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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
오다 마사쿠니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서책이란
본래 모두 기도일 것이다
조금 전 꾼 꿈에서
수많은 서책이 하늘을 날았는데
그 모두가 기도였던 것이다.
(본문에서)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소설은 '가장 재밌는 국내 소설'로 꼽힐 정도로 일본에서 화제가 된 작품이다. 화자인 도이 히로시(또는 히로봉)이 다이쇼 시대 활약했던 외조부 '후카이 요지로'의 비밀스러운 삶을 수기 형식으로 풀어내는 이 소설은 영화 《빅피쉬》를 연상케 한다. 과거와 현재를 매끄럽게 넘나드는 구성, 이야기 전반을 아우르는 환상성이 소박한 주제의식을 매혹적으로 떠받치고 있다.
어느 날, 요지로는 관 속에 누워 흰 국화에 숨 막히게 파묻혀, 목욕할 때도 벗지 않던 안경을 벗고, 길고 긴 뻥튀기 이야기를 마침내 끝냈다는 양 힘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런 변명도 없이 똑 자른 것처럼 죽었다. 나는 슬프다기보다 맥이 빠졌다. 돌연히, 까닭도 모른 채로 끝난 연재만화처럼, 그 다음이 더 있을 텐데 하는 기분이었다. 그 뒤 얼마 동안 요지로가 없는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불현듯, 대지에서 조그만 싹이 삐죽 나오듯 그 다음을 느꼈다. 흡사 거울 두 개를 이용해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지는 자신의 옆얼굴을 본 듯한, 아니, 죽음의 옆얼굴을 본 듯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 다음이란 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연달아 태어나서 죽고, 또 태어나서 죽고, 앞으로도 그게 내내 이어지는 것, 인간이란 그런 것이구나 싶었다. 자각이 있건 없건 누구나 누군가의 그다음을 산다. 물론 내 그다음 또한 누군가가 살 것이다. (...)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배 속 깊은 곳에서 네 이름을 천천히 기르기 시작했지 싶다. (본문 중에서)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 후카이 요지로는 '에드워드 블룸'에 버금가는 허풍선이다. 그의 허풍의 골자는 '하늘을 나는 서책'이다. 일명 '환서(幻書)'라고 불리는 이 환상적인 서책은 암수 책의 교미를 통해 탄생한다. 우연히 환서의 존재를 알게 된 외손자 히로시는 환서, 즉 '하늘을 나는 서책'에 얽힌 진실을 은밀히 풀어나간다. 날개 달린 서책의 존재는 어린 히로시를 이끌어 만화경 같은 세계의 면면을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삶과 죽음, 인간의 복잡한 속성, 그리고 사랑을 배우면서 히로시는 자신의 "그다음"(미래)에 도달한다(라는 게 이 소설에서는 적합한 표현이다). 히로시의 "그 다음"은 '게이타로'라는 미래의 아들로 형상화된다. 히로시가 아들 '게이타로'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화자인 히로시 관점에서만 보면 정통적인 성장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자신은 가만있는데 세계가 흔들린다는 것처럼 총신이 세차게 비틀거렸지만, 이케부치의 입은 분명히 "이 배신자."라고 말했다. (...) 이케부치는 악마처럼 말을 이었다. 난 벌써 먹히기 시작했다고. 발부터 먹히고 있어. 이 적도인들 놈한테 잡아먹힌 인간은 잊혀. 세계로부터 잊혀. 아예 태어나지도 않은 것처럼 잊혀. 선생도 그럴 테지. 이놈들한테 잡아먹힌 날 잊어버릴 테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나랑 한 걸음도 같이 안 걸었던 것처럼 잊어버릴 테지. 하지만 그게 인간이잖아? 그렇게 까맣게 잊어버리는 게 인간이잖아? 안 그래? (본문 중에서)
인생을 한 권의 책에 빗대고 있는 이 소설에는 다양한 삶의 표정과 목소리가 담겨 있다. 몇 세대에 걸친 후카이 일족과 후카이가의 은인 구로카와 히로에몬, 히로에몬의 증손자 쓰루야마 샷쿠리( 또는 가메야마 긴고)에 얽힌 비화가 환상적으로 전개된다.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요지로와 같이 이야기의 전면(前面)에 드러나는 인물이 몇 있다. 요지로의 동기생이자 평생의 숙적 쓰루야마 샷쿠리와 요지로의 동생이자 히로시의 작은할아버지인 후카이 히데노리, 요지로의 아내 후카이 미키가 그들이다. 이들 중에서도 히데노리의 짧은 일생(이야기에도 잠깐 등장한다)은 '하늘을 나는 서책'의 상징성을 효과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쇼와 20년(1945) 3월 하순, 폭탄을 장착한 제로센 전투기에 탑승한 히데노리는 황혼 녘, 다이토 제도(諸島) 앞바다에서 적함의 대공 포화와 적기에 전우들이 잇따라 날벌레처럼 추격되는 것을 외면하고,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더 높이 올라가겠다는 양 이카로스처럼 부쩍부쩍 고도를 높이더니 푸름과 아름다움이 한층 짙어져가는 은하로 돌아가듯 행방불명되었다. 요지로에 따르면, 히데노리는 청년의 매끈한 이마를 방풍창에 갖다 대고 인간이 사랑스럽다, 우주도 사랑스럽다, 하고 중얼거리며 인류의 발자취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고 죽으려고 여전히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한다. (본문 중에서)
천문학도 지망생 히데노리는 삶의 유한성에 갇힌 인간 정신의 무한 가능성을 통찰한 인물로 그려진다. 폭탄을 장착한 전투기를 타고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그의 죽음, 아니, 실종은 매우 강렬한 방식으로 소설의 주제의식을 일깨운다. 인간이 죽으면 한 권의 책이 되어 날아간다는 소설적 설정은 그 바탕에 유한한 인생의 허무를 짙게 깔고 있다. 허무한 인생에 자유를 선사하는 것, 그러니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바로 (위대한) 허구, 다시 말해 '우주적 상상력'이다. 히데노리를 하늘 저편으로 이끈 것도 바로 이것이다.
한낱 인간이 머릿속에 그리는 미래 중 어느 것인들 환상이 아닌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현재에 관해서조차 환상 아닌 다른 것을 갖는 게 불가능한데.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미래에 관해 행사할 수 있는 자유는, 고작해야 어떤 환상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기분 좋은 허구에 몸을 의탁할 것인가에 불과할 터다. (본문 중에서)
(우주적 상상력에서 뻗어나온) 기상천외한 이야기의 저류를 흐르고 있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이다. 예상 외로 뜨겁고 진지하다. 재미는 말할 것도 없다. "책의 젖가슴", "에로혁명", "6중날 T자 면도기 같이 날카로운 욕설", "어머니의 악다구니를 분해하는 박테리아", "지렁이가 양달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은 것 같은 글씨","앨커트래즈 감옥에서 콘크리트에 땅굴을 파듯 늘 흠칫흠칫" (...) 같은 기발한 표현들이 이야기에 생기를 부여한다. "돌팔매처럼 세계에 던져져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면서도 자유를 꿈꾸며 미친 듯이 춤출 뿐인" 우리 인간의 허무를 환상적인 방식으로 달래는 위대한 허구, 일본판 《빅피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