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잔을 찾아서
대학 때, 뭔가 여성주의적인 영화라고 봤다. 상황은 잘 기억이.
계급이 분명히 다른 두 여자가 뭔가 사람을 찾는 이야기였는데, 잘 기억은 안 난다. 기억나는 건, 시작. 미용실에서 온 얼굴의 털을 미는 장면이다. 왜? 왜? 왜?
티비에서 다리털을 밀고 실크 손수건을 떨어뜨리는 장면이 나왔을 때도 역시 그런 느낌. 왜? 왜? 왜?
고등학교 때 친구는 '있잖아, 나는 아깝다. 잘 먹고 잘 자서 이렇게 내 몸에 있는 것들인데 아깝잖아'라고 여자애치고는 잘 보이는 팔뚝 털을 조금은 어루만지면서 말했었다. 그 친구가 그 말을 하면서 살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했다. 폭식이나 나쁜 습관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고 있는 동안 내 몸을 받쳐주는 내 몸에 생겨난 나의 살들도 그렇게 아깝다고. 그 진지한 표정을 기억하고 있어서, 얼굴털을 다리털을 싹 다 밀어버리는 여자들이 이상했다. 내 몸인걸, 나는 좋아한다구. 이건 어쩌면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같지만 묘하게 다른.
털을 미는 문화가 개화되기 전에 있었을까, 많은 불편부당하다고 분노하는 것들이 서구화와 근대화 가운데 우리에게 들어온 건 아닌가 싶다. 서양여자들은 저렇게 털을 싹 다 밀어???이러면서 놀라면서 봤던 기억이.
2.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남장여자인 김윤희가 대물이 되는 이유는, 남자들 안에 있는 위계와 문화를 아예 모르기 때문이다. 왕만이 지나갈 수 있는 문으로 성큼 걸어들어가려는 여자는 궁정의 문화나, 여러 불가능한 일들-저질렀을 경우 큰 벌을 받게 되는 일들-에 대해 무지하다. 아예 알지 못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남자들의 눈에는 대범하게 보인다.
여자들에게는 여자들의 문화가 있다. 남자들이 '사회'라는 구조를 만들면서 쌓아올린 어떤 규칙들처럼, 여자들은 여자들의 방식 가운데 판단한다. 위계 대신 친소로 새로운 관계 가운데서 판단을 한다. 김윤희같이 글을 배운 여자라면, 여자들 가운데서도 남자들 가운데서도 쉽지는 않겠다.
3. 사막의 꽃
소말리아 출신의 수퍼모델, 아프리카 여성할례를 철폐하기 위한 활동을 한다. 직접 쓴 수기의 제목은 자신의 이름 와리스에서 왔다. 사막의 꽃은 소말리아 어로, '와리스'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오래 전에 읽었는데, 모든 수기들이 그러하듯이 더 복잡하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전한다. 글로는 주제가 하나, 집중된 게 읽기 좋겠지만, 삶은 그런 게 아니니까, 삶을 쓴 글이다.
나는, 사막에서의 삶을 묘사할 때, 부유함,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의 부유함이 무엇을 치른 댓가인가, 이런 생각. 묘사된 사막의 삶에서 부유한 적 없던 와리스의 가족은 고기가 생기면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줄 수 있을 때 베풀어야 하는 문화는 어쩌면 저장의 한계 때문이겠지만, 가난이 아닌 공동체를 본 나는 부러웠다. 나눠먹을 사람들이라, 나는 만들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