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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의 낯선 자들 ㅣ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0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데뷔작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탄탄한 구성과 밀도 높은 심리 묘사, 선명한 주제의식까지 소설이 요구하는 기본 구색을 잘 갖추고 있다. 주인공 가이와 브루노의 팽팽한 대결 구도는 선과 악, 자유와 순종, 양심과 사회 규범 같은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하면서 인간 본성의 가장 밑바닥까지 독자를 끌고 들어간다. 긴장감이라는 말로는 부족해 보인다. 주인공 가이가 그랬던 것처럼 독자는 외면하고 부정하고 저항하면서도 어느새 이야기에 완전히 흡수되어버리고 만다.
사람들, 감정들, 모든 것이 이중적이라는 거죠. 개개인의 마음속에 두 사람이 있는 거죠. 보이지 않는 당신의 일부처럼 당신과 정반대인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고, 숨어서 기다리고 있죠. (본문 중에서)
메트캐프로 향하는 열차 안, 이혼을 앞두고 어지러운 상념에 빠진 <가이 헤인스>에게 맞은편 좌석에 앉은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아내 미리엄에 대한 모순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가이는 이 낯선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가이는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지만 이상한 열기를 발산하는 이 남자는 물러나기는커녕 자신의 특별 전용실로 가이를 초대한다. 가이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낯선 남자와 함께 독립된 공간에 있게 된다. 근사한 식사와 위스키, 달콤한 디저트, 이전에도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는 <낯선 사람>의 묘한 매력은 가이의 경계심을 일시에 허물어뜨린다.
“본질적으로 여자는 한 유형뿐입니다.” 브루노가 말을 이었다. “배신자들이죠. 배신자이면서 창녀. 그중에서 고르는 거죠.” (본문 중에서)
가이의 맞은편에 앉은 <낯선 남자>는 스물다섯의 청년 <찰스 브루노>이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브루노는 아버지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가진 인물이다. 탐욕적이고 냉담한 아버지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브루노는 애정결핍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린다.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문란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머니 이외의 모든 여성을 극단적으로 혐오한다. 문란한 아내에 대한 증오와 배신감으로 괴로워하는 가이의 처지에 브루노가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다.
그런 여자에겐 남자들이 꼬이는 법이죠. 쓰레기 주변에 파리가 꾀듯이. (본문 중에서)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은 끔찍한 운명으로 이어진다. 가이는 브루노가 제안하는 은밀한 거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브루노는 가이의 아내 미리엄을, 가이는 브루노의 아버지를 교환 살인하자는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브루노의 집요한 설득과 회유를 물리치고 도망치듯 열차에서 내린 가이에게 그것은 긴 악몽의 시작이 된다.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사람을 죽이는 연기를 했고 그러자 마약을 한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가이가 브루노 생각을 떨치기 위해 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연기였고, 점점 더 커지는 악의적인 생각을 칼처럼 베어내는 몸짓이었다. 밤이 되면 브루노의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물체였고, 가이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 어떤 힘이었다. 방 안에 루거 권총을 두고 살인을 연기하고, 브루노를 따라 유죄 선고를 받고 사형에 처해지는 상상을 하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본문 중에서)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이 마치 정해진 운명을 따르듯이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을 그리는 이 소설은 인간의 선과 악이 어떤 형태로 공존하고 발현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대판 <죄와 벌>이라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다. 한순간 살인자가 되어버린 평범한 인물의 복잡한 심리 변화를 세밀하게 포착해 내는 솜씨가 놀랍다. 악마의 화신 같은 브루노와 그의 계략에 하릴없이 휘둘리는 가이의 이상한 끌림과 치열한 대립 양상은 인간의 양면성 - 본성과 이성, 선과 악, 사랑과 증오 같은 모순적인 성질들이 자아내는 <존재의 불안>을 섬뜩하리만치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박쥐처럼 커다란 망토를 두른 키 큰 남자가 갑자기 방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나예요."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가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와 싸우려 했다. "누구야?" 가만히 보니 브루노였다. 브루노는 맞서 싸우기보다는 저항했다. 가이가 젖먹던 힘까지 짜낸다면 브루노의 어깨를 바닥에 밀어붙일 수 있었고, 계속 되풀이되는 꿈속에서 가이는 온 힘을 짜내야 했다. 가이는 브루노를 바닥에 눕혀 무릎으로 고정하고 목을 졸랐지만, 브루노는 아무 느낌도 없는 것처럼 씩 웃고만 있었다. "내가 누구냐고? 바로 너야." 브루노는 마침내 그렇게 대답했다. (본문 중에서)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정서는 <불안>이다. 내가 말하는 불안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을 법한 서스펜스 차원을 넘어선 무엇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눈동자를 오래 들여다본 적 있는가. 무심하게,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와 맞은편에 서 있는, 나와 똑같지만 어딘지 <낯선 사람>의 골똘한 시선이 돌아온다. 그 순간의 섬뜩한 이질감에서 발생하는 현기증 같은 불안. 하이스미스는 이 작품에서 그런 종류의 불안,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불안을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