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상처가 더 아프다 - 유독 마음을 잘 다치는 나에게 필요한 심리 처방
최명기 지음 / 알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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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서부터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뜯어내자니 아프고 그냥 두자니 거슬리는 손톱 거스러미 같은 작은 상처들은 일상 곳곳에 포진해 있다. 대수롭지 않은 생채기도 오래 방치하면 괴사가 일어나거나 심각한 병이 될 가능성도 크다. 정신과 의사 최명기는 이 책에서 마음의 생채기를 유발하는 다양한 상황들을 집어주고 그에 맞는 처방을 준다. 책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살펴 보면서, 일상의 작은 상처는 발뒤꿈치를 깨무는 뻣뻣한 신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신어도 자꾸 생채기를 내는 신발이라면 내 발과 맞지 않는 것이다. 신발도 내 발도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서로 맞지 않는 것, 다르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는 경우보다는 무심결에 상처를 주고 은연중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상처를 주고 받게 되는 것이다. 책에서는 상처를 받는 사람의 심리와 상처를 주는 사람의 심리를 간결하고 명쾌하게 풀어준다. 상처는 바이러스와 같아서 돌고 도는 것 같다. 살면서 일방적으로 상처를 (주거나) 받기만 하는 경우는 없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가해자도 다른 상황에서는 상처를 받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역으로도 마찬가지.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뒤꿈치를 깨무는 뻣뻣한 신발 때문에 절룩이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과감하고 명쾌한 조언을 준다. 너무 아프면 벗어버리자는 것이다. 그 고약한 신발이 가족일지라도 끊임없이 나를 아프게 한다면 거리를 두는 게 맞다는 것이다. 사회나 상황이 조장하는 죄의식에서 자유로워지자는 말이다.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것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심리 처방들은 단순하고 현실적이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을 찾아보라든가, 상상으로라도 복수하라든가. 엉뚱하고 비겁해 보이지만 인간적이고 솔직한 처방에 속이 후련해진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에 등장하는 정신과 의사 <이라부>가 떠오르기도 한다. 따끔하지만 현실적인 조언에 정신이 번쩍 든다. 후시딘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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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블 이야기
헬렌 맥도널드 지음, 공경희 옮김 / 판미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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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잃어버린 매>가 인도하는 이상하고 이중적인 숲들을 탐사한 특별한 기록이다현대판 <오르페오>라고 하면 될까헬렌 맥도널드는 이 책에서 지옥을 보여준다지옥의 다른 이름은 <슬픔>이다.

 

    그저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그는 여전히 거기잃어버리고 죽은 나머지 모든 것들과 함꼐 얽히고설킨 숲 속 어딘가에 있었다이제 나는 봄에 꾼 꿈들이매가 갈라진 틈으로 빠져나가 공중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꿈들이 의미하는 바를 안다나는 아버지를 찾아서 매와 함께 날아가고 싶었다그를 찾아서 집에 데려오고 싶었다. (본문 중에서) 


   이토록 <필사적인애도라니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충격과 슬픔에 빠진 헬렌이 <야생 참매>를 길들이는 과정을 담은 이 책은 날것의맹렬한 슬픔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헬렌은 직접 조련하는 참매 <메이블>에게 자기를 투사한다바깥으로부터 오는 모든 빛을 차단한 작은 방 안에서 메이블을 주먹에 올려놓고 있는 헬렌의 모습은 <혼자이고 냉정하며슬픔에서 자유롭고인생사의 아픔에 둔>한 야생 참매와 닮아 보이기도 한다메이블이 잡아온 어린 토끼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내장을 뜯어낼 때는 냉혹한 사냥 본능에 충실한 한 마리 야생 짐승 그 자체 같다동시에 그녀는 야생 참매의 예리한 발톱 아래 붙들려 찢기고 피 흘리는 무력한 한 마리 토끼이기도 했다.

 

   여자들과 몇 차례 연애하긴 했지만 화이트의 판타지는 가학적이고 주로 청소년기 소년들을 향했다. 그는 이런 판타지가 유년기의 학대로 인해 생겼다고 확신했고, 수치스럽고 두려웠다. 그런 판타지 속에서 화이트는 그를 떄린 아버지와 학교 선생들 같은 학대자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베넷의 치료는 이런 욕구들을 없애지 못했다. 그 욕구들은 화이트를 떠나지 않았다. 말년에 그는 멋진 남학생들에 대한 포르노 같은 소설을 썼고, 그것은 길고 끔찍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고를 감추었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다. 평생토록 그는 욕망을 억압했다. (본문 중에서) 


   분노와 가학자기연민아예 <마음이란 게 없는슬픔의 극한을 오가는 헬렌의 위태로운 애도와그림자처럼 그녀 곁을 지키는 야생 참매와의 특별한 교감이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헬렌이 매 훈련 지침서로 삼은 책 참매의 저자 T.H 화이트의 불행한 삶과 그의 <잃어버린 매고스와의 짧은 동거 이야기가 헬렌의 현실과 교차로 이어지는데이는 보다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세상과 담을 쌓고 야생의 삶을 택했지만 거기서도 평온을 얻지 못했던 가련한 사내는 책을 덮고 나서도 내 마음을 타박타박 걸어다닌다짧지만 강렬한 화이트의 이야기는 그 정도로 파문이 컸다.



   인간의 손은 다른 인간의 손을 잡으라고 존재한다. 인간의 팔은 다른 인간을 꼭 안으라고 존재한다. 토끼의 목을 부러뜨리고, 매가 사냥감의 흉강에서 피를 빨아먹는 동안 나뭇잎 더미에서 둘둘 말린 내장이나 찾으라고 손과 팔이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괴롭다. 모든 게 영원한 현재에 잡혀 있다. 토끼는 호흡을 멈춘다. 매는 먹는다. 나뭇잎은 떨어진다. 구름은 머리 위에서 흘러간다. (본문 중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슬픔이라는 지옥불에 뛰어든 헬렌. <잃어버린 매>가 상징하는 아버지의 죽음그 불가사의한 심연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헬렌의 시선은 일면 섬뜩하기까지 하다맹렬한 슬픔과 냉혹한 야생을 오가면서그 사투 끝에 헬렌은 그토록 꿈꾸던 야생 참매가 되어 하늘로 솟구쳐 올랐을까물론 아니다그랬다면 《메이블 이야기》도 없었겠지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건 무얼까슬픔의 극한까지 스스로를 내몬 한 인간의 통렬한 자기성찰을 담고 있는 이 책이 던지는 답은 이렇다불타는 지옥인 동시에 우리를 세상과 이어주는 중요한 끈야생 참매에게는 없는 그것상처 받고 슬퍼할 줄 아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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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의 낯선 자들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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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0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데뷔작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탄탄한 구성과 밀도 높은 심리 묘사, 선명한 주제의식까지 소설이 요구하는 기본 구색을 잘 갖추고 있다. 주인공 가이와 브루노의 팽팽한 대결 구도는 선과 악, 자유와 순종, 양심과 사회 규범 같은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하면서 인간 본성의 가장 밑바닥까지 독자를 끌고 들어간다. 긴장감이라는 말로는 부족해 보인다. 주인공 가이가 그랬던 것처럼 독자는 외면하고 부정하고 저항하면서도 어느새 이야기에 완전히 흡수되어버리고 만다.

 

   사람들, 감정들, 모든 것이 이중적이라는 거죠. 개개인의 마음속에 두 사람이 있는 거죠. 보이지 않는 당신의 일부처럼 당신과 정반대인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고, 숨어서 기다리고 있죠. (본문 중에서)

 

    메트캐프로 향하는 열차 안, 이혼을 앞두고 어지러운 상념에 빠진 <가이 헤인스>에게 맞은편 좌석에 앉은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아내 미리엄에 대한 모순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가이는 이 낯선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가이는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지만 이상한 열기를 발산하는 이 남자는 물러나기는커녕 자신의 특별 전용실로 가이를 초대한다. 가이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낯선 남자와 함께 독립된 공간에 있게 된다. 근사한 식사와 위스키, 달콤한 디저트, 이전에도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는 <낯선 사람>의 묘한 매력은 가이의 경계심을 일시에 허물어뜨린다.

 

  본질적으로 여자는 한 유형뿐입니다.” 브루노가 말을 이었다. “배신자들이죠. 배신자이면서 창녀. 그중에서 고르는 거죠.” (본문 중에서)

 

    가이의 맞은편에 앉은 <낯선 남자>는 스물다섯의 청년 <찰스 브루노>이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브루노는 아버지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가진 인물이다. 탐욕적이고 냉담한 아버지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브루노는 애정결핍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린다.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문란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머니 이외의 모든 여성을 극단적으로 혐오한다. 문란한 아내에 대한 증오와 배신감으로 괴로워하는 가이의 처지에 브루노가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다.

 

    그런 여자에겐 남자들이 꼬이는 법이죠. 쓰레기 주변에 파리가 꾀듯이. (본문 중에서)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은 끔찍한 운명으로 이어진다. 가이는 브루노가 제안하는 은밀한 거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브루노는 가이의 아내 미리엄을, 가이는 브루노의 아버지를 교환 살인하자는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브루노의 집요한 설득과 회유를 물리치고 도망치듯 열차에서 내린 가이에게 그것은 긴 악몽의 시작이 된다.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사람을 죽이는 연기를 했고 그러자 마약을 한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가이가 브루노 생각을 떨치기 위해 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연기였고, 점점 더 커지는 악의적인 생각을 칼처럼 베어내는 몸짓이었다. 밤이 되면 브루노의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물체였고, 가이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 어떤 힘이었다. 방 안에 루거 권총을 두고 살인을 연기하고, 브루노를 따라 유죄 선고를 받고 사형에 처해지는 상상을 하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본문 중에서)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이 마치 정해진 운명을 따르듯이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을 그리는 이 소설은 인간의 선과 악이 어떤 형태로 공존하고 발현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대판 <죄와 벌>이라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다. 한순간 살인자가 되어버린 평범한 인물의 복잡한 심리 변화를 세밀하게 포착해 내는 솜씨가 놀랍다. 악마의 화신 같은 브루노와 그의 계략에 하릴없이 휘둘리는 가이의 이상한 끌림과 치열한 대립 양상은 인간의 양면성 - 본성과 이성, 선과 악, 사랑과 증오 같은 모순적인 성질들이 자아내는 <존재의 불안>을 섬뜩하리만치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박쥐처럼 커다란 망토를 두른 키 큰 남자가 갑자기 방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나예요."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가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와 싸우려 했다. "누구야?" 가만히 보니 브루노였다. 브루노는 맞서 싸우기보다는 저항했다. 가이가 젖먹던 힘까지 짜낸다면 브루노의 어깨를 바닥에 밀어붙일 수 있었고, 계속 되풀이되는 꿈속에서 가이는 온 힘을 짜내야 했다. 가이는 브루노를 바닥에 눕혀 무릎으로 고정하고 목을 졸랐지만, 브루노는 아무 느낌도 없는 것처럼 씩 웃고만 있었다. "내가 누구냐고? 바로 너야." 브루노는 마침내 그렇게 대답했다. (본문 중에서)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정서는 <불안>이다. 내가 말하는 불안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을 법한 서스펜스 차원을 넘어선 무엇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눈동자를 오래 들여다본 적 있는가. 무심하게,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와 맞은편에 서 있는, 나와 똑같지만 어딘지 <낯선 사람>의 골똘한 시선이 돌아온다. 그 순간의 섬뜩한 이질감에서 발생하는 현기증 같은 불안. 하이스미스는 이 작품에서 그런 종류의 불안,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불안을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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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에게서 온 편지 : 멘눌라라 퓨처클래식 1
시모네타 아녤로 혼비 지음, 윤병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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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뜨거운 열기로부터, 이 사막 같은 땅에서 도망가요

         ( Fuggiam gli ardori inospiti di queste lande ignude )  .

 

 

               -       <아이다> 3막 마지막 부분

 

 

 

 

 

 

   죽은 사람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온다는 설정은 이미 소설이나 영화에서 심심찮게 다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은 사람의 편지>라는 소재는 많은 사람들의 구미를 돋운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과 <말을 전하는> <편지> 고유의 역할이 결합하면서 자아내는 복잡한 정서는 매혹적인 이야깃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좋은 소재를 살리는 건 이야기의 구성력에 달렸다. 죽은 가정부로부터 차례로 날아오는 편지를 두고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을 그린 이 소설은 <죽음><편지>가 자아내는 묘한 긴장감이 잘 살아있다.

 

   난 조금 더 기다렸다가 천천히 문을 밀기 시작했네.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지. 창백한 달빛이 그녀가 덮고 있는 얇은 침대보 위로 쏟아지고 있었네. 나는 노래를 들으며 문턱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네. '자백해(Discolpati).' 그녀는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리고 있었어. 그녀가 깨어 있는지 잠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 나는 울기 시작했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지만 그녀가 알아차리고 말았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네. "울지 말고 노래나 들어." (본문 중에서)

 

   시칠리섬의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한 집안의 가정부로 살았던 마리아 로살리아 인제릴로, 일명 <멘눌라라>라는 중년 여성의 임종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족 간의 이별 의식이나 비통한 곡소리도 없이 차분하고 심상하다. 소설이 아니라 영화였다면 의사의 손에 포개진 고인의 투박한 손을 오래 클로즈업했을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과연 <멘눌라라다운> 임종이구나 수긍하게 된다. 임종 순간이 말해주듯이 멘눌라라(줄여서 멘누’)는 은밀하고 고독한 생을 살았다. 어린 나이에 생계를 짊어져야 했던 멘누는 아몬드 농장에서 일하다 불의의 사건에 휘말려 알팔리페가의 가정부로 들어간다. 알팔리페가에서 주인마님의 총애를 받던 멘누는 점점 자기 영역을 확대해 마침내 집안의 재산 관리까지 도맡게 된다. 말이 가정부지 알팔리페가의 실세였던 셈이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분이에요. 굉장히 똑똑한 분이었다는 건 틀림없어요. 문화적인 소양도 대단하셨고...... 여자치곤 좀 복잡했죠. 집에서는 비밀이 많다고 놀려댔어요. 저희 아버지가 경찰에서 근무하셨는데 이모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마피아 두목이 되었을 거라고 늘 그러셨어요. 뱃심 좋은 여자라고 불렀죠. (본문 중에서)

 

   멘누가 죽고 유산 상속을 노린 알팔리페가 자손들이 고향집에 모이면서 빚어지는 갈등, 이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억측과 낭설 속에서 <마리아 로살리아 인제릴로> 또는 <멘눌라라 <멘누>라고 불렸던 여인이 천천히 베일을 벗는 과정을 박진감 있게 그려냈다. 여러 개의 이름만큼이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는 멘누의 일생은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자> <까다롭고 권위적인 여자> <주인이 바라는 대로 복종하는 헌신적인 여자> <상스럽고 예의를 모르는 여자> <뱃심 좋은 여자> <쇠와 불로 만들어진 여자> <죄수> <성녀> <마녀> . . . 멘누는 <한마디로 형언하기 힘든 존재>였다.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 추측으로 재구성되는 멘누의 얼굴을 또렷해졌다 흐려지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이때 등장하는 결정적인 <편지>가 직소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처럼 멘누의 초상을 완성한다.

 

   어느 날 나는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네. 하루는 그녀가 빨래하는 모습을 그려도 되느냐고 물었는데, 그녀가 하는 대답은 항상 똑같았네. "넌 주인이야. 난 하녀고." (본문 중에서)

 

   가슴 졸이는 긴박감이나 강렬한 반전은 없지만 묘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는 소설이다.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의 등장인물들의 진술, <편지>의 고백적 성격을 통해 <베일에 싸인> 주인공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살려낸다. <하녀> 역할을 천명처럼 받아들이는 한편 자기 욕망의 <주인>으로 살았던 여성의 생애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고인에 대한 한조각 기억에 사로잡힌 사람들, 탐욕에 눈먼 알팔리페가 사람들의 웃지 못할 소동을 지켜보면서 진정한 주인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아이들하고 있을 때 너무 더우면 여름이든 겨울이든 항상 신고 다니던 두꺼운 양말을 벗고 맨발로 돌아다니거나 땅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마냥 행복해했다. 바람이 세게 불어오면 머리카락이 목 뒤로 나부꼈다. 그러면 멘누는 머리를 풀어헤치며 이렇게 말했다. "바람을 누가 이기겠어." 그럴 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머리에서 달아나려는 듯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어깨 위로 다시 가라앉았다. (본문 중에서)

 

   누구라도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멘눌라라>는 그런 삶에 얽매여 있는 우리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자기 삶의 주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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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
에리 데 루카 지음, 이현경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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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 하고 천천히 발음해 본다. 둥글게 모아지는 입술 사이로 알음()과 앓음(아픔)이 떠오른다. 알음()이 먼저일까 앓음(아픔)이 먼저일까. 헛된 물음이다. 알면 다치고 아프면 배우게 되고 알아가면서 또 앓기도 하고.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삶이니까. 그러고 보니 <정말로> 인생은 아름다운 거구나. <아름다움>이 품고 있는 이런 <지속성>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이끌어 온 거였구나.

 

    가까이에 있는 그 애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입을 맞추기 위해 다가갈 때 모든 것을 벗어버린, 말을 삼킨, 있는 그대로의 여자 입술은 감동적이다. "그 물고기 눈 꼭 감아." "감을 수가 없어. 내가 보는 걸 너도 볼 수 있다면, 아마 너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거야." (본문 중에서)

 

 

   미지의 세계에 첫 발을 들였을 때 흔히 ~에 <눈떴다>라고 한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차마 눈 감을 수 없는 그런 결정적 순간들 말이다. 지금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런 순간들을 서정적인 문장으로 풀어낸다. 이제 예순이 된 주인공은 오십 년 전 여름의 해변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는 폐쇄적이고 냉소적인 열 살 소년이다. 소년은성처럼 쌓인아버지의 책들을 통해 <어른의 세계>를 훔쳐본다. 소년이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에는 <지속성>이 없다. 어른들은 곧잘 사랑을 속삭이다가도 금세 서로를 증오한다. 타인과의 약속은 물론 스스로와의 약속조차도 지키지 않을 때가 많다. <지속성>이 결여된 그 세계는 과장과 허위로 포장된 공허한 세계이다.


 

   지속하다mantenere. 열 살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였다. 이 말은 손을 잡는다는 약속, 지킨다는 약속을 담고 있었다. 이 말이 나에게 필요했다. (본문 중에서)



 

   정신이 성장하는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연약한 껍데기에 불과한> 육체에 갇힌 소년은 <지속성>을 갈망한다. 그동안 경험해 온 불안정한 세계의 껍데기를 탈피할 수 있는 어떤 결정적 순간이 소년에게는 절실하다. 별거 중인 어머니를 따라 찾은 지중해의 한 해변에서 소년은 바로 그 순간을 경험한다. 거대한 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인 자기 존재의 본질에 <눈뜨게> 된다.


   나는 성장할 생각이 없는 이 어린아이의 몸을 버려야만 한다. 칼을 몸에 지닐 게 아니라 그 세 아이를 찾아가 내 몸의 껍데기가 깨질 때까지 때려 달라고 부탁해야만 한다. 내면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외부에서 해줘야만 한다. 그들을 찾으러 가야만 한다. (본문 중에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는 이 작품은 소설이기보다는 한 편의 <아름다운> 산문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적 감수성이 곳곳에 묻어 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에리 데 루카는 불쑥 불쑥 무질서하게 솟아나는 기억의 형식을 고스란히 이야기에 옮겨놓고 있다. 열 살 소년이 갑자기 이십대 청년이 되어 집을 뛰쳐나가고 혁명을 부르짖는 시위 현장에 서 있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예순의 노인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자칫 산만하다 느껴질 수도 있는 구성인데, 오히려 그 불규칙성이 <기억을 다루는> 이야기의 진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 천천히 가. 너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 그러더니 소녀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도 물속으로 들어가 소녀를 끌어올렸다. 그 애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으로 나왔다. 그 애는 계속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지속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사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이야기의 중심에는 주인공 소년과 이름 모를 소녀의 짧은 만남이 있다. 자기 감정에 충실한 소녀는누에고치처럼자기 안에 파묻힌 소년을 <감정의 세계>로 이끌어낸다. 감정의 세계는 눈부시고 아름답고 그래서 위험하기도 하다. 소년에게 처음으로 <지속성>을 가르쳐 준 이 세계는 역설적이게도 <어른의 세계>이다. 소년이 가까스로 당도한 이 세계 역시 시간의 파도 앞에서 거품처럼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괜찮다. 소년에게 바로 그 순간, 그 세계는 절대적이고 영원하니까 말이다. 

 

   “놀라워.” 입술을 뗐을 때 느릿느릿 내가 말했다. “이건 너를 위한 키스야. 다시 물어보는데, 사랑이 좋니?”“이게 사랑이라면,, 좋아, 좋아.” 나는 앞으로 어떤 책을 읽든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본문 중에서)

 

   혼자 읊조리는 노래의 후렴구처럼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싶다. 다치고 깨지고 앓으면서 알아가는 것이 삶이다. 그러니까 인생의 모든 순간은 <아름답다>고.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이 <아름다움>이 동시에 우리를 위로하기도 한다고. 시간의 파도가 휩쓸어가버리는 순간들을 기억의 망막에 새기기 위해 매순간 눈 뜨고 있어야 한다고.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이 작품은 이런 소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너무 빤한 말들이 작품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을 훼손할까 두렵다.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어울리는 말은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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