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에 대한 재발견


이창호가 지닌 덕목은 워낙 많아서 한두 가지로 정리되지 않는다. 인간적 품성, 승부사적 자질 어느 쪽을 막론하고 두루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번 상하이에서 치러진 제6회 농심배 최종라운드를 동행하면서 나는 그의 ‘전혀 새롭지 않은(?)’ 모습들을 ‘매우 새롭게’ 만나곤 했다. 이창호 캐릭터에 대한 내 나름의 복기(復棋)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때때로 그는 승부사라기보다 도인(道人) 쪽에 가까웠고, 대중적 인기인은커녕 수도승 같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곤 했다. 그 조용하기 그지없는 몸짓이 한 번 펼쳐질 때마다 5명의 자객(刺客)들은 차례로 쓰러져갔다. 외경(畏敬)과 두려움의 5일 간이었다.


<성실성>

금강산 대국 사흘 만에 또 한 번 반복된 외지 원정. 폭주에 가까운 스케줄이었다. 일정이 이렇게 밖에 안나오는 걸까. 한국기원 스케줄러를 향해 이창호는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지만 그는 눈자위가 푸석푸석한 채로 가장 먼저 인천 공항에 나타났다. 그리고 묵묵히 비행기에 올랐다. 평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방식 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약속에 늦는 법이 없다. 절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그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근성>

첫날 대국에 앞서 오전에 열린 기자회견. 이창호 장쉬 등 오후에 대국할 당일 출전 기사들은 빠졌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한국 팀 김인 단장은 “우리 선수단이 포기한 모양이다”라며 탄식했다. 그 소식을 나중에 전해들은 이창호가 펄쩍 뛰었다. “그럴 순 없죠. 꼭 이기겠습니다.” 양처럼 순하기만 한 이창호의 손바닥엔 매(鳶)의 발톱이 숨겨져 있었다. 훗날 그는 ‘김국수님’의 자극 요법이 큰 힘이 됐다며 웃었다.


<자기 조절>

뒤로는 올 들어 1승 5패란 최악의 전적. 앞에 보이는 것은 5연승이란 태산 같은 짐. 그는 도착 직후부터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차단했다. 동행했던 한국 팀 관계자들과 식사조차도 어울리지 않았다. 마음이 풀어질 수도 있고 부담감이 가중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체력 비축의 의미도 강했다. 베이징서 사업을 하는 한 살 아래 동생 영호 씨가 날아와 형의 일거수일투족을 수발했다. 식사는 동생이 거의 매 끼를 사다 날라 해결했다. 호텔 방에서 가족들의 근황을 반찬삼아 함께 식사를 마치면 날이 어둑해지곤 했다. 형이 바둑판을 당겨놓는 동안 동생은 방을 치웠다.


<치밀함>

첫 날 도착 후 바둑판부터 요청했다. 그리곤 미리 준비해 온 다음 날 대적할 상대의 기보를 놓아보며 포석을 구상했다. 제한 시간 1시간짜리 준(準) 속기인 농심배는 사전 구상이 잘 맞아떨어지면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매일 밤늦게 까지 다음 ‘제물’감을 바둑판 위에 눕혀놓고 숙달된 조리사처럼 기보를 해부했다. 이 번 대회 기간 중 그가 거의 매 판에 걸쳐 초속기로 빠른 운석(運石)을 보인 이면엔 이 같은 비결(?)이 있었다.


<여유>

중국 기자들은 집요했다. 4명의 중, 일 기사들이 모두 탈락하고 21세의 애송이 왕시만을 남겼을 때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처음 만나는 상대에겐 약한 모습을 보여 왔다. 혹시 그 전통대로 마지막 단계에서 무너지는 건 아닐까?” 이창호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승부란 상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맞상대는 안 해봤어도 간접적으로 기질(棋質)을 파악할 수 있다.” 그 바둑은 이번 이창호의 5승 가운데 가장 편한 바둑 중 한 판이 됐다.


<극복력>

초1류 승부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2가지. 하나는 승부처를 찾아내는 동물적 후각이고, 또 하나는 승부처에서 자기 쪽으로 물줄기를 돌려내는 감각이다. 출국 비행기 안에서 이창호는 "농심배 우승을 하긴 해야겠는데, 그러려면 상하이에서의 첫 판, 즉 장쉬와의 대결이 결정적 승부처인 것 같다"고 했다.

그 바둑서 이창호는 초반 여유 있는 우세를 잡고도 갑자기 두 세 차례의 헛손질을 범해 미세한 형세까지 쫓겼다. 엄청난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막판 혼신의 힘으로 결정타를 꽂아 넣는데 성공한다. 극적 5연승으로 대회가 끝난 뒤 그는 “장쉬와의 첫 판 고비를 넘은 뒤 둘째 판부터는 컨디션이 상승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고 술회했다. 출국 직전 최철한에게 당한 3연패, 연 초 1승 5패로 몰렸던 난조는 그 뒤부터 급격히 물줄기를 돌렸다. 이창호만이 할 수 있는 위기 관리 능력이자 극복력이었다.


<소탈함-예의바름>

스타들에게 이른바 ‘팬’이란 사실 무섭고도 성가신 존재다. 특히 중국 내에서 이창호에 대한 인기는 일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는 가는 데마다 쫓겼다. 심지어는 시상식 도중에, 화장실 갈 때까지도 사인 부대는 강력한 공격을 감행하곤 했다. 그러나 이 번에도 역시 이창호의 찡그리거나 거절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요즘에야 어디 사인으로 끝나던가? 디지틀 카메라를 내밀면 포즈도 취해줬다. 인천 공항 개선(凱旋) 후에도 팬이나 이창호나 전혀 달라짐 없이 똑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꾸준함>

이상의 덕목들은 이창호란 이름의 시계 속 ‘부속 장치’같은 것 들이다. 앞서 열거한 ‘부속’들 가운데 빠진 것도 제법 있을지 모른다. 어찌됐건 이 시계는 지난 20년 간 해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수 십 년 간 계속 째깍거릴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중간에 잠시라도 쉰다면 그건 시계도 아니지. 이창호는 잠시 반짝했다가 한 동안 잠수해 버리고, 다시 나타나 한 바탕 소동을 벌이고 또 다시 사라지는 류의 기사와 구별된다. 그의 진짜 최대의 덕목은 바로 이 ‘꾸준함’이 아닐까.


‘난청지역’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는 데 칭찬만하고 있을 순 없다. 그도 인간인지라 분명 부족한 점도 있는데, 이 기회를 빌려 마음먹고 흉도 좀 봐야겠다.

(1)절대로 튀지 않는다=어떤 경우에도 과도한 쇼 맨쉽을 피한다. 시상식 때 꽃다발을 높이 쳐든다든가, 하다못해 뛰쳐나온 응원단과 하이 파이브를 나눈다든가…하는 것은 그의 사전엔 없다. 답변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상대는 훌륭한 기사입니다” 는 등 판에 박은 모범 답안뿐이다. 이세돌과 둘을 섞어 반죽한 뒤 다시 둘로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이런 거야 뭐 아무래도 좋다. 진짜 큰 문제는 다음 2번이다.

 

(2)이창호는 모기 띠?=인터뷰 할 때 그를 중심으로 한 반경 30센티 밖은 난청지역이다. 도대체 몇 데시벨 쯤 될까. 모기 소리보다 결코 더 크지 않다. 국제 대회 때면 한국 기자들만 애먹게 마련이어서 더욱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창호의 답변은 외국 기자들에겐 통역을 통해 우렁차게 전달되는데 반해(통역자만 애먹을 뿐이다), 한국 기자들은 ‘이창호의 한국말’을 직접 ‘해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 기간 동안에도 대국 직후 인터뷰를 앞두곤 '최전방’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이런 정도는 흉이라고 할 것도 못된다. 이창호에게 그런 약점이 애교에 불과하듯 이 글에서도 그냥 애교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이창호와 같은 나라 사람이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지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 것은 거의 축복 수준이다.

중국 바둑 팬 중엔 막무가내식 맹목적 국수주의자도 많지만 이창호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응원하는 팬들도 적지 않다. 이번 대회가 한국의 대 역전 우승으로 끝난 뒤 중국 인터넷 사이트엔 “이창호의 5연승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를 존경한다”는 댓글이 수도 없이 올라왔다.

체단주보 시에레이(謝銳)기자 같은 사람은 평소에도 이런 얘기를 한다. “이창호는 바둑에 관련된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자 자존심이다. 이창호처럼 성실하고 겸손하며 노력하는 천재가 쉽게 무너진다면, 바둑 자체의 위상은 물론이고 바둑 종사자 모두가 엄청나게 초라해질 것이다. 그 때를 상상하면 소름이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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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이 되기 위한 즐거운 글쓰기
루츠 폰 베르더. 바바라 슐테-슈타이니케 지음, 김동희 옮김 / 들녘미디어 / 2004년 9월
구판절판


논리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자신을 -197쪽

갈고 닦는 '나'는 또 다른 '나'에게 정신적인 질서를 세우라고 호소한다.
철학적인 글쓰기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로 성장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나'는 자신을 분석하고 통합함으로써 철학자가 되어가며 그 과정에서 더욱 강해진다. 그와 더불어 글속의 '나'는 실재의 '나'를 뛰어넘으려 하고, '나'의 외부에 있는 절대성을 영혼을 근거로 해서 파악하려 한다.
철학적 글은 다음과 같은 진리에 입각하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
'나'에 대한 철학적 글은 여러 철학자들이 시도한 바 있다. 몽테뉴는 자신을 9년 동안이나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관심을 내부에 두고 있다‥‥‥‥누구나 바깥쪽에 한눈을 판다. 그런데 나는 내 안을 들여다본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에게만 관계가 있다 나는 내 자신의 내부에 원을 그린다. "
몽테뉴의 '나'에 대한 연구결과는 이렇다. 즉, '나'는 비약이 심하고 기분의 변화가 많다 도대체 파악이 불가능하다.
"나는 나의 상태를 파악할 수 없다. 그 대상은 자연 도취상태에서 비틀거리며 왔다 갔다 한다. "
데카르트의 󰡔성찰󰡕은 개인의 생각과 개인의 존재를 규명하려 했기 때문에 철학적인 글쓰기의 귀감이 되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출발점에서 어떻게 감각적인 삶의 세계를 이성으로 뛰어넘을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길을 제시했다.
아일랜드 철학자 버클리는 '나'를 의지와 동일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198쪽

실험을 제안했다.
"자궁 속의 아이를 지켜보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에 주의하라 정신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감각기관에 의해 지각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너는 너의 천성을 믿게 될 것이다 "
자신의 내면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 루소의 『참회록』도 철학적 글쓰기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참회록』을 시작한다.
"나는 전례가 없었던, 그리고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일을 시작하고 있다. 나는 나의 동료들에게 한 인간을 자연 그대로의 진리 속에 드러내 보이고 싶다. 그런데 그 인간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도 철학적인 글쓰기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이 세상을 지옥, 불안 지루함, 나 자신 그리고 너로 인식했으며 그것들을 철학의 대상들로 삼았다."
철학자인 바더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분석했다.
"위대한 사상은-나의 내면적인 인생 전체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내 일기장 속에서 언젠가 볼 수 있게 될 것이다-내 전체 영혼을 가득 채운다. "
철학적 글쓰기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그리고 그 후 실존주의가 유행하면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나'의 약점도 알려지게 되었다. 카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내가 불합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의'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 "자아는 세상에서 물러-199쪽

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내가 사람들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것이다‥‥자아'는 지독한 고독을 경험한다. ""'자아'는 무가치를 경험한다.‥ ".자아'는 지옥에 산다. 지옥이 여기 있다.
"사르트르는 '나'를 해충으로 보았다 즉, "나는 마을에 페스트를 옮기는 병원균이다" 그리고 '나'는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는 이세상의 위인도 아니고 그런 위인과 교제하지도 않는다." '나'는 전체인생을 조망하지도 않는다. "나는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자기 인생을 조망할 수 없다고 느꼈다. " 그렇지만 '나'는 모든 면에서 자유롭다. "누구나 자기 인생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 '나'는 원래 고독한 존재이다. "나는 끝없는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즐긴다. - "·나'는 자본주의, 의회주의, 중심화, 관료주의의 생산품이다.
"하지만 철학적인 글쓰기는 방금 언급한 예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정지되어 있는 상태를 살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와 초월성과'나'가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에 대해 연구한다.
파스칼은 일기에서 자신의 미약함과 동시에 위대함도 알아냈다. "팽창을 통해 우주는 나를 포함시킨 다음 점과 같이 만들어 버렸다. 나는 사유를 통해서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 " "나는 단지 자연의 가장 연약한 갈대일 뿐이지만, 생각하는 갈대이다‥‥나'는 그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신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 이로써 파스칼은 허무주의에 바탕을 둔 '나'를 극복할 수 있었다
작가인 노발리스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나'는 나 이상이다. "나는 너다. "-200쪽

키에르케고르는 자아 숭배를 극복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내재적인 신(神)은 없다 ‥‥단지 실존자들만을 위해서 신은 존재한다.
작가인 테오도어 헤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공포에 떨면서 다음 과같이 썼다. "고통과 어려움이 커질 때마다 나는 믿기 어려운 신에게 나를 맡긴다. " 해커는 '나'의 고립을 다음과 같은 말로 극복하곤 했다. "나의 파트너는 바로 위대한 '너'야.
"종교 철학자인 엘리아드는 '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출생 전의 상황을 기록했다. "가끔 순수한 상태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 무엇이었는지 처음의 순간으로 돌아가려는 정향이 있고, 그것을 반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심리학자 융이 정신병으로 고생하는 동안 가시화되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방법을 이용해서 무의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관찰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철학적 글쓰기는 '나' '세계','초월성'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이제부터 철학적 글쓰기를 위한 단계적인 훈련과정을 소매할 것이다
훈련단계를 쫓아 무엇이 자신을 힘들게 했는지에 대해 쓰다 보면 소진된 에너지가 조금씩 회복되면서 매일 조금씩 내부의 성을 쌓아 가게 될 것이다. 내세를 바라볼 수 있는 탑과 함께. 철학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허무주의를 방어하는 데 공헌을 하는 셈이다.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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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2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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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장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곧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알리는 것이 될 것 같아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백내장의 후유증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라도 기존의 기억을 이용해 계속해서 물건들을 볼 수 있도록 물건들 사이의 거리와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아내는 공부를 조용히 집요하게 했었다. 나중에는 예기치 않게 냄새들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어둠 속에서는 부피나 색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 있는 힘으로 구분되었고, 그녀를 체념으로 인한 수치심으로부터 결정적으로 구원해 주었다. 그녀는 방 안의 어둠 속에서도 바늘에 실을 꿰고, 옷에 단춧구멍을 낼 수 있었고, 우유가 언제 끓을 것인지도 알아냈다. 각각의 물건들이 있는 장소를 어찌나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지 때때로는 자기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그녀 자신도 잊곤 했다. -69쪽

한번은 결혼반지를 잃어버린 페르난다가 집 안을 온통 뒤집어놓았었는데, 우르술라가 아이들의 침실 까치발에서 찾아냈었다. 다른 사람들이 신경을 쓰지 많고 사방을 돌아다니는 동안에 우르술라는 단순히 그들이 갑자기 자기와 절대 부딪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의 네 가지 감각을 동원해 그들을 감시하곤 했는데, 마침내 집안 식구들이 각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날마다 같은 길을 반복해서 다니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같은 시각에 거의 같은 발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이 매일매일의 자잘한 습관에서 벗어날 때만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래서 페르난다가 반지를 잃어버리고는 낙담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르술라는 그날 페르난다가 했던 행동 가운데 다른 날과 달랐던 점은 전날 밤에 메메가 빈대 한 마리를 발견해 페르난다가 아이들 침대 매트리스들을 햇볕에 내다 말린 것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매트리스 청소를 할 때 아이들도 도왔기 때문에 우르술라는 페르난다가 반지를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유일한 장소인 침실 까치발에 빼두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반면에 페르난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찾는 일이란 일상의 습관 때문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자기가 일상적으로 지나다니는 길들에서만 반지를 찾아했는데, 그래서 흔히들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데는 그토록 힘이 드는 법이다.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2 』P.69~70.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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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서주의자의 책/ 표정훈 지음 / 마음산책 

 

 

  

 

 

 

서울, 1969년 겨울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 ─ 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드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軍用 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 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에서,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새뮤얼 베케트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박경리는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중학교 1학년이던 송승환이 TV 연속극 〈똘똘이의 모험〉에 출연했고, 미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의 차가 채퍼퀴딕 다리 밑으로 떨어져 동승했던 28세 여비서가 익사했다.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준공되었고, 경인고속국도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으며, 아폴로 11호 착륙선 이글호가 달의 ‘고요의 바다’에 착륙했고, 소련 유인우주선 소유즈 4호와 5호가 최초로 우주 공간에서 도킹했으며, 보잉747 여객기가 첫 상업 비행에 나섰다.


지미 핸드릭스의 공연을 끝으로 ‘우드스탁 69(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1969)’가 성황리에 치러졌고, 보성중학 3학년 김의철이 첫 창작곡 〈뭉게구름〉을 작곡했고, 레드 제플린이 첫 앨범을 내놓았으며, 조영남은 〈딜라일라〉로 김추자는 신중현으로부터 받은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로 각각 데뷔했고, 비틀스는 ‘옐로 서브머린’ 앨범을 내놓았으며, 남산 중턱에는 친일 혐의자 김경승이 조각한 백범 김구의 동상이 세워졌고, 문희, 남정임, 윤정희가 스크린을 석권하고 있는 동안 피터 폰다(제작 및 출연), 데니스 호퍼(감독 및 출연), 잭 니콜슨 등이 〈이지 라이더〉에서 오토바이를 탔다.


미국 프로야구 뉴욕 메츠는 창단 7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며, 메이저리그의 마운드 높이가 15인치에서 10인치로 낮아졌고, 뉴욕 경찰이 게이바 ‘스톤월’에 들이닥쳐 동성애자들을 거칠게 연행했으며, 한국 중앙정보부는 위장 간첩 이수근을 체포했다고 발표했고, 리비아의 청년 장교 가다피가 왕정을 무너뜨리고 실권을 장악했으며,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월드컵 예선전에서 감정이 극으로 치달은 끝에 5일간 전쟁을 벌였고, 박정희 대통령의 뜻대로 3선 개헌안이 통과됐다.


천주교 서울교구장 김수환 대주교는 추기경이, 야세르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됐고, 육군사관학교 교관 신영복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됐으며, 미 공군 B-52 폭격기 60여 대가 캄보디아 상공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중공’과 소련이 우수리강 국경 지대에서 무력 충돌했다. 우리나라 정기발행복권의 효시인 주택복권이 처음 발행됐으며, 미국 벨 연구소가 유닉스UNIX 운영 체제를 개발했고, 오늘날 인터넷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아르파넷ARPANET이 시작됐다.


어느 해든 그렇겠지만 1969년에도 세상은 숨가쁘게만 달렸다. 그해 마지막 달 어느날의 《동아일보》 1면을 보니, 미국이 대한對韓 원조를 5천만 달러 삭감했고, 비축미를 확보하기 위해 현물상환 조건으로 일본쌀 50만 톤을 차입했으며, 통일원이 ‘북괴’의 유엔 인정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남북한 총선’ 대책 연구에 착수할 계획임을 국정감사에서 밝혔다. 1969년에 시작된 아르파넷을 원조로 하여 발전한 인터넷으로 옛날 신문을 검색할 수 있게 된 세상이니, ‘북괴’ ‘대한 원조’ ‘일본쌀 차입’ 등의 표현은 차라리 수백년 전의 것만 같다.

 

 첫 아이가 태어난 날 모든 신문을 한 부씩 사놓았다는 분이 있다. 아이가 성인成人이 됐을 때 그 신문 뭉치를 건네줄 계획이라고 한다. 그럴듯하다. 만일 내가 아버지로부터 그런 선물을 받았다면, 광고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면을 샅샅이 훑어 읽었을 것 이다. 모니터에서 PDF 파일로 그 내용을 볼 수 있다 해도, 그날 부모가 직접 산 신문 실물이 주는 각별한 느낌에야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그해 마지막 달의 어느날’은 나의 생일이다. 날짜만 고려한다면 1679년 토머스 홉스가 세상을 떠난 날이고, 1795년 토머스 칼라일이, 1875년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태어난 날이며, 1912년 그날에는 전쟁이 일어났다. 독일 함대가 네 척의 미 군함을 침몰시키고 호놀룰루를 포격했던 것이다.



다음날 독일과 미국은 전쟁을 선포했고 사회주의자들은 독일과 미국에서 총파업에 돌입했다. 그런 전쟁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아마 그럴 것이다. 한 주 만에 끝난 이 전쟁은 역사가 아닌 소설,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가의 탄압을 적나라하게 그려 레닌의 극찬을 받기도 한 작품, ‘소설 자본론’이라는 별칭이 무색하지 않은 잭 런던의 『강철군화』(차미례 옮김, 한울)에 나오기 때문이다.



1969년 그날의 《동아일보》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1면 하단의 책 광고다. ‘인간의 욕망을 풀어주는 기상천외한 마력의 서書! 천天과 지地를 마법단지에 담아 남과 여 그 쾌락의 모험을 한껏 펼친다. 무삭제원본비장판 전8권.’ 이 문구만으로는 도대체 어떤 책인지 감을 잡기 힘들 것이다. 다만 ‘쾌락의 모험’이라는 표현이 묘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광고 문구를 좀더 보자.



폭풍처럼 이는 격상激賞


삼국지와 수호전을 압도하는 무진한 감흥!


샘물처럼 넘쳐나는 마약적인 매혹의 보고!


사상 가장 화려한 꿈의 도취, 불멸의 고전!


아름다운 밤의 영상, 놀라운 관능의 추구!



책은 다름아니라 『천야일야千夜一夜』, 즉 ‘아라비안 나이트’ 혹은 ‘천일야화千一夜話’ 번역서다. 위의 광고 문구 뒤로는 이런 내용이 이어진다. ‘이 기나긴 겨울밤 천야일야의 마녀신은 당신을 황홀경으로 안고 날읍니다. 동서문화사 창업 15주년 기념출판 전8권 특가 7,000원 7개월 월부 공급.’


1969년, 일본 최초의 성인용 애니메이션 영화 〈천야일야 이야기 千夜一夜物語〉(감독 데즈카 오사무)가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했다. 데즈카 오사무는 이듬해에도 성인물 〈클레오파트라〉를 발표했지만 흥행에 실패하여 성인용 애니메이션은 이후 오랜 동안 만들어지지 못했다. 〈천야일야 이야기〉와 〈클레오파트라〉는 성인용답게 누드와 정사 장면이 가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서문화사〉의 『천야일야』는 영국의 탐험가, 외교관, 동양학자로, 30여 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 Richard Francis Burton(1821~1890)의 『아라비안 나이트』를 오정환 씨가 옮긴 것이다. 오정환 번역의 『아라비안 나이트』는 현재는 〈명문당〉에서 전10권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버턴의 영역본을 옮긴 것인지 일역본을 옮긴 것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영역본과 일역본을 모두 저본底本으로 삼지 않았나 싶다. 일역본은 1929년에 오야 소이치大宅壯一(1900~1970) 번역으로 〈주오고론샤中央公論社〉에서 12권으로 출간됐고, 1967년에 〈슈에이샤集英社〉에서 『千夜一夜 : 全譯』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온 적이 있다.


문필가이자 저널리스트 오야 소이치는 1969년에 데즈카 오사무 감독의 〈천야일야 이야기〉 제작 과정에도 참여했으며, 자신이 수집한 방대한 단행본 및 잡지 자료를 오야 소이치 문고로 남긴 장서가이기도 하다. 6, 7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나온 서양의 고전 작품 번역서들이 정확히 어떤 일역본과 상관 있는지 조사해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잊혀진 원본들’이라고나 할까?


내가 태어난 해와 태어난 날짜에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으며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물론 내가 태어난 해와 날짜라는 것이, 다른 해와 날짜에 비해 지금의 나 자신에게 더 큰 의미와 중요성을 갖는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금의 많은 현자賢者들이 충고하듯,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니던가.



작가 로렌스 G. 더렐의 말이라고 기억한다. “누구에게나 두 곳의 출생지가 있다. 몸이 태어난 출생지가 있고, 삶의 진실과 세상의 실재를 깨달은 곳이 있다.” 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몸이 태어난 시간이 있다면 ‘삶의 진실과 세상의 실재를 깨달은 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자꾸만 ‘서울 1969 겨울’이라는 내가 태어난 장소, 연도, 계절에 편파적으로 마음이 끌린다. 아직까지 삶의 진실과 세상의 실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한 욕망에 관한 기억


나는 태어나 지금까지 두 번 책을 훔친 적이 있다. 첫번째는 중학교 1학년 때 학급 문고에서 에세이집 한 권을 훔친 일이다. 새빨간 천 표지만 기억나고 정확한 제목이나 책 내용은 잊어버렸다. 우리나라 작가들과 이른바 명사들의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이었는데, 그걸 도대체 왜 훔치려 했는지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청소 당번이었던 날 몰래 책가방에 넣어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꺼내본 순간 쿵쾅거리던 가슴! 하지만 정작 끝까지 다 읽지도 않았고, 읽으면서 실망했던 기억만 난다. 그 책에 관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까닭이 어쩌면 절도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두번째로 훔친 책은 ‘중국 고전 해제집’이었는데, 인사동의 어느 술집 겸 식당에서 술자리를 파하고 일어설 때 몰래 집어들어 책가방에 넣었었다. 하지만 그 책 역시 몇 번 들춰보지도 못했음은 물론, 이사할 때 잃어버리고 말았다.


… (하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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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상·하/ 샨사 지음/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 

 

 

 

 

끝없이 이어지는 달들, 불투명한 세계, 으르렁거림, 돌풍, 지진. 휴식의 순간은 드물었다. 무릎에 이마를 대고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나는 생각하고, 귀 기울이고, 존재하지 않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거기 생명이 있었다. 천천히 자전하는 별이, 투명한 진주가. 나는 장님이었다. 내 눈은 매일 조금씩 지워지는 다른 세계, 다른 삶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색깔들은 이미 퇴색해버렸고, 이미지들도 흐릿하게 변해버렸다. 귓가에는 여전히 외마디 비명소리와 희미한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아득한 기억이 날 짓누르고, 짙은 우수憂愁가 날 태웠다. 난 누구지? 내 발치에 웅크리고 있던 죽음에게 물었다. 죽음은 으르렁거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웃음소리,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들이 틀림없어요, 대감. 아, 움직여요. 성깔이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누가 되든, 그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 무한함에 싫증이 나 있었다. 희망하고, 기다리고, 내 자신,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에 싫증이 나 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날 진정시켜주었다. 나는 흘러내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결코 태양이 뜨지 않는 내 하늘 속에서 어린 소녀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 부드럽고 순결한 목소리가 날 잠재워주었다. 내 언니, 나는 그녀에게 큰 불행이 닥칠까봐 두려웠다. 손 하나가 날 어루만지려 했다. 하지만 벽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었다. 어머니, 내 생각의 벽에 비치는 그림자여, 당신은 내가 당신의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버린 늙은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호수 깊은 곳, 세피아빛 물속에서 나는 뒤척이고, 움츠리고, 기지개를 펴고, 빙글빙글 돌았다. 몸이 하루가 다르게 붓고 무거워져 날 질식시켰다. 바늘 끝, 모래알갱이, 물방울에 비친 태양이 되고 싶었던 내가 부풀어 터지는 살, 주름과 피의 산, 바닷괴물이 되어갔다. 어떤 숨결이 날 들어올려 흔들어주었다. 나는 걸핏하면 성깔을 부렸다. 내 자신에게, 간수였던 여자에게, 나의 유일한 친구인 죽음에게 화를 냈다.


그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들에게 조照라는 이름을 붙여줄 거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출산준비의 소란이 나의 명상을 방해했다. 그들은 옷, 기저귀, 잔치, 뚱뚱하고 살결이 희며 튼튼한 유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귀신들이 내 영혼을 앗아갈까 두려워 내 이름을 입 밖에 내는 것을 금했다. 그들은 그들의 운명이 끝나는 바로 그곳에서 내가 다시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호들갑스럽고 상냥하고 탐욕스러운 그 존재들이 불쌍했다. 그들은 내가 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그들 세상을 파괴하리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화염으로, 얼음으로 해방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물이 들끓고 있었다. 성난 파도가 내게로 밀려와 부서졌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호흡에, 진통의 경련에 집중하며 두려움에 대항해 싸웠다. 쇄도하는 늪의 물결은 나를 좁은 하구로 몰아넣었다. 나는 바위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몸에서 피가 났다. 피부가 찢어졌다. 머리가 파열됐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누군가가 내 발을 잡아당기고는 엉덩이를 때렸다. 거꾸로 들린 채 나는 울음을 토해냈다. 누군가가 피부가 벗겨질 듯 따가운 천으로 날 감쌌다. 나는 불안으로 가득한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들이요, 딸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가 나를 안아 배내옷을 찢을 듯이 벗겨내려 했다.


한 여인의 신음소리에 그가 동작을 멈추었다.


“또 딸이에요, 대감.”


“아!” 그가 탄식하며 눈물을 쏟았다.

 

 십여 명의 여자들이 나의 성장을 보살폈다. 세 명의 유모가 번갈아가며 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나의 왕성한 식욕이 그들을 겁먹게 만들었다. 나는 벌써 웃었다. 흑진주같이 검고 큰 눈이 안구 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나는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고 밤낮없이 세상을 바라보았다. 정상적이지 못한 나의 행태에 불안을 느낀 어머니가 귀신 쫓는 중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 안에 터를 잡은 악마를 몰아내지 못했다.


나는 결국 그들의 호들갑에 지치고 말았다. 그들이 날 가만히 내버려두도록 나는 망사 모기장 속에서 거짓잠을 청했다. 한 여자는 요람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고, 또 한 여자는 향기 가득한 세계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몇 안 되는 날벌레를 쫓기 위해 부채질을 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창문 너머 먼 곳으로 생각을 띄워 보냈다.


아버지가 절대적 주인인 왕국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정前庭은 남자들에게 할애된 공간이었다. 집사, 비서, 회계원, 요리사, 시동, 하인, 마부, 위병, 머슴들이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관료와 군인들이 명령을 받고는 말을 타고 황급히 어딘가로 떠났고, 병사들은 연병장에서 하루 종일 훈련을 했다. 이 남성적인 세계는 규방이 시작되는 주홍색 대문 앞에서 멈춰졌다. 눈처럼 희고 높은 담 뒤에서 늙거나 젊거나 혹은 어리거나 한 여자 수백 명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쪽찐 머리에 꽃을 꽂았고, 비단 허리띠에 옥고리를 달았다.



무덕武德 여덟 번째 해였던 그해,1) 초봄의 파리한 화사함이 유행이었고, 옷들은 크로커스(사프란 속의 꽃`―`역주)의 황색, 수선화잎의 녹색, 버찌의 사랑스러운 분홍색, 호수에 비친 태양의 양홍洋紅색을 띠고 있었다. 청소하는 여자, 하녀, 옷 짓는 여자, 수놓는 여자, 심부름꾼, 유모, 요리사, 감모監母, 여집사, 치장 담당 시녀, 가희, 무희, 그들은 모두 천천히 걸어다녔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해가 뜰 때 일어났고, 해가 질 때 목욕을 했다. 그들은 아버지의 정원을 장식하는 꽃들로, 단 한 사람을 아름답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 활짝 피어났다.


어머니의 차림새는 검소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침소리와 눈초리에 따라 온 집안이 움직였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우아했다. 유행은 한철 나비처럼 지나갔지만, 어머니는 영원한 봄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본가인 홍농弘農 지방 양씨楊氏 집안은 제국에서 가장 지체 높은 서른 개의 가문 중 하나였다. 승상들의 딸이자 조카, 누이이며, 황실 부인들의 사촌, 황제의 가까운 인척인 어머니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보석, 망토, 후광처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절에 시주를 했고, 걸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줬다. 열렬한 불교신자였던 그녀는 채식만 고집했으며, 소란스러운 세상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녀는 정성 들여 경전을 베껴 쓰며 눈부신 광채를 발하는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가기를 꿈꾸었다.


어머니는 차갑고 세심하고 부드러웠다. 날이 선 불투명한 그녀의 부드러움은 내 요람 위에 매달려 있던 옥 원반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늘 그녀가 그리웠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짜증이 났다. 그녀는 며칠 만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날 찾을 때면, 땅에 끌리는 비단 옷자락과 끝없이 긴 모슬린 상의가 내 방의 휘장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그녀의 신발이 닿을 때마다 땅은 쾌락으로 속삭였다. 그녀의 향수가 그녀보다 앞서 왔다. 향수에서는 태양, 눈, 동풍, 행복으로 충만한 꽃부리 냄새가 났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나를 품에 안아주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나는 그녀를 집어삼킬 듯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은 두 장의 빨간 꽃잎이었다. 털이란 털을 모두 뽑은 그녀의 얼굴은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밀어버린 다음, 매미의 날개 모양으로 다시 그려넣은 눈썹 아래의 반짝이는 두 눈에는 떨쳐버릴 수 없는 실망감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원했던 것이다.


 석류꽃이 만발하자 여름이 왔다. 그리고 내 백일이 다가왔다. 어머니는 연못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를 열게 하고 친구와 친지를 초대해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반짝이는 물에 둘러싸인 정자 안에서 나는 이 손 저 손을 타고 돌아다녔다. 그들은 날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하녀들이 층계를 걸어올라와 선물을 내려놓았다. 어떤 부인은 나에게 에메랄드 팔찌를 선물했다. 그녀는 눈이 이렇게 검고 반짝이니 틀림없이 총명할 거라고 말했다. 다른 부인은 은쟁반에 금괴 아홉 개를 얹어 가져오게 하고는 이마가 이렇게 넓으니 좋은 배필을 만나 유복하게 살 거라고 말했다. 또 다른 부인은 금실 은실로 수놓은 화려한 비단 아홉 필을 선물했다. 그녀는 코가 이렇게 반듯하고, 볼이 이렇게 통통하며, 입이 이렇게 동그라니 틀림없이 아들을 여럿 낳을 거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흡족해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내자 사람들이 잔치판 중앙에 비단융단을 펼치고, 포대기에서 날 꺼내 그 위에 앉혔다. 하녀들이 열 가지 가량의 물건을 여기저기 흩어놓았다. 나는 그 자리에 모인, 호화롭게 치장한 부인들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대신 차가운 장난감 하나를 집어, 그것을 들어올리려고 애썼다. 웅성거림이 번져가는 가운데 부인 하나가 입을 열어 평했다.


“이 아이는 아름다움의 분통粉桶도, 고귀함의 옥玉도, 음악의 피리도, 지혜의 책도, 시詩의 붓도, 상商의 주판도, 구도의 염주도 집지 않았어요. 사촌언니, 이 아이의 미래는 아주 특이할 거예요. 사내아이로 태어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래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다른 부인이 아쉬운 듯 또 한 번 반복해 말했다.


“그렇게 아쉬워할 것 없다.” 위엄이 넘치는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시대에는 여자들도 얼마든지 위업을 달성할 수 있어. 예전에 평양平陽 공주는 선왕을 대신해 전장에 나갔다. 전사한 그녀의 장례식 때 황제께서는 나팔을 불고 북을 치게 해 남자와 똑같은 예우를 해주셨지. 네 딸은 하늘의 숨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 툭 불거진 이마, 반짝이는 눈동자, 단단한 턱, 도톰한 입술을 타고났다. 이 아이가 제 아버지의 검을 집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이냐! 얘야, 앞으로 이 아이를 사내처럼 입히고 타고난 운명에 걸맞는 교육을 시키거라. 장군의 딸은 지휘를 좋아하는 법이니라. 이 아이는 장차 훌륭한 무관 집안의 여주인이 될 게다!”


나는 요람에서 세상을 맞이하기보다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픈 욕구를 느꼈다. 두 발을 딛고 설 수 없었으므로 나는 기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걸음은 내 몸에 있는 모든 근육의 공조를 요구했다. 목표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기 위해 입을 벌린 채, 나는 한 팔, 한 다리를 번갈아 들어올려 우주를 가르며 나아갔다.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날 굽어보았다. 검은담비로 안을 댄 비단 망토로 몸을 감싼 그는 먼 곳에서, 아주 먼 곳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그를 보고 있자니 말발굽 소리, 무기 부딪히는 소리, 바람의 울부짖음, 유녀游女들의 미친 듯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에게서 풍기는 짐승의 냄새는 나를 전율케 했고, 그의 갑작스런 입맞춤은 내 뺨을 찢어놓았다.


한 계집아이가 날 유심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홍조 띤 얼굴빛, 수려한 용모, 단단한 다리, 검은 눈동자, 그녀가 끌고 다니는 나무오리에 매료되었다. 나를 요리조리 살펴보던 그녀는 내 손에 손가락 하나를 올려놓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끝내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그 손가락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언니를 아프게 하지 마세요.” 유모가 나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먼 훗날, 아무것도 모르던 이 날처럼 언니가 나에게 자신의 처형자가 되어달라고 애원하게 되리라는 것을.


무덕 아홉 번째 해, 황제가 아들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다. 열두 달 후, 새 황제가 임무수행차 양주揚州에 가 있던 아버지를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이세민의 난이 일어난 이주利州의 도독都督(지방 장관`―`역주)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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