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마음의 연구 - 자아와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아뢰야식
한자경 지음 / 서광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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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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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제586호 : 2018.12.11
시사IN 편집국 지음 / 참언론(잡지)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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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 주5일제 투쟁을 위해 노조가 대절한 버스를 타고 집회에 갔었다. 기분좋게 소리를 지르고 내려오는 길에 듣는 뉴스들에서 만나는 미움들에 당황했다. 내가 생각한 주 5일제,는 신규고용을 창출할 거라고 '급여삭감없는'은 할 수 있는 최선의 주장을 해야 하니까, 라고 생각한 거였다. 어차피 기업은 자신의 최선의 이익을 주장할 테니, 노동자는 노동자의 최선의 이익을 주장하면서 부딪치는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런데, 기분좋은 투쟁의 현장에서 들리던 소리들은, 티비를 켜면 미움의 말들 뿐이었다. 뉴스들은 '급여삭감없는'에 방점이 찍힌 기득권노조의 투쟁이라고 했다. 현장에서는 결국 '급여삭감은 없었지만' 신규채용도 없었다. 이긴 거라지만, 이긴 건지 알 수가 없는 투쟁이었다. 그 다음 정권을 기업가 마인드의 기업가에게 넘겼던 걸 생각하면, 코 앞에서 이기고 두 세 걸음 쯤 앞에서 고꾸라진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광주형 일자리에 대한 노동자의 입장에 지면이 많이 할애되어 있다. 남편과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반대하는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광주형 일자리나, 최저임금,에 대하여 나는 예전처럼 분명한 입장이 되지 못한다. 국경이 가르는 빈부의 격차만큼, 지역이 가르는 빈부의 격차가 분명히 있는데, 울산의 일자리가 광주로 간다고 반대하는 노동조합을 외부자인 나는 어떻게 봐야 할까. 결국 급여수준을 떨어뜨리게 될 거라는데, 지금 급여가 없는 사람이나 지역에서 더 낮은 급여수준으로 기업을 유치하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우호적이라 할 정부를 상대로 이기고, 아예 정권을 내어준다면, 그 싸움은 누구에게 득이 되는 것일까, 생각이 많다. 항상 이길 수 있는 대기업 노동조합의 조합원인 내가, 대체자 없이는 휴가를 낼 수 없다는 협력사 직원과 마주할 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은 거다. 내가 누리는 안정감이나 복지가 어떤 것 위에 세워졌는지 아는데, 회사랑 둘이 붙어 이긴다 한들, 무슨 소용인 건가, 싶다. 

어렵고 힘든 시기다. 그저 우호적인 언론이 없어서 그런 건가,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역시 모르겠다. 사람들의 태도 가운데, 무언가가 있는 거라고, 노동자일 때 사장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 없다는 태도는 사장이고 싶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고 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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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셔의 손 -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김백상 지음 / 허블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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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쓸모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장르소설의 쓸모까지. 그리스 로마의 철학이나, 서양에서 인간의 완성형에 대한 묘사같은 걸 보면서, 서양의 학문은 분별 가운데 이뤄지는 거라서, 소설, 다르게 말하면 문학이 균형추같이 작동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철학이나 논리학 가운데 빠진 부분들을 비어버린 부분들을, 그것만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소설이 균형을 잡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장르물들이 근대에 발명되었다는 추리소설이나, SF소설이 또 역시 근대에 발명된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발명되었다고도 생각했다. 인간이라는 모호하고 비합리적인 존재에게 합리성이나 논리, 과학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읽은 책에서 목 위로만 살아있는 존재를 만난 적이 있다. 삽화가 곁들어진 아동용 서적에서 목 위로만 살아있는 존재는 기괴했다. 지금이 그 상상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성형과 장기이식과 의족과 의수. 삶과 죽음의 경계도 흐릿해지고, 나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책 속에서 죽음대신 기억을 지우기로 택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기억을 지우면서, 삶에 새로운 기회를 준다는 묘사를 나는 쉽게 수용하지 못한다. 두 손으로 받칠 만한 뇌 한 덩이를 가방에 남기고, 그 나머지를 모두 다른 것들로 만든 존재도 나온다.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니듯이 전뇌를 머리에 아예 이식한 인간들은 스스로의 경계를 만들 수 있을까. 인간의 이야기에 개입한 기술들을 내가 수용할 수 있을까. 지금의 인터넷과 스마트폰 다음, 아예 이식된다는 전뇌를. 아직 그런 기술이 보편적이지 않아 다행이다. 나는 그런 기술들이 개입한 세상에서 희미해진 나의 경계가 무섭다. 몸,이라는 명확한 경계가 뇌,까지 축소되는 것을 견디는 것도 어렵고, 그게 내가 아니라 타인이라도, 한 덩이 뇌를 내가 알던 누군가로 대할 수 없을 거 같다. 기술에 대한 호기심 이외에 이야기 속 캐릭터들은 누구에게도 이입하기 어렵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동안 하는 행동들, 결국 기억을 잃게 되는 존재들을 옛날사람인 나는 그 사람의 연속성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살기 힘들어 죽음을 택하는 것과 살기 고통스러워 기억을 지우는 것은 또 똑같이 이해하기 어렵다.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시간 축의 기억을 날리고 나면 나란 인간은, 물질축의 모든 육체를 날리고 나면 나란 인간은 뭐가 남지?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미래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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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엘리자베스 키스 외 지음, 송영달 옮김 / 책과함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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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책을 열심히 읽을 때 마음 깊이 반발심이 들 때가 있었다. 대개는 백인 여성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묘사 가운데, 먼저 깨달은 사람인 체 이야기하는 그 많은 것들에, 많이 공감하던 시기들 다음 어느 순간 깊이 '우리 엄마는 그렇게 한심하지 않다고!'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의 삶이나 문화가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그 전후 맥락없이 관찰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었다. 

책소개만 읽었지만('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정체성 정치를 넘어'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9019514&start=slayer)) 지레짐작으로 나도 아마 그런 상태일 거야, 이런 상상도 한다. 남편이 사서 책꽂이에 꽂은 '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225966) 같은 책등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내 안에는 알게 모르게 쌓여 있는 동양의 가치관, 태도 들이 충돌하고 있는 거라고도 생각한다. 


오래 전에 읽은 책이다. 

영국인 여성화가가 구한말, 조선의 풍경을 그린 그림들과 그 그림을 그리는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름다운 채색수채화 옆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다. 게으른 노인과 활달하고 자신감 넘치는 강인한 여성들이 나란하다. 외국인의 눈으로 봤을 때 자신은 알지 못한 것들을 보는 순간들이 책 속에 있다. 가부장제에 억압당한 여성,이라는 짧은 서사에는 없는 다른 것들. 강인하고 활력넘치는 여성들,이 있다. 나는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문화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싫다는 후배에게 조언을 보내는 이황의 편지(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7837311)처럼 삼가는 가운데 노력하는 문화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그런 문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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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2-13 2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넵,저도 이 책을 읽었는데 서양인의 왜곡된 시각이 좀 적은 책인것 같더군요^^
 
양육가설 - 부모가 자녀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
주디스 리치 해리스 지음, 최수근 옮김, 황상민 감수 / 이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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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되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뭔가 부모노릇에 관심이나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래도, 식당에서 아이가 뛰면 부모를 찾고, 역시 아이들은 좀 귀찮다고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부모가 되어 달리는 차 문을 벌컥 열고 내리려고 한 적이 있다. 아이가 아파서 어린이집을 중간에 나와 병원에 갔다가 오는 길에 탄 택시였다. 목적지가 가까워서 속도를 줄이는데, 그 짧은 길에 아이가 멀미를 할 것 같았다. 차에 멀미를 잔뜩 토하고, 기사 분한테 야단이라도 맞을까봐 그저 속도가 줄었을 뿐인 차의 문을 벌컥 열고, 상상하던 그 이상 욕을 먹었다. 욕을 먹으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미쳤었네, 그랬다. 아이를 안고 내릴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속도가 줄었대도 멈추지 않은 차였고, 다칠 수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아픈 아이가 있는데. 


부모도 사람인지라 이야기를 듣는다. 엄마들의 진상짓,이라고 올라오는 인터넷의 글에도, 노키즈 존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는 신문의 기사도, 아닌 체 해도 듣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일의 선후를 뒤섞고 중한 것과 중하지 않은 것을 헷갈렸다고 내 자신에게 설명했다. 그래도 역시 미친 거였다. 


부모가 되어 저지른 많은 미친 짓에는, 아이를 보기보다 내 또래를 봐서 저지른 일들도 많다. 아이가 원하는 어떤 일을 내가 허용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나보고 미쳤다고 하겠지, 싶은 것들. 여름에 부츠를 신으려고 하는 아이와, 겨울에 두꺼운 옷을 거부하는 아이와 지나치게 싸우고 있을 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아이가 덥거나 추울까보다,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할까, 같은 게 앞에 있었다. 아이가 보이는 어떤 모습, 태도가 부모의 평판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평판을 두려워해서는 양육을 즐길 수가 없다. 


저자는 아이를 부모가 빚는 피조물로 대하는 '양육가설'과 여기에서 출발한 수많은 조언들로 양육이 괴로웠던 엄마다. 두 딸을 키우면서 겪는 어려움 가운데, 양육가설이나 조언전문가들이 자신을 얼마나 억압했는지 내내 설명한다. 말 안 듣고, 어울리지 않았으면 하는 아이들과 어울리는 둘째 딸 때문에 속을 썩으면서 자신이 써온 심리학-성인의 온갖 심리적 문제를 아동기 학대에서 원인을 찾는- 교과서들에 반감이 드는 거다. 부모의 역할은 분명히 있지만, 그 한계 또한 분명하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말들이 가득하다. 이민가정, 또래집단, 입양아 등, 기존 양육가설이 반하는 증거들을 어떻게 배제해왔는지 말한다. 기존의 연구들을 반박하면서 또래집단 가운데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 아이들에 대해 말한다. 동양의 부모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면서 그걸 설명하는데 이렇게 많은 말이 필요하다는 것이 의아하다. 그러면서도 역시 내가, 서양에서 비롯된 양육가설에 휘둘리지 않았다고는 못하겠다. 


인재시교,를 읽은 나는, 서양의 학문이 시간 축을 잘라내고, 누군가를 책임지우기 위해 상황을 단순화시킨다고 삐딱하게 본다. 서양의 학자들처럼 말하지 못하는 나의 추상성을 이제, 다른 식으로도 말한다. 양육가설을 읽으면서 함께 읽은 '심층마음의 연구'덕분에 어쩌면, 동양은 자아를 형성한 다음, 그 자아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으며 나아가는데, 서양은 그게 안 되는 건가, 생각도 한다. 첫번째 밑줄은 그런 것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나"의 내면은 변화를 멈췄다'고 단정하는 것에 화들짝 놀랐다. 동양에서는 다음 단계가 있으니까, 내면은 변화하고 성장한다고 믿으니까, 적어도 나의 내면은 스물 다섯보다는 나이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너무 부끄러운 말이 아닌가, 싶고, 설마 서양은 문화에서는 부끄러운 말이 아닌 것인가, 싶기도 한 것이다. 


아이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부모인 나는 나와 아이 밖의 말들에 조금은 귀를 닫고 내가 즐길 수 있을 만큼 양육한다. 

열일곱 살에서 스물다섯 살 사이 언젠가부터 "나"의 내면은 변화를 멈췄다. 변화를 멈춘 이유는 아마도 뇌가 완전히 성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보다 늦게 성숙하는 남자는 조금 더 오래 유연한 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p414

하지만 양육이란 섹스가 그렇듯 고생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다. 진화는 우리에게 채찍만이 아니라 당근도 줬다. 자연은 인간이 어떤 일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그에 걸맞은 기쁨과 만족감을 보상으로 제공한다. 양육이 힘겹고 어렵기만 한 일이라면 침팬지들이 그 일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부모란 양육을 즐길 수 있는 존재다. 양육을 즐기고 있지 않는다면 어쩌면 힘에 부칠 정도로 노력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p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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