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랩
멜라니 라베 지음, 서지희 옮김 / 북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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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라니 라베의 소설 <<트랩>>(THE TRAP)은 함정의 함정에 의한 함정을 위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이야기의 외피라고 할 수 있을 소설적 형식으로서의 함정과 그 안에 소설적 은유로서의 함정이 각각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다하면서 하나의 정교한 함정을 완성해 나간다.

 


     함정 1.  감 금 된   맹  수

 

    명예와 부미모까지 겸비한 소설가 린다 콘라츠는 십일 년째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린다에게는 깊은 트라우마가 있다십이 년 전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사건 현장을 최초로 발견한 린다는 현장에서 달아나는 범인의 얼굴을 목격했지만 끝내 범인의 정체를 밝히지 못한 채 사건은 미제로 남는다그로부터 십이 년이 흐르고 세상은 당시의 충격적인 사건을 잊었지만 린다에게 그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형형의 악몽이다범인과 조우했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분노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함께 린다를 괴롭히는 것은 경찰과 세상 사람들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린다를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여긴다는 사실이다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안고<감금된 맹수>와도 같이 제한적이고 위태하고 무력한 삶을 이어가던 린다는 어느 날 무심히 보던 티븨 화면에서 십이 년 전 동생을 살해한 범인을 발견한다.

 

    함정 2.  피 를   나 눈   자 매

 

    수년 간의 외로움과 슬픔에 사로잡힌 린다의 유일한 숨통이 되어준 것이 <글쓰기>였다어릴 적부터 상상의 위력을 확인해 온 린다에게 소설 작업은 숨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임의적이고 변화무쌍한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면서 현실과는 아주 동떨어진 <변화된 현실>로써 위로를 얻던 린다에게 소설은 이제 전혀 다른 가능성으로 다가온다여전히 생생한 악몽 속 <괴물>, 십이 년 전의 그 살인범(빅토르 렌첸)이 유명 기자라는 것을 확인한 린다는 소설가다운 함정을 마련한다십이 년 전의 사건을 그대로 재구성한 소설<피를 나눈 자매>를 발표한 린다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인터뷰어로 빅토르 렌첸을 지목하고 그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치밀한 준비를 한다.


    함정 3.  살 인 자 와 의   인 터 뷰

 

    소설의 절정 부분에 해당하는 인터뷰 장면은 숨죽이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그만큼 압도적이다기원을 알 수 없는 불길한 얼룩이 아주 천천히 순백의 테이블보를 점령해 나가는 모양을 지켜볼 때 느낌직한 차분하고 무력한 혼돈은밀하게 서서히 번지는 얼룩처럼 침착하고 용의주도한 모습을 유지하던 린다는 인터뷰 중반부터 심상치 않은 감정적 동요를 보인다오래 <감금된 맹수>가 뛰쳐나온 듯이 격정적으로 치닫는 린다의 심리 변화는 방심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기 충분하다예상 가능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던 이야기의 방향이 홱 틀어졌을 때의 당혹감과 허탈한 안도감(역시 그런 거였어)은 그러나 순간이다린다와 빅토르 렌첸의 팽팽한 대결 구도는 제멋대로 방향을 바꾸는 돌풍처럼 독자를 이리저리 요동치게 한다빅토르 렌첸은 누구인가린다의 생생한 기억이 가리키는 대로 잔혹한 살인마일까.아니면 동생을 살해한 린다의 거짓 기억이 만들어 낸 무고한 희생양일까.

 

    0.   트  랩

 

    치밀하고 영리한 소설이다매끄럽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 이야기밀도 높은 심리 묘사소설 곳곳에 깔린 반전의 복선들이 탄탄한 함정의 임무를 잘 해내고 있다끔찍한 범죄 사건으로 동생을 잃은 린다와 린다가 살인범으로 지목한 빅토르 렌첸의 긴박감 넘치는 심리전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스릴러의 탈을 쓴 사랑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살인사건을 맡은 형사와 린다의 미묘한 연애감정선은 긴 시간 트라우마라는 함정에 갇혀 있던 린다를 <진짜 세상>으로 이끌어주는 문턱 역할을 한다.


   영화화가 결정된 이 소설은 영화 <<캐롤>>의  시나리오 작가 <필라스 나기>가 각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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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멀리 뛰기 - 이병률 대화집
이병률.윤동희 지음 / 북노마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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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노마드 대표 윤동희 씨가 출판계 선배이자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한 이병률 시인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여러 계절을 거치면서 나눈 마음들이 고스란히 담겼다바뀐 계절 얘기평소 주량이나 술버릇좋아하는 시간대나 애용하는 화장품 같은 일상적이고 사적인 주제부터 시와 문학을 포함한 예술관, SNS 문화나 세월호 사건 같은 묵직한 주제에 대해서도 이병률만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이 세상에 음악이 필요해요이 세상에 예술이 필요해요정신없이 사느라 내가 사람인지를 모르고 사는 일련의 문제들과 충돌을 겪어요하루 세끼 온전하게 밥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하고 살더라도 그 사이그 간극에는 시가 놓여야 하고음악이 흘러야 하고그림이 걸려 있어야 하거든요. ‘와락’ 하는 것들이요그것들 없이도 살 수 있을까하고 한 번쯤 의문을 던질 수 있지만실제로 그것이 없다면 몸이 불편하고 삶이 두려워질 거라고 믿는 사람이에요시가음악이미술이 우리를 동정하고 있다고도 보고요우리의 약한 부분을 메꿔준다고도 믿어요. (108)

 

    시처럼 음악처럼 바람처럼 섬세하면서도 자유로운 리듬이 느껴지는 이병률의 어법에는 사람을 옭매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끌어당기는 부드러운 힘이 있다그 리듬을 만들어내고 또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질문자의 몫이기도 할 것이다질문자와 대답자 사이에서 관심의 무게와 신뢰의 공기가 어우러져 <적정한 온도에 도달>했다는 느낌이랄까이병률만의 표정, 음색호흡침묵의 결까지도 오롯이 전해져서 바로 옆에서 대화를 훔쳐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밀착감,이라기보다는 적정한 온도와 좋은 공기 속에 합류했다는 느낌이라고 하면 될까대화를 따라가는 동안 그 느낌이 아련한 위로를 준다.

 

    내가 어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면...... 나를 좀더 의심하려고요하고 싶은 게 분명 있는데 도무지 하지 않는 나를요하물며 공원 같은 곳에서도 벌렁 눕고 싶은데 사람들이 볼까봐 눕지 못하는 나를친구들하고 소풍 가자고 하고 잔뜩 음식 만들고 싶은데 가자고도 하질 않고음식 만드는 일은 오버하는 것 같아 하지 않는 나를 의심하려고요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한 일인지를 반성해야죠그리고 죽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사랑했으면 해요아직은 무엇인지누군지도 모를그 모두이며 수많은 것들을요. (169)

 

    이병률은 여행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항상 떠나기 위해 준비가 된 사람 말이다새롭고 낯선 미지의 것들이 두려워 한자리만 맴도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병률은 좋은 자극이 되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준다반드시 장소의 이동만이 여행은 아닐 것이다삶의 결정적인 변화마음을 뒤흔드는 일들한 마음이 다른 마음에게로 건너가는 일도 멋진 여행이겠지.

 

    나는 불완전체이니까 다른 사람을 만나 완성 가까이로 가려는 노력을 해요나는 빈 상태이고 불완전한 상태라는 걸 인정하지요계속 부딪히고 계속 가야죠새가 멀리 날 수 있는 건 가방이 없어서이기도 하잖아요. (68)

 

    책을 덮고긴 여행에서 돌아왔다는 기분이다한 사람 안으로 힘껏 멀리 뛰기 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나는 울컥 사람이 그립고 삶이 그리워졌다. 어떤 것에 대한 <안 좋은 기억> 때문에결국 <‘라는 장애때문에 <가 닿을 수 없는 것들>, 자꾸만 놓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도 계속 부딪히고 계속 가야겠다고나는 가방이 없으니까 멀리 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격려하면서 천천히, 멀리 돌아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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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자들 - 뇌의 사소한 결함이 몰고 온 기묘하고도 놀라운 이야기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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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 손상 환자들을 진료하고 연구하면서 뇌과학 발달에 기여한 신경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구성이 먼저 눈에 띈다정교한 뇌 해부도와 본문을 부연하는 사진 자료들과 노트이야기체 서술 방식이 책의 내용을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각 장의 첫머리마다 그림과 문자를 조합한 수수께끼를 푸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기이하고 예측 불가능한 증상을 보이는 뇌 손상 환자들의 갖가지 사례와 뇌과학적 통찰을 얻기까지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뇌과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뇌의 구조와 각 부위의 명칭뇌의 작동 기제 같은 뇌과학적 지식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가끔 무엇’ 갈래의 손상이 선택적으로 일어나 모든 사물이 아니라 특정 범주의 사물들만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이런 범주 인식 장애자 중 많은 사람들은 입술 포진을 일으키는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감염된 뒤에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헤르페스herpes는 살금살금 기어가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는데그 바이러스는 대개 별 해를 끼치지 않지만 때로는 악당으로 변해 후각 신경을 따라 올라가 뇌로 침투해 관자엽을 공격한다이렇게 되면신경세포들은 공포에 질려 신호를 발사하기 시작한다. (153)


   과거와 현재 사이의 연속성 감각을 잃고 단 몇 분의 기억력만 남은 사람세상의 절반만 인식하는 사람거울 속의 자신을 적으로 인식하고 공격하는 사람자기가 이미 죽었다고 확신하는 사람 등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뇌에 결함이 생긴 사람들의 기묘하고 놀라운 이야기는 물질적인 뇌가 어떻게 비물질적인 정신 현상(마음)을 일으키는가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포레족이 갈수록 까칠한 반응을 보임에 따라 현장에서 연구하는 의사들은 포레족에게 귀한 물건을 주고 조직과 맞바꾸었다이 때문에 볼썽사나운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의사들은 쿠루병 말기 환자가 사는 마을 외곽에 머물며 야영을 했다막대를 몇 개 세우고 그 위에 방수포를 둘러쳐 임시변통으로 부검을 위한 장소를 만들었다그리고 첫 번째 곡소리가 울리면희생자 가족이 사는 오두막집으로 들어가 협상을 시도했다. (...)한 남자는 백인들이 자신의 고기’(아내의 뇌)를 가져가겠다면그 대가로 다른 고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224)


    미지의 영역에 묻혀 있던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를 밝혀낸 신경학자들의 노고와 열의그리고 인간 뇌(정신)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시선도 읽을 수 있다묘지에서 훔친 시체의 머리를 해부한 베살리우스이례적으로 가족의 머리를 열고 직접 뇌를 절개한 펜필드 외에도 뇌과학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하는 용감하고 기상천외한 신경학자들의 활약상이 극적으로 펼쳐진다.


    가장 심한 기억상실증 환자도 자신을 잊어버리지는 않는다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예를 들면대부분의 기억상실증 환자는 자신의 성격을 묘사할 수 있다그들은 그런 성격 특성을 내비친 적이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자신이 관대한지 성급한지 혹은 그밖의 성격이 어떤지 안다또한다른 기억에 의지해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449)


    유려한 문장과 극적인 구성으로 뇌과학의 역사를 풀어내는 이 책은 인간 마음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담고 있는 한편 뇌의 사소한 결함으로도 허물어질 수 있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일깨우기도 한다책의 서두에서 샘 킨은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이 밝히고 있다머릿속에서 맴돌던 질문 <뇌가 끝나고 마음이 시작되는 곳은 어디인가에 답하기 위해서였다고. 뇌과학 역사의 시초가 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펼친 이유도 다르지 않다뇌가 끝나도 마음은 지속될까내가 나라는 의식나를 나이게 만드는 자아의 핵심이란 게 있을까있다면 어디 있을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는 이런 질문들은 무얼 말해 주나. 몸과 마음물질과 비물질성 사이에서 인간은 한결같이 <>를 주시하고 있(었던)는 것이다. 이 책의 재료를 제공했고 이 책을 쓰게 했고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게 했으며 이 책이 결국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단순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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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 - 프로이트도 놓친 꿈에 관한 15가지 진실
슈테판 클라인 지음, 전대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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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든 이의 얼굴에 붉은색 낙서를 하면 꿈꾸러 나간 넋이 집을 못 찾고 영영 떠돌게 된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에 들었다. 무시무시하면서도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주위 아이들이 붉은색 공포증에 걸린 것처럼 붉은색을 기피하면서 호들갑을 떨 때, 나는 밤마다 꿈꾸러 나간다는, 넋이라고도 영혼이라고도 정신이라고도 불리는 나의 분신에 대해 생각했다. 막연하고 질서 없는 공상 속에서 유리처럼 투명한 육체를 입은 또 하나의 나는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해 꿈길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높은 데서 떨어져도 죽지 않았고 깨어 있을 때는 볼 수 없던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눌 수도 물고기로 변신하거나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는 그곳은 놀랍고 멋진 세계였다. 기분 좋은 꿈을 꿀 적이면 꿈속에서 영영 못 돌아와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것도 아주 가끔이고, 대개가 무섭거나 슬프지 않으면 부끄럽고 허황된 내용이었다. 나쁜 꿈을 자주 꾸었고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캄캄한 천장을 쳐다보던 날이 많았다. 다시 돌아왔네. 안도감 비슷한 것을 느끼면서 꿈속의 이야기들을 오래 곱씹었다. 이제와 돌아보면 나 자신과 좀 더 가까워지고 솔직해지는 순간이었다. 


     꿈속에서 우리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다. 로마의 신 야누스가 두 개의 얼굴을 가졌듯이, 우리는 수면 중에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미래를 내다본다. 기억의 이미지로 이루어진 배경 속에서 미래의 과제를 숙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이다. (227쪽) 



    뇌파 분석을 통해 꿈의 내용을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뉴스 기사를 본 적 있다. 해몽의 시대가 가고 해독의 시대가 온 것이다. 얼굴에 붉은색 낙서를 하면 영혼이 길을 잃는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믿는 아이들이 요즘 시대에도 있을까. 꿈꾸는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현대인의 삶에서 1<꿈은 그냥 밤에 켜진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보게 되는 싸구려 영화> 같은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하지만 텔레비전은 누구에 의해, 왜 켜지는 것일까. 싸구려 영화 같은 꿈속 이야기들은 과연 무의미한 우연에 불과한 걸까. 이런 문제에 대해 궁금증을 품어본 사람이라면 지금 소개하는 책에서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꿈은 깨어 있는 삶의 왜곡된 반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꿈은 뇌가 감각의 연속적인 점화에서 벗어나자마자 어떤 표상을 산출하는지 보여준다. 꿈은 가능성을 가지고 하는 놀이다. 꿈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구성한 현실 속을 돌아다닌다. 깨어난 뒤에 외부 세계에서 그 현실을 추구한다. 우리가 오래전에 꿈속에서 본 듯한 장소에 가고 또 그런 장면이 자꾸 반복되는 것은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97)

 

     꿈이라는 주제에 다각적이고 세부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이 책은 우선 능란하고 명쾌한 화법이 돋보인다. 철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이 책에서 정신분석학, 뇌과학, 심리학은 물론 철학, 예술, 신화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면서 꿈에 관한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일목요연하게 들려준다. 흔히 가위눌림이라 부르는 수면마비를 경험한 개인적 체험부터 헬렌 켈러, 카프카, 폴 매카트니 등 유명인들의 꿈 체험에 얽힌 기상천외하고 신비한 일화들이 자칫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연구 보고들을 부연하고 있어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카프카가 보기에 꿈 세계와 깨어 있는 세계 사이에는 확고한 경계가 전혀 없었다. 두 세계 각각이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적이고, 우리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갈 수 있었다. 한번은 친구 막스 브로트의 집을 방문한 카프카가 거실에서 졸고 있는 막스의 아버지를 건드렸다. 카프카는 소파 앞으로 살며시 지나가면서 반쯤 깨어난 친구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저를 하나의 꿈으로 간주해주십시오.” (301)

 

    오랜 세월 베일에 싸여 있던 꿈의 실체를 낱낱이 밝히고 있는 이 책에 의하면 꿈은 <그냥 밤에 켜진 텔레비전> 이상의 목적과 의미가 있는 중요한 정신 작용이다. 꿈을 통해 우리는 기억과 감정을 복기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즉 뇌는 꿈이라는 현상을 통해 과거의 흔적을 정리하고 미래를 연습하면서 앎을 획득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우리의 뇌는 포화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책에 의하면 꿈은 예술적 창의력의 보고이기도 하다. 비틀스의 <예스터데이>가 폴 매카트니의 꿈속에서 흘러나온 멜로디라는 일화는 유명하다. 자신의 글쓰기를 두고 <나의 꿈 같은 내면적 삶의 표현>이라고 밝힌 카프카의 작품들 역시 꿈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읽기 어렵다.이들 외에도 책에는 꿈을 통해 창의력을 발휘한 사람들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악몽을 꾸는 환자는 우선 꿈속에서 체험하는 바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해 공포의 이미지들과 대면해야 한다. 그 목적은 악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견딜 만한 이미지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환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공포 영화에 새로운 긍정적 변화를 가미해야 한다. 환자의 꿈속 자아는 공포에 휩싸여 얼어붙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공황에 빠져 달아나는 대신에 추격자를 향해 몸을 돌려 대화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에 환자는 낮에 이런 장면을 반복해서 상상한다. 이 치료법을 상상 예행연습 치료Imagery Rehearsal Therapy'라고 한다. (255)

 

    학문적 성과나 일화들을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꿈을 활용할 수 있는 솔깃한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꿈으로부터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얻는 효과적인 방법, 반복되는 악몽에서 벗어나는 법, 자각몽을 마음대로 연출하는 방법들을 놀랍도록 명쾌하게 집어 주고 있다. 오랜 통설을 깨는 이 책에 의하면 꿈은 더 이상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혹은 무의미하고 터무니없는 현상이 아니다. 꿈꾸는 동안 우리의 뇌는 낮에 배운 것을 복습하고 감정을 처리하면서 성격이 발달하고, 뇌가 변화하면서 능력이 확장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꿈은 얼마나 미래지향적인가. 꿈은 내가 잠든 사이 저편 세계로 건너간 나 자신으로부터 송신된 암호문 같은 것이다. <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매혹적인 방식으로 일러주는 꿈을 무시하고 외면한다면 그야말로 우리 영혼은 집을 못 찾고 영영 떠돌게 되지 않을까.

 

 

 

 

 


 



  1. 꿈은 그냥 밤에 켜진 텔레비전 같은 거지. 우연히 보게 되는 싸구려 영화들을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잖아. 
    이상우 『프리즘』(문학동네)
    ㅡ 「비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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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두 얼굴 - 어떤 무의식을 선택할 것인가
김태형 지음 / 유노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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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심층심리학이 대중에게 주목 받기 시작한 게 십여 년 안팎일 것이다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으니 십 년이면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닐 것이다티븨에서는 최면에 걸린 연예인이 홀린 듯이 자기의 전생을 들려주는가 하면 프로파일러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잔혹한 범죄자들의 심리를 분석해 범죄 발생의 근본 원인을 밝히면서 범죄를 재해석하고 있다. 거미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주인공 한기로가 무의식을 탐사하는 과정을 만화화한 <기로> 같은 웹툰도 인기를 얻고 있다. 각종 매체에서 <트라우마> <콤플렉스> <리비도> <무의식> <억압> <동기> <방어기제같은 심리학 용어들과 심리 치료 기법을 소개했고 많은 사람들이 오묘하고도 무한한 정신분석의 세계에 압도되었다독서치료음악치료미술치료연극치료 등 정신분석을 활용해 인간 무의식에 접근하고 심리적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무의식을 활용한 글쓰기 기법인 프리라이팅도 주목 받고 있다미지의 영역이었던 <무의식>을 환한 곳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달리 말해 무의식을 의식화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는 점에서 심층심리학의 대중화 현상은 고무적이고 혁신적이지만 동시에 <무의식>에 대한 그릇된 해석을 낳기도 했다.

 

    심리적 상처는 고통을 유발하게 마련이고사람은 그 고통에 관심을 집중하게 마련이다통속적으로 말해 마음의 상처는 손톱 밑의 가시나 눈 안의 티끌처럼 지속적으로 신경 쓰게 만든다는 것이다따라서 무의식적인 마음의 상처가 사람들을 병적인 욕망에 집착하게 만들거나특정한 감정을 방어하는 데 집착하게 만들 경우에는 인생 전체가 요동칠 수 있다당연히 이것은 정상적이라기보다 건강하지 못한 경우인데이런 특수한 경우에 무의식이 사람의 삶을 지배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사람은 어디까지나 의식을 통해서 자신을 지휘하고 통제하며 살아가는 의식적인 존재다. (167)

 

    인간 무의식에 대한 오해와 논란은 여태 있어왔는데 그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마음속 악마 이론일 것이다인간 마음 깊은 곳즉 무의식은 악마의 지배 영역이라는 주장이다무의식은 저 깊은 내면세계에 감춰져 있어서 개인(의식)이 통제할 수 없다는 오랜 통념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다마음속에는 정말 악마가 살고 있을까깊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악마적인 세력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는 걸까심리학자 김태형은 지금 소개하는 책에서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무의식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아 올바른 이해를 돕고자 한다.

 


   후기의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관한 초기의 올바른 견해에서 이탈하여 억압당하는 기억이나 생각을 무의식으로 간주했고그 핵심은 동물적인 본능이기 때문에 당연히 억압당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 동물적 본능은 억압되어야 하므로 무의식이 될 수밖에 없는데이 동물적 본능은 반사회적이다.즉 무의식에는 악마가 사는데그 악마가 동물적 본능이라는 것이다프로이트주의의 무의식에 대한 견해는 옳지 않은데그것은 무엇보다 성욕설 자체가 잘못이기 때문이다. (35)

 

   무의식은 악마의 영역이며 의식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통설을 명쾌하게 깨고 들어가면서 저자는 프로이트와 융의 무의식 이론에서 허점과 모순을 지적하고 무의식에 대한 개념부터 바로세운다저자에 따르면 무의식은 <의식되지 않은 의식>이다무의식은 과거의 의식,즉 개인의 심리적 역사이며 특정 자극에 의해 의식으로 떠오를 수 있는 잠재된 의식이라는 것이다. 앞서 확인했듯이 무의식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활용한 다양한 본보기들을 주변에서 보고 들으면서도두렵고 이상하고 나쁜 것들이 우글거리는 지하감옥과도 같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반 대중에게 저자의 주장이 처음에는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일시적 혼란감은 잠시책을 읽어나가면서 무의식의 정체와 영향력을 바로 보게 될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백인에 의해서 인종차별과 학대를 당해 왔기 때문에 당연히 흑인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저항해야 한다하지만 장기간 계속된 차별화와 피학대 경험은 흑인에게 흑인을 사랑하지도긍정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그 결과 흑인은 피학대자임에도 학대자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자신을 폄하하고 혐오하는 전형적인 피학대 심리를 갖게 된 것이다고정관념처럼 특정한 개념이나 사고방식 등이 굳어지면의식적인 회피 노력에도 무의식적 사고를 통해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22)

 

   이백 쪽이 조금 넘는 이 단출한 책은 무의식의 개념부터 작동 기제무의식을 내 편으로 만드는 무의식 활용법까지 싣고 있다두께는 얇지만 그 내용이 알차고 실하다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사례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통해 무의식의 핵심을 알기 쉽게 풀어준다개인의 심리적 역사에 해당하는 무의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만든 것이며 따라서 무의식의 내용을 통제하고 지휘할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이라는 것무의식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려면 무의식의 본질부터 정확히 파악하자는 것이 책의 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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