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아이 1
에리크 발뢰 지음, 고호관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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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어둠 속에 홀로 앉아 

다른 인간을 갈구하며 울 때마다 

                     기적이 다가온단다.


 

 

 

 

 

    기자 출신의 작가가 자신의 취재 기록과 유년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진중하고 정밀하다한때 덴마크를 들썩이게 했던 <콩슬룬 사건>을 중심 소재로 낙태미혼모입양언론과 정치의 부도덕한 권력 남용인간 성격 형성에 천성과 환경이 미치는 영향력 등 깊이 있고 묵직한 주제를 이야기에 담아냈다소설의 주요 무대가 되는 <콩슬룬 고아원>은 작가 자신이 유년기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미혼모의 삶을 비관한 어머니의 우울증과 자살 시도로 몇 년 간 고아원 생활을 해야 했던 개인적 체험이 소설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아원 사감이 <침대와 침대 사이를 오갈 때 나는 프리지어 향기>와 <갓 다린 리넨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 전달하는 세세하고 생생한 묘사력이 인상적이다등장인물들(특히 입양아)에 대한 내면 묘사에도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그분을 향해 손을 뻗는다하지만 불평은 하지 않는다우리는 일부러 과장해서 하품하지도 않는다우리는 누가 원한 적도 없고아무런 기대도 받지 못한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아주 처음부터 우리는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기술을 습득했다겸손복종감사하는 마음그리고 우리는 침대에서 침대로 메시지를 전했다왜냐하면 완벽하게 균형을 유지해야 우리가 안전하게 끝까지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권, 107)

 

    어느 날 국무부에 배달된 <욘 비에르스트란>이라는 이름의 출생증명서와 익명의 편지로부터 이야기의 문이 열린다익명의 편지에는1961년 콩슬룬 고아원 유아방에 있던 일곱 명의 아이들 사진도 한 장 들어 있다욘 비에르스트란은 누구이고 일곱 명의 아이들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일곱 아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욘 비에르스트란>의 정체를 추적한다그 과정에서 2001년 덴마크의 한 해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신원불명의 여인과 <욘 비에르스트란>의 충격적인 관계가 드러난다.

 

    새로운 아이들이 도착했다가 빠져나갔고곧 다시 떠나갈 다른 아이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곧 나는 작별 인사 횟수로 국내 기록을 세웠다(나보다 더 많이 아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본 아이는 없었다). 입구로 들어오면 보이는 흑백사진 중에는 내가 잔교棧橋 끝에 서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담긴 것도 있다그 사진은 15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서 찍은 것 같다내 몸은 살짝 한쪽으로 기울었고왼쪽 팔은 흐느적거린다그리고 자세히 보면 내가 주먹을 쥔 게 보인다입에서는 깊은 계곡 속의 바람 같은 공허하고 슬픈 곡조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가지 마...... 가지 마......!’ (1권, 116~117)

 

   사회정치 문제부터 복잡한 인간 본성에 이르기까지 밀도 있게 파고드는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주된 정서는 <갈망>이다등장인물들의 갈망과 집착이 배양되고 뻗어나가다 충돌하고 결국에는 파국으로 치닫는 일련의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진다인간 본성에 대한 작가의 이해와 통찰이 엿보이는 부분이다특히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 <잉거 마리>에 대한 내면 묘사는 불편하지만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무도 모르게 두개골이 특유의 곡면을 발달시키거나 코가 제 각도를 찾아가듯이 영혼 속에서 기형이 자라났다오를라의 굴욕은 신이나 악마가 보낸 게 아니었다오를라를 보호했어야 마땅한 인간으로부터 오를라에게 전해졌던 것이다막달렌이었다면 부족한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그건 오를라의 어머니 때문이라고. (1권, 197쪽)

 

   책을 덮고 나서 얼마간은 머릿속이 시끄러웠다사방으로 튀는 생각들을 한데 붙들기 어려웠다과부하가 걸린 느낌이랄까중심 사건에서 뻗어나가는 가지가 많고 저마다 굵직해서 생각할 거리는 많은 반면 이야기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다일기나 편지신문 기사 등 다양한 형식과 시점을 오가는 구성도 산만하다는 인상을 준다느린 전개주제의식의 과잉이 소설적 재미를 반감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정밀하고 지나치게 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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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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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언 반스가 2008년에 발표한 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한 폭넓은 사유와 통찰을 담고 있다과학과 종교예술철학개인적 기억의 영역까지 아우르는 줄리언 반스의 입담은 지적이고 예리하며 해학적이고 유희적이다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맞닥뜨렸을 의문과 불안의 영역을똑바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구덩이>를 대담하게 쑤석거리고 있는 이 책은 그래서 주제의 묵직함과는 별개로 재미있게 읽힌다.

 

    설령 신이 지켜보고 있었다 해도왜였을까신이 내 스스로 씨앗들을 쏟아버리는 상황을 분명 못마땅해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렸던 건나의 열의에 찬지칠 줄 모르는 자위행위를 저 위에서 목격했지만 그럼에도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 않은 건 그 짓이 죄라고 단정하지 않아서라는 생각은 왜 못했던 걸까더군다나 죽은 조상들이 내 행동을 보고 하나같이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할 거라는 상상 역시 해본 일이 없었다. “뭘 망설이니아가야할 수 있을 때 즐기렴일단 영혼이 육신을 이탈하고 나면 할 게 그리 많지 않아그러니 우릴 위해서 한 번 더 해다오.” (31)

 

    다양한 작품들에서 죽음에 대한 고민과 사유를 계속해 왔던 줄리언 반스는 이 책에서 모든 격식(문학적 형식이나 인간적 체면 같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글쓰기를 선보인다평소 자신의 글에 사생활 노출을 꺼리던 그가 이 책에서는 가족과 지인의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폭로하는가 하면 개인적 체험이나 내밀한 감정 묘사에도 거침이 없다이런 솔직한 태도에는 이 책의 성격과도 연관이 깊다불가지론자인 줄리언 반스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한 걸음 물러난 거리에서 접근하고 있다가장 개인적인 기억을 불러올 때마저도 그의 엄정한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심지어는 삶과 죽음에 대해 애착과 두려움을 느끼는 자기 존재마저도 뇌과학적인 견지에서는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가정을 내세우면서 무구한 허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비트겐슈타인은많은 아이들이 겁에 질려 있는 걸 알아차리고선 차례대로 옆으로 가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겁이 나니그런 거라면 하느님 생각만 해.” 아이들은 사실상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숲 속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까짓 것믿어버려손해 볼 것 있어그리고 추정컨대 손해 본 아이는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존재하지 않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 요정들과 도깨비들과 나무의 악령들한테서만큼은 우리들을 보호해주실 것이다실제로 존재하는 늑대들과 곰들(과 암사자들)한테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43)

 

     <홍당무>의 작가 쥘 르나르알퐁스 도데투르게네프스탕달플로베르스트라빈스키베토벤쇼스타코비치와 같은 저명한 예술가들은 물론 유진 오켈리 같은 기업가의 죽음가족과 친지의 죽음에 관한 일화와 그들이 남긴 경구들을 늘어놓으면서 삶과 죽음의 민낯을 민망할 정도로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는 이 책은 하나의 진실로 절망과 위로를 동시에 안겨준다이들은 모두 죽었다. 우리도 결국 죽을 것이다라는 당연하지만 믿기지는 않는 명제 앞에서 우리는 절망과 두려움을 느끼는 한편 이 절망과 두려움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보편성에 위로 받는다줄리언 반스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삶이라는(죽음을 포함한오리무중의 구렁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고뇌가 한낱 뇌의 망상에서 기인한다는 가정을 체념적이지만 유쾌한 어조로 이어간다.

 

    힘든 건 단순히 구덩이를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인생을 응시하는 것이다인생은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사안으로그 근본적인 목적은 단순한 자기 영구 보존이라는 것인생은 공허 속에서 펼쳐진다는 것우리의 행성은 어느 날 얼어붙은 침묵 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리라는 것그리고 인류는 그 모든 격앙된지나치게 교묘히 계획된 복잡성 속에서 발전해왔지만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며우리를 그리워할 어떤 이나 그 어떤 것도 세상에 없기 때문에 고스란히 잊히리라는 확실성은 고사하고 그 가능성이라도 직시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힘든 일이다. (285)

 

    줄리언 반스는 이 책에서 끝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유머를 갖춰 체념하는 법>을 잘 보여준다그가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체념과 유머이다죽음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체념하고 남은 삶을 건강하게 웃으면서 살아가자고 하는 지혜가 엿보인다유머야말로 삶이라는 망상 앞에 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퍼포먼스라고 말이다이 책은 그런 믿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려는 듯하다삶과 죽음, 현실과 허구기억과 진실의 문제를 사유하는 과정을 맨몸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아니이 책은 처음부터 어떤 결론 같은 것을 목적하지 않고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그저 죽음()에 관한 <이 일화 저 일화 사이를 비실비실 걸어다니는모양을 보여줄 뿐이다줄리언 반스는 이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이고 있다. <나의 이런 일화들은 내가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곧이곧대로 믿어선 결코 안될 것이다>라고이러한 사유의 형식은 자칫 산만하다 느껴지기도 하는데삶과 죽음이라는 속성을 고려하고 보면 가장 정직한 포즈로 다가오기도 한다. <인생의 행보가 비실비실 걷는 것이니까>,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 뿐이니까길고 산만한 소설 같고 어지러운 꿈 같기도 한 이 책은 그러나 <해몽할 만한 꿈>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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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
샤를 와그너 지음, 문신원 옮김 / 판미동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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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이설의 단편 <빈집>은 전시된 욕망에 빙의하는 현대인의 강박증적 자화상을 신랄하게 묘사해 낸 작품이다. 능청스러운 직설 화법이 정교한 내시경처럼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사실적으로 투시하는 동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제스처를 망설이다 끝판에 가서는 왈칵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게 된다.

 

    수정은 완벽하게 꾸며진 새 아파트에 방해가 되는 것들에 자꾸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잡지에 실린 사진대로 꾸몄고, 그걸 본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것까지 보완한 집이었다. 자기 스스로조차 새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다 느껴지면 빈방으로 숨어들었다. 완전한 공간에 자기가 흠집이 되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이설, 오늘처럼 고요히문학동네, 2016)

 

    <내집마련>의 꿈을 이룬 수정은 새 아파트에 입주한 날부터 실내 장식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다. 잡지나 블로그에 소개된 실내 장식을 소품 하나까지 똑같이 재현했고 그도 모자라 손님들의 취향까지 반영해서 완벽한 구색을 갖추었다. 수정이 느끼기에 완벽한 집에 흠집이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들 부부였다. 수정은 <자기 때문에 새 아파트의 완벽성이 떨어지는 건 아닌가>(위의 책) 해서 소파에 앉아 있기도 불편할 지경인데, 남편은 고급 실내 장식에 어울리지도 않는 너저분한 차림새로 소파에 발을 올려놓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남편이 자러 가면 수정은 뒤바뀐 소파 툴의 위치를 소파와 직각으로 되돌려 놓았다. 수정은 점점 더 자신과 남편이 완벽한 새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 흠집이라고 느끼기 시작한다. 초라해 보이는 남편에게 화가 치밀어 오른다. 수정은 완벽한 거실에 나갈 때마다 외출을 하듯이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외출복을 입고 양말까지 신는다. 그러고도 자신이 <새 아파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빈방으로>(같은 책) 쫓기듯이 숨어드는 것이다. 그저 소설적 비약이라고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이야기이다.

 

    욕망으로 내면이 어수선해지면 결국 머지않아 외적으로도 어수선해진다. 도덕적인 삶은 자신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삶이지만, 부도덕한 삶은 욕구와 열정에 사로잡혀 휘둘리는 삶이다. (20)

 

    김이설의 소설 <빈집>에 관한 이야기가 좀 길어진 것 같다. 소개하려는 책과는 무관해 보이는 소설 작품 얘기가 생뚱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책 샤를 와그너가 쓴 <단순한 삶>을 읽으면서 김이설의 <빈집>을 떠올렸다. 서평을 쓸 때 <빈집> 얘기를 해야겠다 생각했다. 샤를 와그너도 김이설의 소설을 읽었더라면 필시 마음에 들어 했을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에 씌여진 이 책이 오늘날의 세태와도 서로 공명하는 것을 반갑게 여겨야 할까. 그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사회생활을 불안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 보라.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 목록은 제법 길어질 테지만, 결국은 본질과 부수적인 것을 혼동하는 보편적인 원인에서 비롯된다. (25)

 

    19세기 프랑스의 진보적인 목사가 쓴 이 책은 단순한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에 대한 현실적이고 명쾌한 조언이 담겨 있다.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수많은 유혹 속에서 삶의 본질 즉 알맹이를 취하면서 사는 것이 샤를 와그너가 말하는 단순한 삶이다. 그가 말하는 삶의 본질이란 인간다운 아름다움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단순한 삶이라고 하면 먼저 형식적인 소박함 같은 것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그러니까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 같은 것 말이다, 책에서 강조하는 단순함은 형식이나 기술이 아닌 일종의 마음가짐이다. 얼마나 소유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소유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단순함이 드러나는 외적인 징후가 전혀 없다거나, 그 나름의 습관이나 특징적인 기호와 방법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거짓으로 꾸밀 수도 있는 외적인 면모들을 본질 자체와 깊고도 완전한 내면의 원천과 혼동해선 안 된다. 단순함은 일종의 정신 상태다. 단순함은 우리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핵심 의지에 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존재방식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일 때, 다시 말해서 아주 솔직하게 그저 한 인간이고 싶을 때 가장 단순하다. (31)

 

    샤를 와그너는 물질적 풍요가 반드시 행복의 지표는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인간의 허영심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복잡한 욕망이 쌓아 올린 사회라는 건축물, 즉 인류의 거대한 집 안에서 어쩌면 우리의 참된 자아는 김이설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곁방으로 쫓겨난 신세인지 모른다. 쇼윈도 인생, 보여지기 위한 삶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삶은 부자연스럽고 복잡해지고만 있다. 자기 본성과 욕구 의지와 유리된 채 타인의 시선에 갇힌 삶은 공허하고 피곤하다. 이런 삶은 샤를 와그너가 말하는 단순한 삶, 인간다운 삶과는 거리가 있다. 욕망과 필요를, 부수적인 것과 본질을 혼동하지 말라는 샤를 와그너의 말은 그가 말하는 주제처럼 단순하고 소박하다. 이 단순하고 소박한 진리를 실천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왜 이토록 어려운가 말이다. 이 책에서 그는 단순함의 본질부터 생각하고 말하기, 명성과 선행, 아이들 교육법에 이르기까지 삶에서 우리가 부딪치는 가장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을 들려준다. 단순함에 대하여 240쪽에 달하는 장광설이 필요하다니. 그러고도 모자라서 우리는 계속해서 단순한 삶의 기술을 배우려고 다른 책들을 뒤적일 것이다. 샤를 와그너라면 이렇게 충고했을 것이다. 책 말고 당신 자신을 들여다 보라고.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이 책이 말하는 단순한 삶에 대해 정리하면서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자기 본질에 충실한 삶. 이 책이 말하는 단순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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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의 힘 - 지금껏 우리가 놓쳐온 색깔 속에 감춰진 성공 코드
김정해 지음 / 토네이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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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색에 흰색이나 회색을 섞어 비교적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색들이 요즘 트렌드인 것 같다.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벌써 유행하는 색의 의상이나 소품 몇 가지는 마련했을 것이다. 유행색을 모르겠다는 사람은 번화가에 나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옷가게 화장품 가게에 진열된 상품이나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의상과 소품을 보면 어느 정도 트렌드를 포착할 수 있다어쩌면 계획에 없던 옷이나 소품을 구입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마음에 들어서 구입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유행에 뒤처지면 안 될 것 같아서 무턱대고 샀다가 집에 돌아와 후회해 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내가 미쳤지, 이런 색을... 거울 앞에 서서 딱한 심정으로 속말을 중얼거려본 경험이. 그런 경험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의식적으로 색을 제한해서 사용하게 된다. 그냥 편하고 무난한 색, 자기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색만을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색이 나에게 어울리는 색일까. 나에게 어울리는 색은 내 몸과 마음에는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걸까. <색깔의 힘>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다채로운 답을 마련해 놓고 있다.

 

    원하는 색을 자주 입고 자주 보는 별 것 아닌 일이 자존감을 높이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된다. 감정을 읽어주고 마음껏 표현하다 보면 자기 조절 능력도 커진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누군가 내 감정을 알아주면 상한 마음이 금방 풀린다. (207)

 

    색채 심리와 색채 치료를 연구한 저자가 책에서 강조하는 것이 있다. 나에게 어울리는 색보다는 나에게 꼭 필요한 색을 찾아서 활용하라는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색이라니. 색에 무감각한 많은 사람들이 뻥해져 물어올 것이다. 색채 치료에서는 자기 기질에 맞는 색을 잘 활용하기만 해도 신체적 정서적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필요한 색은 곧 자기 기질과 맞는 색을 가리킨다. 그러면 우선 내 기질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의 3장을 보면 궁금증이 풀린다. 색깔별 기질의 특성과 조언을 덧붙이고 있다. 자기 기질을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자기의식이 희미한 사람에게는 자기 기질을 찾는 일부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에는 그 흔한 자가진단 질문지 같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난색을 표하는 이들에게 저자는 자기 기질을 알려면 다양한 색을 경험하라고 조언한다. 색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개인적 경험 때문에 평소 멀리했던 색, 낯설고 어색한 색이라도 내 기질과는 잘 맞는 색 혹은 내 기질을 보완해 주는 색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색에 대한 기억이 부정적이면 컬러 테라피가 성공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어릴 때 큰 홍수를 겪었다면 물을 상징하는 파란색은 그것이 지닌 보편적인 느낌과 상관없이 전혀 평화롭지 않은 색깔이 된다. 이런 경우에는 파란색을 매우 신중하게 활용해야 한다. 아픈 기억과 충돌하지 않게 돌려서 자극하거나 아예 배제해야 한다. (137)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이 있다. 컬러 테라피에 적용해 보면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자기 기질에 맞는 색을 적절히 활용할 때 얻는 심리적 안정감에 빗대어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파란색 기질인 사람이 파란색에서 빨간색 기질인 사람이 빨간색에서 에너지를 얻고 위로를 받는 경우 말이다. 반면에 컬러 테라피가 색의 명도나 채도 대비를 활용해 다양한 색감이 주는 미묘한 영향을 활용하는 분야라는 점에서라면 초록은 동색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실제로도 초록은 동색이 아니다. 같은 초본 식물이라도 잔디의 녹색과 클로버의 녹색은 명도나 채도가 다르다. 섬잣나무 이파리의 녹색과 버드나무 이파리의 녹색 아까시나무와 단풍나무 이파리의 녹색이 각각 미묘하게 다르다. 같은 계열의 색이라도 채도나 명도 일조량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 얼마나 색에 무감하게 살았는가를 깨달았다. 흑백티비를 보다 컬러티비를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경이감을 느꼈다. 과장이 아니다. 평소 나를 둘러싼 환경, 벽지, 커튼, 침구, 책상 주변 소품, 옷장을 채우고 있는 색들. 자주 다니는 산책길에서도 내 눈은 가늘어졌다 커지는가 하면 마치 생애 처음 보는 색인 양 오래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색을 의식하고 감각하고 호흡하게 되었다. 색깔 위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나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에도 더 잘 집중할 수 있었다. 컬러 테라피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것. 많은 돈이나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진정한 컬러 테라피는 우리를 둘러싼 다채로운 세상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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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휴버트 셀비 주니어 지음, 황소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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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보고도 본 것 같은가 하면 보고도 안 본 것 같은 그런 영화들이 있다. 울리 에델 감독의 1989년 작품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Last Exit Brooklyn>가 내게는 그런 영화 가운데 하나였다. 스무 살 끄트머리였나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은 하늘이 어깨를 짓눌러 오던 침울한 오후였던 것 같다. 책과 비디오를 대여해주는 가게에서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발견했고 나는 얼마간 그 자리에 서서 비디오테이프 케이스를 훑어보았던 것 같다. 이상하게도 이미 본 영화인 것 같다는 기시감 같은 것이 들었는데 동시에 나는 그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이 그랬다. 나는 그 영화를 본 적 없었고 다만 그 제목과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같은 것들이 희미하게 머릿속을 요동쳤던 것 뿐이었다. 나는 몇 개의 오래된 영화와 함께 그 영화를 집어들었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집에 와서 서너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았다. <체리 향기><델리카트슨 사람들> 같은 오래된 영화들이었고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는 끝까지 다 보았는지 보다가 말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숨처럼 터져나오는 질문을 캄캄한 벽에 대고 중얼거렸던 것만 기억난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살까.

 

    입에서 비명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자기 목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입에서는 작게 그르륵 하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하나님, 하나님, 조까세요. (276)

 

     아마도 그들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 말이다, 내 목소리를 들었더라면 필시 이런 응답이 돌아왔으리라. 조까세요. 그들은 이미 나의 무력하고 무지하고 비겁하기까지 한 속내를 간파한 것이다. 내가 그들을 알아봐 주기도 전에 나는 그들에게 나 자신의 어둔 그늘을 들켜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확실히 이 작품에는 마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상한 힘이 있다.

 

    공을 맞은 아이의 친구들 중 하나가 도망가는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더러운 개자식들이라고 부르자 도망가던 아이들이 돌아와 그 아이에게 넌 똥보다 더 더러워, 하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너희들 집엔 더러운 빈대가 바글바글하잖아, 하고 말했다. 다른 꼬마는 너희 엄마는 스픽이랑 그 짓 한다며, 하고 말했다. 큰 패거리 아이가 손톱 다듬는 줄을 꺼내 다른 꼬마의 뺨을 베고 도망갔고, 패거리 아이들도 함게 도망쳤다. 놀이터 한쪽 구석에는 또 다른 아이들이 작게 무리 지어 자기들끼리 조용히 뭉쳐 있었다. 싸움이 나든 말든 비명 소리가 들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어깨동무를 한 채 웃으며 마리화나를 피웠다. (323)

 

     지금 소개하는 책은 영화의 바탕이 된 원작 소설이다. 원작자인 휴버트 셀비 주니어(Hubert Selby Jr. 1928~2004)는 브루클린에서 성장한 유년의 경험을 되살려 이 소설을 썼다. 소설을 출간한 1961년 당시 미국 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고 책에 대한 판매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그로부터 삼십 년 남짓 시간이 흘러 독일 감독 울리 에델이 만든 영화가 (미국의) 충격과 공포와 수치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를 끌어내 부활시켰다. 영화 정보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는 90년이 되어서야 개봉했다. 무자비한 폭력과 섹스, 윤간, 동성애와 마약으로 얼룩진 1950년대 미국 하층민의 암울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영화는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불편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소설은 영화의 곱절 정도 불편하다. 비속어와 은어가 난무하는가 하면 참혹한 윤간 장면이나 폭행 장면 등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의식을 잃고 공터의 좌석에서 뻗어버린 그녀를 계속 따먹었다. 얼마 못 가 그들은 시체처럼 널브러진 그녀에게 싫증이 났다. 구멍동서들의 줄도 깨졌다. 그들은 윌리스로, 그릭스로, 군부대로 돌아갔다. 구경하면서 순서를 기다리던 동네 꼬마들은 트랄랄라에 대한 실망을 분출하며 그녀의 옷을 박박 찢어 그녀의 젖꼭지에 담뱃불을 대고 몇 번 비벼 근 다음 막대기가 꽂혀 꿈틀대는 그녀의 음부에 오줌을 갈기고 나서 그것마저도 싫증이 나자 널브러진 그녀를 버려두고 떠났다. (139)

 

    연작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집에는 셀비 주니어의 첫 단편 <여왕은 죽었다>와 영화에서 스티븐 랭이 열연한 해리 블랙의 파업 이야기를 담은 <파업>, 발표 당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작품 <트랄랄라> 등 여섯 편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여기 실린 여섯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울리 에델의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릭스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프레디 일행, 파업 시위 현장과 동성애자 모임을 오가며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 나가는 해리 블랙, 게이 세계에서 여왕이라고 불리는 조제트, 조제트가 사랑하는 비니, 비니와 결혼한 메리메리와 비니의 아들 조이, 퇴물 신세가 된 매춘부 트랄랄라. 집 없고 돈 없고 직업도 없는 이들이 뒤엉켜 울고 웃고 사랑하고 배신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절로 힘이 빠진다. 몹시 피곤해진다.

 

     . 문은 닫히고, 닫히고, 닫히고, 꽉 닫혔다. 수천 번 당한 비참한 꼴. , . . 항상 쾅 닫혔다. 노크 소리는 없다. 상상해. 억지로라도. 똑똑. 제발, 제발. , 하나님, 노크하게 해주세요. 노크하게 해주세요. 아무나 노크하게 해주세요. 들어오게 해주세요. 왜 노크하지 않는 거죠? (...) 뭐라도. 아무라도. 닫혔어. 닫혔어. . . ! 닫혔어! , 하나님, 닫혔어! (43)

 

     1950년대 미국 사회를 조명한 영화는 의외로 많다. 최근에 내가 본 영화만 해도 대여섯 편은 되는 것 같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면 <옥토버 스카이> <캐롤> <트롬보> <레볼러셔너리 로드> 같은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에서 보여주는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막강하고 부유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은 우주로까지 확대된다. 반공산주의 물결 속에서 집단주의가 강화되었고 결과적으로 획일화된 집단에 속하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은 세상 바깥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는 바로 그 추방 당한 인물들의 암울한 삶을 무섭도록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풍요하고 희망에 찬 미국이 애써 감추고 외면하고자 했던 또 다른 미국의 현실이 이 작품을 통해 까발려진다. 소설을 읽은 직후에 영화를 다시 보았다. 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영화 같이 느껴졌다. 영화를 볼 당시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보이기 시작했다. 뭣 모르고 볼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답답하고 불편해졌다. 저들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물의 과거나 내면묘사가 없어도 절절히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은 왜, 같은 질문 대신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란 대체 무얼까. 당시 영화를 볼 때에도 나는 제목에 대해 생각해 봤던 것 같다. 도무지 그 의미를 풀 수 없었다. 내용만 보자면, 인물들이 처한 현실만 두고 보면 <브루클린에서 나가는 마지막 비상구>가 적절해 보였다. 한데, 브루클린에서 나가는 비상구 같은 건 당시 현실에서 <꽉 닫혀 있었다>. 문은 바깥에서 잠겨 있었고 그 바깥에 있는 누군가만 열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군가는 바로 우리가 될 수도 있겠지.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우리의 용기야말로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고 셀비 주니어는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 . 저 소리가 들리는가. 단 한 번의 노크만으로도 브루클린으로 가는 비상구의 잠금장치가 해제될 것이다. 애초 저들을 내몬 건 우리의 무관심 혹은 비겁한 외면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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