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이방인' 카뮈 … 알제 티파사에서

은빛 지중해, 태양이 작열하는 거리
가난한 다섯식구 살던 집 지금은 카페로
글·사진=김화영 고려대교수·불문학
입력 : 2005.05.19 18:57 23' / 수정 : 2005.05.19 19:46 49'

알제에 도착하던 날 한국 대사관저의 간단한 파티에는 알제의 여러 문인들, 그리고 테시에 대주교가 왔다. 50년대 알제 서부 벨쿠르 동네에서 부제로 일하신 그분은 카뮈가 어린 시절에 살던 옛 집을 알고 있었다. 이튿날 그분의 안내로 서민들이 사는 벨쿠르 거리 리용가 124번지를 찾아갔다. 거리 이름도 지금은 독립전쟁 영웅의 이름을 따서 모하메드 벨루이자드 가. 소설 ‘이방인’에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난 뫼르소가 일요일 날 오후, 발코니에 나앉아 거리를 내다보며 무료하게 보내는 장면이 길게 묘사되어있다.

아마 거기일 것이다.

‘맞은 쪽 보도 위에 담배 가게 주인이 의자를 문 앞에 내다놓고 등받이 위로 두 팔을 고인 채 거꾸로 타고 앉아 있었다.’(‘이방인’중)

아파트의 파란 덧문 사이로 지금은 카페가 된 그 담배 가게의 아랍어 간판이 내다보였다. 어둑한 계단을 올라가면 왼쪽 첫 문. 식당 하나 거실하나, 침실 하나, 방 3개에 카뮈네 가난한 다섯 식구가 살았다. 지금 주인 슈누프 무스타파는 1951년 이 집에서 태어났단다. 2003년 지진으로 많이 파괴된 이 동네에서 이제 무스타파를 제외하고 알베르 카뮈가 누구인지 아는 아랍인은 없다. 뫼르소는 자기가 살던 동네에서도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카뮈의 ‘티파사에서의 결혼’ 첫 구절이다. 오래 전부터 이 문장은 에게 해의 섬들처럼 머리 속에 떠돌고 있었다. 늘 그 티파사에 가고 싶었다. 거기에 가면 매 순간이 돌 더미 속에서 푸드득 튀어 오르는 새처럼 돌연한 빛이 되어 번뜩일 것 같았다.

티파사로 가는 길은 멀었다. 1974년 봄, 프랑스에서 카뮈에 대한 학위논문을 발표하고 나서 귀국 직전, 티파사에 가기 위하여 파리 주재 알제리 대사관으로부터 입국 비자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다. 알제 대학의 강연 초청장도 무용했다. 당시 한국과 알제리 인민공화국 사이에는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알제시의 높은 곳인 프란츠 파농 대로에 우뚝 솟은 엘 오라씨 호텔의 객실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봄바람이 가끔 흔들고 지나가는 커튼 사이로 저 아래 알제 시가 전체가 하얀 레고를 조합해 놓은 듯 바다를 향해 경사를 이루며 펼쳐져있다. 그 앞으로 ‘세상에서 가장 선명한 물굽이’에 안긴 지중해 바다는 주름하나 없다.

즉시 알제에서 서쪽으로 해안을 끼고 티파사를 향해 달렸다. ‘내게는 그 69킬로미터의 길에서 어느 곳 하나 회상과 감동으로 뒤덮여있지 않은 데가 없다’고 2차대전 직후 ‘티파사에 돌아온’ 카뮈가 말했던 길이다. 벌써부터 갈대밭 저쪽 파란 바다에 와 엎드린 ‘이끼 낀 신(神)’ 슈누아가 눈에 들어온다. 고요한 마을을 지나서 유적지 안으로 몇 발자국 들여놓자 벌써 황갈색의 해묵은 페허의 돌과 꽃들의 ‘혼례‘잔치다. 보라색 엉겅퀴 꽃들과 노란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계단을 올라 바다 쪽으로 나서자 오른 쪽에는 슈누아 산의 ‘시커먼 등뼈’, 동쪽 산등성이 쪽에는 등대가 보인다.


▲ 카뮈의 산문‘티파사에서의 결혼’을 낳은 티파사의 고대 유적지.
‘결혼. 여름’을 쓰던 1936년의 젊은 카뮈는 지금의 유적지 공식적 입구 쪽이 아니라 마을 초입 어항 곁으로 난 폐허로 들어온 것 같다. ‘항구의 왼쪽으로 난 마른 돌계단이 유향나무와 금작화들 사이의 페허로 인도한다. 길은 조그만 등대 앞을 지나서 들의 한복판으로 빠져 들어 간다’고 썼으니 말이다.

지금 등대 앞길은 막혀있다. 그 사이에 알제리 독립 전쟁이 있었고 카뮈는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기 2년 전에 세상을 떴다. 그리고 회교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과 정부군 사이의 피아를 구별하기 어려운 살육의 공포가 불과 3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제 알제리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고대 로마의 폐허에도, 최근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폐허에도 봄은 잊지 않고 돌아왔다.

‘폐허와 봄의 결혼 속에서 폐허는 다시 돌이 되어, 인간의 손길로 닦여진 저 반드러운 손때를 이제는 다 버리고 자연 속으로 되돌아왔다. 탕아의 귀향을 위하여 어머니 대자연은 꽃들을 아낌없이 피워놓았다.’

나는 구태여 기행문을 쓸 필요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카뮈의 문장을 옮겨놓기만 하면 그대로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다. 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 속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 속에,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 넓고 찬란한 고대 도시 속에 서 그날 아침나절 내가 만단 사람은 모두 열 사람이 채 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오래 동안 관광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지냈던 것이다. 폐허 속에 서있는 눈에 익은 카뮈의 문학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낌 없이 사랑할 권리다.’


▲ 글·사진=김화영
고려대교수·불문학
‘티파사에서의 결혼’에서 인용한 말이다. 그런데 알제리아가 독립하여 프랑스인들이 모두 본토로 쫓겨 가고 아랍 사람들의 나라가 된 이후, 누군가가 ‘CAMUS’라는 이름을 파서 그 일부분을 지워 놓았다. 이것은 사람의 손이 한 일이지만 자연도 세월을 따라 변했다. 카뮈는 땅에서 파내놓은 석관들을 보면서 ‘옛날엔 그 석관들 속에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샐비어와 향 꽃 무가 그 속에서 자란다’고 썼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나서 내가 그곳에 갔을 때 석관 속에는 노란색 들꽃이 소복하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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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카뮈와 알제리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5.05.19 18:58 02'


 

“나는 언제나 테러를 규탄했다. 나는 알제의 거리에서 맹목적으로 자행되고 언젠가 내 어머니와 가족을 덮칠 테러리즘을 규탄해야만 한다. 나는 정의를 믿지만, 정의 앞에서 내 어머니를 보호할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작가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주창한 알제리 민족이란 개념에 의구심을 품었다. 알제리는 유태인, 터키인, 그리스인, 이탈리이안, 아랍인, 프랑스인 등 다양한 민족의 이민자들이 흘러들어와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에 알제리 단일 민족론은 성립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프랑스인들과 이슬람 교도들이 통합된 알제리 공화국을 수립하고, 프랑스 연방의 일원이 되는 제3의 해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카뮈는 프랑스와 알제리 양쪽에서 모두 외면당했다.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은 죽음의 숙명을 지녔으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무용한 정열을 그렸다. 실존의 부조리를 탐구한 소설이기 때문에 실존주의 문학의 상징적 소설로 꼽힌다.

지중해의 푸른 물결과 작열하는 태양, 눈부시게 빛을 반사하는 흰 벽의 집이 형성하는 풍경 속에서 전개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카뮈처럼 알제리의 프랑스인이다. 그는 해변에 산책을 나갔다가 한 아랍인과 말다툼을 벌이게 되고, 그 아랍인이 꺼내든 단도를 꺼내들자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해 그를 죽인다. 뫼르소는 법정에서 “단지 태양때문에”라며 변호하지만, 그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이방인이 된다.

뫼르소는 사형 집행일 전날 밤 감옥 창살 너머에서 풍겨오는 별, 흙, 소금 냄새를 맡으면서 멀리서 울리는 뱃고동 소리를 통해 대우주의 품 속으로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는 환상 속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삶의 쾌감을 만끽한다. 카뮈의 산문 ‘티파사에서의 결혼’은 매혹적인 문체 미학을 통해 신화와 현실이 공존하는 지중해가 바로 카뮈의 푸르디 푸른 영혼을 낳았음을 보여준다. 지중해의 자연과 인간이 결합하는 신성한 공간에서 정오의 태양은 강렬한 빛의 세례를 선사한다. 카뮈의 문학은 그 백색의 풍경 속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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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보르헤스

 

▲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를 산책하는 보르헤스.
 
 
 
부에노스 아이레스=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환상과 사실이 뒤섞인 환상적 사실주의를 주창해 20세기 소설 미학에 새 장을 열었다.

1899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탄생한 작가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청소년기를 보낸다. 1923년 고향으로 돌아온 작가는 이듬해 첫 시집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를 내면서 시인으로 출발했으나 1935년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출간하면서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책을 읽은 데다 유전적 요인으로 30대 후반부터 서서히 시력을 상실해 인생의 후반부를 암흑세계에서 지내게 된다. 1937년 도서관에 처음 취직한 이래 평생을 사서로 지낸 그는 1955년부터 20여년 동안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직했다.

그의 소설집 ‘픽션들’은 경이롭고 충격적인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도서관을 선택한다. 우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서관에는 모든 책들의 가이드 같은 ‘책 중의 책’(=진리)이 존재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찾지는 못한다. 인간은 개별적인 책으로만 접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적인 진리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원형의 폐허들’의 주인공은 꿈을 꾸면서 인간을 만들어낸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그 인간은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어느날 주인공의 신전에 불이 나는데, 자신의 몸도 불에 타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 또한 누군가의 꿈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의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은 우리가 확고부동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자아와 세계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픽션들' 보르헤스

 
 
보르헤스 문학의 맥박은 탱고에 실렸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관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그는 인간의 살과 뼈가 부딪치고 땀냄새가 풍기는 탱고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이곳은 유럽 이민이 건설한 도시다. 신대륙에서 새 삶을 찾으려던, 혹은 새 운을 만날까 기대하던 사람들의 좌절과 욕망을 한데 버무린 음악 탱고…. 보르헤스의 청년시절은 탱고의 시대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해질 무렵과 밤이 없다면 탱고는 만들어질 수 없다.” 그렇게 탱고를 품었던 작가는 탱고 가사를 쓰기도 했다.

고층건물이 있는 도심에서 남쪽으로 달리면 ‘탱고의 거리’ 보카지구가 나온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황혼이 드리울 무렵이 되자 돌로 포장된 좁고 고풍스런 거리에서 결렬한 리듬과 관능적인 몸짓이 어우러지는 즉석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카를로스 가르델 같은 대가수를 낳았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대형 극장이건 조그만 광장이건 매일 밤 탱고 공연이 끊이지 않는다. 보르헤스가 단골로 찾은 카페 토르토니(Tortoni)에는 카를로스 가르델,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 등과 보르헤스가 탁자에 앉아 있는 밀랍인형을 구경할 수 있다.

보르헤스가 소설을 쓴 단초는 그의 작품 세계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193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는 아파트 계단을 뛰어올라가다가 창문에 머리를 부딪혀 한 달간 사경을 헤맸다. 회복기에 접어든 보르헤스는 혹시 지적 능력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빠졌고, 시험 삼아 단편소설을 써보기로 했다. 이 단편들이 오늘의 보르헤스를 만들어낸 명작들이 되었다. 거울과 미로, 도서관과 꿈 등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는 눈을 제공한 보르헤스는 20세기 현대소설의 탈출구를 열었다.

50대 이후 보르헤스에게는 훤한 대낮도 탱고가 흐르는 밤이었다. 56살에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됐지만, 그때는 이미 시력을 거의 잃어 책을 읽을 수 없게 된 상태였다.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심경을…’(‘축복의 시’). 그토록 좋아했던 책의 바다에서 단 한줄의 글도 읽을 수 없는 극단적 불행을 ‘축복’이라고 노래한 보르헤스의 심정을 헤아릴 길이 없다.

눈먼 보르헤스가 걸었던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를 부인 마리아 코다마(68)씨와 함께 걷는다. 한낮의 더위가 식어가는 저녁 8시 쯤 되자 애완견을 데리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보르헤스가 살았던 마이푸 994번지에는 그가 즐겨 걸었던 지역을 표시한 지도가 거리에 붙어 있었다. 유럽풍 고옥(古屋)의 현관 아치와 격자창들을 느끼기 위해 작가가 이따금 걸음을 멈추곤 하던 거리는 수십년 전 정취를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단편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이 거리를 걸으며 구상한 것은 아닐까. 작품에서 계속 왼쪽으로만 갈라지는 길을 따라 들어가 모든 사람들이 길을 잃는 미로(迷路)로 연결된다는 내용은, 실명(失明)으로 거리를 걷는 작가를 연상시킨다.

“남편은 노란색과 파란색, 그리고 초록색 외엔 온통 어둠뿐인 암흑의 세계에 빠졌죠. 그렇지만 한번 산책에 나서면 코스를 정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걸었어요. 수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책에 나선 것은 이 도시의 매혹을 접하지 않고서는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50대 중반에 실명한 보르헤스의 대형사진 앞에 선 마리아 코다마. 그녀는 30여년 동안 보르헤스의 눈이 되어 주었다.
열두살 때 보르헤스를 만나, 비서이자 연인으로 30년을 작가 곁에 있던 코다마씨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했다. 보르헤스는 결혼 두 달 후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거의 20년이 흘렀지만, 코다마는 지금도 보르헤스와 함께 걷던 거리 모퉁이마다 추억이 생생하다. 현재 보르헤스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는 보르헤스의 손때가 그대로 묻어 있는 지팡이들을 보여주며 “보르헤스의 분신”이라고 했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거리의 건물 색깔이나 특징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 동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죠. 산책하며 작품의 영감을 얻곤 했어요.”

투쿠만가 840번지 생가터는 ‘카페 리테라리오(Cafe Literario)가 들어서, 매주 수요일 저녁 문학토론이 벌어지는 문학카페로 변신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보르헤스를 읽고 토론한다는 것은 교양인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통용된다”(가르시아 다리스 살바도르대 교수) “철학·건축·영화 등 문화계 전반에 걸쳐 20세기 작가 중 가장 인용이 많이 되는 작가”(문학평론가 파트리시오 로이사가씨). 이제 신화가 된 보르헤스는 오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어둠에 껴묻혀 숨쉬고 있다.

 

 

▲ 부에노스아이레스 남부에 있는 보카 거리. 즉석에서 탱고 공연이 벌어지기도 한다. 보르헤스는 이 거리를 산책하며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최홍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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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 철저한 은둔자로 유명한 JD샐린저가 살고 있다고 인근 주민들이 말한 저택. 뉴햄프셔주 코나슈의 숲속에 있다.
뉴욕 맨해튼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16세 소년 홀든은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한 사립학교에서 쫓겨난다. 5과목 중 4과목 낙제 때문이다. 맨해튼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틀 동안 그의 경험과 생각을 1인칭 시점으로 들려준다. 첫 출간은 1951년이다. 인간 군상의 비열함, 어른들의 허위 의식, 희망을 잃어버린 암울함이 소설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홀든은 그런 세상을 견딜 수가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넓은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뛰어놀다 넘어지면 잡아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바로 책 제목이다. 결국 홀든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랠프 엘리슨 ‘보이지 않는 인간’(1952), 앨런 긴스버그 ‘울부짖음’(1956), 잭 케루악 ‘노상에서’(1957), 노먼 브라운 ‘죽음에 반하는 삶’(1959), 그리고 제임스 딘 주연 ‘이유 없는 반항’(1955) 등과 더불어 1950년대 안정과 순응의 사회에 도전한 기념비적 명저로 남아 있다.

“그 집에 접근하지 마세요. 바로 체포됩니다. 저도 얼굴을 못봤어요.”(지방신문 기자 존 양씨)

“그 집요? 알지요. 하지만 가르쳐 드릴 수 없네요. 규칙입니다.”(우체국 직원 M씨)

허위의식과 획일주의에 저항하며 시대 정신을 앞서갔던 소설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Salinger·86)는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철저한 은둔자로 살고 있다. 뉴욕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6시간 이상 달려가면 뉴햄프셔주의 산간 마을 코니시(Cornish)에 그의 집이 있다. 인근 레바논시(市)에 있는 L 공학박사 집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아침 밤새 내린 눈에 깜짝 놀라며 코니시의 야산들을 훑기 시작했다. 해발고도 100m 안팎의 완만한 구릉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고, 고개 하나 넘으면 겨우 집 한 채가 나올 만큼 숲속에 묻힌 마을이다. 3~5층 높이쯤 돼 보이는 나무들로 울창한 산 속에 누워 있는 도로는 차 바퀴가 빠질 정도로 좁다. 그 길마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어느 집에 샐린저가 살고 있을까.

코니시로 올라가기 전 그의 생가가 있는 뉴욕 맨해튼의 어퍼 웨스트 사이드, 그리고 그가 맨해튼에서 퇴학 당하고 전학 간 펜실베이니아주 웨인시(市)의 밸리 포지 밀리터리 아카데미(Valley Forge Military Academy)를 먼저 찾았다. 그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Holden) 역시 퇴학 맞은 고교생이기 때문이다.

회색 구름이 낮게 웅크리고 있던 날, 맨해튼에서 남서쪽으로 자동차로 3시간쯤 떨어진 이 학교에서 샐린저가 남긴 흔적을 더듬었다. 그가 고교생이던 때는 벌써 70년 전이다. 찰스 맥조지(McGeorge) 교장은 “샐린저 말고도 이 학교 출신 중 작가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11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 학생도 10여명이 다니고 있는 이 학교에 대해 맥조지 교장은 “샐린저의 책에 있는 것들은 다 픽션이다. 여기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이 다섯 과목 중 네 과목이나 낙제해서 퇴학을 당하기 때문인지 맥조지 교장은 소설의 내용과 현재 학교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것을 한사코 꺼려하는 눈치였다.


▲ 딸이 쓴 자서전 표지 JD샐린저의 짤 마거리트(폐기)는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 '드림캐쳐'를 썼다. 책 표지 사진에서 어린 폐기가 아빠에게 무등을 타고 있다.
그러나 샐린저와 동기 동창생이었으며 현재는 이 학교 채플에서 교목으로 일하고 있는 사닐리(Sanelli) 장군은 “이 학교에서의 경험이 상당히 많은 부분 그의 소설에 녹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롬은 그때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공공연한 꿈을 갖고 있었지요. 문학 서클에는 가입한 적이 없지만 영화를 좋아했고, 릴에 감아 놓은 영화를 사다가 집에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샐린저의 딸인 마거리트 역시 “아빠의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픽션이 아니라 실제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학교의 켈리 M 드셰인 행정실장이 1930년대 소년 샐린저의 모습이 들어있는 졸업앨범을 찾아내왔다. 1919년 1월 1일 뉴욕 출생인 샐린저가 이곳 밀리터리 아카데미 B 중대 소속이었다는 점, 그리고 드라마클럽(Mask and Spur), 비행기조종클럽(Aviation Club) 같은 9개 동아리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세 줄짜리 화려한 장식 단추의 제복을 입은 샐린저의 사진이 실려 있다. 부리부리한 눈썹과 갸름한 턱선이 누가 봐도 준수한 용모다.

이곳에서 샐린저는 펜싱팀 주장을 맡았는데,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도 펜시 고교의 펜싱팀 주장으로 나온다. 학교에서 쫓겨난 홀든은 서부로 도망치려다 막내 여동생과 정신적인 교감을 하면서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당시는 “속물주의에 찌든” 암울한 시대였다. “미치지 않았다면 마주하기 힘든 일만” 가득한 환경을 “정말 무서운 일”이라고 뇌까렸던 열여섯 소년 홀든이 절망에 잠겨 걸었던 발걸음을 따라가 보고 싶었다.

펜실베이니아 애거스타운 톰슨언덕→앤터니웨인가(街) 스펜서 선생집→기차역→(기차탑승)→뉴욕 34번가 펜역(驛)→그랜드센트럴역→브로드웨이→센트럴파크→47번가 빌트모어 극장→50번가 라디오시티→센트럴파크 동쪽 서튼플레이스에 있는 앤톨리니 선생집→회전목마….

변한 것은 없었다. 50여년 전 소설 속이나 지금이나 위치도 건물도 모두 그대로였다. 심지어 홀든이 소설 속에서 그토록 걱정했던 센트럴파크 연못의 오리떼조차 여전했다. ‘연못이 얼어버리면 그곳에 살고 있던 오리들은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알고 계세요?’(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25쪽, 113쪽)

그 뒤, 뉴햄프셔로 찾아간 샐린저의 집은 코니시의 ××로드 1××번지로 확인됐다. 우체통에는 지방신문 2부가 들어 있었고, 쌓인 눈 속에 파묻힌 집 외벽에는 전기작가 사라 모릴(Morril)이 얘기했던 대로 위성 접시 안테나가 걸려 있다.

얼마 전까지 샐린저는 수요일이면 다운타운에 내려와 외식을 했다. 식당은 ‘피터 크리스천스’다. 나중에 ‘진스’로 바뀌었다. 샐린저는 이 식당에서 ‘피터 어머니의 특선(特選)’이라는 샌드위치를 주로 먹었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먹는 야채는 모두 길러 먹었다.

“허위로 가득한 세계가 강요하는 획일적인 가치관에 정면으로 맞섰던” 샐린저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던 경계선의 작가”라는 평가도 듣는다. 정작 본인은 세상의 평가를 듣는 듯 마는 듯 아마 죽는 날까지 은둔의 베일을 벗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맨해튼 센트럴파크 샐린저의 기념비적인 출세작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주인공 홀든은 맨해튼의 센트럴파크를 지나면서 "저 오리떼들은 겨울이 오면 어디로 갈가?"라고 걱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호밀밭의 파수군'을 거론할때마다 맨먼저 인용하는 유명한 문구다. 사진은 센츠럴파크 남쪽에 있는 연못과 오리, 그리고 햇볕을 쬐고 있는 뉴욕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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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아서 밀러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아서 밀러가 마릴린 먼로와 함께 '더 미스피츠'(부적격자·1957)의 무대를 배경으로 다정하게 서 있다. 뜨겁던 두 사람은 1960년에 이혼했다.
미국 코네티커트주 산속 록스버리의 아서 밀러의 3층 저택은 비어 있었다. 숲속에 묻힌 하얀 집은 여름에는 잘 보이지 않을만큼 도로쪽으로 나무가 무성했다. 그는 50년 가까이 이곳 토피트 로드 232번지에 살다 지난 2월10일 타계했다. 평생 뉴욕을 무대로 활동했고, 도시인의 존재와 절망을 썼던 그는 뉴욕 맨해튼서 자동차로 두시간 거리인 이 산속 마을에서 반생을 보냈다.

집은 지금도 누구나 접근할 수 있었다. 거실에는 도시바 TV가 있었고, 주인없는 자동응답 전화기는 빨간 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문학상 수상 상패가 벽면에 7개 걸려 있었고 거실에는 낡은 책들이 수백 권 꽂혀 있었다. 의자도 소파도 50년 이상은 돼보였다. 차고에는 폭스바겐 승용차가 들어 있었고, 온갖 농기구들이 차고 밖 벽면에 가득 걸려 있었다. 도끼로 금방 패놓은 장작들이 생나무의 기운을 그대로 드러낸 채 쌓여 있었다.

“그 사람은 콜드 피쉬(cold fish)에요. 자기 개인 얘기는 절대 안해요.”

아서 밀러의 전기(‘Arthur Miller:his life and work’)를 쓴 평론가이자 전기작가 마틴 고트프리드(Gottfried)씨는 밀러에 대해 그렇게 입을 열었다.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자기 책에 서명해주면서 그는 “내가 사생활 얘기도 쓴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는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밀러는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성복 제조공장을 운영해서 비교적 넉넉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브루클린 3번가로 이사를 갔다. 이곳이 뒤에 ‘세일즈맨의 죽음’에 무대가 됐던 곳이다.

밀러의 텅빈 집에서 나와 개가 심하게 짖고 있는 이웃집을 찾았다. 말이 이웃집이지 200미터는 떨어져 있는, 산간 마을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집들이다. 여주인 메리 욘커(Jonker) 씨가 나왔다. “저는 2년 전에 죽은 그의 와이프와 수영 클럽에 같이 다니며 친구처럼 살았죠. 밀러 씨는 재미있고 유머감각이 뛰어났지만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즐겨하지는 않았습니다.”

밀러는 말년에 애그니스 벌리(Burly·34)라는 여성 아티스트와 함께 살았다고 욘커씨는 말했다. 밀러의 집은 그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그는 근처 땅 350에이커를 소유하고 있었다. 밀러는 여름이면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이웃동네인 우드베리에 가서 신문을 사오곤 했다. 그 동네엔 ‘카르멘 안소니’라는 제일 번듯한 생선요리 전문 레스토랑이 있다. 매니저 데이브 웰쉬(Welsh) 씨는 말했다. “밀러 씨는 저희 식당에 자주 오곤 했습니다. 꼭 농어 요리를 시켰죠.”

겨울은 오래 전에 철수했는데 새봄은 멀리 있었다.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머드 시즌’(mud season)이라고 부르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은빛 설경(雪景)도 없고, 새순 돋는 연초록도 아직은 일렀다.

무대를 바꿔 브루클린. 밀러의 최고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세일즈맨의 죽음’(1949) 에서 이곳은 주급 몇푼에 목숨 걸고 살아가는 가난한 소시민들의 세상이었다. 그러난 9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 붐을 타고 이곳은 요즘 뉴욕의 신흥 여피촌으로 번쩍번쩍 윤나는 동네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밀러가 살았던 브루클린 3번가는 여전히 황막했다. 말다툼을 벌이던 윌리와 비프(‘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주인공 부자)가 금세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1350번지 역시 스산했다.

“운전사가 딸린 리무진으로 출퇴근을 할만큼 떵떵거리던” 밀러의 아버지가 대공황으로 쫄딱 망해서 맨해튼 110가에서 쫓기듯 이사온 집이다. 유태인 마을인 이곳에서도 그 집은 더 작고 초라했다.

아들을 앞세우고 나온 한 30대 남자가 “밀러 씨네는 20여년 전에 이곳을 떠났다. 그후 집주인도 여러차례 바뀌었다”고 말했다. 길게 말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간신히 한마디 한 후 문을 닫아 버린다.

이곳에는 20세기 현대 연극사를 새로 쓰게 만들었던 밀러를 추억할 아무런 기념 표식도 없었다. 마를린 몬로와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이를 되새김한 희곡 ‘몰락 이후’(After the Fall)를 발표한 밀러는 전세계가 그의 작품들에 열광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의 흔적은 남아있는 곳이 없었다.

뉴욕공립도서관(NYPL)에서 사서(司書)들의 도움을 받아 ‘세일즈맨의 죽음’이 초연된 100여 년의 유서깊은 극장 ‘모로스코(Morosco)’의 기록을 뒤졌다. 극장이 있던 브로드웨이 1535번지에는 메리오트 마르퀴스 호텔이 들어서 있었다.

밀러의 흔적을 찾아 매서추세츠 세일럼(Salem)으로 갔다. 영국 식민지 시대의 초기 정착도시였던 이곳에서는 광기어린 마녀사냥이 벌어졌다. 죄없는 여성 12명을 목매달아 죽인 17세기 말의 마녀 사냥을 소재로 밀러는 1950년대 매카시 선풍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더 크루서블’(‘시련’ 혹은 ‘도가니’ 등으로 번역됨)을 썼다. 그러나 이 박물관에도 밀러를 기념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키작은 여성 스태프 재니 씨가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밀러 씨가 이곳에 자주 오셨죠. 마녀 사냥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묻곤 하셨습니다.”


▲ 아서 밀러가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코네티컷주 록스베리시 토피트 로드 232번지의 3층 목조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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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년의 기다림에 바다도 글썽였다

 
카르타헤나·바랑키야=최홍렬기자

카르타헤나 바닷가에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의 동상이 서있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까치발을 한 모습이 애틋하고 아련하다.
 

어느 바닷가엔들 사랑과 헤어짐,기다림의 전설이 없으랴.

그러나 이곳, 마르케스가 젊은 시절 뜨거운 피를 바닷바람에 식히러 나왔을 카르타헤나 바닷가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식민지 처녀와 스페인 청년장교의 비련이라는 점에서 어두운 역사의 무게까지 담고 있다. 스페인의 식민침탈이 본격화되던 17세기, 콜롬비아 바닷가에서 시작된 사랑은 청년이 고국으로 가버리면서 비극으로 치닫는다.


▲ '백년의 고독'을 주제로 한 콜럼비아 화가 페드로 비잘바 오스피나의 작품

 

카르타헤나 바닷가엔 인디오 처녀의 동상…

 

해풍에 휩쓸린 뜨거운 모래가 거리를 뒤덮고 있다. 망고·쿠루바·마라쿠자 같은 열대과일 주스가 불티나게 팔렸다. 생굴과 삶은 새우를 토마토케첩과 식초, 설탕 등으로 버무린 해물요리 세비체를 파는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오의 혼혈)가 “남자들 정력에 좋다”며 호객을 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운명을 그린 ‘백년의 고독’에는 식민지 수탈의 역사와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의 슬픈 열정이 고스란히 배있다. 마치스모(machismo·남성우월주의)라는 독특한 말이 있듯, 중남미는 관습적으로 남성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러나 6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남성!)의 몰락을 다룬 이 소설에서 이야기 전개의 중심축에 여성을 놓고 있다.

 


▲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 동상.그리움은 저 바다를 건너가려나. 카르타 헤나 해안가에 세워진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Catalina) 동상. 떠나버린 연인을 기다리다 죽음에 이른 애절한 사랑을 전
하고 있다.
 
 

남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함께 상상의 마을 ‘마콘도’를 건설한 우르술라는 성서에 나오는 현인처럼 120여년 동안 가문의 부침을 목격한다. 남자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정치적 소용돌이와 부패에 휘말리면서 죽음을 당하거나 길을 떠나는 반면, 그녀는 가문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집안 식구들을 단속하고 사탕이나 구운 과자 가계를 차려 살림을 이끌어 간다. 우르술라의 증손자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결혼하는 페르난다 델 카르피오도 바로 그같은 여인상이다.

 

이곳에서 만나 작가 구스타보 타티스씨는 “우르술라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라 여신 같은 존재이자 대모(大母·Great Mother)이며, 수십명의 등장인물이 부침을 거듭하는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작품 ‘백년의 고독’ 등서 불멸의 여성性 높이 찬양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우르술라 같은 ‘여족장’의 건너편에 필라르 테르네 같은 여성을 세워둔다. 창녀인 그는 섹슈얼리티와 다산(多産)의 상징. 우르술라의 두 아들과 관계한 그녀는 둘 사이에서 아들을 각각 낳아 부엔디아 가문의 자손을 이어가게 한다. 그녀는 예언자이며 주술사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 끝없는 연민과 동정을 가진 그는 가문의 운명에 대한 비밀이 담겨져있는 멜키아데스의 양피지 해독에 도움을 주는 천리안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작년에 출간된 ‘내 슬픈 창녀들에 관한 기억’에서, 아흔살의 주인공은 자신의 생일을 14살 창녀와 함께 침대에서 축하하기로 결심한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 소녀는 낮에는 온종일 공장에서 단추를 달아야 했으며, 남미대륙의 고독을 상징하듯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어린 창녀에게 인디오 처녀 카탈리나의 운명이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오버랩되고 있다.

 

카리브해를 품어안은 바닷가 도시 바랑키야. 핏줄에 뜨거움이 흐르던 스무살 이곳에 온 작가는 평생 그의 작품에 되살아나고 또 되살아나는 여인들을 이곳서 만났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답했다.

 

“관대히 용서할수 있는 실수는?” “허리 밑에서 저지르는 실수.”

“실생활에서 가장 선호하는 여주인공은?” “대답 보류. 모든 여주인공이 내 사생활을 구성하고 있다.”

 

20대 초반의 작가는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친구들이 ‘성스러운 악녀’라는 별명을 붙여준, 약사 바르차의 딸인 메르세데스와 연애를 했다. 작가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신문 ‘엘 에스펙타도르’지 유럽특파원으로 근무하던 도중 신문이 독재정권에 의해 폐간되는 등의 고욕을 겪었으며, 파리에서 귀국한 직후인 30살에 결혼을 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메르세데스와 해로하고 있다. 지금 멕시코시티에 살고 있는 작가는 오전에는 자서전을 쓰고, 오후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산책을 하며 지내고 있다. 작가의 큰 아들 로드리고(46)는 미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있다. 2000년 국내에 소개된 영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수 있는 것’의 감독이다. 둘째 아들 곤살로(43)씨는 파리에서 사업가로 활동 중이다. 꿈과 환상, 현실과 역사를 온통 한데 버무린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삶은 그렇게 다음 대로 이어지고 있다.

“형은 페미니스트… 행운을 부르는 건 여자들이라고 믿어”

동생 하이메 가르시아 마르케스

 


▲ 하이메 가르시아 마르케스
“형은 여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대통령이 되면 콜롬비아가 완전히 바뀌게 될 것이라고 얘기하죠.”
 

카르타헤나에서 만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동생 하이메 가르시아 마르케스(64)씨는 “유머가 많고 쾌활한 성격의 형은 10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일일이 챙겨주었다”고 말했다.

 

작가의 형제는 모두 11명.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장남이며 하이메씨는 여덟째. 맏형과는 13살 차이다. 작가는 하이메씨의 대부(代父)이기도 하다.

 

하이메씨는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0여년 전 이곳에 세운 언론인 육성기관 ‘이베로 아메리카의 새로운 언론을 위한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5일 단기코스로 운영되는 이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2500여명이 수료했다.

 

“형은 기자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1999년 보고타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엘 캄비오’를 인수해 스포츠·문화·정치 등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형은 언론을 문학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사거리를 소재로 소설을 쓰기도 했죠. 야구 투수가 정식 시합이 아니라도 항상 공을 던지며 어깨를 단련시키듯 형은 신문기사건 소설이건 항상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형이 그에게는 여전히 피가 더운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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