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프랑수아 슈아르 지음 / 해냄출판사 

 

 

 

1 전설


젊고 매력적이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자,


우리 신(神)들의 모습이며, 내가 보는 그대들의 모습이오.


- 라신느, 『페드라』, 2막 6장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은 어떤 자들인가? 한 특별한 인물의 삶의 궤적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하나의 신화를 제공한 그 이야기들을 도대체 누가 시작했던 것일까? 역사보다 더 정확하게, 더 본질적으로 핵심에 이르게 하는 그 이야기를? 최초의 증인들이 썼던 저서들은 사라지고 없다. 알렉산더를 찬양하거나 비난하는, 뒤늦게 나온 역사서들과 한 권의 소설, 그리고 종교적 문헌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에서 전설까지




알렉산더의 동료들이 전하는 이야기들,


역사적 사실에서 전설적인 이야기까지



알렉산더의 전설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무궁무진한 일화들과 귀감이 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찬 보물창고 같기 때문이다.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서로 겹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역사가들과 이야기꾼들은 서로 확신과 반박을 교환하면서, 수세기 동안 이 보물창고를 끈기 있게 채워오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한다.


알렉산더의 원정 이야기를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들은 그 놀라운 정복사업에 참여했던 측근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그 정복자 덕분에, 그 때까지는 알지 못했던 놀랍고도 매혹적인 이방국가들과 페르세폴리스, 수사, 바빌론처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부유한 도시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놀라운 모험을 글로 기록하면서, 동시에 느꼈던 깊은 감동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글은 마케도니아를 선전하는 다양한 도구들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역사가들의 붓은 신화학자의 마법의 주문으로, 웅장한 서사 시인의 빛나는 팔레트로, 혹은 찬가를 연주하는 트럼펫 소리로 바뀌어야 했다. 따라서 알렉산더를 신화로 만드는 작업은 비록 그의 사후에 더욱 증폭되기는 했지만 아주 일찍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의 삶을 직접 목격했던 증인들의 글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훨씬 뒤에 나타난 역사가들을 통해 인용이나 차용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동작업자이자 조카였던 칼리스테네스(Callisthenes)는 이 영웅의 정복역사를 찬양할 임무를 띠고, 철학가이자 역사가의 자격으로 알렉산더를 동행했다. 따라서 인도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사건들인 그의 이야기는 동시대에 씌어진 것이다. 그의 글에는, 알렉산더가 이끈 모든 전쟁이 야만족들에 대한 그리스의 복수로 그려지고 있으며, 웅장한 서사시의 옷을 입고 있다.

  

말하자면 알렉산더는 호메로스가 찬양했던 영웅들의 계승자인 것이다. 칼리스테네스는 왕을 신격화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제우스`-`아몬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는 알렉산더의 신성(神性)을 공식적으로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칼리스테네스는 그 영웅의 친구이자, 기원전 327년 그에게 희생된 자인 동시에, 이 정복자를 따라다니는 어두운 전설의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는 한 요소이다.

칼리스테네스 외의 다른 동료들은 그의 사후에 글을 썼는데, 모두들 역사적인 자료들과 전설적인 요소들을 버무려 놓았다. 예를 들어 항해사이자 지리학자인 오네시크리토스는 알렉산더를 야만인의 관습을 폐지하고 문명의 혜택을 펼치기 위해 세상을 정복한 철학적인 왕으로 그렸다. 그리고 이 영웅과 아마존의 여왕 탈레스트리스가 만나 사랑을 나눈 이야기를 꾸며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파탈라부터 페르시아만 입구까지 알렉산더의 함대를 이끌었던 해군사령관이자 탐험가인 네아르코스(Nearchos)는 인도와 인도의 강들을 묘사하고, 인도에서 수사까지의 여정을 소개하고 있다. 알렉산더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이 원정은 지식에 대한 왕의 갈증과 미지의 세계를 발견코자 하는 그의 열망을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더를 계승하여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는 알렉산더의 모든 군사작전에 관여했으며, 기원전 330년부터 사령관으로 주요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디아도코이(Diadochoi, 그리스어로 ‘후계자들’이라는 뜻`─`역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면서, 알렉산더를 전쟁터의 뛰어난 지휘관이자 모범적인 국가원수인 동시에, 냉혹함과 관대함의 대조적인 면을 적절하게 구사할 줄 아는 비범한 개성의 소유자로 역설했다.


기술자이며 건축가인 아리스토불로스는 이 영웅을 비방하는 자들로부터 그의 명성을 지켜주었다. 그의 글에 나타난 알렉산더는 수많은 도시와 기념물을 건축한 군주였고 방탕이나 잔인성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우정의 대화를 좋아하고 여인들 앞에서 수줍어하는 순박함을 지닌 자였다. 그래서 그는 이 정복자가 필로타스의 처형, 클레이토스의 살해, 칼리스테네스의 죽음 등 그의 삶에 나타난 일련의 비극에 대해 ‘죄가 없다’고 보았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클레이타르코스는 너무 어려서 알렉산더의 원정에는 참여할 수 없었지만, 그리스 전역에서 이 마케도니아인을 알았던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모두 모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부름을 받고 이집트로 갔던 탓일까. 그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해서, 인도에서 알렉산더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그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군주가 된 프톨레마이오스와 알렉산더의 관계를 찬양했다. 그는 또 알렉산더의 신성을 계시하고, 알렉산더를 새로운 헤라클레스로 여기며, 앞으로 이루어질 업적들에 대한 신탁을 받았던 이집트의 성지 시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의 이야기는 알렉산더의 친구들이 쓴 이야기들과 후세에 씌어진 이야기들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했다.


현존하는 문헌들, 알렉산더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현존하는 역사서들은 알렉산더의 생애와 원정보다 3백년 정도 늦게 나타났다. 따라서 그 저자들은 선배들의 작품을 참조하면서 선배들이 이 인물에 대해 내린 판단과, 라틴과 이집트문화 등 이방 문화와 그리스 문화가 합쳐진 세계의 개념에 따라 이 영웅의 이미지를 고정시켰다. 이런 상황은 알렉산더의 전설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약 300여 년 사이에 나타난 많은 양의 문헌을 통해 알렉산더라는 인물의 매력을 볼 수 있다.


기원전 60~30년 사이에 그리스어로 씌어진 『세계사(Bibliotheca historica)』의 17권을 보면, 저자인 시칠리아의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os Sikelos)가 알렉산더의 열렬한 지지자임을 알 수 있다. 클레이타르코스의 이야기를 주요 근원으로 삼았던 그는 권력이 요구하는 것들을 존중하고 있으며, 그 권력은 개인의 장점들을 무시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가 그린 알렉산더의 초상화는 다분히 이상화되었다. 그는 알렉산더를 영웅적이고 명예를 사랑하며 신중하고, 위대함과 권력이 무엇인지를 아는 감각을 갖고 있는데다 천운까지 타고 났으며, 아시아에서 누릴 수 있었던 절대 권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거부할 수 있는 인물로 보았다. 그의 저서에는 기원전 329~327년 사이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갈로`-`로마 사람인 폼페이우스 토로구스(Pompeius Trogus)는 기원전에서 후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필리포스 역사』를 썼는데, 이 책은 적어도 2세기가 지난 후 유스티누스(Justinus)가 요약한 형태로만 전해지고 있다. 유스티누스가 정리한 알렉산더의 이미지는 훨씬 더 혼란스럽다. 저자는 도덕적인 면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정복자의 용기와 노련함, 관대함을 칭송하고 있으나 악덕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혹은 복수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보여준 냉혹함, 적뿐 아니라 자기 사람들에게까지 극한 혈기를 부리게 했던 무절제한 음주벽, 아몬신전의 신관들을 매수하여 자신이 신의 혈통을 가졌음을 선포하게 한 후에 보여준 오만함 등에 대해 얘기한다. 유스티누스가 보기에 알렉산더는 장점뿐 아니라 단점에서도 아버지 필리포스를 능가했을 정도였고, 악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에서도 과도한 점이 특징인 인물이었다.


또 한 사람의 로마 역사가 퀸투스 쿠르티우스(Quintus Curtius)의 저서는 기원후 1세기의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앞서 두 권의 책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 많은데, 그의 글에는 유스티누스와 유사한 정신이 스며있다. 그가 같은 이야기들을 조금 더 발전시켜 나간 부분이라든지, 필요해서 내린 도덕적 판결들 역시 알렉산더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아몬의 신탁 요청, 이방풍습의 채택, 클레이토스 살해, 칼리스테네스 처형, 카르마니아에서 벌인 디오니소스제(祭) 등이 그렇다. 퀸투스 쿠르티우스는 이 정복자에게 늘 미소를 지어준 행운의 여신 역시 그를 부패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퀸투스 쿠르티우스의 저서는 12세기에 고티에 드 샤티용(Gautier de Ch?illon)이 라틴어로 쓴 웅장한 서사시 <알렉산더>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프랑스의 초등학교에도 알려져 있으며, 자주 모방되는 작품인 이 서사시는 플루타르코스의 『알렉산더 전기』와 함께 고전주의 시대에 알렉산더에 관한 지식을 전해준 주요 자원이었다.


이 세 명의 역사가들`―`디오도로스, 유스티누스, 퀸투스 쿠르티우스`―`의 저서는 알렉산더에 관한 한 『불가타(Vulgata) 성서』(라틴어역 성서로 서방세계에서 표준성서로 사용되고 있음`─`역주)라고 불릴만 하며,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고대사까지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고려해 볼 만한 역사서는 두 권이 더 있다. 우선 플루타르코스(46~120)는 역사가의 입장보다는 철학가, 도덕가의 입장에서 저서를 남겼다. 그 저서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로마의 전통에 따라 씌어졌다. 그는 『알렉산더 전기』와 두 권의 논문, 그리고 여러 편의 윤리적 저서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일화들을 통해, 이 영웅에 대해 그런대로 긍정적인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영웅의 약점도 숨기지 않았다. 과격함, 허풍, 냉혹함, 방탕, 미신으로 흐르는 경향 등이 인생행로를 따라 점차 심해지고 있음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도 퀸투스 쿠르티우스처럼, 점점 커가는 알렉산더의 권력이 가공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간파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무엇보다도 알렉산더가 가진 영혼의 위대함을 부각시켰다. 그 위대함은 거의 모두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그의 계획들과 그가 적들과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던 놀라운 관대함과 인내심을 통해 초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수많은 출처들에서 끌어낸 이야기들을 비평적인 시선으로 검토하고, 알렉산더의 서신들과 군무일지 등 공문서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쓴 플루타르코스의 저서는 16세기부터 이 마케도니아인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


90년에 태어나서, 플루타르코스가 활동을 시작한 지 수십 년 정도 후인 2세기 전반에 활약한 플라비우스 아리아노스(Flavius Arrianus)의 저서도 빠뜨릴 수 없다. 그는 비티니아 출신의 그리스인으로 철학자 에픽테토스(Epiktetos)의 제자였다. 특히 카파도키아에서 로마를 위해 주요 직책들을 수행했으며, 아테네에서 집정관을 지내다 그곳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아나바시스(원정 이야기)』를 보면, 저자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더의 뛰어난 군사전략가적 자질, 고귀함을 풍기는 위엄, 탁월한 정치적 통찰력 등에 설득당한 알렉산더 예찬가로 비쳐진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베수스의 신체를 훼손했을 때라든지 페르시아의 의복을 입었을 때처럼, 필요할 때는 비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베수스에게 내린 알렉산더의 지나친 징벌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신체의 끝부분을 절단하는 것은 야만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메디아와 페르시아에 필적할 만한 부를 누리고, 일상에서까지 왕과 신하 사이에 불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야만인들의 관습을 따랐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두 대륙의 왕이 되었고, 전세계에 그 명성을 떨쳤던 알렉산더가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로스의 저서들을 바탕으로 씌어진 아라아노스의 저서는 알렉산더의 삶과 5세기의 간격이 있었지만, 알렉산더에 관해 정확하고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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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의 역사, USA/ 에릭 프라이 지음 / 추기옥 옮김/ 들녘 

한국어판 서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인들의 수가 점점 늘고 있다. 여기 백 년 전부터 세계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수를 자처하며 다른 민족들을 파멸에서 구한다는, 오직 그 하나의 순수한 목적을 위해 그들의 아들과 딸을 전쟁터에 보내고 항상 덕과 법의 편을 들었던 나라가 있다. 그러한 미국이 오늘날에는 과거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이 거의 전 세계에서 증오의 대상이 되어 대량살상의 위협에 처해 있다.


자화상 속에는 분명 비판과 통찰력이 들어 있지만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미국식 사회·경제·정치 모델의 원칙적 타당성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이것이 미국의 딜레마다. 이들은 선과 악을 엄격하게 구분하며, 복잡한 회색빛은 참아내지 못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들의 결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결정 속에서 이 무한한 가능성의 나라는 종종 실망스럽게, 때론 재앙처럼 보이기도 한다.


50년이 넘는 한국 내 미군 주둔의 역사는 미국 역사의 갈등을 대변하는 좋은 사례다. 미국은 선의를 가지고 한국에 왔다. 잔인한 북쪽의 형제로부터 공격을 받은 우방을 방어하기 위해 왔던 것이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의 한국전쟁은 유혈이 낭자한 비참한 전쟁으로 미군 역시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원칙적으로는 정당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정치적·군사적 실수를 범하여 중국의 개입을 초래했으며 그로 인해 결국 한반도는 통일의 희망을 잃었다. 다시 옛 국경선으로의 복귀라는 삭막한 결과를 놓고 본다면 전쟁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도 한국전쟁이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결과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50년도 넘는 시점부터 미군은 북한이 다시 한국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이것은 제국주의가 아니라 파트너십이 존재하는 좋은 예다. 그리고 한국이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지구상의 가장 부유한 나라 중의 하나로 인상적인 경제도약을 이루고, 1990년대 민주화를 이룬 데에는 미국 측의 지원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부분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미움을 받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미국을 거부하거나 증오로 맞서기까지 한다.


거기에는 비이성적인 이유를 포함하여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반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잔혹한 서울의 군사독재를 지원했으며, 이들 정권이 자국 국민들을 괴롭히거나 학살할 때에도 모르는 체 외면하거나 막후에서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인권에 대해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인권 대통령으로 정평이 난 지미 카터조차 우방의 정치적 안정을 전략적으로 우선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현재 한국 국민들에게는 쉽사리 잊혀질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다.


또 미국은 오늘날 북한에 대해 호전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 물론 평양의 정권이 정치 결정권자들에게 커다란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예측할 수 없고, 위험하며, 위협이나 허용을 통해 이성으로 유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효과적인 외교를 통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려는 노력보다는 결연한 태도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상을 점점 더 강하게 풍기고 있다. 특히 조지 W. 부시 대통령 행정부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우방과의 관계에 있어 문제에 대한 섬세한 접근이나 대화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워싱턴 정가의 신보수주의자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의 서울에서도 그대로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반대의견을 표시하거나 저항하는 사람은 이미 적의 공범자로 통한다.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은 이 글의 중심 주제가 아니다. 미국 정치에서 정말로 심각한 잘못과 죄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역시 이 글에서 지적했듯 지난 50년간 미국 외교정책이 저지른 잘못에서 예외가 아니다. 맹목적인 반공산주의, 군사적 수단에 대한 지나친 믿음, 최후의 강대국이라는 자만심이 세계경찰의 역할을 하던 미국의 영향력을 위험한 방식으로 전도시켰으며, 선의에서 수행된 많은 정책들도 결국 다른 나라와 민족들에게 해를 끼치게 되었다. 특히 2001년 9월 11일 이후 부시 행정부가 어긋난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에 대한 전 세계의 불신은 확연히 증가했다.

경제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 최대의 시장경제가 막대한 예산적자를 쌓으면서 전 세계의 자본을 흡수하고 있다. 그들은 자유무역을 주장하면서도 자국의 이익에 따라 거침없이 보호주의적 조치를 취한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철강과 자동차 제조기업들은 자유무역의 기치 아래 정말 미국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 전 세계인들은, 어쩌면 금세기에 지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일지도 모르는 기후변화를 무시하는 미국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미국 내의 잘못이 전 세계로 파급되기도 한다. 전 세계가 미국을 역할 모델로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의 가치와 시스템에 관대하지 못한 미국식 소명의식 때문에 그렇다. 모든 산업국가들처럼 한국도 미국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무비판적인 ‘미국화’를 지양해야 하지만, 대신 미국의 경제·사회체제의 장점을 수용하는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격차에서 오는 미국 정치의 딜레마가 이라크에서만큼 공공연히 드러난 적은 없었다. 국제법적으로 의심이 가는 상황이었고 현실적인 위협도 부재했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은 어쩌면 긍정적인 결과를 낼 수도 있었다. 우리 시대 최고로 잔혹한 지배자 사담 후세인이 실각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라크 국민들의 분위기를 잘못 판단해 잘못된 점령정책을 펴고,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내의 이라크 포로들을 잔인하게 대우함으로써, 미국의 도덕적 권위는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다. 그리고 아랍 이슬람 세계를 안정시키고 민주화하려는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이 이라크에 주둔한 이래 이라크는 통제불능의 상태나 마찬가지가 되었고 오히려 미국 정부가 군사적으로 타파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 테러리즘의 온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난관 이상으로 이미 비극이다.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위해 한국이 강력하고 이성적인 미국을 필요로 하듯 전 세계도 신뢰할 수 있는 질서의 힘을 필요로 한다. 오로지 미국만이 이 역할을 해낼 수 있다. 미국인들이 잘못을 하면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가 된다.


에릭 프라이Eric Frey


들어가는 글

미합중국은 멋진 나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럽에서 자행된 종교적 박해와 정치적 탄압과 빈곤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건국되었고, 이어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메디슨 같은 초창기 정치가들은 그들의 독립선언서에도 볼 수 있듯 계몽주의의 후손들이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똑같이 창조되었고, 창조자로부터 삶과 자유와 행복 추구권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십 년 후 그들은 전제정치를 종식시키고 여러 그룹의 이익 조정을 최고의 목표로 선언하는 헌법을 제정하는 등, 민주체제를 고안하여 오늘날까지 존속시키고 있다. 그들은 헌법의 수정조항에 종교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가폭력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법률을 통과시켰다. 재산권을 확실하게 보장한 덕분에 미국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개발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미국인들은 또한 세계에 대한 책임도 짊어졌다. 20세기에 미국은 고립주의를 털어버리고 그동안 가장 밀접한 우방국이 된 영국의 편에 서서 유럽전쟁에 참여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917년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전쟁’을 수행하여 ‘세계를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목표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다. 베르사유 회의에서 발표한 윌슨의 14개 조항은 민중들에게 자결권을 약속하면서 유럽 강대국들이 철면피적인 현실정치에서 방향전환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구대륙 유럽이 깊은 어둠에 빠져 있던 1941년 미국은 국민사회주의와 파시즘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해 거둔 군사적 승리를 새로운 정치에 이용하여 패자에게도 자유와 행복을 선물했다. 미국은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성공적이었던 마셜 플랜이라는 원조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UN의 지휘하에 다자적 세계질서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공산주의가 무너질 때까지 40년을 추격하여 유럽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치하에 다시 통합될 수 있도록 도왔다. 인권이 짓밟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러시아 군대나 유럽연합이 아닌 민주주의 초강대국 미국에 구조를 요청했다.


또한 세계 각국 사람들은 희망의 땅 미국에서 ‘아메리카의 꿈’에 동참하고자 매년 백만 명 이상이 합법 또는 불법 이민자로 미국 땅을 밟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방문객들이 활력 넘치는 경제, 수준 높은 대학과 연구시설, 사회의 다면성, 언론의 자유와 비판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긍정적이며 친절한 미국인들에게 감명받고 있다. 이웃이 서로 알고 항상 돕는 곳, 창조주를 믿고 창조주의 명령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곳, 위쪽으로의 신분상승이 가능하다고 누구나 믿는 나라다. 슈타이어마르크 출신 경찰관의 어린 아들이 세계적 스타가 되고, 백만장자가 되어 인구가 밀집된 연방주의 주지사가 될 수 있는 곳.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미국 현실의 일부, 지극히 협소한 일부 현실에 불과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메리카 드림이 악몽이 되는 비참한 경우는 수없이 많다. 미국에서는 모든 아동의 5분의 1이 빈곤 속에서 방치되고 있으며, 무제한의 무기소유가 범죄를 부추기고 있고, 사법 스캔들은 일상사에 속한다. 2백만 명의 사람들이 교도소에 갇혀 있는데 그 중 어떤 사람들은 별것 아닌 범행으로 중형을 받은 사람들이며, 매년 범죄에 대한 충분한 증거도 없이 수많은 재소자들이 처형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과다체중이 되고, 종교적 무관용주의자들이 늘어나며, 민주주의가 비극적인 조롱거리로 추락하고, 노동자와 주주들을 희생시켜 회사 사장이 부를 축적하는 나라, 이것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의 외교는 특히 부시에 이르러 세계평화의 위협이 되었다. 그들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국제기구들을 파괴시키며, 유일한 맹주로서 세계를 지배할 권리를 요구한다. 입으로는 자유무역을 설교하면서 스스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국 보호주의에 빠지고, 스스로를 너그러운 존재로 평가하면서도 개발도상국 지원에는 인색하다. 눈치 보지 않고 온실가스를 방출시켜 환경을 황폐화시키는 주범이기도 하다. 신이 자기들 편이라고 믿으며 겉으로만 성스러운 척한다. 찬탄받으며 사랑받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우방국 내에서조차 점점 거부와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라크에 대한 전쟁은 미국의 위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조작된 증거를 바탕으로 불법적이며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켜 포악한 독재자를 몰아냈으나 그 땅에는 평화도 안정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미국의 역사는, 자신들의 헌법과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노력한다는 이상을 깔아뭉개는 정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음을 보여준다. 인디언들을 거의 전멸에 이르게 하고 흑인들을 노예화한 것에서부터 베트남 전쟁과 제3세계의 수많은 독재자들을 지원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런 예는 비일비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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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1/ 안수길 지음/ 미래의 창 

사잇섬 농사

 

 



1


동쪽 창문이 훤했다. 날이 새기 시작하는가 보다.


꼬꾜-.


닭이 벌써 여러 홰 울었다.




멍, 멍, 머엉 멍! 멀리서 세차게 개 짖는 소리가 단속적으로 들려온다. 여우가 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로도 들렸다. 슬픈 것 같으면서도 간절한 걸 호소하는 듯한 소리였다.



6월 초순. 음력으로는 단오가 지났다.


제법 짧아진 초여름 밤, 이 밤을 남편 때문에 뜬눈으로 샌 뒷방예는 멀리서 전해 오는 개 짖는 소리에 가슴이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 상기 오잴까?”


이 고장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렇지마는 뒷방예는 유난히 혀끝이 짧은 것 같은 발음으로 말을 한다. 지금도 그런 발음으로 한 마디를 뇌이면서 일어났다.


문을 열었다. 정주방 허리문이었다.


밖에 나갔다. 개 짖는 소리가 여전히 무겁게 들려 올 뿐,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저 개얘지 새끼 강쪽에서 짖는 게앵가?”


개는 확실히 두만강 짖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문득 뒷방예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걸 물리치려는 듯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을날같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다. 별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바람기도 없었다.


(오늘두 비가 올 것 같재쿵.)


청명 무렵에 하루 잠깐 흐렸다가, 가랑비가 뿌린 일이 있었을 뿐, 춘경기에 들어서부터 오늘 이앙기가 지나기까지 쭉 비 구경을 못했다. 겨울에도 강추위만 헐벗은 사람들을 못 견디게 했을 따름, 싸락눈 한 알 날리지 않았다.


보리가 결딴났다. 파종을 한들 무슨 소용이랴? 논판에서 먼지가 날렸다. 모를 키울 수도 없었고 꽂을 수도 없었다.


2년 내리 계속하는 가물이었다. 노인들은 30년래의 흉년이라고 했다. 성황당에 기우제를 지냈다. 관우묘에 치성도 드렸다. 그러나 비는 여전히 오지 않는 대로 하늘만 맑을 뿐이었다. 그리고 당분간 올상부르지도 않았다.


개 짖는 소리가 잠깐 멈추었다. 그 뒤에는 귀가 찡하는 듯한 고요! 뒷방예는 오싹 몸에 소름이 끼쳤다. 무섬증이 치밀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멍, 멍, 머엉 멍!


멈췄던 개가 또 짖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꿈틀하는 걸 걷잡으려니 속으로 뇌까려진다.


(조련한 일이 앙이궁!)

  

쫓기듯 정주에 들어서니,

“지엄마아!”


할머니 품에 안겨 자던 다섯 살짜리 장손이 잠꼬대인가 할머니를 부른다.


제 어머니는 삼촌 아이들이 하는 대로 <아지미>라고 부르고, 할머니를 <지엄마>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장손아!”


잠귀 옅은 시어머니가 깬 모양이다. 손으로 손자를 더듬다가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개가 어째 저리 짖능가?”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앉는다. 그 서슬에 기침이 머리를 드는 것이 아닌가. 쿨룩 쿨룩, 한참 고통을 겪다가 허옇게 센 머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어 올린다.


“그래 말입꼬망!”


뒷방예도 근심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생겨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이내 입에 내어 주고받기에는 너무나 큰 걱정인 듯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기에 시어머니의 기침이 이내 가라앉지 않았다. 뒷방예는 쿨룩거리는 시어머니를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희미한 호롱불에 비치는 두 사람의 얼굴은 누렇게 부었다. 영양실조였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오랜 해소병이었다.


“오늘은 가마이 누워 계시쟁쿠!”


낮에 그 몸으로 산에 가서 풀뿌리를 캐 온 것을 민망해 하면서 나무라는 말이었다.


“어떻게 누워 있겠음. 칡뿌리래두 캐다가 아아드르 멕여얍지.”


쿨룩 쿨룩 시어머니의 기침이 여전했다. 그러면서도 아들의 걱정이었다.


“순라군에게 들킨 게 앰매?”


“글세 말입꼬망.”


“꿈자리가 뒤숭숭하드랑.”


“어마임께서 꿈 이얘기 듣구서 한새코 말렸등이 그 고집튕이 들어얍지.”


꿈이란, 밖에 나갔던 아들이 전립(戰笠)을 쓰고 군복을 갖춰 입고 전통(箭筒)을 차고 환도를 휘두르고 춤을 추면서 집으로 들어오더라는 것이었다. 어젯밤 날이 새었으니 그제밤에 시어머니가 꾼 것이었다. 길몽은 아니라고 시어머니 며느리가 수군거렸다.


뒷방예는 꿈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였다.


“오늘밤은 고만 두오.”


뒷방예의 불안한 얼굴을 한복이는 멍하니 보았다.


“뭐?”


“꿈자리가 뒤숭숭하다지 않소.”


“흥, 꿈자리구 뭐구, 얼핏 건너가서 아시 감쥐라두 캐 와야지 꿈타러엉하다가 뭇주검이 나는 거 기다리겠음…….”


“그래두…….”


한복이의 표정이 저으기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도사려 잡는 것이었다.


자신 있는 목소리였다.


“걱정 말라구.”


“한새쿠 갈 작젱임둥?”


“그래.”


고집 센 남편이라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뒷방예는 내키지 않는 대로,


“그럼, 조심이나 합꼬망.”

“조심하지 않음, 치덕이두 같이 가는데…….”

“오라방이두?”


장치덕이는 한복이의 처남일 뿐 아니라, 헌헌장부의 기질을 가진 뜻 맞는 친구였다. 그와 둘이면 사실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리고 둘이는 오늘밤 <사잇섬>에 가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그래.”


그랬을 뿐 입을 굳게 다물고 한복이는 강을 넘어간 것이었다.


“그 고집튕이가 한 번 되쌔 흥이 나야지…….”


타는 가슴이 뒷방예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고집이사 세지마는…….”


아들의 고집불통엔 애를 먹고 있는 터다. 그러나 며느리가 가림 없이 나무래니 듣기 싫은 모양이었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감싸 주려다가 문득 더 세차게 짖어대는 먼 개소리에 그만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멍, 멍, 머엉, 멍, 멍…….


뒷방예도 금시에 얼굴이 흐려진다. 숨을 죽이고 시어머니의 등을 쓰다듬을 따름이었다.


쿨룩, 쿨룩,


머엉, 멍멍, 머엉, 멍…….


치미는 기침보다도 개 짖는 소리에 시어머니는 신경이 더 쓰여지는 모양이었다. 정채 없는 눈을 껌뻑 껌뻑하여서, 마음은 마냥 개 짖는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2


가물이 아니라도 이 고장은 땅이 메말랐다. 연사 좋은 해에도 소출로 계량을 대일 양이면 근검절약을 해야했다. 하물며 2년 내려 계속되는 흉년에 있어서랴.


남녀노소가 산으로 들로 나무뿌리나 나물을 캐러 다녔다. 먹을 수 있는 거면 땅 속에 있건, 땅 위의 거건, 움트는 싹이건, 줄거리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칡뿌리가 캐어지고 소나무가 껍질이 벗겨졌다. 그래도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뒷방예 시어머니처럼 해소병으로 쿨룩거리는 남녀노소가 수두룩했다.


살 길을 찾아 이 고장을 떠나는 사람. 거지가 되어 가족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정들이 많아졌다. 그러는 중에서도 몇몇 약삭빠른 사람들은 <사잇섬 농사>를 지어 초근 목피와 함께 겨우 연명을 해왔다.


<사잇섬>이란 이곳, 종성부(鍾城府) 중에서 동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이 동네 앞을 흐르는 두만강 흐름 속에 있는 섬이었다. 흡사 고구마 형국으로 생긴 사잇섬은 모래로 이루어진 사주(沙洲)다. 주위가 십리가 될까? 땅이 검어 기름질 것 같으나 모래로 이루어진지라 곡식이 되지 않았다.


물 역에 몇 군데 새밭이 있었으나, 삿자리의 재료는 물론, 아무 쓸모가 없었다. 부지런한 농사꾼이 건너가 베어다가 말리어 아궁이에 때이기도 하고 썩혀서 거름으로 쓰는 게 고작이었다.


대안인 청국땅과 우리나라 사이를 흐르는 두만강, 그 강물 가운데 있는 섬이었다.


그러나 이 섬은 우리나라 영토였다. 그리고 압록강, 두만강 흐름 속에 있는 섬이 모두 청국 영토가 아니었다. 대국(大國)의 금도로 강 속에 있는 섬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일 거다. 압록강구의 위화도(威化島)를 비롯해 종성부의 조그만 이 섬에 이르기까지…….

<사잇섬> ―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섬이라는 뜻이 그대로 이름이 되고 만 것이랄까?

<사잇섬 농사>란 여기 가서 농사를 짓는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에 내세우는 표방에 지나지 않았다. 불모(不毛)의 섬에서 어떻게 곡식이 나랴? 그러므로 사잇섬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는 건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사실은 대안(對岸)인 청국땅에 건너가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같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강물인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은 토질이 어쩌면 그렇게도 다를까? 이쪽이 박토인데 반해 대안 지방은 시꺼먼 땅이 기름지기 그대로 옥토였다.


그러나 그럴 밖에 없는 일이었다.


청태조 누루하치(奴爾哈赤)의 발상지가 길림성, 오동성(敖東城), 돈화(敦化) 지방이었다. 두만강에서 북방으로 삼사백리 지점에 있는 고장이었다.


그가 십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에 입성한 해가 1644년이었다. 그 사이 수십 년간 두만강 변경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았다. 누루하치는 수하의 정병(精兵)을 삼기 위해 자신의 출생지에서 순 만주족인 장정을 뽑았다. 같은 족속이라야 믿음이 갔기 때문이리라.


승승장구, 천하를 손아귀에 넣을 기세였던 누루하치였다. 그러므로 장정들은 그의 수하 정병으로 뽑히는 걸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지휘 밑에 넓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북상(北上)했다. 가슴속에는 규모는 작으나 누루하치 못지않은 영화를 꿈꾸면서……. 그러므로 한번 북상한 장정들은 고향에 돌아오려 들지 않았고 돌아오지도 않았다.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을 아들이나 동생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기후 좋고 밝은 땅에 삶의 터전을 잡아야 한다는 야심과 희망이 부풀지 않을 수 없었다. 장정들이 병정에 뽑히자, 좋아라고 살림을 뜨기 시작했고 누루하치가 북상하자, 솔가해서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된 것이었다.


한 집이 뜨고, 두 집이 뜨고…….


이렇게 하여, 원체 인구가 희박하던 이 지방에는 사냥꾼과 통행인이 가끔 눈에 띌 뿐, 인적이 드물었다.


더욱이 중흥기의 강희(康熙), 건륭(乾隆) 두 임금은 이 지방을 청조 발상(淸朝發祥)의 성지(聖地)라고 하여 통치하에 있는 타민족 외에는 이민을 허가하지 않았다. 제 백성을 그랬거든 다른 민족에 있어서랴.


우리나라와 청국 사이에는 서로 이민을 철거케 하는 비공식 협정이 맺어진 모양이었다. 조정에서는 어느 결에 두만강의 월강을 금지했고 이를 범하는 자에게는 월강죄(越江罪)의 극형으로 임했다. 이러고 보니, 조·청 양국 민족이 이 지역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가위 무인지경이었다.


그동안이 2백여 년.


나무가 자랄 대로 자라고, 그 잎이 떨어져 쌓였다가는 썩고, 썩은 나뭇잎이 땅속에 파묻히고…….


이러기를 2백년을 되풀이 하였으니 지력(地力)은 조금도 소모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땅이었다. 어찌 기름진 옥토가 아닐 수 있을 것인가?


쟁기나 보습, 괭이로 파 뒤집으면 시커먼 흙이 농부의 목구멍에 침이 꿀꺽하고 삼켜지게 했다. 씨를 뿌리기만 하면 곡초가 저절로 쑥쑥 소리라도 들릴 듯이 자라 올라갔다. 거름이 필요 있을 까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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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캐너 살 때 아르미 5.0을 번들로 받았었는데, XP에선 안 되어서 아쉬웠었는데, 드디어 6.0 프로를 구하게 되어서 시험해 보니 한글은 95점, 한자는60점 정도이니, 아르미6의 인식율이 놀랍다. 기술의 진보가 얼마나 갈지 궁금해지게 만들어 준다.

시험삼아 여름에 읽었던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152~154을 읽어 들어 보았는데, 허균이 사모하던 기생을 기리는 글이다.


절묘한 시구는 비단 펼친 듯

밝은 노래 가던 구름길을 범했네.

복숭아 훔친 죄로 인간 내려와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떠났네.

부용 휘장 등불은 어둑도 하고

비취빛 치마엔 향기가 남아

내년에 복사꽃이 활짝 피면은

그 누가 설도(薛濤) 무덤 지나가리오.

妙句堪摘錦      淸歌解駐雲

倫桃來下界      竊藥去人群

燈暗美蓼帳      香殘翡翠裙

明年小桃發      誰過薛濤墳


처량타 반희(班姬)가 부치던 부채

구슬퍼라 탁문군(卓文君)이 타던 거문고

날리는 꽃 공연히 한만 쌓이고

시든 향초 다만 마음 상하네.

봉래도라 구름은 자취도 없고

푸른 바다 달빛은 하마 잠겼네.

훗날 소소(蘇小)의 집을 찾으면

시든 버들 그늘도 못 드리우리.

凄絶班姬扇      悲凉卓女琴

飄花空積恨      衰蕙只傷心

達島雲無迹      溟滄月已沈

他年蘇小宅      殘柳不成陰


 

 '비단을 펼쳐놓은 듯 아름답던 시, 청아한 노랫소리는 구름도 가던 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내 보기에 그대는 복숭아 훔친 죄로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선녀였다. 그런데 이제 인간의 불사약을 훔쳐 달나라로 달아났던 항아(辯』刻처럼 훌쩍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구나. 그대의 거처엔 불이 꺼지고, 그대 입던 치마엔 향기만 남았으리. 봄날이 와, 그대가 훔쳐 와 심은 그 복숭아 나뭇가지에 꽃이 활짝 피어나면, 사람들은 저 옛날 중국의 시기(詩妹) 설도(薛濤 :당나라 때 이름난 기생. 양가의 딸로 가난 때문에 기적奇籍에 몸을 올리고, 백거이 두목 등의 시인과 시를 주고받았다)의 무덤을 찾지 않고, 모두들 그대의 무덤을 찾아 스러져버린 꽃다운 기억들을 추억하게 될 게요.'


둘째 수에서는 버림받은 신세를 가을부채에 견주였던 한나라 반첩여(班婕妤)의 원가행(怨歌行)과 탁문군(卓文君)의 거문고 고사를 끌어와 이 둘을 합한 것이 바로 계랑이라고 추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은 흩날리는 꽃잎처럼 한만 답쌓이고, 거듭되는 이별에 가슴만 아픈 나날이었다. 그제 그녀는 봉래산으로 건너갔고, 달빛은 바다에 잠겨 세상은 어둠 속에 묻히고 말았다. 유명한 기생 소소(蘇小)의 명망도 이제 그녀의 꽃다운 이름 앞에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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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라는 노랫말처럼 가을이 깊어 갈수록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편지를 쓰는 것이 생활이었던 때가 있었다. 언어장애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전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은 편지라는 수단이 절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PC를 사서 어느 정도 익히게 되자 바로 프린터를 사서 편지를 찍어 보내게
되었다. 처음으로 장애우들 모임에 나갔을 때, 언어장애 때문에 다른 장애우들에게
조차 외면 당하기 일쑤였다. 그렇기 때문에 외면 당하지 않으려고 만나는 사람들에
게 편지를 부지런히 써서 보내야 했다.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이나 팔이
아무리 아파 와도 쉴 줄 모르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말씀처럼
힘들게 써서 보낸 편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내게로 열게 만들어 줄 때 무엇에 비할
수 없는 희열을 맛보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편지를 쓰기 위해 한 장을 채워야 한다는 부담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조그맣게 찍히는 9핀 프린터로 A4 용지를 채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손은 느리고 무수한 오타와 싸우다 보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오래 걸려 쓰다
보면 자꾸 고치게 되어서 더 오래 걸리게 된다. 

그만큼 편지마다 공이 더 들어가고 애착이 가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답장이 거의
받지 못해 실망이 들게 되었다. 모임에 자주 나가게 되면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나아져서 마음놓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어 편지를 힘들게 쓸 필요를 점점 덜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편지를 쓰는 일이 갈수록 부담스러워져 가게 되었고 쓰는 것이
드물어지게 되었다. 그 후 PC 통신을 하게 되면서 E메일(전자우편)이라는 수단을
쓰게 되어서 더욱 편지를 쓰지 않게되었다. 

편지란 쓰기도 힘들지만 내겐 봉투에 넣고 주소를 쓰고 우표를 사서 붙이는 것도 
남을 시켜야 하니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전 개인의 E메일化가 소원이 되기도 한다. 편지가 종이 위에 쓰는 것이라면 E메일은 PC에 써서 회선을 통해 보내면 되는 것이다.
종이에서처럼 분량을 신경 쓸 일이 전혀 없다. 형식이나 심지어 맞춤법까지 무시하고 서로 뜻만 통하면 된다. 성가신 스팸이나 공지 매일 속에서 친구의 메일을 받게 될 때 그 반가움이란 형식을
갖춘 장문의 편지에 못지 않은 기쁨을 준다. 그렇지만 편지이든 메일이든 마음을 기울인 예의 바른 것을 받게 될 때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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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10-11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문의 편지를 신들린 듯 썼던 시절이 그립네요. 그 때의 나는 누구였을까 싶도록 건조하고 단순해진 현재의 나를 되돌아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