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셔의 손 -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김백상 지음 / 허블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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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쓸모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장르소설의 쓸모까지. 그리스 로마의 철학이나, 서양에서 인간의 완성형에 대한 묘사같은 걸 보면서, 서양의 학문은 분별 가운데 이뤄지는 거라서, 소설, 다르게 말하면 문학이 균형추같이 작동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철학이나 논리학 가운데 빠진 부분들을 비어버린 부분들을, 그것만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소설이 균형을 잡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장르물들이 근대에 발명되었다는 추리소설이나, SF소설이 또 역시 근대에 발명된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발명되었다고도 생각했다. 인간이라는 모호하고 비합리적인 존재에게 합리성이나 논리, 과학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읽은 책에서 목 위로만 살아있는 존재를 만난 적이 있다. 삽화가 곁들어진 아동용 서적에서 목 위로만 살아있는 존재는 기괴했다. 지금이 그 상상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성형과 장기이식과 의족과 의수. 삶과 죽음의 경계도 흐릿해지고, 나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책 속에서 죽음대신 기억을 지우기로 택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기억을 지우면서, 삶에 새로운 기회를 준다는 묘사를 나는 쉽게 수용하지 못한다. 두 손으로 받칠 만한 뇌 한 덩이를 가방에 남기고, 그 나머지를 모두 다른 것들로 만든 존재도 나온다.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니듯이 전뇌를 머리에 아예 이식한 인간들은 스스로의 경계를 만들 수 있을까. 인간의 이야기에 개입한 기술들을 내가 수용할 수 있을까. 지금의 인터넷과 스마트폰 다음, 아예 이식된다는 전뇌를. 아직 그런 기술이 보편적이지 않아 다행이다. 나는 그런 기술들이 개입한 세상에서 희미해진 나의 경계가 무섭다. 몸,이라는 명확한 경계가 뇌,까지 축소되는 것을 견디는 것도 어렵고, 그게 내가 아니라 타인이라도, 한 덩이 뇌를 내가 알던 누군가로 대할 수 없을 거 같다. 기술에 대한 호기심 이외에 이야기 속 캐릭터들은 누구에게도 이입하기 어렵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동안 하는 행동들, 결국 기억을 잃게 되는 존재들을 옛날사람인 나는 그 사람의 연속성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살기 힘들어 죽음을 택하는 것과 살기 고통스러워 기억을 지우는 것은 또 똑같이 이해하기 어렵다.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시간 축의 기억을 날리고 나면 나란 인간은, 물질축의 모든 육체를 날리고 나면 나란 인간은 뭐가 남지?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미래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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