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에게서 온 편지 : 멘눌라라 퓨처클래식 1
시모네타 아녤로 혼비 지음, 윤병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이 뜨거운 열기로부터, 이 사막 같은 땅에서 도망가요

         ( Fuggiam gli ardori inospiti di queste lande ignude )  .

 

 

               -       <아이다> 3막 마지막 부분

 

 

 

 

 

 

   죽은 사람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온다는 설정은 이미 소설이나 영화에서 심심찮게 다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은 사람의 편지>라는 소재는 많은 사람들의 구미를 돋운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과 <말을 전하는> <편지> 고유의 역할이 결합하면서 자아내는 복잡한 정서는 매혹적인 이야깃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좋은 소재를 살리는 건 이야기의 구성력에 달렸다. 죽은 가정부로부터 차례로 날아오는 편지를 두고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을 그린 이 소설은 <죽음><편지>가 자아내는 묘한 긴장감이 잘 살아있다.

 

   난 조금 더 기다렸다가 천천히 문을 밀기 시작했네.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지. 창백한 달빛이 그녀가 덮고 있는 얇은 침대보 위로 쏟아지고 있었네. 나는 노래를 들으며 문턱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네. '자백해(Discolpati).' 그녀는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리고 있었어. 그녀가 깨어 있는지 잠이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 나는 울기 시작했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지만 그녀가 알아차리고 말았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네. "울지 말고 노래나 들어." (본문 중에서)

 

   시칠리섬의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한 집안의 가정부로 살았던 마리아 로살리아 인제릴로, 일명 <멘눌라라>라는 중년 여성의 임종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족 간의 이별 의식이나 비통한 곡소리도 없이 차분하고 심상하다. 소설이 아니라 영화였다면 의사의 손에 포개진 고인의 투박한 손을 오래 클로즈업했을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과연 <멘눌라라다운> 임종이구나 수긍하게 된다. 임종 순간이 말해주듯이 멘눌라라(줄여서 멘누’)는 은밀하고 고독한 생을 살았다. 어린 나이에 생계를 짊어져야 했던 멘누는 아몬드 농장에서 일하다 불의의 사건에 휘말려 알팔리페가의 가정부로 들어간다. 알팔리페가에서 주인마님의 총애를 받던 멘누는 점점 자기 영역을 확대해 마침내 집안의 재산 관리까지 도맡게 된다. 말이 가정부지 알팔리페가의 실세였던 셈이다.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든 분이에요. 굉장히 똑똑한 분이었다는 건 틀림없어요. 문화적인 소양도 대단하셨고...... 여자치곤 좀 복잡했죠. 집에서는 비밀이 많다고 놀려댔어요. 저희 아버지가 경찰에서 근무하셨는데 이모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마피아 두목이 되었을 거라고 늘 그러셨어요. 뱃심 좋은 여자라고 불렀죠. (본문 중에서)

 

   멘누가 죽고 유산 상속을 노린 알팔리페가 자손들이 고향집에 모이면서 빚어지는 갈등, 이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억측과 낭설 속에서 <마리아 로살리아 인제릴로> 또는 <멘눌라라 <멘누>라고 불렸던 여인이 천천히 베일을 벗는 과정을 박진감 있게 그려냈다. 여러 개의 이름만큼이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는 멘누의 일생은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자> <까다롭고 권위적인 여자> <주인이 바라는 대로 복종하는 헌신적인 여자> <상스럽고 예의를 모르는 여자> <뱃심 좋은 여자> <쇠와 불로 만들어진 여자> <죄수> <성녀> <마녀> . . . 멘누는 <한마디로 형언하기 힘든 존재>였다.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 추측으로 재구성되는 멘누의 얼굴을 또렷해졌다 흐려지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이때 등장하는 결정적인 <편지>가 직소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처럼 멘누의 초상을 완성한다.

 

   어느 날 나는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네. 하루는 그녀가 빨래하는 모습을 그려도 되느냐고 물었는데, 그녀가 하는 대답은 항상 똑같았네. "넌 주인이야. 난 하녀고." (본문 중에서)

 

   가슴 졸이는 긴박감이나 강렬한 반전은 없지만 묘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는 소설이다.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의 등장인물들의 진술, <편지>의 고백적 성격을 통해 <베일에 싸인> 주인공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살려낸다. <하녀> 역할을 천명처럼 받아들이는 한편 자기 욕망의 <주인>으로 살았던 여성의 생애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고인에 대한 한조각 기억에 사로잡힌 사람들, 탐욕에 눈먼 알팔리페가 사람들의 웃지 못할 소동을 지켜보면서 진정한 주인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아이들하고 있을 때 너무 더우면 여름이든 겨울이든 항상 신고 다니던 두꺼운 양말을 벗고 맨발로 돌아다니거나 땅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마냥 행복해했다. 바람이 세게 불어오면 머리카락이 목 뒤로 나부꼈다. 그러면 멘누는 머리를 풀어헤치며 이렇게 말했다. "바람을 누가 이기겠어." 그럴 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머리에서 달아나려는 듯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어깨 위로 다시 가라앉았다. (본문 중에서)

 

   누구라도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멘눌라라>는 그런 삶에 얽매여 있는 우리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자기 삶의 주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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