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죽음' 아서 밀러
▲ 아서 밀러가 마릴린 먼로와 함께 '더 미스피츠'(부적격자·1957)의 무대를 배경으로 다정하게 서 있다. 뜨겁던 두 사람은 1960년에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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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코네티커트주 산속 록스버리의 아서 밀러의 3층 저택은 비어 있었다. 숲속에 묻힌 하얀 집은 여름에는 잘 보이지 않을만큼 도로쪽으로 나무가 무성했다. 그는 50년 가까이 이곳 토피트 로드 232번지에 살다 지난 2월10일 타계했다. 평생 뉴욕을 무대로 활동했고, 도시인의 존재와 절망을 썼던 그는 뉴욕 맨해튼서 자동차로 두시간 거리인 이 산속 마을에서 반생을 보냈다.
집은 지금도 누구나 접근할 수 있었다. 거실에는 도시바 TV가 있었고, 주인없는 자동응답 전화기는 빨간 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문학상 수상 상패가 벽면에 7개 걸려 있었고 거실에는 낡은 책들이 수백 권 꽂혀 있었다. 의자도 소파도 50년 이상은 돼보였다. 차고에는 폭스바겐 승용차가 들어 있었고, 온갖 농기구들이 차고 밖 벽면에 가득 걸려 있었다. 도끼로 금방 패놓은 장작들이 생나무의 기운을 그대로 드러낸 채 쌓여 있었다.
“그 사람은 콜드 피쉬(cold fish)에요. 자기 개인 얘기는 절대 안해요.”
아서 밀러의 전기(‘Arthur Miller:his life and work’)를 쓴 평론가이자 전기작가 마틴 고트프리드(Gottfried)씨는 밀러에 대해 그렇게 입을 열었다.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자기 책에 서명해주면서 그는 “내가 사생활 얘기도 쓴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는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밀러는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성복 제조공장을 운영해서 비교적 넉넉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브루클린 3번가로 이사를 갔다. 이곳이 뒤에 ‘세일즈맨의 죽음’에 무대가 됐던 곳이다.
밀러의 텅빈 집에서 나와 개가 심하게 짖고 있는 이웃집을 찾았다. 말이 이웃집이지 200미터는 떨어져 있는, 산간 마을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집들이다. 여주인 메리 욘커(Jonker) 씨가 나왔다. “저는 2년 전에 죽은 그의 와이프와 수영 클럽에 같이 다니며 친구처럼 살았죠. 밀러 씨는 재미있고 유머감각이 뛰어났지만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즐겨하지는 않았습니다.”
밀러는 말년에 애그니스 벌리(Burly·34)라는 여성 아티스트와 함께 살았다고 욘커씨는 말했다. 밀러의 집은 그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그는 근처 땅 350에이커를 소유하고 있었다. 밀러는 여름이면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이웃동네인 우드베리에 가서 신문을 사오곤 했다. 그 동네엔 ‘카르멘 안소니’라는 제일 번듯한 생선요리 전문 레스토랑이 있다. 매니저 데이브 웰쉬(Welsh) 씨는 말했다. “밀러 씨는 저희 식당에 자주 오곤 했습니다. 꼭 농어 요리를 시켰죠.”
겨울은 오래 전에 철수했는데 새봄은 멀리 있었다.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머드 시즌’(mud season)이라고 부르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은빛 설경(雪景)도 없고, 새순 돋는 연초록도 아직은 일렀다.
무대를 바꿔 브루클린. 밀러의 최고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세일즈맨의 죽음’(1949) 에서 이곳은 주급 몇푼에 목숨 걸고 살아가는 가난한 소시민들의 세상이었다. 그러난 9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 붐을 타고 이곳은 요즘 뉴욕의 신흥 여피촌으로 번쩍번쩍 윤나는 동네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밀러가 살았던 브루클린 3번가는 여전히 황막했다. 말다툼을 벌이던 윌리와 비프(‘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주인공 부자)가 금세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1350번지 역시 스산했다.
“운전사가 딸린 리무진으로 출퇴근을 할만큼 떵떵거리던” 밀러의 아버지가 대공황으로 쫄딱 망해서 맨해튼 110가에서 쫓기듯 이사온 집이다. 유태인 마을인 이곳에서도 그 집은 더 작고 초라했다.
아들을 앞세우고 나온 한 30대 남자가 “밀러 씨네는 20여년 전에 이곳을 떠났다. 그후 집주인도 여러차례 바뀌었다”고 말했다. 길게 말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간신히 한마디 한 후 문을 닫아 버린다.
이곳에는 20세기 현대 연극사를 새로 쓰게 만들었던 밀러를 추억할 아무런 기념 표식도 없었다. 마를린 몬로와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이를 되새김한 희곡 ‘몰락 이후’(After the Fall)를 발표한 밀러는 전세계가 그의 작품들에 열광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의 흔적은 남아있는 곳이 없었다.
뉴욕공립도서관(NYPL)에서 사서(司書)들의 도움을 받아 ‘세일즈맨의 죽음’이 초연된 100여 년의 유서깊은 극장 ‘모로스코(Morosco)’의 기록을 뒤졌다. 극장이 있던 브로드웨이 1535번지에는 메리오트 마르퀴스 호텔이 들어서 있었다.
밀러의 흔적을 찾아 매서추세츠 세일럼(Salem)으로 갔다. 영국 식민지 시대의 초기 정착도시였던 이곳에서는 광기어린 마녀사냥이 벌어졌다. 죄없는 여성 12명을 목매달아 죽인 17세기 말의 마녀 사냥을 소재로 밀러는 1950년대 매카시 선풍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더 크루서블’(‘시련’ 혹은 ‘도가니’ 등으로 번역됨)을 썼다. 그러나 이 박물관에도 밀러를 기념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키작은 여성 스태프 재니 씨가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밀러 씨가 이곳에 자주 오셨죠. 마녀 사냥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묻곤 하셨습니다.”

▲ 아서 밀러가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코네티컷주 록스베리시 토피트 로드 232번지의 3층 목조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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