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
에리 데 루카 지음, 이현경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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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 하고 천천히 발음해 본다. 둥글게 모아지는 입술 사이로 알음()과 앓음(아픔)이 떠오른다. 알음()이 먼저일까 앓음(아픔)이 먼저일까. 헛된 물음이다. 알면 다치고 아프면 배우게 되고 알아가면서 또 앓기도 하고.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삶이니까. 그러고 보니 <정말로> 인생은 아름다운 거구나. <아름다움>이 품고 있는 이런 <지속성>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이끌어 온 거였구나.

 

    가까이에 있는 그 애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입을 맞추기 위해 다가갈 때 모든 것을 벗어버린, 말을 삼킨, 있는 그대로의 여자 입술은 감동적이다. "그 물고기 눈 꼭 감아." "감을 수가 없어. 내가 보는 걸 너도 볼 수 있다면, 아마 너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거야." (본문 중에서)

 

 

   미지의 세계에 첫 발을 들였을 때 흔히 ~에 <눈떴다>라고 한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차마 눈 감을 수 없는 그런 결정적 순간들 말이다. 지금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런 순간들을 서정적인 문장으로 풀어낸다. 이제 예순이 된 주인공은 오십 년 전 여름의 해변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는 폐쇄적이고 냉소적인 열 살 소년이다. 소년은성처럼 쌓인아버지의 책들을 통해 <어른의 세계>를 훔쳐본다. 소년이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에는 <지속성>이 없다. 어른들은 곧잘 사랑을 속삭이다가도 금세 서로를 증오한다. 타인과의 약속은 물론 스스로와의 약속조차도 지키지 않을 때가 많다. <지속성>이 결여된 그 세계는 과장과 허위로 포장된 공허한 세계이다.


 

   지속하다mantenere. 열 살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였다. 이 말은 손을 잡는다는 약속, 지킨다는 약속을 담고 있었다. 이 말이 나에게 필요했다. (본문 중에서)



 

   정신이 성장하는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연약한 껍데기에 불과한> 육체에 갇힌 소년은 <지속성>을 갈망한다. 그동안 경험해 온 불안정한 세계의 껍데기를 탈피할 수 있는 어떤 결정적 순간이 소년에게는 절실하다. 별거 중인 어머니를 따라 찾은 지중해의 한 해변에서 소년은 바로 그 순간을 경험한다. 거대한 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인 자기 존재의 본질에 <눈뜨게> 된다.


   나는 성장할 생각이 없는 이 어린아이의 몸을 버려야만 한다. 칼을 몸에 지닐 게 아니라 그 세 아이를 찾아가 내 몸의 껍데기가 깨질 때까지 때려 달라고 부탁해야만 한다. 내면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외부에서 해줘야만 한다. 그들을 찾으러 가야만 한다. (본문 중에서)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는 이 작품은 소설이기보다는 한 편의 <아름다운> 산문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적 감수성이 곳곳에 묻어 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에리 데 루카는 불쑥 불쑥 무질서하게 솟아나는 기억의 형식을 고스란히 이야기에 옮겨놓고 있다. 열 살 소년이 갑자기 이십대 청년이 되어 집을 뛰쳐나가고 혁명을 부르짖는 시위 현장에 서 있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예순의 노인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자칫 산만하다 느껴질 수도 있는 구성인데, 오히려 그 불규칙성이 <기억을 다루는> 이야기의 진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 천천히 가. 너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 그러더니 소녀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도 물속으로 들어가 소녀를 끌어올렸다. 그 애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으로 나왔다. 그 애는 계속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지속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사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이야기의 중심에는 주인공 소년과 이름 모를 소녀의 짧은 만남이 있다. 자기 감정에 충실한 소녀는누에고치처럼자기 안에 파묻힌 소년을 <감정의 세계>로 이끌어낸다. 감정의 세계는 눈부시고 아름답고 그래서 위험하기도 하다. 소년에게 처음으로 <지속성>을 가르쳐 준 이 세계는 역설적이게도 <어른의 세계>이다. 소년이 가까스로 당도한 이 세계 역시 시간의 파도 앞에서 거품처럼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괜찮다. 소년에게 바로 그 순간, 그 세계는 절대적이고 영원하니까 말이다. 

 

   “놀라워.” 입술을 뗐을 때 느릿느릿 내가 말했다. “이건 너를 위한 키스야. 다시 물어보는데, 사랑이 좋니?”“이게 사랑이라면,, 좋아, 좋아.” 나는 앞으로 어떤 책을 읽든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본문 중에서)

 

   혼자 읊조리는 노래의 후렴구처럼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싶다. 다치고 깨지고 앓으면서 알아가는 것이 삶이다. 그러니까 인생의 모든 순간은 <아름답다>고.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이 <아름다움>이 동시에 우리를 위로하기도 한다고. 시간의 파도가 휩쓸어가버리는 순간들을 기억의 망막에 새기기 위해 매순간 눈 뜨고 있어야 한다고.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이 작품은 이런 소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너무 빤한 말들이 작품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을 훼손할까 두렵다.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어울리는 말은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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