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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아이 1
에리크 발뢰 지음, 고호관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인간이 어둠 속에 홀로 앉아
다른 인간을 갈구하며 울 때마다
기적이 다가온단다.
기자 출신의 작가가 자신의 취재 기록과 유년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진중하고 정밀하다. 한때 덴마크를 들썩이게 했던 <콩슬룬 사건>을 중심 소재로 낙태, 미혼모, 입양, 언론과 정치의 부도덕한 권력 남용, 인간 성격 형성에 천성과 환경이 미치는 영향력 등 깊이 있고 묵직한 주제를 이야기에 담아냈다. 소설의 주요 무대가 되는 <콩슬룬 고아원>은 작가 자신이 유년기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미혼모의 삶을 비관한 어머니의 우울증과 자살 시도로 몇 년 간 고아원 생활을 해야 했던 개인적 체험이 소설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고아원 사감이 <침대와 침대 사이를 오갈 때 나는 프리지어 향기>와 <갓 다린 리넨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까지 전달하는 세세하고 생생한 묘사력이 인상적이다. 등장인물들(특히 입양아)에 대한 내면 묘사에도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그분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하지만 불평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부러 과장해서 하품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누가 원한 적도 없고, 아무런 기대도 받지 못한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아주 처음부터 우리는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기술을 습득했다. 겸손, 복종,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우리는 침대에서 침대로 메시지를 전했다. 왜냐하면 완벽하게 균형을 유지해야 우리가 안전하게 끝까지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권, 107쪽)
어느 날 국무부에 배달된 <욘 비에르스트란>이라는 이름의 출생증명서와 익명의 편지로부터 이야기의 문이 열린다. 익명의 편지에는1961년 콩슬룬 고아원 유아방에 있던 일곱 명의 아이들 사진도 한 장 들어 있다. 욘 비에르스트란은 누구이고 일곱 명의 아이들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일곱 아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욘 비에르스트란>의 정체를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2001년 덴마크의 한 해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신원불명의 여인과 <욘 비에르스트란>의 충격적인 관계가 드러난다.
새로운 아이들이 도착했다가 빠져나갔고, 곧 다시 떠나갈 다른 아이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곧 나는 작별 인사 횟수로 국내 기록을 세웠다(나보다 더 많이 아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본 아이는 없었다). 입구로 들어오면 보이는 흑백사진 중에는 내가 잔교棧橋 끝에 서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담긴 것도 있다. 그 사진은 15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서 찍은 것 같다. 내 몸은 살짝 한쪽으로 기울었고, 왼쪽 팔은 흐느적거린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내가 주먹을 쥔 게 보인다. 입에서는 깊은 계곡 속의 바람 같은 공허하고 슬픈 곡조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가지 마...... 가지 마......!’ (1권, 116~117쪽)
사회, 정치 문제부터 복잡한 인간 본성에 이르기까지 밀도 있게 파고드는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주된 정서는 <갈망>이다. 등장인물들의 갈망과 집착이 배양되고 뻗어나가다 충돌하고 결국에는 파국으로 치닫는 일련의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인간 본성에 대한 작가의 이해와 통찰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 <잉거 마리>에 대한 내면 묘사는 불편하지만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무도 모르게 두개골이 특유의 곡면을 발달시키거나 코가 제 각도를 찾아가듯이 영혼 속에서 기형이 자라났다. 오를라의 굴욕은 신이나 악마가 보낸 게 아니었다. 오를라를 보호했어야 마땅한 인간으로부터 오를라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막달렌이었다면 부족한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건 오를라의 어머니 때문이라고. (1권, 197쪽)
책을 덮고 나서 얼마간은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사방으로 튀는 생각들을 한데 붙들기 어려웠다. 과부하가 걸린 느낌이랄까. 중심 사건에서 뻗어나가는 가지가 많고 저마다 굵직해서 생각할 거리는 많은 반면 이야기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다. 일기나 편지, 신문 기사 등 다양한 형식과 시점을 오가는 구성도 산만하다는 인상을 준다. 느린 전개, 주제의식의 과잉이 소설적 재미를 반감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정밀하고 지나치게 진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