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 ㅣ 사이언스 클래식 2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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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성을 타고 나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그 논란에 대해 인간은 빈 서판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그렇게 제목을 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빈서판>에 대한 비판의 원칙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1. 인간의 모든 행동 특성은 유전적이다.
2. 한 가족 내에서 양육되는 것의 효과는 유전자의 영향보다 작다.
3. 복잡한 행동 특성들의 편차 중 상당 부분은 유전자나 가족의 영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652)

이를 입증하기 위해 거의 분야의 지식을 동원하는 저자의 솜씨와 열정이 새삼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본성이냐, 양육이냐를 논할 때는 양자의 상호작용이라고 햐야 되지 않을까?

본성(nature)이냐 양육(nuture)이냐 대한 강조의 차이는 사회 경제적 상황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회 경제적으로 활기에 차있는 사회에서는 환경의 작용에 의해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양육론이 지배하고 사회 경제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본성론이 지배하게 된다.
즉, 사회 경제적으로 활기에 찬 사회에서는 증대된는 생산에 인간을 원하는 대로 배치시킬 수 있는 양육론이 지배하게 되어 사회적 차별이 약화되며, 침체된  사회에서는 제한된 자원을 지배층이 독점하기 위해 본성론을 동원해 사회적 차별을 강화하게 되는 경향인 것 같다.

본성이냐, 양육이냐에 대한 대양한 최신의 논쟁들을 흥미진진하게 감상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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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책 읽기 - 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
천정환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11월
구판절판


독서학자 모터머 애들러(M. Adler)에 의하면 연애편지 읽기는 가장 모범적이면서도 탐욕적인 텍스트 읽기 방식이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평소보다 훨씬 더 꼼꼼하게 글 자체를 잘 읽으려고 노력하는 경우는 단 하나, 사랑에 빠져서 연애편지를 읽을 때이다. 연애편지를 읽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행간과 여백에 감춰진 의미까지 읽어 내려 한다. 부분의 견지에서 전체를 읽고 전체의 견지에서 부분을 읽는다. 경험과 지적 능력을 최대한 민감하게 발휘하여 문맥을 해석하고, 애매한 구절과 암시 · 함축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말의 색깔, 문장의 냄새 , 구절의 무게까지 알아차리려 하며 심지어 구두점의 위치까지도 고려한다. 만약 이러한 가설이 맞는다면, 한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연애소설 읽기나 연애편지 읽기 · 쓰기가 강렬한 문학체험의 첫머리에 놓인다는 사실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연애 서간문집이나 감성적 사랑을 다룬 대중적 시집이 시대를 초월하여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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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글자의 철학 - 혼합의 시대를 즐기는 인간의 조건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품절


고통이 희망의 동기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유토피아 정신과 맞닿아 있다 '어떻게 하면 고통이 적은사회와 삶을 이루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추구가 이상향을 그리는 정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헐벗음과 굶주림, 착취와 불평등, 폭력과 억압, 상호 기만과 음해와 무시가 없는 세상, 곧 고통이 없는 세상에 대한 추구가 유토피아 정신이다.
아도르노는 이런 유토피아 정신을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을 없앨 뿐 아니라, 다시 소환할 수 없을 만큼 지나가버린 고통조차도 소환해 없앨 수 있는 세상의 건설"을 위한 것이라고 간절히 표현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고통조차도 다시 불러서 없애버릴 수 있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만큼 간절한 바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고통은 인간을 이렇게 간절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 같은 세상에서도 우리가 숨어 있는 고통들을 찾아내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77쪽

제인 구달은 인간에게 고통 받는 동물과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용기를 내어 그들의 눈을 바라본다면 그들의 고통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생명답게 존재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의 이해와 극복이 곧 생명의 도(道)인 것이다.-78쪽

행운 앞에서는 놀라움에 고개가 젖혀지고 노력 앞에서는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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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오리엔트의 역사를 통해 조명하는 구약성서의 이해
심종석 지음 / 이컴비즈넷 / 2004년 8월
품절


하나님께서 어느 날 천사들을 불러 모아 이르시기를 '내가 나와 대화할 수 있고, 사귈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려고 한다'는 뜻을 피력하셨다. 사실 신성을 가진 천사는 하나님과 주종관계(主從關係)의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주종관계 이상의 지위를 갖는 친구와도 같은 지위로써, 그것도 신성을 갖고 있지도 않은 미약한 존재로써 인간을 창조하신다는 의지[計劃]에 전에 없이 반발하게 된다.
당시 천사장 미가엘(Michael)과 같은 수준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루시퍼(Lucifer)라는 천사가 그 반발의 주동이 되었고, 이에 천사의 3분의 1이 루시퍼의 만발에 동조하게 된다.
루시퍼의 이해(利害)에는 후일 심판의 날에 이르러 그를 포함한 모든 천사가 인간의 수종(隨從)이 되어야 했던 이유에서 더욱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91쪽

이 같이 끝없이 교만하였던 루시피는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음부(陰府)에 추락하게 되는데(墜落天使, 叛逆天使), 그가 곧 사탄(Satan)이다.
루시퍼 곧 사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이 그의 멸망[咀呪]의 원인이 되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여, 그와 같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필연[報復]이 존재하게 된다. 왜냐하면 루시피는 창조된 인간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을 배반한 반역의 괴수로 낙인찍혀 음부에 추락하는 파멸을 맞았기 때문이다.
루시퍼는 이에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끊게 하려는 목적에서, 일례로 수많은 신화를 이 세상에 전하여 간섭하기 시작하고, 나아가 신약(新約)에 이르러서는 인간을 너무도 사량하여 그 죄를 대속(代讀)하기 위해, 그 또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하나님]을 광야에서 시험하기도 한다.
루시퍼는 불완전한 인간의 심성을 그의 신성을 통하여 익히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그가 인간의 파멸과 멸망을 위해 역사하는 일면은 인간의 생각[理解]으로 너무나 쉽게 수용할 수 있게끔 작용한다. 곧 루시퍼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극히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한 본성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게 역사한다. 예컨대 탐스러운 선악과(善惡果)에 대한 유혹,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쾌락과 부귀영화,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서 일신상의 기복(祈福), 끊임없는 전쟁으로부터 인간의 파멸과 멸망, 유일 신앙을 현혹할 수 있는 다양한 미신과 사이비 종교의 창궐(猖獗) 등이 루시퍼에 속한 역사의 실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루시퍼와는 달리 인간이 생각하기에 극히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이며 비논리적으로 다가와, 그 자유의지에 따라 정(正)과 사(似)가 구별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92쪽

이는 루시퍼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는 역사의 차이점이다 예컨대 이스라엘 앞에 놀인 홍해(Red Sea)가 갈라지며,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일곱 바퀴를 돌았더니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던 여리고(Jericho)성이 일순에 무너지고, 홍해와 같이 요단(Jordan)강이 갈라지고, 예언되었던 바대로 모세에 의한 애굽에서의 열 가지 신비적 재앙이 일어나고, 해와 달이 멈추어 서는 등의 사건이 하나님께 속한 역사의 실재로 예시할 수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역사의 기로에서 인간은 그 자유의지에 따라 필연적으로 하나의 길을 선택하여야 하는데, 그 결과가 곧 인류의 흥망성쇠의 역사로 남게 되고, 또한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성서에서의 역사[記錄]이자 신관이다.
기독교적 신앙에 의지할 경우, 루시퍼 곧 사탄에의 역사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그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은 창조주를 기억하는 피조물로써 당연한 인간의 숙명이라 할 수 있다.
루시퍼가 가장 두려워하고, 또한 인간이 루시퍼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창조의 이유였던 바와도 같이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祈禱]이다.
피조물로써 신앙을 지켜야만 하는 방위는, 곧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겨 그가 주재하는 악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하나님과 피조물 된 지위에서 친구에 상당하는 관계를 유지하며, 창조주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내던져진 미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삶의 목적일 수 있다
이것이 구약성서에서 신관으로 표창(表彰)할 수 있는 사실이고, 필자 또한 이것이 계약의 핵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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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문학선 1 ㅣ 한국단편문학선 1
김동인 외 지음, 이남호 엮음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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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괴로움의 바다요, 불붙는 집이라면, 감옥은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데다, 게다가 옥중에서 병까지 들어서 병감에 한정없이 뒹구는 것은 괴로움의 세 겹의 괴로움이다."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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