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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휴버트 셀비 주니어 지음, 황소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안 보고도 본 것 같은가 하면 보고도 안 본 것 같은 그런 영화들이 있다. 울리 에델 감독의 1989년 작품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Last Exit Brooklyn>가 내게는 그런 영화 가운데 하나였다. 스무 살 끄트머리였나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은 하늘이 어깨를 짓눌러 오던 침울한 오후였던 것 같다. 책과 비디오를 대여해주는 가게에서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발견했고 나는 얼마간 그 자리에 서서 비디오테이프 케이스를 훑어보았던 것 같다. 이상하게도 이미 본 영화인 것 같다는 기시감 같은 것이 들었는데 동시에 나는 그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이 그랬다. 나는 그 영화를 본 적 없었고 다만 그 제목과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같은 것들이 희미하게 머릿속을 요동쳤던 것 뿐이었다. 나는 몇 개의 오래된 영화와 함께 그 영화를 집어들었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집에 와서 서너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았다. <체리 향기>나 <델리카트슨 사람들> 같은 오래된 영화들이었고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는 끝까지 다 보았는지 보다가 말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숨처럼 터져나오는 질문을 캄캄한 벽에 대고 중얼거렸던 것만 기억난다.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살까.
입에서 비명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자기 목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입에서는 작게 그르륵 하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하나님, 하나님, 조까세요. (276쪽)
아마도 그들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 말이다, 내 목소리를 들었더라면 필시 이런 응답이 돌아왔으리라. 조까세요. 그들은 이미 나의 무력하고 무지하고 비겁하기까지 한 속내를 간파한 것이다. 내가 그들을 알아봐 주기도 전에 나는 그들에게 나 자신의 어둔 그늘을 들켜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확실히 이 작품에는 마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상한 힘이 있다.
공을 맞은 아이의 친구들 중 하나가 도망가는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더러운 개자식들이라고 부르자 도망가던 아이들이 돌아와 그 아이에게 넌 똥보다 더 더러워, 하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너희들 집엔 더러운 빈대가 바글바글하잖아, 하고 말했다. 다른 꼬마는 너희 엄마는 스픽이랑 그 짓 한다며, 하고 말했다. 큰 패거리 아이가 손톱 다듬는 줄을 꺼내 다른 꼬마의 뺨을 베고 도망갔고, 패거리 아이들도 함게 도망쳤다. 놀이터 한쪽 구석에는 또 다른 아이들이 작게 무리 지어 자기들끼리 조용히 뭉쳐 있었다. 싸움이 나든 말든 비명 소리가 들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어깨동무를 한 채 웃으며 마리화나를 피웠다. (323쪽)
지금 소개하는 책은 영화의 바탕이 된 원작 소설이다. 원작자인 휴버트 셀비 주니어(Hubert Selby Jr. 1928~2004)는 브루클린에서 성장한 유년의 경험을 되살려 이 소설을 썼다. 소설을 출간한 1961년 당시 미국 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고 책에 대한 판매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그로부터 삼십 년 남짓 시간이 흘러 독일 감독 울리 에델이 만든 영화가 (미국의) 충격과 공포와 수치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를 끌어내 부활시켰다. 영화 정보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는 90년이 되어서야 개봉했다. 무자비한 폭력과 섹스, 윤간, 동성애와 마약으로 얼룩진 1950년대 미국 하층민의 암울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영화는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불편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소설은 영화의 곱절 정도 불편하다. 비속어와 은어가 난무하는가 하면 참혹한 윤간 장면이나 폭행 장면 등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의식을 잃고 공터의 좌석에서 뻗어버린 그녀를 계속 따먹었다. 얼마 못 가 그들은 시체처럼 널브러진 그녀에게 싫증이 났다. 구멍동서들의 줄도 깨졌다. 그들은 윌리스로, 그릭스로, 군부대로 돌아갔다. 구경하면서 순서를 기다리던 동네 꼬마들은 트랄랄라에 대한 실망을 분출하며 그녀의 옷을 박박 찢어 그녀의 젖꼭지에 담뱃불을 대고 몇 번 비벼 근 다음 막대기가 꽂혀 꿈틀대는 그녀의 음부에 오줌을 갈기고 나서 그것마저도 싫증이 나자 널브러진 그녀를 버려두고 떠났다. (139쪽)
연작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집에는 셀비 주니어의 첫 단편 <여왕은 죽었다>와 영화에서 스티븐 랭이 열연한 해리 블랙의 파업 이야기를 담은 <파업>, 발표 당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작품 <트랄랄라> 등 여섯 편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여기 실린 여섯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울리 에델의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릭스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프레디 일행, 파업 시위 현장과 동성애자 모임을 오가며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 나가는 해리 블랙, 게이 세계에서 여왕이라고 불리는 조제트, 조제트가 사랑하는 비니, 비니와 결혼한 메리, 메리와 비니의 아들 조이, 퇴물 신세가 된 매춘부 트랄랄라. 집 없고 돈 없고 직업도 없는 이들이 뒤엉켜 울고 웃고 사랑하고 배신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절로 힘이 빠진다. 몹시 피곤해진다.
쾅. 문은 닫히고, 닫히고, 닫히고, 꽉 닫혔다. 수천 번 당한 비참한 꼴. 쾅, 쾅. 쾅. 항상 쾅 닫혔다. 노크 소리는 없다. 상상해. 억지로라도. 똑똑. 제발, 제발. 아, 하나님, 노크하게 해주세요. 노크하게 해주세요. 아무나 노크하게 해주세요. 들어오게 해주세요. 왜 노크하지 않는 거죠? (...) 뭐라도. 아무라도. 닫혔어. 닫혔어. 쾅. 쾅. 쾅! 닫혔어! 아, 하나님, 닫혔어! (43쪽)
1950년대 미국 사회를 조명한 영화는 의외로 많다. 최근에 내가 본 영화만 해도 대여섯 편은 되는 것 같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면 <옥토버 스카이> <캐롤> <트롬보> <레볼러셔너리 로드> 같은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에서 보여주는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막강하고 부유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은 우주로까지 확대된다. 반공산주의 물결 속에서 집단주의가 강화되었고 결과적으로 획일화된 집단에 속하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은 세상 바깥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는 바로 그 추방 당한 인물들의 암울한 삶을 무섭도록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풍요하고 희망에 찬 미국이 애써 감추고 외면하고자 했던 또 다른 미국의 현실이 이 작품을 통해 까발려진다. 소설을 읽은 직후에 영화를 다시 보았다. 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영화 같이 느껴졌다. 영화를 볼 당시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보이기 시작했다. 뭣 모르고 볼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답답하고 불편해졌다. 저들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물의 과거나 내면묘사가 없어도 절절히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은 왜, 같은 질문 대신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란 대체 무얼까. 당시 영화를 볼 때에도 나는 제목에 대해 생각해 봤던 것 같다. 도무지 그 의미를 풀 수 없었다. 내용만 보자면, 인물들이 처한 현실만 두고 보면 <브루클린에서 나가는 마지막 비상구>가 적절해 보였다. 한데, 브루클린에서 나가는 비상구 같은 건 당시 현실에서 <꽉 닫혀 있었다>. 문은 바깥에서 잠겨 있었고 그 바깥에 있는 누군가만 열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군가는 바로 우리가 될 수도 있겠지.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우리의 용기야말로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고 셀비 주니어는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쾅. 쾅. 저 소리가 들리는가. 단 한 번의 노크만으로도 브루클린으로 가는 비상구의 잠금장치가 해제될 것이다. 애초 저들을 내몬 건 우리의 무관심 혹은 비겁한 외면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