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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이토 씨
나카자와 히나코 지음, 최윤영 옮김 / 레드박스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가족 = 식구>라는 등식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가족이란 한 집에서 하나의 밥상을 놓고 밥을 먹는 관계였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귀가한 가족 구성원이 둘러 앉아 하루의 피로를 달래고 정을 나누는 자리가 밥상머리였던 것이다. 반면에 오늘날의 가족에는 밥상이 부재한다. 가족이면서 식구는 아니고 식구이기는 하나 가족이라고 하기는 미묘한 다양한 동거 형태가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를 갈아엎고 있다. 아버지와 딸, 딸의 연인이 한집살이를 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해프닝을 그리는 이 소설은 보편적인 화법으로 이 시대 <가족>의 의미를 환기하는 한편, 그 바탕에는 어쩔 수 없는 사람 사이의 간격, 그 공백을 담담히 응시하는 쓸쓸한 정조를 깔고 있다.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그들의 포근한 식탁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에게 있어 그것은 영원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먼 지평선에 존재하는 정경이겠지. 왜냐하면 아버지에게는 ‘집’이 없으니까. 물론 돌아가야 할 '장소‘는 있다.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오후 도서관의 할아버지들처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서른 중반의 미혼 여성 <아야>는 스무 살 연상의 돌싱남 <이토 씨>와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 일 년째 한집살이 중이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두 사람은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가까워졌는데, 그때까지는 어떤 정서적 교류도 없다가 순전히 서로의 성적 매력(이를 테면 “25센티미터”의...)에 이끌려서 연인이 되었다. 특별한 계획도 약속도 없이 서로의 생활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무던한 일상을 이어가던 두 사람 앞에 아야의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OO은 도망가지 않는다.” 이토 씨의 입버릇이다. 분명 도망가지 않는 것은 세상에 많다. 하지만 그렇게 느긋한 자세를 취하는 동안, 혹은 보지 않는 척하는 사이에 존재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 많지 않을까. 결국 놓쳐 버리고 만 것이. 이토 씨에게는. (본문 중에서)
미혼의 딸이 스무 살 연상의, 그것도 학교 급식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미래 없는 남자와 한집에서 살고 있단 걸 알게 된 아버지와 두 연인의 우여곡절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가족이면서 식구는 아녔던 아버지와 딸, 식구지만 가족이라기엔 애매한 이토 씨. 이들 세 사람이 한집살이를 하게 되면서 서로를 수용하고 이해해 나가는 과정이 뭉클하게 담겼다. 갈등의 불씨가 되어 마땅할 이토 씨는 오히려 위태로운 한 가족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 이토 씨가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장면과 (연인의 아버지와 이토씨가) 한 자리에서 밥을 먹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토 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딸의 거리(아야와 아버지의 불화는 이토 씨의 존재와는 무관하다)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단지 밥을 같이 먹는다고 해서 온전한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연인의 방과 아버지가 머무는 방을 가로막고 있는 벽과 그 벽 너머 불편한 정적, 미동도 없이 닫혀 있는 문 같은 것이 대신 말해주고 있다.
상자는 아버지 손에서 떨어져 공중에서 회전했다. 힘과 열로 인해 상자가 터진다. 터진 상자에서 무수히 많은,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는 작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식기였다. 모두 식기였다. 자루가 긴 스푼. 과일을 먹기 위한 작은 포크. 검은 옻칠을 입힌 식사용 젓가락. 끝에만 톱날이 달린 큰 나이프……. 식사를 위한 온갖 도구가 골판지 상자에서 튀어나와 유유히 허공을 떠돌았다. (본문 중에서)
외면적으로 이 소설은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읽기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할 여지가 많다. 아버지도 아야도 이토 씨도 <밥상머리>가 부재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쓸쓸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밥상머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침묵과 무관심으로 봉인된 진한 허기가 쓸모를 잃고 늘어가는 식기들처럼 차가운 몸을 맞대고 숨죽이고 있다. 이 시대의 온전한 가족의 의미를 묻고 있는 이 소설은 제8회 현대소설 장편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찬사를 받았다. 분명 좋은 소설이다. 다만 도치법으로 일관하는 번역체 문장과 쉼표의 남용이 독서의 호흡을 방해하고 이야기의 맛을 반감시킨 것 같아 아쉽다. 그럼에도, 불길에 휩싸인 고향집에서 아버지의 상자가 열리고 그 안에서 갖가지 식기들이 번쩍이며 허공으로 치솟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용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