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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사회
알렉스 벤틀리 외 지음, 전제아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는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고립된 하급 사무원 바틀비의 비극을 다룬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사무실의 외진 자리에 틀어박힌 바틀비는 보편적 행동 양식에 저항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마땅히 해야 할 자신의 직무에서도 '선택할 권리'를 주장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가 "증기처럼 뿜어내는" 이 한 마디는 바틀비의 존재를 대변한다. 기존 체제와 보편적 행동 양식에 저항하는 바틀비의 비극(교도소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잘' 선택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개인적 판단이 아무런 쓸모도 없음을 안다면 우리는 다수의 판단, 혹은 적어도 평균치 사람들의 판단을 따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열심히 따라 하는 개인들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의 심리가 '관습적 판단'이라고 일컫는 것을 만들어낸다. (본문에서 재인용)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에 급급했던 과거에 비해 오늘날 우리는 "선택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선택 장애'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을까. 당장 외식을 한다고 해도 무얼 먹을지 한참을 고민하게 된다. 짜장면 짬뽕 딜레마는 추억이 되었다. 음식 문화가 발달하면서 수백 수천 가지의 요리들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수없이 쏟아지는 상품 광고와 인터넷 정보도 우리를 현혹한다. 이 어지러운 선택의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얼까. 어떤 선택이 우리에게 보다 이롭게 작용할까. 《모방사회》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다.
심리학자들이 뉴런 하나하나가 아닌 인간의 생각 자체를 연구하듯이, 이렇게 세계적이고 '집단적인 아이디어'의 사회를 연구할 때는 개인을 다루는 방법과 달라야 한다. 한 사람이 내리는 결정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어도 인구 집단 전체의 결정들이 모여 집합을 이룰 때 나타나는 효과는 복잡할 수 있다. 이처럼 세계적이고 커뮤니케이션으로 넘쳐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사회라는 바다를 한없이 떠돌며 항해한다. (본문 중에서)
《모방사회》는 모방 행위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적응 반응이라고 강조하는 한편 우리 삶에서 모방 본능이 어떤 형태로 작용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우리가 독립적 선택이라고 자부하는 많은 것들(지난 저녁에 먹은 xx치킨, 헤어스타일, 특정 어휘 사용, 글씨체, 선호하는 브랜드 등등)이 실은 "편파적인 선입견에 물든 사회학습"의 결과라는 것을 일깨운다. 인류학 교수와 마케팅 전문가로 구성된 저자들은 사회과학적인 근거와 예시, 도표 등을 제시하면서 단순히 따라하는 행위에서 나아가 특정 상황에서,누구를, 어떻게 모방하느냐에 따라 변형되는 사회적 영향력의 방향과 규모를 예측하고 있다.
'영향력'이라는 어휘는 대학가에 폭포처럼 쏟아지면서 가속도가 붙고 진화하면서 가지를 쳤다. 그 와중에 차이니즈 위스퍼스 게임 같은 돌연번이를 만들어냈다.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개인들이 영향력의 의미에 대해 자기만의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좀 더 오랜 시간을 두고 관찰하면, 이것은 마치 공통의 근원을 가진 언어가 여러 가지 언어로 발전하는 현상과 비슷하다. 로망스어가 수세기에 걸쳐 여러 언어로 갈라진 것처럼 말이다. (본문 중에서)
바틀비의 비극은 《모방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바틀비는 (사회규범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면서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이야기 곳곳에서 바틀비는 유령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바틀비를 특징 짓는 창백한 외모와 고집스러운 침묵은 그가 사회적으로 유령적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명성과 평판이 좋은) 다수의 사람들을 모방하는 안전한 선택을 거부한 바틀비는 끝내 유령이 되고 만다. 한편으로 바틀비는 무분별한 모방 사회에 경각심을 심어준다. 개인의 의지와 개성을 죽이면서 맹목적으로 타인을 따라하는 것이야말로 유령의 삶이라는 메시지를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방사회》에서 역설하는 내용도 같은 맥락이다. 개인의 선택과 사회 현상의 밑바닥에 뿌리 내린 모방 본능을 인식하고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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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ess whispers: 하나의 메시지를 옆 사람에게 전달해, 여러 사람을 거치는 동안 그 메시지가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보는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