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년의 기다림에 바다도 글썽였다
카르타헤나·바랑키야=최홍렬기자
카르타헤나 바닷가에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의 동상이 서있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까치발을 한 모습이 애틋하고 아련하다.
어느 바닷가엔들 사랑과 헤어짐,기다림의 전설이 없으랴.
그러나 이곳, 마르케스가 젊은 시절 뜨거운 피를 바닷바람에 식히러 나왔을 카르타헤나 바닷가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식민지 처녀와 스페인 청년장교의 비련이라는 점에서 어두운 역사의 무게까지 담고 있다. 스페인의 식민침탈이 본격화되던 17세기, 콜롬비아 바닷가에서 시작된 사랑은 청년이 고국으로 가버리면서 비극으로 치닫는다.

▲ '백년의 고독'을 주제로 한 콜럼비아 화가 페드로 비잘바 오스피나의 작품 | |
카르타헤나 바닷가엔 인디오 처녀의 동상…
해풍에 휩쓸린 뜨거운 모래가 거리를 뒤덮고 있다. 망고·쿠루바·마라쿠자 같은 열대과일 주스가 불티나게 팔렸다. 생굴과 삶은 새우를 토마토케첩과 식초, 설탕 등으로 버무린 해물요리 세비체를 파는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오의 혼혈)가 “남자들 정력에 좋다”며 호객을 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운명을 그린 ‘백년의 고독’에는 식민지 수탈의 역사와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의 슬픈 열정이 고스란히 배있다. 마치스모(machismo·남성우월주의)라는 독특한 말이 있듯, 중남미는 관습적으로 남성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러나 6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남성!)의 몰락을 다룬 이 소설에서 이야기 전개의 중심축에 여성을 놓고 있다.

▲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 동상.그리움은 저 바다를 건너가려나. 카르타 헤나 해안가에 세워진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Catalina) 동상. 떠나버린 연인을 기다리다 죽음에 이른 애절한 사랑을 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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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함께 상상의 마을 ‘마콘도’를 건설한 우르술라는 성서에 나오는 현인처럼 120여년 동안 가문의 부침을 목격한다. 남자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정치적 소용돌이와 부패에 휘말리면서 죽음을 당하거나 길을 떠나는 반면, 그녀는 가문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집안 식구들을 단속하고 사탕이나 구운 과자 가계를 차려 살림을 이끌어 간다. 우르술라의 증손자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결혼하는 페르난다 델 카르피오도 바로 그같은 여인상이다.
이곳에서 만나 작가 구스타보 타티스씨는 “우르술라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라 여신 같은 존재이자 대모(大母·Great Mother)이며, 수십명의 등장인물이 부침을 거듭하는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작품 ‘백년의 고독’ 등서 불멸의 여성性 높이 찬양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우르술라 같은 ‘여족장’의 건너편에 필라르 테르네 같은 여성을 세워둔다. 창녀인 그는 섹슈얼리티와 다산(多産)의 상징. 우르술라의 두 아들과 관계한 그녀는 둘 사이에서 아들을 각각 낳아 부엔디아 가문의 자손을 이어가게 한다. 그녀는 예언자이며 주술사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 끝없는 연민과 동정을 가진 그는 가문의 운명에 대한 비밀이 담겨져있는 멜키아데스의 양피지 해독에 도움을 주는 천리안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작년에 출간된 ‘내 슬픈 창녀들에 관한 기억’에서, 아흔살의 주인공은 자신의 생일을 14살 창녀와 함께 침대에서 축하하기로 결심한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 소녀는 낮에는 온종일 공장에서 단추를 달아야 했으며, 남미대륙의 고독을 상징하듯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어린 창녀에게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의 운명이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오버랩되고 있다.
카리브해를 품어안은 바닷가 도시 바랑키야. 핏줄에 뜨거움이 흐르던 스무살 이곳에 온 작가는 평생 그의 작품에 되살아나고 또 되살아나는 여인들을 이곳서 만났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답했다.
“관대히 용서할수 있는 실수는?” “허리 밑에서 저지르는 실수.”
“실생활에서 가장 선호하는 여주인공은?” “대답 보류. 모든 여주인공이 내 사생활을 구성하고 있다.”
20대 초반의 작가는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친구들이 ‘성스러운 악녀’라는 별명을 붙여준, 약사 바르차의 딸인 메르세데스와 연애를 했다. 작가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신문 ‘엘 에스펙타도르’지 유럽특파원으로 근무하던 도중 신문이 독재정권에 의해 폐간되는 등의 고욕을 겪었으며, 파리에서 귀국한 직후인 30살에 결혼을 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메르세데스와 해로하고 있다. 지금 멕시코시티에 살고 있는 작가는 오전에는 자서전을 쓰고, 오후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산책을 하며 지내고 있다. 작가의 큰 아들 로드리고(46)는 미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있다. 2000년 국내에 소개된 영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수 있는 것’의 감독이다. 둘째 아들 곤살로(43)씨는 파리에서 사업가로 활동 중이다. 꿈과 환상, 현실과 역사를 온통 한데 버무린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삶은 그렇게 다음 대로 이어지고 있다.
“형은 페미니스트… 행운을 부르는 건 여자들이라고 믿어”
동생 하이메 가르시아 마르케스
▲ 하이메 가르시아 마르케스 | |
“형은 여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대통령이 되면 콜롬비아가 완전히 바뀌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죠.”
카르타헤나에서 만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동생 하이메 가르시아 마르케스(64)씨는 “유머가 많고 쾌활한 성격의 형은 10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일일이 챙겨주었다”고 말했다.
작가의 형제는 모두 11명.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장남이며 하이메씨는 여덟째. 맏형과는 13살 차이다. 작가는 하이메씨의 대부(代父)이기도 하다.
하이메씨는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0여년 전 이곳에 세운 언론인 육성기관 ‘이베로 아메리카의 새로운 언론을 위한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5일 단기코스로 운영되는 이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2500여명이 수료했다.
“형은 기자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1999년 보고타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엘 캄비오’를 인수해 스포츠·문화·정치 등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형은 언론을 문학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사거리를 소재로 소설을 쓰기도 했죠. 야구 투수가 정식 시합이 아니라도 항상 공을 던지며 어깨를 단련시키듯 형은 신문기사건 소설이건 항상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형이 그에게는 여전히 피가 더운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