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습니다
오다 마사쿠니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서책이란 

본래 모두 기도일 것이다 

        조금 전 꾼 꿈에서 

수많은 서책이 하늘을 날았는데 

        그 모두가 기도였던 것이다.


(본)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소설은 '가장 재밌는 국내 소설'로 꼽힐 정도로 일본에서 화제가 된 작품이다. 화자인 도이 히로시(또는 히로봉) 다이쇼 시대 활약했던 외조부 '후카이 요지로'의 비밀스러운 삶을 수기 형식으로 풀어내는 이 소설은 영화 《빅피쉬》를 연상케 한다. 과거와 현재를 매끄럽게 넘나드는 구성, 이야기 전반을 아우르는 환상성이 소박한 주제의식을 매혹적으로 떠받치고 있다. 


    어느 날, 요지로는 관 속에 누워 흰 국화에 숨 막히게 파묻혀, 목욕할 때도 벗지 않던 안경을 벗고, 길고 긴 뻥튀기 이야기를 마침내 끝냈다는 양 힘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런 변명도 없이 똑 자른 것처럼 죽었다. 나는 슬프다기보다 맥이 빠졌다. 돌연히, 까닭도 모른 채로 끝난 연재만화처럼, 그 다음이 더 있을 텐데 하는 기분이었다. 그 뒤 얼마 동안 요지로가 없는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불현듯, 대지에서 조그만 싹이 삐죽 나오듯 그 다음을 느꼈다. 흡사 거울 두 개를 이용해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지는 자신의 옆얼굴을 본 듯한, 아니, 죽음의 옆얼굴을 본 듯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 다음이란 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연달아 태어나서 죽고, 또 태어나서 죽고, 앞으로도 그게 내내 이어지는 것, 인간이란 그런 것이구나 싶었다. 자각이 있건 없건 누구나 누군가의 그다음을 산다. 물론 내 그다음 또한 누군가가 살 것이다. (...)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배 속 깊은 곳에서 네 이름을 천천히 기르기 시작했지 싶다. (본문 중에서)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 후카이 요지로는 '에드워드 블룸'에 버금가는 허풍선이다. 그의 허풍의 골자는 '하늘을 나는 서책'이다. 일명 '환서(幻書)'라고 불리는 이 환상적인 서책은 암수 책의 교미를 통해 탄생한다. 우연히 환서의 존재를 알게 된 외손자 히로시는 환서, 즉 '하늘을 나는 서책'에 얽힌 진실을 은밀히 풀어나간다. 날개 달린 서책의 존재는 어린 히로시를 이끌어 만화경 같은 세계의 면면을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삶과 죽음, 인간의 복잡한 속성, 그리고 사랑을 배우면서 히로시는 자신의 "그다음"(미래)에 도달한다(라는 게 이 소설에서는 적합한 표현이다). 히로시의 "그 다음"은 '게이타로'라는 미래의 아들로 형상화된다. 히로시가 아들 '게이타로'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화자인 히로시 관점에서만 보면 정통적인 성장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자신은 가만있는데 세계가 흔들린다는 것처럼 총신이 세차게 비틀거렸지만, 이케부치의 입은 분명히 "이 배신자."라고 말했다. (...) 이케부치는 악마처럼 말을 이었다. 난 벌써 먹히기 시작했다고. 발부터 먹히고 있어. 이 적도인들 놈한테 잡아먹힌 인간은 잊혀. 세계로부터 잊혀. 아예 태어나지도 않은 것처럼 잊혀. 선생도 그럴 테지. 이놈들한테 잡아먹힌 날 잊어버릴 테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나랑 한 걸음도 같이 안 걸었던 것처럼 잊어버릴 테지. 하지만 그게 인간이잖아? 그렇게 까맣게 잊어버리는 게 인간이잖아? 안 그래? (본문 중에서) 



   인생을 한 권의 책에 빗대고 있는 이 소설에는 다양한 삶의 표정과 목소리가 담겨 있다. 몇 세대에 걸친 후카이 일족과 후카이가의 은인 구로카와 히로에몬, 히로에몬의 증손자 쓰루야마 샷쿠리( 또는 가메야마 긴고)에 얽힌 비화가 환상적으로 전개된다.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요지로와 같이 이야기의 전면(前面)에 드러나는 인물이 몇 있다. 요지로의 동기생이자 평생의 숙적 쓰루야마 샷쿠리와 요지로의 동생이자 히로시의 작은할아버지인 후카이 히데노리, 요지로의 아내 후카이 미키가 그들이다. 이들 중에서도 히데노리의 짧은 일생(이야기에도 잠깐 등장한다)은 '하늘을 나는 서책'의 상징성을 효과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쇼와 20년(1945) 3월 하순, 폭탄을 장착한 제로센 전투기에 탑승한 히데노리는 황혼 녘, 다이토 제도(諸島) 앞바다에서 적함의 대공 포화와 적기에 전우들이 잇따라 날벌레처럼 추격되는 것을 외면하고,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더 높이 올라가겠다는 양 이카로스처럼 부쩍부쩍 고도를 높이더니 푸름과 아름다움이 한층 짙어져가는 은하로 돌아가듯 행방불명되었다. 요지로에 따르면, 히데노리는 청년의 매끈한 이마를 방풍창에 갖다 대고 인간이 사랑스럽다, 우주도 사랑스럽다, 하고 중얼거리며 인류의 발자취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고 죽으려고 여전히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한다. (본문 중에서)



   천문학도 지망생 히데노리는 삶의 유한성에 갇힌 인간 정신의 무한 가능성을 통찰한 인물로 그려진다. 폭탄을 장착한 전투기를 타고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그의 죽음, 아니, 실종은 매우 강렬한 방식으로 소설의 주제의식을 일깨운다. 인간이 죽으면 한 권의 책이 되어 날아간다는 소설적 설정은 그 바탕에 유한한 인생의 허무를 짙게 깔고 있다. 허무한 인생에 자유를 선사하는 것, 그러니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바로 (위대한) 허구, 다시 말해 '우주적 상상력'이다. 히데노리를 하늘 저편으로 이끈 것도 바로 이것이다.


    한낱 인간이 머릿속에 그리는 미래 중 어느 것인들 환상이 아닌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현재에 관해서조차 환상 아닌 다른 것을 갖는 게 불가능한데.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미래에 관해 행사할 수 있는 자유는, 고작해야 어떤 환상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기분 좋은 허구에 몸을 의탁할 것인가에 불과할 터다. (본문 중에서)



    (우주적 상상력에서 뻗어나온) 기상천외한 이야기의 저류를 흐르고 있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이다. 예상 외로 뜨겁고 진지하다. 재미는 말할 것도 없다. "책의 젖가슴", "에로혁명", "6중날 T자 면도기 같이 날카로운 욕설", "어머니의 악다구니를 분해하는 박테리아", "지렁이가 양달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은 것 같은 글씨","앨커트래즈 감옥에서 콘크리트에 땅굴을 파듯 늘 흠칫흠칫" (...) 같은 기발한 표현들이 이야기에 생기를 부여한다. "돌팔매처럼 세계에 던져져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면서도 자유를 꿈꾸며 미친 듯이 춤출 뿐인" 우리 인간의 허무를 환상적인 방식으로 달래는 위대한 허구, 일본판 《빅피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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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의 인문학 -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보는 법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지음, 박다솜 옮김 / 시드페이퍼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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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단 하나의 진정한 여행은 

낯선 땅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갖는 것,

다른 사람의 눈으로,

그것도 백 명이나 되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우주를 보는 것,

그들이 저마다 보고 있으며 그들 자신이기도 한

백 가지 우주를 보는 것이리라.


   .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irstopher Chabris는 1999년 매우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세상에 내놓는다일명 '보이지 않는 고릴라'로 칭하는 이 실험에서 피험자들은 두 팀으로 나뉜 학생들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을 주시한다팀별로 흰색 유니폼과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이 서로 농구공을 패스하고 있다피험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흰색 유니폼을 입은 팀의 패스 수를 세는 것이다간단하지만 주의를 요하는 작업이다이 영상 중간에는 특이한 장면이 들어 있다고릴라 복장을 한 연기자가 패스하는 학생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장면이다놀랍게도 영상을 다 본 실험 참가자 중 절반 이상이 고릴라의 등장을 알아채지 못했다이 흥미로운 실험 결과는 선택적 집중 능력이 야기하는 시각적 맹점을 입증한다.

 

   집중력은 우리의 모든 행동에 활용된다아주 복잡한 행동뿐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행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어딘가로 오가는 일예컨대 길을 걸어 출근하거나 가게에 가거나 학교에 가는 일은 놀라울 정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관심을 쏟을 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애초에 집중할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잊히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집중력'은 주의를 기울인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 정보를 차단한다선택적으로 시야를 축소하는 것이다따라서 사람들은 보고 싶거나보게 될 거라 기대하는 것만 보게 된다심리학 용어로는 '부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고 한다'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부주의 맹시는 매우 일상적인 현상이다. 그 특성상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살면서 우리가 간과하고 지나친 '고릴라'들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다른 생각(또는 행동)에 골몰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특정 현상 같은 것들을 알아채지 못하는 일은 다반사 아닌가


    사람은 정상적으로 발달하는 동안 집중할 수 있는 대상 전체에 집중하지 않는 법을 익힌다세상에는 색깔형태소리가 넘쳐나기 때문에 우리 몸의 기능을 제대로 쓰려면 그 일부를 무시해야 한다그렇다고 우리가 무시한 세부 요소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다(본문 중에서)

 

    이 책에서는 일상에서 우리가 무심코 놓치고 있는 '고릴라'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개의 사생활의 저자이기도 한 알렉산드라 호로비츠는 개와 나선 산책길에서 이 책의 착상을 떠올린다(생후 19개월 된 아이곤충박사지질학자,타이포그라퍼음향 엔지니어시각 장애인 등저마다의 관점으로 세계를 지각하는 이들을 동반한 이례적인 산책을 시도해 보자는 것이었다알렉산드라는 '선택적 강화selective enhancement'에 주목했다앞서 언급한 부주의 맹시 또는 주의력 착각직업적 왜곡("모든 상황을 자신의 직업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경향", 쉽게 말해 '직업병'이다같은 "지각에서 어던 분야를 강화시키고 나머지를 억누르는현상이 모두 '선택적 강화에 속한다각자의 관점과 방식을 지닌 산책 동반자들은 보통 사람의 시선을 비껴난 삶의 또 다른 부분을 드러내 보여주는(강화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도시에서 동물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동물을 보지 못한다단지 기대하는 것만으로 무언가를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면세상에 우리를 위한 '단서'가 숨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시야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본문 중에서)

 


   이 책은 또 다른 버전의 '보이지 않는 고릴라실험 같다. 흥미롭고 경이롭다. 우리의 제한된 시야가 밀어낸 세계의 반쪽을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고생대의 돌들과 야생동물들눈앞을 스쳐가는 사람들의 병적 징후다양한 형태의 문자들크고 작은 소리다양한 냄새들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보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한이것들, '보이지 않는 고릴라()'은 실로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다잎사귀에 남은 특정 곤충의 흔적이나 발부리에 채이는 돌멩이의에 담긴 역사, 길바닥에 들러붙은 껌딱지 같은 것들을 유심히 지켜볼 가치가 있나 의문도 들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진짜 '고릴라'를 코앞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서 있던 길모퉁이에서 누군가 가래를 퉤 뱉었다절로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로 불쾌한 소리였다우리는 그에게서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결한 가래 덩이를 피하려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따청각은 그네에 대한 향수 같은 감정적 기억 외에도 시각적이거나 촉각적인 기억들을 떠오르게 한다도시에서 일정하게 '하고 울리는 신호음을 들으면 후미등을 켜고 천천히 후진하는 트럭이 생생히 떠오른다나는 거리를 걷다가 독특하게도 시각이나 촉각 등의 감각과 관련되는 소리들을 발견했다.무거운 짐을 끌고 분투하는 남자를 봤을 때는 허리가 아프겠다는 느낌이 들었고발랄하게 껌을 씹으며 지나가는 여자아이를 보니 내 입과 입술에 터진 풍선껌이 붙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본문 중에서)

 

 

   다른 사람의 눈(관점)으로 보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어쩌면 가장 원초적이고 오래된 이 질문이야말로 인류를 성장시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나와 다른 타인의 편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려는 노력은 생존에도 필수적이었을 것이다.이 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고생대의 돌멩이나 독특한 방식으로 뚫린 잎사귀 같은 것이 아니다알렉산드라와 동행한 각각의 전문가들은 우리에게 '제대로 보는 법'을 일깨운다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순간 수많은 것들을 간과해 버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이 책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각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제대로 본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있다제대로 본다는 것은 무얼까매순간 깨어 있는 것이다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가깨어 있어라그리고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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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근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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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랜서 작가인 
''의 삶은 바닥을 치고 있다번번이 퇴짜 맞은 원고가 쌓여가고 수중에 있는 재산이라고는 4,264원이 전부이다밀린 월세 때문에 세들어 사는 집에서 쫓겨날 판인데 마땅한 일거리도 없다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답답한 현실에 쫓기듯 걸음을 내딛던''는 불광천 다리 밑에서 구인 전단지를 발견한다. "일하실 분 찾습니다일당 오만 원성공 보수도 있음젊고 건강한 사람 우대문의는..."전재산이 오천원도 되지 않는 ''에게 오만원은 거액이었고 '성공 보수'라는 문구 또한 유혹적이다서른셋내세울 거라고는 젊음과 건강한 몸뚱이밖에는 없는 ''는 눈앞에 나타난 황홀한 미끼를 덥석 물 수밖에 없었다.

 

"멀쩡한 어른이 먹고살려고 이런 일을 해요?"

"누나는 멀쩡한 어른이 아니야."

"그럼요?" (...)

"우리는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쫓는 어른들이야."

"정말 멀쩡한 어른이 아니네요." (본문 중에서)

 

    황홀해 보였던 미끼는 황당한 세계의 밑바닥에 ''를 철퍼덕 내던져 놓는다거기낡은 소파 위에 섬처럼 떠 있는 노인이 있었다노인은 오리 한 마리를 찾고 있다한데보통 오리가 아니다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다노인이 삼 년째 애지중지 길러온 가족 같은아니 "유일한 가족"이었던 고양이 호순이를 노인이 보는 앞에서 통째로 꿀꺽해버린 범압(犯鴨)말하자면 범죄오리를 찾는 것이 ''에게 주어진 주요 업무였다딱히 업무 방식이랄 것도 없다사건(!) 현장인 불광천의 오리들을(정확히 말하면 잠재적 용의자 얼굴을사진에 담아오는 일이 업무 내용의 전부다대체 이게 말이 되는가그 오리가 저 오리 같고 저 오리가 그 오리 같은 오리 얼굴을 어떻게 판별하겠나아니그보다 앞서 오리가 고양이를 잡아먹는 일이 현실에서 가능하기는 한가.

 

    왜 하필 오리였을까오리보다는 개가 더 그럴싸하지 않나개가 고양이를 물어 죽이는 일이라면 흔치는 않아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골똘히 생각해본 다음에야 깨달았다얼마든지 있을 법하기 때문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적어도 노인에게는 그랬으리라노인에게 필요한 것은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그러니까 진실이 아니라 왜곡된 진실이었던 것이다다시 말해 진짜가 아닌 가짜. (본문 중에서)

 

    제11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는 제목 그대로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쫓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그래. 여기저기서 헉소리가 들려온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가 현실에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니까. 따라서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찾는다는 노인의 말은 허구가 된다노인의 '범압 소탕작전'에 휘말린 ''와 '여자', '아이역시 허구를 쫓는 셈이 된다실로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에 대한 노인의 서사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것이어서 ''를 비롯한 세 사람은 한순간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가 존재할 가능성을 고려해보기까지 한다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에 사로잡힌 노인과 허구의 주인공을 쫓는 인물들은 허먼 멜빌의 소설《모비딕》을 떠오르게 한다허구라는 망망대해에서 또 하나의 허구를 찾아헤매는 노인과 하수인들의 무모함과 절박감은 흰고래를 쫓는 에이해브 선장과 선원들의 광기를 닮아 있다.

 

    "좀 더 듣게좀 더 차분히 들으라고알겠나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판지로 만든 가면이야그러나 어떤 일이라도...... 의심할 수 없는 이 생의 행동 속에서는 말야그 엉터리 가면 뒤에서 무언가 알 수는 없지만 엉터리가 아닌 것이 고개를 쳐드는 법이야만일 사람을 때려주고 싶다면 그 가면을 찢어버리게죄수는 벽을 때려 부수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네내게는 저 흰고래가 바로 벽일세바싹 가까이 다가와 있네그야 저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수도 있지그러나 그게 뭐란 말인가그놈이 나를 마구 휘두르며 덤벼들고 있어그 바닥을 알 수 없는 게 나는 미워 견딜 수가 없는 거야그래서 흰고래란 놈이 심부름꾼이건 두목이건 나는 이 미움을 그놈에게 풀고 싶은 거야(<모비딕> 동서문화사, 2007, 222) (본문에서 재인용)

 

    김근우는 노인의 목소리에 에이해브 선장의 목소리를 덧입히면서 '허구'를 쫓는 사람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한편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의 상징성을 절묘하게 풀어낸다허구의 세계에서 불가능한 것은 없다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존재할 수 없는이를 테면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의 존재 역시 허구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유일한 가족이었던고양이를 잃은 슬픔에 빠진 고독한 노인과 돈 없고 빽 없고 능력도 없는삶의 가장자리에 내몰린 가련한 인생들(이들에게는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여자남자아이노인으로만 불린다)이 열심을 다해 몰아가던 허구의 배가 마침내 삶의 진실을 낚아올릴 때 느껴지는 저릿한 감동은 '이야기'를 즐기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익숙한 감각이다.


 

    불광천은 마포 망원지구에서 홍제천과 합류한다저 물이 그 물이고 그 물이 저 물이고저것과 그것이 결국 하나가 되어 어느 게 저것이고 그것인지 분간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게 되는 그런 지점그 지점은 수심이 꽤 깊었다거기서부터 한강까지는 불과 몇 킬로미터 되지 않았다. (본문 중에서)



     반짝 인기를 누리던 광명의 시절을 녹슨 훈장처럼 간직하고 있는 ''는 언젠가 '진짜문학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접을 수 없다장르소설이른바 경계문학을 해 온 ''는 사람들의 멸시와 '가짜'라는 꼬리표가 익숙하면서도 억울하다실제로 장르소설을 써 온 김근우는 그간 이어온 문학적 고민들을 ''의 목소리에 싣고 있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이란 과연 무엇일까이 절박한 물음이 이야기를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김근우는 시종 안정적인 문장과 넉살 좋은 입심으로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단조롭지만 힘 있는 구성으로 독자를 휘어잡는 솜씨가 보통 아니다'진짜'와 '가짜', '진짜 같은 가짜'와 '가짜 같은 진짜'를 정신없이 뒤섞고 감추는가 하면 이내 눈앞에 들이미는 이 황당한 이야기에 휩쓸려 가다 보면 "저 물이 그 물이고 그 물이 저 물이고저것과 그것이 결국 하나가 되어 어느 게 저것이고 그것인지 분간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게 되는 그런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 지점은 수심이 꽤 깊"정신 없이 휩쓸려 온 독자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가라앉으면서 점점 가라앉으면서 마침내 이야기와 한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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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필사노트 : 메밀꽃 필 무렵 / 날개 / 봄봄 필사하며 읽는 한국현대문학 시리즈 1
이효석.이상.김유정 지음 / 새봄출판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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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세르Michel Serres는 소셜 미디어 세대를 '신인류'라고 지칭하면서, 지시과 정보가 네트워크에 집중되는 방식이 인간의 의식과 사고방식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누구라도 손쉽게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체계가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면서 지식의 권위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누구라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소셜 미디어 체계에서는 일반인들도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숨죽이고 있던 일반 대중들이 하나 둘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SNS가 활성화되고 결과적으로 말과 글이 넘쳐나게 되었다. 이 많은 비평가, 웅변가, 작가들은 어디서 쏟아져 나온 것인지.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쏟아지는 말글의 홍수에 파묻히지 않으려면 나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절실해졌다. 자기표현능력을 기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일반인을 위한 글쓰기 비법서나 강의도 늘고 있는 추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글쓰기 훈련의 기본은 필사筆寫일 것이다. 어린 아이가 부모의 것을 흉내내면서 말을 배우듯이, 좋은 문장을 베껴쓰면서 자연스럽게 문장의 기본 구조를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필사에 특별한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이 선호하는 좋은 책이나 문장을 베껴쓰면 된다. 문장을 옮겨 적으면서 소리내 읽어보거나 하나의 문장을 여러 번 써 보는 것도 좋다. 필기구도 편한 대로 선택하면 된다. 그래도 선뜻 엄두가 안 난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소개하겠다. 새봄출판사에서 선보이는 '필사하며 읽는 한국현대문학 시리즈 01권(이 책을 기점으로 필사하기에 좋은 훌륭한 우리 문학을 고루 소개할 예정이라고 한다)'이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동시에 필사도 가능한 책(이면서 노트)이다. 이 책에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이상의 <날개>, 김유정의 <봄봄>이 실렸다. 각각의 작품은 필사노트와 원문으로 구성했다. 필사노트를 살펴보자. 


        


     문단마다 번호를 매겨 나누고 각 문단마다 한 면의 공백을 두었다. 문단을 공백에 옮겨 적으면 된다. 따로 밑줄이 없어서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글자 크기 조절에 실패하면 문단을 모두 옮겨 적기도 전에 공백이 남지 않게 된다. 자신 없는 사람은 처음부터 밑줄을 그어두고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옛말이나 난해한 어휘는 노트 하단에 작게 설명을 달고 있다. 작가와 작품 소개, 필사를 위한 몇 가지 조언도 덧붙이고 있다. 


     어떤 작품을 고를지, 어디서부터 어떤 방식으로 시작할지 막막한 필사 초보자에게 마침맞은 책이다. 보다 효율적인 필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을 것 같다. 독서대나 노트를 따로 준비할 필요 없이 책을 읽으면서 곧장 옮겨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손수 글씨 쓸 일이 드물어졌다. 컴퓨터 자판 두드리면서 필사하는 사람도 많다. 아끼는 문장을 곱씹어가며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던 정취가 그리운 이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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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만다라
Carlton Books 엮음 / 담앤북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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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인도에서 발원한 만다라Mandalas는 산스크리트어로 ( circle)을 의미한다. 다양한 패턴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원을 이루는 만다라는 카르마karma(業)에 의해 생사 세계를 돌고 돈다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투영한다. 만다라를 구성하는 점, 선, 면 하나하나가 일정한 양식에 따라 그려지는데, 이 작은 부분들이 이룩하는 균형미와 통일성이 마음에 안정을 준다고 해서 오늘날에는 명상과 미술치료의 도구로도 활용된다.

     지금 소개하는 책은 백서른여덟 개의 만다라 도안을 싣고 있는 컬러링북이다. 크고 작은 원 안에 물방울, 이파리, 꽃잎, 별 같은 눈에 익은 그림들로 구성된 것도 있고, 여백도 없이 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우는 세밀하고 복잡한 패턴들까지 다양하다. 테두리선도 굵직하고 짙게 마무리한 것이 있는가 하면 섬세하게 표현된 것도 있는데, 일반적인 그림(사람이나 풍경)에 비해 상당한 집중력을 요한다. 테두리선을 벗어나지 않으려면 색칠 도구는 끝이 섬세한 것이 적당하다. 나는 색연필을 사용했다.

 

 

 

 

 



   하나의 도안을 완성하는 데 평균 한두 시간 정도 걸렸다. 하나의 물방울에 색을 입히면 그 다음 물방울, 그보다 더 작은 물방울, 이지러진 물방울, 물방울 다음 물방울, 또 다른 물방울. . . 이런 식으로 비슷한 패턴을 반복해서 칠해나가면 그야말로 무아경無我境에 이르게 된다. 어지러운 색들로 뒤엉긴 마음속 풍경이 천천히 탈색되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동시에 마음속을 채우고 있던 색색의 감정들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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