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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 : 나는 카메라다 ㅣ 비비안 마이어 시리즈
비비안 마이어 지음, 박여진 옮김 / 윌북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영원히 지속되는 건 없다고 생각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해. 이건 바퀴야. 일단 타면 끝까지 가야 하는 바퀴. 그러면 다른 누군가도 끝까지 가볼 기회를 갖게 되겠지.
- 비비안 마이어 Vivian Maier
평생을 미혼의 보모로 살았던 여성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의 작품집이다. 독특한 구도와 기발한 표현 방식이 시선을 끄는230여 점의 사진들을 수록하고 있다. 마이어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마빈 하이퍼만의 소개글도 매우 흥미롭다. 40쪽 분량의 짧은 글에서 하이퍼만은 마이어의 고독한 생애와 복잡한 성격을 입체적으로 전달한다. 마이어가 남긴 물건들(엄청난 분량의 필름들, 카메라, 직접 쓴 쪽지들, 의료기록, 영수증, 연하장, 여행안내 책자, 옷과 구두, 머리카락이 담긴 봉투...)과 생전에 마이어를 알고 지낸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그녀의 삶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한다. 마이어의 사진들만큼이나 신비하고 내밀한 그녀의 삶은 대중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독특한 억양과 걸음걸이, 유행을 초월한 실용적인 차림새, 헝클어진 머리칼, 화장기 없는 얼굴, 무표정. 한 지인은 그런 마이어를 다른 시간에서 온 사람 같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인상적인 몇몇 일화와 증언에 등장하는 마이어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지적이고 자유분방한 '코닥걸'의 이면에는 폐쇄적이고 인색하고 냉담한 괴짜 예술가의 얼굴이 숨어 있다. 부모의 이혼과 오빠와의 이별(여섯 살 위의 오빠 찰스는 입양된다)로 외롭고 불안정했던 유년기가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성인이 되고 생을 마감한 순간까지도 마이어는 가족과의 유대가 거의 없이 가정집을 전전하며(보모로 일하며) 홀로 생활한다. 제한적이고 고립적인 삶에서 카메라는 마이어를 세상과 이어준 유일한 통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중반부터 2009년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마이어는 엄청난 분량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너무 찍어대는 통에 스파이라는 의심을 샀을 정도였다. 마이어는 뷰파인더를 통해 일상의 순간들을 담담하게 응시하고 있다.남성과 여성, 노인과 아이, 흑인과 백인, 상류층과 빈곤층, 개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교차하고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포즈를 세련된 방식으로 포착해 낸다. 이 사진집에 실린 사진 대다수는 20세기 뉴욕과 시카고의 거리 풍경을 담고 있다. 사고 현장을 적나라하게 담아낸 사진이 있는가 하면 손깍지를 낀 연인들처럼 감상적인 사진도 있다. 발목이나 엉덩이를 쑥 들이미는 장난스러운 사진, 벌쭉 미소 짓게 만드는 사진들도 있다. 어떤 사진은 오래도록 시선을 붙들어 두면서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2007년 심각한 빈곤 상태에 처한 마이어의 재산 일부(개인 소지품과 필름을 보관한 다섯 개의 창고)가 경매에 팔렸다. 마이어가 보관해 온 사진 상자에는 엄청난 분량의 인화된 사진들과 인화되지 않은 필름들이 담겨 있었다. 30만 장에 달하는 네거티프 필름을 구매한 부동산 중개업자인 존 말루프가 세상에 사진을 공개하기까지 마이어는 묵묵히 사진만 찍으면서 살았다. 일정한 거처 없이 가정집을 전전했던 마이어는 사진을 인화하고 보관하기가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천여 통에 달하는 인화되지 않은 필름들이 곤궁한 그녀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한편으로 인화되지 않은 필름들은 사진에 대한 마이어의 철학을 함축하고 있는 것도 같다. 마이어에게 사진은 인화해서 보거나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마이어는 휴대용 녹음기에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자기 독백을 녹음하기를 즐겼다. "이건 바퀴야. 일단 타면 끝까지 가야 하는 바퀴." 이 문장은 마이어가 녹음한 자기 독백 중 일부이다. 마이어에게 사진은 "바퀴" 같은 것 아니었을까.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타면 끝까지 가야 하는" (삶과 동급으로서의) 신성한 의무 같은 것 말이다. 다시 말해, 카메라(사진 찍는 행위)는 마이어가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방식, 마이어가 택한 가장 정직한 포즈가 아니었나 싶다. 다른 장소, 다른 각도에서 찍은 셀프 포트레이트들은 하나 같이 표정이 없다. 매순간 그녀는 삶의 유한성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카메라와 녹음기에) 순간을 기록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무표정으로 굳어진 저 얼굴은 깊은 공동(空洞) 같이도 보인다. 저 아득한 공동으로부터 울려오는 하나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꽉 붙들고 있다. "영원히 지속되는 건 없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