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 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 인에이블러의 고백
앤절린 밀러 지음, 이미애 옮김 / 윌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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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아직 없을 때 다른 분의 서평(https://blog.aladin.co.kr/smila/761186) 을 보고 나는 아이가 팔 없는 사람을 그리게 키우지 않아야지, 생각했다. 첫 아이가 네 살일 때는 다른 엄마들한테 자꾸 말하게 되서 일부러 책을 구해 읽었다.(https://blog.aladin.co.kr/hahayo/3331734)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다른 엄마들의 말들에 휩쓸리지 않았던 이유 중에 하나가 되었을 거다. 무서운 상상들을 부풀리면서도, 혼자 나서는 아이를 내버려두는 것은 아이에게 아이의 인생이 있고, 아이가 자신의 팔을 언제라도 그리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아마도 팔 없는 사람을 그리게 만들었을 엄마가, 늦게나마 깨닫고 쓴 고백서다. 보살피는 '엄마'의 일을 하는 존재라면 누구나, 자신과 같은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전자책으로 걸으면서 읽으면서, 다시 읽을 때마다 줄치고 싶은 문장들을 만난다. 부모 자식 관계가 아니더라도, 살아가면서 어떤 관계에서라도 내가 누군가의 조장자는 아닌가 주의해야 한다. 밑줄긋기는 P로 표시되지만 모두 %이다. 

젊었을 때는 적당히,라는 말이 안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얼마나 좋은 말인지 생각하고 있다. 좋기만 한 것은 없고, 사는 것은 정말 어렵구나.

내가 낙천주의자가 되는 것이 힘든 일에 대응하는 더 나은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다.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그릇된 뭔가를 핑곗거리 삼으려는 욕구는 본질적으로 부정적 순환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관념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인생이 우리가 인식하는 그대로라면, 인생을 풍부하고 자애롭다고 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낙관적인 태도는 행복을 자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 만일 ‘네가 보는 것이 네가 얻는 것이다‘라면,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보는 편이 훨씬 타당한 선택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 철학은 매우 간단하다. - P26

사람은 원하는 대로 행동할 권리가 있지만, 어떤 형태의 행동이든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른다. 사람의 상호 작용을 통제하는 자연법이 있다. 또한 사회적 관습은 대체로 모든 이들의 이익을 위해 발전해왔다. 이런 원칙들은 상벌 체계와 더불어 우리의 감정 세계를 형성하는 생태 환경을 이룬다. 우리는 확립된 행동양식을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과는 항상 잇따른다. 어떤 특정한 행동의 결과를 견디고 싶지 않으면, 그 행동을 ‘변화‘시켜야 한다. - P30

나는 나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옳아야 한다고 느꼈다. - P44

어떤 고난이나 장애를 겪든 간에 사람들은 그것에 대처할 자기 나름의 개인적 수단을 개발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 역경이 닥쳤다고 해서 책임을 떨쳐버려도 되는 것은 아니다.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사람은 휠체어 사용법을 익혀야 한다. 장애가 자신의 가능성을 발전시키지 않을 타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많은 활동을 배울 수 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중독에 빠지기 쉽지만, 그래도 첫 잔을 마실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계속 절망을 느낄 수 있지만,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을지 말지는 그들의 선택이다. 모든 것은 그들의 문제이고,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한 자신의 전략을 개발해야 하는 사람들도 바로 그들 자신이다. - P53

이러한 덕목들에는 각각 어두운 면이 있다. 어느 한 사람의 능력이 지나치게 부풀려지면, 다른 사람은 자신을 무능하게 느낄 수 있다. 용서를 받으면, 죄책감이 생길 수 있다. 친절한 배려를 받으면, 그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너그럽게 용인해주면, 종종 남용을 부추기게 된다. 융통성을 발휘하다 보면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없앨 수도 있고, 한쪽이 강인하면 상대방의 의존을 허용하게 된다 - P55

거부하며 싸우든 기꺼이 받아들이든, 변화는 일어난다. ‘지나간 옛것‘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하거나, 아니면 ‘현재 얻을 수 있는 것‘을 환영하거나,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 P65

운 좋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대체로 지지와 보살핌을 받아왔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신이 사랑을 받고 존중받으며 가치있다고 느낀다.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시간과 힘, 지능을 사용해서 일하고 만족감을 얻을 만한 온갖 일에 참여한다. 어떤 속임수도 곁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기에, 이들의 관계는 개방적이고 단순하다. - P48

꼭 필요한 도움과 조장하는 도움 사이의 경계선은 종종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 P54

젊은이들은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흔히 상상한다. 하지만 이런 공상이 성장을 가로막는, 꿰뚫을 수 없는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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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4 13: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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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4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린 여자였을 때 나를 사로잡은 이미지는 이런 거였다. 강간하려는 남자를 피해 다세대 주택 옥상 물탱크 뒤에 숨어 있다가, 뛰어내려 죽는 젊은 여자. 그 이미지 가운데, 나는 나라면 어떡할까 상상했다. 여성을 옥죄는 순결에 대한 강박 가운데, 나는 그게 뭐 별건가, 죽지는 말아야지!라는 강경한 입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라이크 어 버진,을 부르는 마돈나에 열광하고, 순결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내 자신을 얽매지 않았다. 다시 또 그러면서, 이건 내 마음이니, 번드르르한 어떤 남자애가 그런 말로 나를 꼬드겨도 내가 싫다고 비웃어줄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싫으면 싫은 거지. 순결 이데올로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너랑 하기 싫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지. 이데올로기로서의 순결은 내게 힘이 없지만, 임신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서로에게 오락이 아니라는 믿음 따위는 관계에서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혼인빙자 간음,이나 간통죄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순결을 가볍게 여기는 나의 마음과 법이 충돌하고 있다고.

혼인빙자 간음,도 간통도, 낙태도 더 이상 형법 상의 죄가 아니다. 이제 공동체는 처녀애와 '결혼한다고 속여서 관계한 남자'나, 결혼하고도 결혼 밖에서 성교한 남녀나, 임신을 중지한다고 해도, 공동체의 윤리를 위해 처벌할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둘 사이에 벌어진 마음을 상하게 한 일, 개인 간의 송사로 처리해야 할 일이 되었다. 나는 그걸 받아들이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 윤리의 재정립 가운데, 순결에 대한 강박이나 억압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별볼일 없는 놈팽이랑 잠을 잤다고 해서, 딸아이를 깨진 그릇 취급하면서 그 놈에게 치우는 부모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처녀의 순결이 가벼워지는 것을 원해 왔다. 그깟 일로 깨어지는 유리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 정도 일로는 손상되지 않는 단단한 존재라고 주장해 왔다. 

그래서, 나는 그 여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혼인빙자 낙태종용'이라는 불가해한 언어의 조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정말 누군가가 파렴치한,이고 내가 함께 서서 비난해야 하는 존재인가, 에 대답할 수 없었다. 만약, 그 놈이 '결혼을 할 거니까 절대 임신중지를 하지 말라'고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지금 책임지지 않는다,는 폭로라면 나는 함께 서 줄 수 있다. 그렇지만, '결혼을 할 거니까, 낙태를 하자'라고 듣기에 따라서 종용이랄 수도 있는 말을 결국은 수용한 여자가, 종국에 나와 헤어졌다고 다 늦게 하는 폭로에 왜 내가 같이 욕해줘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더라. 연인의 데이트는 숙박을 포함한 여행이 당연히 있고, 아기가 생겨야 겨우 결혼을 고민하는 세태에 비추어, 게다가 공동체의 합의를 통해 임신을 중지하는 것이 범죄도 아닌데, 사귀다가 헤어진 연인 사이에 임신중지가 있었다고 한 들, 도대체 서로에게 무슨 해악을 끼쳤다고 저런 폭로를 한단 말인가.

아무 것도 모르는 친구에게 사건을 중계하고 '왜? 너, 팬이냐?'라는 반응에 분개하면서 통화하다가 사무실에 오십대 아저씨가 그걸 봤다. 덕분에 사무실에서 아저씨들이랑 이야기한다. 이야기하면서 내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날까, 나는 무엇 때문인 걸까, 알아차렸다. 아저씨들은 그 놈은 세상 파렴치한에 못된 놈이라고 여자를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자를 아이 취급하는, 성교를 했고, 임신중지까지 했으니 깨어진 그릇처럼 취급했던 그런 생각들 가운데, 남자가 파렴치한이 되어 버린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요? 도대체 왜요? 여자가 뭐가 돼? 낙태한 여자가 된 거죠, 뭐.

세상이 달라지고, 도덕률이 바뀌고, 이제 아무도 모든 임신을 완전히 끝까지 유지하라고 그건 살인이라고 여자를 옥죄지 않는다. 임신중지한 게 뭐 별거라고 남자가 여자를 책임져야 하는가. 종용이든 설득이든 임신을 중지했는데, 남자가 여자를 왜 책임지는가. 여자는 여자의 인생, 남자가 굳이 누군가의 인생에서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자신의 아이인 거지. 여자는 아니다. 결혼은 함께 나눠지는 인생의 짐 같은 거지, 누가 누구를 책임지는 게 아니고, 결혼하기 전의 관계라면 언제든 틀어질 수도 있는 거다. 

새털처럼 가벼워진 순결이데올로기,의 다른 면은 이렇게 남자라면 당연히 책임져야 할 행위의 범주가 줄어드는 것이다. 오래된 생각의 습관들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제 여자는 자유로워진 만큼 자기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세상이고, 나는 그 여자의 판단 다음 벌어진 일들에 남자를 함께 욕해 줄 마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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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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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종신의 계약이다. 변호사 유튜버의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6513741 )를 후닥닥 넘겨 읽으면서, 결혼이 얼마나 무거운지, 깜짝 놀란다. 상호 정절의 의무를 지기로 하고, 서로의 짐을 나눠지기로 하고 인생의 끝까지 함께 걷기로 하는 건 그래, 역시 겁이 나는 일이다. 나는 결혼에 환상이 없어서 오히려 쉽게 결혼한 것도 같다. 회사에서 여자들이 모여 왜 결혼했는가,를 주제로 말할 때, 나는 명쾌하게 아이가 갖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사랑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 싫어서는 나의 이유가 아니었다. 뭐 사는 거야 살면 되잖아? 그런데 아이를 갖는 건 뭔가 강경한 계약이 필요해,라는 태도가 내게 있었다. 

아마도 영화가 개봉할 즈음 책을 사서 읽은 거 같다. 무언가 젊은 여성에게 주는 교훈서 같은 인상을 받는다. 아름다움과 젊음으로 자신만만하던 여성이 당시의 결혼적령기를 이미 넘기고 점점 자신감이 떨어지는 와중에 그래도 자신의 여동생보다 먼저 결혼하려고 마침맞게 청혼한 남자와 결혼을 한다. 다행히 나쁘지 않은 남자였는데, 사랑의 열정과 사교적인 능숙함, 친절한 말 따위를 원하는 여자에게는 지나치게 진지한 남자여서 여자는 바람을 피운다. 이미 결혼했고 아이까지 있는 남자와 이것은 사랑이라는 확신에 차서 어리석은 정사를 나누고는 남편의 조롱을 받는다. 남편은 극진히 사랑했으나 정절의 의무를 저버린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안전한 식민지 도시를 떠나 전염병이 창궐한 내륙으로 들어간다. 안온한 삶에서 위험한 삶으로 남편을 따라 떠난 젊은 아내는 주변의 죽음 가운데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각하고, 자신의 딸에게는 의존적이지 않은 삶을 주겠다고 결심하면서 맺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결혼에 대한 생각을 했다. 여성에게 어쩌면 강요,되는 정절의 의무는 결혼이란 계약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여전히 성교와 임신을 떼어낼 수는 없고, 결혼이란 계약없이 태어나는 아이들은 보호자가 줄어드는 만큼 위태롭다. 아이를 원했던 여성인 내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보증을 원하는 남자와 종신의 계약을 체결한다면, 그 안에서 서로가 져야 하는 책임은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결혼은, 미래를 아이를 위한 계약이지 나를 위한 계약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 계약을 나나 상대에게도 의미있게 하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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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한자어 속뜻 사전
전광진 엮음 / 속뜻사전교육출판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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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지고 있는 판본을 찾아 겁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산 사전이 많습니다만, 제일 많이 펼쳐봅니다. 인터넷 검색에도 가끔 분명히 한자조어인데, 한자의 뜻풀이가 없는 경우가 있어서 이 책을 찾아보게 됩니다.

한글은 소리글자라 조어의 한계가 분명하고, 이 한계를 뜻글자인 한자가 보완합니다. 짧은 한 문장을 쓸 때도 얼마나 많이 한자어가 쓰입니까? 한자어라는 걸 알고, 그 한자어의 의미가 무언지 알고, 어떤 식으로 조어가 되어있는지 아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아이들용으로 산 국어사전은 한자어를 병기하면서도 한자어 풀이는 따로 없이 그대로 단어의 뜻풀이만 하기 때문에 제가 궁금해서 더 찾아보는 것도 같습니다. 

신문에 한자어를 없앨때, 한글로만 표기하는 신문이 처음 나올 때, 저도 아마 한글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도 같은데, 지금은 한글은 부족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글이라서 부족한 게 아니라, 소리글자,라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리글자는 소리값만 담기 때문에, 점점 복잡해지는 세상사를 묘사할 때 조어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이미 우리의 문자생활에 한자는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말들의 소리값을 그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로서의 한글이 우리의 언어생활을 풍요롭게 합니다만, 같은 단어를 표현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 가운데, 한자의 효율성과 역사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없어보입니다. 문해력이 문제라는 기사건 책이건 볼 때마다, 우리가 쓰는 무수한 한자어,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 사전이 얼마나 좋은지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도 말씀하셨지만,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좋은 사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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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마을 차차차, 재방을 보고 있었다. 남편도 아이도 있는 거실에서 나만 집중하는 드라마기는 하지만, 그 장면은 남편도 아이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얼른 돌렸다. 그 건 거의 둘째 아이 산달이 다 된 보라 엄마가 남편에게 신발끈을 묶어달라고 하는데 거절당하고 이어지는 장면이었다. 남편은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바로 다시 묶어주려고 하면서 '얼른 아기가 나와야지, 그래야 좀 편하지'라고 말한다. 임신기간 내내 이런저런 원망을 쌓았던 임산부는 '편해질 거'라는 말에 '아기가 나오면 밤에 잠도 못 자고 젖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줘야 되는데 그게 할 소리냐' 라면서 폭발한다. 언제나 다음은 더 낫겠지,라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그 남편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나는 그 임산부의 원망이 너무 길어져서 어, 어, 어, 라면서 못 보겠네, 라고 채널을 돌렸다. 남편도 아이도 듣게 해서는 안 되는 원망이다. 나는 거기서 보라엄마가 하는 말이 '내 복에 살지요'에 어리석은 아비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덕에 너희들이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느냐,라고 말하는 아비. 아첨을 바라는 아비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나의 노고를 알아달라, 그러니까 내게 잘해라,라는 의도의 말들일 텐데, 과연 그렇게 전해질까. 그 말을 듣는 아이나 남편은 순순히 그렇게 들을까. 그렇게 듣는다고 해도 상대가 원하는 '잘하는 것'과 스스로가 하고 있는 '잘하는 것'사이에는 괴리가 너무 커서 정작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는 말이다. 나한테 좀 잘해줬으면 좋겠다는 의도와 다르게, 그 말을 듣게 되는 아이는 나는 엄마를 힘들게 하는 짐이구나,라고 느끼지 않을까? 남편은 내가 공연히 나의 만족을 위해 아이를 원했던 건가 후회하게 되지는 않을까? 사랑하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도와 다르게 전해질 수 있는 말이다. 

나는 아이를 원했다. 아이에 대해 내 아이,라는 강경함이 있어서, 아이를 막 낳고 시가에서 들은 '고맙다'는 말도 삐딱하게 듣고-이건 당시 또래의 엄마들에게 조사도 했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대답을 많이 들었다. 내 설문조사가 그렇게 설계되었을 수도 있다. 그 때 좋은 말은 '축하한다' 나 '반갑다'-, 남편이 아이를 야단칠 때는 화가 난다. 아이를 내 것으로 여기는 나의 태도가 문제가 있다는 걸 또 알아서 경계하는 마음으로 주의하고 있다. 

살아갈수록 말하는 게 쉽지 않다. 원래도 재밌게 말 잘 하는 사람인 적은 없지만, 늘 재밌게 말하는 사람들을 선망해왔다. 재밌게 말하려면 듣는 사람들을 고려해 말의 결들을 바꿔야한다. 엄마들끼리 웃을 수 있게 과장도 섞고 좀 더 센 표현들을 선택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좋겠지.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아이들 앞에서나 남편 앞에서 할 수 없기도 하다. 게다가 나는 각각의 순간에 다른 방식으로 하는 말들도, 결국 꼭 한 사람의 청자, 바로 내가 듣고 있어서 쉽지가 않다. 내 마음의 작은 조각을 부풀려서 재미나게 들려준 것일지라도, 듣고 있는 내가 있어서, 이걸 아이 앞에서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듣고 있어서, 나는 어딘가 내 자신이 어그러진 기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결국 재미없게 들리는 민숭맨숭한 말들을 겨우 하는 재미없는 아줌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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