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은 정부의 마이너스 통장이 아니다(https://m.kmib.co.kr/view.asp?arcid=0924253411)라는 글을 봤다. 

글은 공기업의 부실에 대한 성토 다음에 '감당할 수 없으면 차라리 민간에 맡겨라'로 마친다. 

공기업은 소중한 국민의 재산이고, 공기업의 부실은 나라의 부실이 되고, 국가 경쟁력의 약화라는 말 다음에 이어지는 맺는 말에 화들짝 정신이 든다. 

그랬지. 그랬어. 

두 종류의 정부가 있다. 

공기업은 국민의 재산이기 때문에 국민이 어렵지 않도록 이익을 낼 수 없어야 한다는 정부. 공기업이 파는 물이건, 전기건, 공공 서비스건 이익을 낼 수 없도록 가격을 통제한다. 어차피 국민이 낼 돈이고, 통제하지 않는다면 표가 떨어져나간다고 생각한다. 

공기업은 무능하고, 국가는 작아져야 하기 때문에, 국민의 재산이지만 팔아치워야 한다는 정부. 공기업이 파는 물이건, 전기건, 공공서비스 건 이익을 낼 수 있지만, 무능한 공기업이 하던 대로 일을 해서 이익이 안 난 거라고, 민간에 맡긴다면 이익이 날 거라고 말한다. 어차피 국민이 낼 돈이고, 국가로서 책임질 일이 줄어든다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앞의 정부가 집권한 동안 국제정세가 괜찮았으니, 가격이 꽉 묶였어도 어찌어찌 굴러갔던 공기업은, 뒤의 정부가 들어서는 시점에 국제정세가 엉망진창이라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손해가 나는 이유가 무능 때문이니, 민간에 맡겨라. 국가는 책임을 덜고, 민간은 과연 국가가 책임질 때만큼 가격통제에 따를까. 

민자발전소가 들어오고, 한전의 가격통제력은 약화되었다. 하나의 회사일 때와 쪼개진 작은 회사들일 때, 더하여 민간의 발전소가 전기 공급자로 진입했을 때, 가격통제력은 점점 더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국가는 한전을 통제하고, 한전은 발전사를 통제하고, 다시 민자발전사는 억울함을 언론에 토로한다. 이유는 있지만, 설명할 말은 길고, 아무도 열심히 듣지는 않는다. 

민간에 넘기면, 국가의 가격통제력이 약해지겠지. 

부실은 뭐고, 무능은 뭔가. 

민간은 뭐고, 국가는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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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빠빠라기
투이아비 지음, 에리히 쇼이어만 엮음, 유혜자 옮김, 이일영 그림 / 가교(가교출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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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를 보는데, '주접이 풍년'이었던가, 임창정이 나오고, 임창정의 팬클럽 '빠빠라기'가 나왔다. 빠빠라기,가 뭐지 싶어서 검색을 하고 '하늘을 찢고 나온 사람'이라는 원주민 말이라는데, 책도 검색에 걸려서 읽었다. 

태평양의 섬에 사는 원주민이 서양을 여행하고, 자신의 동족들에게 '경계하라'는 말을 하는 책이다. 자신들의 언어에 없는 말들로 서양인의 삶과 문명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몸을 감추는 서구의 문명에 대한 의아함이 가득하고, 절대로 그들처럼 되어선 안 된다는 호소문이다. 

읽으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짧은 여행은 그저 기이하다,고 할 법하지만, 추운 겨울을 겪고 나면 좀 이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뭐, 나도 몸을 죄악시하는 문명은 도대체 이해하기 어렵지만, 태평양 한가운데 섬보다는 춥고 먹을 것도 없는데 사람은 많으니, 벽돌로 궤짝을 만들어 층층이 쌓아놓고 걸어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은 거다.

내 생각인 것처럼 말하지만 나의 많은 부분이 내가 살고 있는 상황들 때문이 아닌가. 추운 겨울이 있으니, 두꺼운 겨울옷을 어디 잘 보관해둬야 하고, 곡식이던 돈이던 모아둬야 하는 게 아닌가. 

서구인의 자신들의 삶이 문명이고, 무언가 대단한 양 주장하는 것도 꼴 사납고, 원주민이 자신들의 삶이 아름답고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도 듣기 괴롭다. 

서구인의 문제는 자기들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살라고 못 살게 군다는 거기는 하다. 게다가, 몸을 죄악시하는 태도로 자연을 대상화시키고, 매연을 쓰레기를 참으로 열심히 내다놓기도 했지. 자연이 손상당하면, 문명화되지 않은 방식의 삶이 또 위협당한다. 결국 문명화의 시도들이 성공했다는 것은 괴롭다. 우월한 게 아니라, 적응한 거였는데, 잘난 체 했더니 속는다. 사람이란 그렇게 팔랑거리는 존재인 건가. 

다른 시공간을 사는 사람들은 이상해 보일 수 밖에 없다. 

아마 이 책이 유럽에 소개된 1920년대에는 문명인의 높은 자부심 가운데, 야만인의 자부심이 이상했을 것이고, 한국에 소개된 1980년대에는 유럽을 쫓아 내달리는 스스로의 열망 가운데 이상했을 거 같다. 그 시대에 필요했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었겠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도 유효한가, 질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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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신문스크랩에서, "윤 대통령의 '원전 페티시즘'... 바보짓 50년이 시작됐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48821.html) 이걸 봤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상대를 거짓말장이, 듣지 않는 고집장이로 단정하고, 국제적 자료를 주워섬기면서 꽤나 근거가 있는 말인 채 한다. 아무리 단가가 싸다 한 들 비오는 날, 바람없는 날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는 재생에너지의 한계나, 전력망이 고립된 우리나라의 상황, 유가가 치솟는 좁은 시공간에 대해서 과연 귀를 막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를 쓰겠다고 생각하면서 기자를 검색하고 내가 이미 이 기자가 쓴 글(국회의사당에 원전을 짓자)을 읽고 '토론의 태도'(https://blog.aladin.co.kr/hahayo/12165658)라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정답을 안다고 생각하시니 부럽습니다,라고도 쓰고는 싶었다. 나도 그런 세상에 살고 싶네,라고 생각한 것도 같다. 


그래 뚱해진 채로 또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원전은 이미 사양산업, 윤 대통령이 나서도 수출 어렵다"(https://news.v.daum.net/v/20220629152401970) 는 글을 보았다. 내가 저 말을 했었는데, 싶어서 기사를 읽었다. 나는 그 말을 2015년에 썼었다.(https://blog.aladin.co.kr/hahayo/7744179) 알라딘의 생태주의자 분이 쓴 글(원자력발전X 핵발전O https://blog.aladin.co.kr/idolovepink/7736949)에 댓글로 말에 옳고 그름이 어디있느냐, 많이 쓰면 그게 맞는 거지,라고 한참을 말하다가, 당시에는 페이퍼 쓸 때가 아니라서 일없이 책을 걸고 리뷰를 썼다. 그리고 그 리뷰에 원자력이 사양산업이고, 이제 공급관리보다 수요관리가 중요하다고 썼었다. 2015년에, 그러고도 수명을 다할 때까지 안전하게,가 역할이면 역할이라고도 썼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가구당 전력소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계속 전력소비가 느는 걸 보고 있으니까, 참 나도 답이 없네,라는 순간들이 생겼다. 한전의 사장님들이 두부가 콩보다 싸서야 되겠냐,고 말할 때마다 그렇지,라고 생각하는 나는, 지금의 기형적인 전력소비상황에서 방법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가전이 꽉 찬 이상적인 집을 묘사하는 광고들 다음에 이제 건조기와 식세기가 필수 신혼가전이고, 가스렌지를 인덕션으로 바꾸는 상황에 직면했다. 

수요관리는 공급관리보다 훨씬 어렵고, 사람들은 산업전기요금과 가정용전기요금이 꽤나 독립된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국가의 부유함이 산업 덕분이고, 제조업에 사용되는 전기는 물품의 생산단가와 연결된다. 나는 원자력이 그 안전에 대해 대중을 설득하지 못해서 사양산업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수출이야 못 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원자력을 수출하지 못해도,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수출해서 우리나라의 부가 유지되기 위해 산업용 전기요금이 어느 정도 낮아야 한다면, 그것도 원자력의 역할이 되어버리는 거다. 전기요금은 올라야 해, 오른 전기요금은 가정에서 에어컨 실내 온도를 높이게 만들어야 하고, 필수가전의 숫자를 줄어들게 해야 한다. 

원자력딜레마( https://blog.aladin.co.kr/hahayo/9663603 )를 읽으면서 조금은 다른 태도가 된 것도 같다.

두부가 콩보다 싸면 안 된다.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개개인이 삶을 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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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벌써 티빙으로 다 봤는데, 뒷북으로 티비엔에서 하는 걸 틀어놓고 보고 있었다. 

한자비석에 학교 밴드로 들어가는 비밀번호가 있다고 해서 찾는 중이었는데, 그 비석에 쓰여진 말이 '出爾反爾'였다. 추리반,이라서 소리가 그렇게 나는 비석을 세웠나, 싶지만 역시 궁금해서 뜻을 찾았다. 

출이반이[出爾反爾]
국어우리말샘
너에게서 나와서 너에게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행불행과 좋은 일 나쁜 일이 결국은 모두 자기 자신에 의하여 초래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더보기
出尔反尔[chū ěr fǎn ěr]
중국어
발음
발음듣기
① 이랬다 저랬다 하다 ② 언행이 앞뒤가 서로 모순되고 신의가 없다 더보기









너무 신기해서 기억해두려고 적어놓는다. 

같은 한자로 쓰여져 있는데, 국어사전 뜻이랑 중국어 뜻이 다르다.

한자를 배워두면 선조들이 하듯이 필담은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 아래쪽에 고사성어 사전에 맹자 양혜왕 하편에 나오는 말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어로 뜻은 왜 저렇게 된 걸까.  

더보기,로 들어갔더니, 중국어 예문에 자업자득,이라는 뜻도 있으니, 같은 의미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아마도 이랬다 저랬다 하다,의 뜻이 더 큰 게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에서 민주화,라는 말을 아예 다른 뜻으로 쓰던 그런 식으로 의미가 변질된 건 아닐까, 혼자 생각했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과정,이라는 의미가 의견을 억압적으로 하나로 통일시킨다,는 의미로 변질되던 과정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처럼, 어른들이 '결국 네가 한 행동이 너에게 돌아온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모순되는 행동을 해 왔으면, 아예 그 말이 그런 의미로 변질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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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숲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지음, 토마스 산체스 그림, 박미경 옮김 / 다산초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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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동서양의 차이는 뭘까, 이런 생각을 계속 하면서 서양인 저자의 책을 보게 된다. 동양인이고 불교문화권 한자문화권에 살면서도 이런 책이 또 좋은 것은, 이미 많이 서구화되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스웨덴에서 경제를 공부하고 기업의 임원이 되려는 순간에 일을 그만두고 숲속 승려로 수련하였다. 오랜 수련을 마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승려가 아닌 삶을 살았다.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되는가, 뭐 그런 생각을 했다. 드라마틱한 변화라는 게 모두 다 선망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더 많이 듣는다. 왕자였으면서도 그 모든 걸 버린 석가모니 부처에게 배움을 청한다. 현대라면 대기업 임원을 목전에 두고도 그 모든 걸 버렸다. 도대체 왜?라는 의구심으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가, 싶다. 깨달음의 말들은 불교의 말들이라 그대로 좋다. 


1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얻은 초능력입니다. - 4%

펀게시판,에서 문화권마다 특정한 정신병이 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문화권의 특성 때문에 정신병의 양태가 달라진다. 무병이나 신병을 부르는 말이 서구문화에 있을까.  

기독교문화권은 결벽적인 신 때문에, 우리문화에서는 무병이나 신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악마,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라고도 생각한다. 


자신의 사고 과정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줄 알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를 갈라놓는 것보다 우리가 공유하는 것을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어디에서 왔든 어떤 이력을 지녔든 간에 우리의 내면이 작용하는 방식은 대체로 닮았습니다. 그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고 잊지 않는다면, 더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악한 양 시늉하느라 기진맥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람과 서로 돕고, 나누고, 진정으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인공위성처럼 고독하게 홀로 부유하지 않는 대신, 다른 사람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대신, 서로의 존재가 위안이 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 배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남들의 아름답고 뛰어난 점을 발견하고도 그들만 못하다는 내면의 속삭임에 더는 시달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 17%

서양의 어떤 태도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이 서양인 스님이 공동체에 대해 배우는 과정은 더 극적인 것도 같다. 요새 나를 사로잡은 질문은 왜 미국은 총기규제를 못하나,이다. 코로나에 대응하는 서구선진국의 어떤 모습-마스크 규제를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 같은 것-이나,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총기규제를 하지 못하는 미국의 모습은 함께 살아가는 걸 어렵게 하는 문화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상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쉼 없이 떠들고 울먹이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독설을 날리고 의문을 제기하고 불평을 일삼는 내 생각과 홀로 마주하는 것, 그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진정시키려 애써도 제 마음은 끊임없이 인신공격과 자기 회의로 반격을 가했습니다.- 18%


"저는 숲속 승려가 되고 싶어서 모든 걸 뒤로하고 왔습니다."- 22%

이 말은 특이하게 결핍이 드러나서 옮겨 놓는다. '모든 걸 뒤로 하고'가 필요한 말이었을까,라고 생각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 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스님의 손바닥 안에 있었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다들 숨 죽이고 스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요. 스님을 몸을 살짝 내밀더니 극적인 효과를 내려고 한 번 더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습니다. 

"자, 다들 그 주문이 뭔지 궁금하시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 40%

이걸 읽고 딸아이에게 알려주려고, 먼저 스님이 꺼낸 도입부를 흉내냈다. 궁금하지?라고 물었더니, 안 궁금하다고, 화나면 싸우고, 지면 지고, 이기면 기분좋을 거라고 했다. 이긴다고 기분이 좋다니, 조금 기다렸다가 가르쳐줬다.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자 결국 아잔 수시토 스님과 저만 남았습니다. 그 순간 제 모습은 아마 언짢음과 짜증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그때 아잔 수시토 스님이 저를 온화하게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나티코, 나티코. 혼돈은 자네를 뒤흔들지 모르지만 질서는 자네를 죽일 수 있다네." 

그렇습니다. 저는 또다시 주먹을 너무 세게 쥐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마땅히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다 안다고 상상한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의 모습이 제 생각과 맞지 않자 울컥한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했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저를 작고 어리석고 외롭게 만듭니다.- 51%

이건 책을 덮고, 기록하기 전에 밑줄을 빠뜨린 거 같아서 열심히 찾았다. 어른이 되는 건 혼돈을 버티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불확실성이나 혼돈에 화를 내는 것이 쓸모없다는 걸 깨닫는 게, 세상에 확실한 건 없다는 걸 깨닫는 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중의 깨달음이라서, 질서가 필요한 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남겨두고 싶었다. 


조금 덜 통제하고 더 신뢰하길 바랍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조금 덜 느끼고, 삶을 있는 그대로 더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에게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되니까요.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을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자신을 원래보다 더 작고 초라하게 만들 필요 또한 없지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목을 옥죄며 살 것입니까, 아니면 넓은 마음으로 인생을 포용하며 살 것입니까? - 52%


우리가 사는 우주는 모든 것이 임의로 이루어지는 차갑고 적대적인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오지요. - 75%


태국에는 멋진 속담이 하나 전해 내려옵니다. '부처의 등을 도금한다'라는 말이지요. 태국의 신도들이 정기적으로 절을 찾아 참선한 다음 금종이와 촛불, 향을 보시하는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태국의 불상들은 대개 이 금종이들로 금박을 입히거든요. 이 속담은 자기의 선행을 다른 이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불상의 등에 금박을 입힌다는 생각에는 그야말로 멋진 구석이 있습니다. - 83% 


이때 다른 누군가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만은 알 테니까요. 우리는 늘 자기 자신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과 기억은 우리가 앉아 있는 목욕물과도 같습니다.  - 84%


세상은 세상 그 자체의 모습으로서 존재하지 않지요. 세상은 우리의 모습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 85%


"화가 나긴 하지만, 그 화는 아무 것도 차지하지 못합니다."라는 뜻이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이 떠오르는 모든 감정을 품을 만큼 매우 깊고 넓을 때 삶이 어떤 모습일지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감정이 곧 우리 자신이라고 믿지 않길 바랍니다. 그것이 내면을 전부 차지하고 물들이게 두지 말길 바랍니다. 그런다면 분노나 억울함도, 시기와 미움도 더는 우리를 해치지 못하고 곧 후회할 일을 저지르게 하지도 못합니다. - 92%


왜 우리 문화권에서는 죽음과 싸우고,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을 부정하는 것을 영웅적이라고 묘사할까요? 죽음은 왜 늘 무찔러야 할 적이나 모욕으로, 실패로 그려질까요? 저는 죽음을 삶의 반대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탄생의 반대에 더 가깝지요. 증명할 순 없지만, 저는 늘 죽음 저편에 뭔가가 있다는 확신을 느껴왔습니다. 때로는 뭔가 경이로운 모험이 저를 기다린다는 느낌마저 들지요. - 95%

살아가는 게 혼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차례차례 논리를 쌓아서 계속 살아갈 동인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논리로는 삶을 설명할 수 없다. 삶이 삶이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자살을 권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의 어떤 태도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그런데, 어디선가 곡기를 끊는, 행위도 자살로 묘사하는 걸 보고 의아한 기분이 되기는 했다. 나는 지금의 연명치료는 원하지 않는다.- 능동이기보다 수동인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어떤 마음의 노력 가운데, 죽음이나 질병을 격리시켜서 죽음이나 질병을 없앨 수 있다는 식의 은유적 믿음이 현대에 존재한다는 면에서 이건 서구문화권만의 문제는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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