나조차도 적응하고 있다는 거다.

어제도 그래서 출근을 못 했다. 출근할 때는 책을 한 권씩 골라주고, 일일연산지를 한 장 뽑아주고, 학교에서 문자가 오면 전화로 알려주는데, 어제는 책 읽기 싫다길래 읽어줬다. 초4에게는 다른 책을 읽어주고, 초1에게는 이 책을 읽어줬다. 

큰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읽고는, 한참 꽂혀 있기만 했었는데-사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기는 사랑해,사랑해, 사랑해(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59324) ,고 이 책은 어른들이나 이해할 책이니까- 꺼내서 읽으니 새삼스러웠다. 그 때도 이런 기분이 들었었던가, 싶은 게 옆에서 듣는 초4는 어, 싶게 난데없이 '이중인격이다!'라고. 반응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고 자라서 엄마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그 인생의 과정에서 위트라고 묘사되는 엄마의 말들에 그런 말이 튀어나온다. 깨어서 난장을 만들어놓는 아기에게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라고 하거나, 더 자란 아이에게 '너를 동물원에 보내버려야지'하거나, '내가 동물원에 간 거 같다'라고 푸념하던 엄마가, 밤에 잠든 아이의 침대 머리맡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것에 지금의 나도 같이 뜨악해진다. 처음 읽었을 때 울었던 것도 같은데, 프렌즈의 조이가 낭독하며 울던 게 생각이 나는 것도 같은데, 내내 이중인격인 엄마가-깨어있는 아들에게 어쩌면 악담을 퍼붓다가, 잠든 아들 곁에서만 사랑을 노래하는- 따로 나가사는 아들네 집에 밤에 찾아가서, 몰래 잠든 아들 곁에 노래를 부를 때는 왜?왜? 왜??? 라는 심사가 되는 거다. 독립이 하고 싶은 아들이 독립을 한 집에 밤에 몰래 찾아가 노래 부를 일이에요???? 

잘 때가 제일 예뻐,라는 말이 가지는 공감대가 물론 있지만, 아이는 나를 기쁘게 한다. 고생스러운 만큼 큰 기쁨이 있기에 나는 아이에게 말로 상처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책 속의 엄마는, 아이와 사이가 좋은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그게 가능할까, 의심이 생긴다. 아이의 관점에서-적어도 나의 초4 아들 눈에- 이 엄마는 '이중인격'이다. 아이와 다시 보니,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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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 '배교자' 이승훈의 편지
윤춘호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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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세상이 느려진 기분이다. 가라앉던 상황에 돌출한 종교가 비난받는 와중에, 저녁이면 원말 명초에 종교로 사람을 모아 정치투쟁을 하는 한족의 이야기 '의천도룡기'를 보고 있다. 헌신하는 믿음없이 불가능한 정치적 성취들을 나도 알고 있고, 젊은 날 내가 부모를 속이고-말하지 않았다- 달려나가던 집회의 현장이나, 혀 차는 소리를 못 들은 체 하고 소리높이던 내 자신을 기억한다. 믿음, 이라는 것에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싶었다. 나는 그저 학식도 높은 조선의 선비가 어떻게 기독교도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유학이라는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학문을 익힌 조선의 선비가 사람들의 나약함을 자극하여 믿음을 그러모으는 천주교도가 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런 이야기는 물론 없다. 정치와 종교의 괴리만큼, 문제의 해결을 찾는 방식이 아예 다르고, 나에게 그걸 설명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책 속에서 내가 본 것은 정치적으로 소수파인 젊은이가 가지는 체제전복적 태도 가운데 스스로의 나약함이 선택받은 자라는 자기 확신으로 변하고, 종교공동체 안에서 갖는 권력에 도취되는 과정을 본다. 죽음까지 불사할 수 있는 비밀결사의 마음을 본다. 지금의 탄압에 비할 바 없는 탄압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탄압 속에서, 결국 배교자였으나 교우를 배신하지는 못한 이승훈이 완전한 배교자였던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형식의 글이다. 재판의 묘사에서 내가 생각하는 정약용의 이미지는 깨어진다. 어쩌면 저자의 기독교적 배경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도 살아오면서 가졌던 믿음을 버리고 있는 중이라 그저 나의 시대가 죽음으로 탄압받지 않는 게 다행이지 싶을 뿐이다. 믿음이 남겨놓은 흔적은 어딘가 내 안에 있지만, 지금 나는 그게 젊은 어떤 날의 열정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교우들을 죽게 한 성실한 자신의 배교가 마음의 빚이 되어 정약용의 저작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글을 쓴다는 것이 모두 변명,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믿는 일이란, 삶을 바꾸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믿고도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나 앎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알고도 믿으면서도 살지 못할 때, 그 괴리들이 쌓여서 그 모든 흔적들은 글이 되는 것 같다. 다른 책을 읽으면서, 만난 글은 그래서 하릴없이 변명을 쌓는 내 자신에 대한 조소다. 


당연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 믿음조차 의식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말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결핍된 것이 의식되고 그래서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산림에 숨어 사는 즐거움을 타인에게 말하려는 것은 그 즐거움의 결핍이 의식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하는 은밀한 두려움이다. -p137,  시적 상상력으로 주역을 읽다. 심의용 지음.

조선 천주교회의 젊은 영수 이승훈은 광신과 맹신의 언저리를 헤매고 있었다. 어느 시대나 나라가 박해하고 다수가 손가락질 하는 소수파의 신념은 강성으로 치닫기 십상이었다. 적절한 지도와 조언이 없는 상태에서 이승훈의 신앙은 외곬수로 흐르고 있었다. - P133

이런 와중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교황청의 권위에 직격탄을 가했다. 유럽 곳곳에서 교황권에 대한 도전이 벌어졌고 교황의 지도력은 땅에 떨어졌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기 국면을 맞아 교황청은 17세기에 보여 줬던 해외 선교에서의 유연성을 잃고 보수적인 원칙론을 고집했다. - P178

20대 시절 뜨겁게 천주를 믿었던 그 흔적이 제 영혼과 마음에 남아 있고 십자가에 매달린 구세주 예수를 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일까 두려워하던 30대 시절의 방황과 번민의 흔적이 육십 노인이 된 제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겁니다. 저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아직도 정 아무개가 서학을 버리지 못한 증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서학을 믿는 것과 그 믿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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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지 않기 - 혹은 사라짐의 기술
피에르 자위 지음, 이세진 옮김 / 위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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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옆에 A가 B에게 '그런데, 왜 채식해요?'라고 물었다. 나는 어어, 그런 질문은, 이라고 말리려고 했다. 불편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B는 '아니에요, 동물권 때문이에요'라고 조금은 길게 대답했다. 나는 B가 대답하는 동안, 아 내가 대답하지 않기를 바란 것은 내가 불편했기 때문이야,라고 생각했다. 육식의 종말,이란 책에 내가 관심을 보였을 때 친구가 '야, 밥만 잔뜩 먹는 한국사람이 무슨 육식의 종말이야?'라길래 그런가,싶었던 이후로 나는 서양인의 그럴 듯한 말들에 경계하고 있다. 불자의 채식,에는 그러려니 하면서도 다를 바 없는 비거니즘에는 짜증이 난달까. 그런데, 둘 사이에는 어떤 태도의 차이가 있다는 거다. 이미 존재했는데, 트렌디한 어떤 것을 선택한 태도 드러내서 과시하는 태도 같은 것 때문에 나는 영 선선해지지 않는 거다. B의 대답을 듣는 동안, 나는 '나는 고기 없으면 못 사는 육식주의자'라고 밝히고 질문한 A가 기분이 나빠질까봐 나는 불편했던 거다.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가끔 자기 주장을 선선히 밝히는 어떤 태도가 비난처럼도 들리는 상황 가운데, 그저 자신이 그렇게 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묻고도 싶었다. 

내 말이 '권력없는 자의 입을 닫게 하는 말'처럼 나쁘게도 들린다고 해서, 나는 나의 불편에 대해 설명할 말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후의 삶'을 읽으면서 첫번째 인용문을 만났다. 책 제목도 나의 궁금증과 통하고, 인용문이 마음에 들었음에도 한참을 망설였다. 서양의 철학자, 특히 프랑스의 철학자가 쓴 철학책이다. 내가 기독교에 대한 편견도 많고, 서양 철학의 구분하는 태도에도 역시 적응이 어렵고 게다가 프랑스, 철학자라니, 한참을 망설이다가 구해 읽었다. 얄팍한 책을 오래도 읽었다. 그리스의 철학적 전통, 종교적 탐색, 이 한가득인데, 역시 잘 이해하기는 어렵다. 태도나 생각을 리셋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동양식으로 지행합일, 같은 태도를 수련하다가, 서양의 태도로 쓰여진 글을 읽는 것은 정말 리셋이 필요한 일이고, 계속 의문이 생기는 일이라서 이해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저 썩 마음에 드는 부분을 찾아 옮겨놓는데 만족한다.  


사실 겸손에는 자기모욕이 없다. 심리적인 자기모욕이든 사회적인 자기모욕이든 그런 것은 겸손과 무관하다. 겸손은 그저 타자가 가장 형편없는 인간일지라도 그에게 아직도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섬세한 지각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우리가 오늘날 드러내지 않기라고 부르는 것의 기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드러내지 않기라는 경험의 중추는-아직 그 경험이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릴지라도- 자기증오나 자기에 대한 염려와는 무관하다. 그 중추는 순전히 타자들에게로, 대타자에게로, 피조물들에게로, 세계로 향해 있다. - P92

어쨌든 이런 의미에서 드러내지 않는 영혼들은 세계의 기초라고 말할 수 있으며 나아가 우리는 열의를 갖고 그렇게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없으면 텅 빈 거울들이나 있을까, 더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없으면 형상없는 질료나 있을까, 아무것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한다. 그 영혼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 그들이 즐기는 방식대로 잠시 모습을 감추는 게 아니라 추악한 전방위적 감시 체제에 짓눌려 결정적으로 사라지는 날, 조용히 물러나 바라보는 눈, 개인의 입장을 떠나 경청하는 귀는 이제 없고 빵빵한 조명과 음향 설비밖에 남지 않은 그날에, 세상에는 아무도 없고 세상 자체도 없을 거라고 장담해 마지 않는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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