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카페거리엔 실존주의 향수가…
탄생100주년 맞아 사상 재조명 학술대회 열기
"대안문화 선봉" "한물간 사상가" 평가 엇갈려
글·사진/파리=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5.06.23 17:58 23' / 수정 : 2005.06.23 18:03 47'


▲ 사르트르의 단골카페 '되 마고' 카페를 장식한 '두 개의 중국 도자기 인형'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이 카페에서 1940년대 후반 사르트르는 왕성하게 글을 썼다.
“사르트르? 한마디로 말하기에는 복잡하지만, 그는 사상사에서 최후의 공룡이었다고나 할까요….”

프랑스에서 대학 위의 대학으로 불리는 그랑제콜인 시앙스 포에서 정치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에마뉘엘 비레. 파리 13구에 위치한 국립도서관(BNF)에서 공부하는 이같은 젊은 세대에게 오늘날 사르트르는 한물간 사상가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런데 국립도서관에서는 20세기 프랑스 문학과 철학의 스타였던 장 폴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을 맞아 특별 전시회(3월 9일~8월 21일)가 열리고 있었다.

“인간은 부단히 자기 밖에 있는 것이며 자기 밖으로 스스로를 투사(投射)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며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의 시대를 주도했던 사르트르의 육필 원고와 저서들의 초판본, 사르트르의 생애와 20세기 주요 사건을 엮은 사진과 동영상 자료 전시 등으로 꾸며진 이 유료 전시회는 석 달 만에 1만2000여명의 관람객을 동원했다. 1980년 사르트르의 장례식에 3만여 명의 군중이 몰렸던 장면이 기억의 갈피를 헤집고 솟아나왔다. 그리고 “죽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다. 어느날 내 삶이 멈추겠지만, 내 죽음이 내 삶을 규정하지 않고, 내가 늘 생의 충동이기를 바란다”고 사르트르는 말하지 않았던가.

정치학도 에마뉘엘 비레는 사르트르의 사상사적 사망을 재확인하는 젊은 지식인의 호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사르트르처럼 모든 문제와 운동에 참여하는 총체적 지식인의 시대는 갔다”며 “요즘 프랑스 젊은이들은 고교 시절에 교과 과정의 일환으로 사르트르의 책 몇 권을 읽을 뿐”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지식인은, 푸코가 말했듯이, 전문 분야의 지식으로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특수한 지식인이고, 사실 요즘 프랑스에서 지식인의 종말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100번째 생일이었던 지난 21일이 도래하기 전 연초부터 프랑스 언론과 출판계는 올해를 사르트르의 해로 선포했다. 사르트르가 창간을 주도했던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70쪽이 넘는 특집호를 마치 단행본처럼 팔고 있다. 사르트르의 활동 무대였던 소르본 대학 앞의 서점들에는 ‘사르트르 희곡전집’을 비롯해 ‘사르트르―21세기를 위한 사상가’ ‘카뮈와 사르트르―우정과 전투’ 등등 새로 나온 전기서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사르트르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 대회가 연중 내내 전국 각 도시에서 열리고 있는 중이다. 사르트르의 공과(功過)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사르트르 전문가인 아니 코앙-솔랄(캉대학 교수)은 “예언자, 전복자, 시민 사회 신봉자였던 사르트르는 사후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대안(代案) 문화의 선봉장”이라며 “20세기의 사상가였던 그는 21세기에도 유효한 사상가”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알바니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 중인 세계적인 소설가 이스마일 카다레는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을 지지했던 사르트르의 수치스러운 현실 참여에 대해 느꼈던 공포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나의 도덕적 의무”라며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의 맹목주의와 정신분열증을 납득할 수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역사학자 미셸 비노크는 “분명히 공산주의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 자유의 철학자는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 사회주의와 자유를 합일시키는 데 실패했다”면서도 “그는 알제리 독립 지지와 베트남 전쟁 반대에서 옳은 편에 섰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사르트르의 생애에 대한 평가가 크게 갈리지만, 정작 그의 실존적 흔적은 파리 센강의 좌안(左岸) 지역에만 집중되어 있다. 파리 16구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외조부 밑에서 컸다가 어머니의 재혼과 함께 라 로셀로 내려갔지만, 파리의 명문 고교 앙리 카트르에 입학한 뒤 지식인들이 몰려 살았던 생 제르망 데프레의 카페 거리, 팡테옹 광장 부근, 몽파르나스 지역을 전전했다. 특히 그는 1946~1949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유대인 문제에 관한 성찰’ ‘더러운 손’ 등등을 왕성하게 펴냈다. 그가 문학비평의 고전이 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쓴 것은 1947년이었다.


▲ 사르트르가 사춘기 시절을 보냈고, 작가·사상가로서 활동했던 파리5구 대학가를 대표하는 팡테옹 광장 거리
이 무렵 사르트르는 계약 결혼의 동반자 보부아르와 함께 단골 카페 되 마고에 매일 나와 글을 썼다. 오늘날 이 카페 앞은 ‘사르트르-보부아르 광장’으로 불린다. 광장이라고 하지만 도로 한 귀퉁이에 불과한 작은 공간이다. 카페 되 마고 옆에 있는 또 다른 카페 드 플로르는 1950년대에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실존주의자들의 본거지였다.

개인의 자유를 외치면서 기성 질서에 대한 반항이 넘쳐났던 이 거리의 고풍스러운 카페들에는 사르트르나 카뮈의 사진 한 장 붙어 있지 않다. 화려했던 실존주의는 이미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카페 거리를 무한한 상상과 향수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르트르의 단골 카페들은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현실 속에 숨어 있는 과거의 섬처럼 거기를 가려는 사람들을 늘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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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문학의 현실참여 천명
좌·우 넘어선 제3의 길
박해현기자
입력 : 2005.06.23 18:00 44'


 


▲ 사르트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듯이 순수 예술과 공허(空虛) 예술은 동일한 것이며, 예술적 순수주의는 지난 세기의 부르주아들의 교묘한 호신술에 불과했다.”

사르트르(1905~1980)는 1947년 발표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순수 예술을 비난하면서 문학의 현실 참여를 천명했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오자마자 사르트르는 좌우파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가들이 민중을 위한 창작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공산당을 지지하는 문인들로부터 당과 노동 계급을 배반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또한 사르트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격렬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우파로부터 “왜 공산당에 들어가지 않는 거요”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냉전 시대의 본격적 개막을 앞둔 좌우 대립 구도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정의를 아우르는 제3의 문학을 지향했다. 그래서 그는 “만일 글쓰기가 단순히 선전이나 오락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사회는 무매개적인 소굴로, 다시 말해서 날파리나 연체동물과 같은 기억 없는 삶으로 빠져들 것”이라며 오늘날도 유효한 경고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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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문한 책이 왔다. 숙제처럼 여기던 돈키호테의 완역본이 나와서 샀는데 레베르테의 소설 두 권이 덤으로 왔다. 어떤 이들은 레베르테의 소설을 읽으려고 돈키호테를 샀다는데 난 반대이기에 돈키호테가 부담스럽게 여겨질 만 크고 두꺼운데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 2,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한국단편문학선 1, 허클베리 핀의 모험도 같이 샀기에 언제 읽게 될지 까마득하다.

  처음에 소설로 시작했지만 전문 서적에 밀려 시시하다고 80~90년대엔 거의 사지 않다가 5년 전부터 소설을 다시 사서 읽기 시작하게 되었다. 딱딱한 책들과 씨름하다 지겨워질 땐 쉬운 책을 읽기 위해서 이고 옛날에 제대로 섭렵하지 못해서 숙제로 남겨져 있던 세계문학작품을 읽고 싶어진 것.

 

  옛날에 읽었어도 부실한 번역 탓에 참 맛을 볼 수 없었는데 해당 문학 전공자에 의한 완역본이 나오고 있어 기쁘다. 신곡도 골랐었지만 완역본이 새로 나왔다고 해서 보니 비싸서 아쉽게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는데 이번에 산 작품들을 다 읽으면 최우선으로 안 사고는 못 배길 터!

 

  길 건너 새로 지은 건물에 신라명과가 들어왔는데 빵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항상 우선순위에 밀려 못 사먹으면서 책은 아낌없이 사고 있으니 어머니께 빵 하나도 안 사 준다고 핀잔을 듣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무리 저 잘난 사람이라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없기에 어차피 인생이란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는 거라면 내 선택을 옳은 거라고  해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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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7-12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많이 사셨네요 ^-^ 아무것이나 마음가는데로 집어들고..
읽기 시작해보세요. 차근차근...
 

[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침묵의 도시에 선 ‘어린왕자’

'어린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프랑스 리옹 벨쿠르광장에서
탄생 100주년… 거리이름 ‘생텍쥐페리’로 문학적 상상력 키웠던 레망에서의 사춘기
리옹=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5.06.09 18:29 40' / 수정 : 2005.06.09 18:55 56'

“내가 죽은 것처럼 보일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야….”

프랑스 제2의 도시 리옹의 벨쿠르 광장에 서있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Saint Exupery)의 동상. 기단에 새겨진 그 짧은 문장이 긴 여운을 남긴다.

생텍쥐페리의 대표작 ‘어린 왕자’에서 왕자가 던진 말이다.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를 만나 꿈같은 우화를 빚어낸 왕자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기 위해 지상을 뜨기 전에 그렇게 말했다.

“내 몸은 버려야 할 낡은 껍데기 같은 거야. 껍데기를 버린다고 슬퍼할 건 없어.”

그 어린 왕자의 작별 인사는 홀연히 인간의 대지를 뜬 생텍쥐페리의 최후를 떠올리게 한다. 1944년 7월 31일 오전 8시 45분 P38 라이트닝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정찰 비행에 나섰다가 끝내 귀환하지 않은 생텍쥐페리는 확인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해 영생을 누리고 있다.

‘어린 왕자’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 독자라면 생텍쥐페리의 비행기가 지상을 이륙해서 지구 바깥까지 나갔을 것이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어느 별에서 밤마다 등에 불을 붙여 지구인들에게 별빛으로 인사하는 점등인으로 살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 생텍쥐페리가 태어나서 아홉살까지 살았던 리옹시.
동상에서 눈을 돌리면 곧바로 마주치게 되는 생텍쥐페리 거리 8번지. 생텍쥐페리의 생가다.

“생텍쥐페리는 이 집 3층에서 1900년에 태어났지요. 물론 내가 이 집에 살기 훨씬 전의 일이지요. 그는 우리의 전쟁 영웅이에요. 용감한 사람이었고, 대지를 떠나 신화가 된 삶을 살았지요.”

생텍쥐페리 생가 건물의 1층에 살고 있는 드뤼포르(Druffort)씨. 아침 식사용 바게트 빵을 사들고 오다가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기자를 보자 그는 대뜸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기자가 고개를 젓자 “일본인 관광객들이 꽤나 많이 찾아오거든…” 했다.

그는 집 옆에 있는 서점에 가면 참고 도서들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줬다. 시킨 대로 서점에 가서 책들을 뒤적거리다가 생텍쥐페리의 전기를 담은 만화책을 한 권 골랐다.

서점 주인은 “리옹 사람이라면 어릴 때부터 어린 왕자가 그려진 연필과 학용품을 쓰면서 자란다”며 “2000년 생텍쥐페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리옹시가 이 거리에 작가의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동상도 그때 세워졌고, 리옹 공항은 리옹 생텍쥐페리 공항으로 개명됐다.

생텍쥐페리는 “우리가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한다면, 그는 산 자보다 더 강하다”고 쓴 적이 있다. 고향은 그의 말을 따랐다.

생텍쥐페리는 리옹에서 9살 때까지 살았고. 리옹 부근의 레망에서 사춘기를 보냈다. 그는 언젠가 “내가 리옹에서 태어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라면서 “리옹은 아름다운 침묵 속의 도시”라고 찬미했다. 그의 생가 바로 부근에서 손강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소년 생텍쥐페리는 강의 끝이 어디일까를 상상하다가, 더 멀리 가기 위해 점차 하늘로 눈을 돌렸던 것이 아닐까.

그의 유년기는 최첨단 문명의 상징인 비행기의 선구자들이 현대의 영웅으로 숭상되던 20세기 초였다. 리옹 부근의 비행장에 친구들과 놀러가기를 즐겼던 그는 창공을 누비는 비행사를 선망하면서 상상력을 키웠고, 수업 시간이면 교실 창밖에 어른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에 넋을 놓으면서 문학적 감성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가 하늘과 땅에 그린 삶의 궤적에서 리옹 시절은 짧은 구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대표작 ‘어린 왕자’는 리옹에서 보낸 유년기와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책의 첫장에 죽마고우였던 레옹 베르트를 위한 헌사를 쓰면서 “어린아이였을 때의 그에게 이 책을 바치기로 한다”고 밝혔다. 그는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에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생텍쥐페리의 동상을 다시 천천히 들여다보니, 작가는 비행복을 입고서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 벨쿠르광장에 선 생택쥐페리와 어린왕자의 동상.
바로 그 옆에 어린 왕자가 “아저씨, 양 한 마리만 좀 그려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붙어 서 있다. ‘어린 왕자’의 삽화는 생텍쥐페리가 직접 그린 것이다. 그는 ‘어린 왕자’에 넣을 그림들을 먼저 완성한 뒤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해군사관학교에 낙방한 뒤 파리에서 미술에 몰두하면서 익힌 그림 솜씨였다. 어느날 그가 어린 왕자를 끄적거리는 것을 보고 누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 영혼을 사로잡는 어린 왕자야. 외로운 왕자”라고 그는 말했다. 어린 왕자의 얼굴에 깃든 알 수 없는 슬픔은 작가의 영혼에 어른거리는 실존의 그림자였다.

“마음이 슬플 때는 지는 해의 모습이 정말 좋아…”라고 읊었던 어린 왕자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어린 왕자의 얼굴은 작가의 영혼이 피운 한 송이 꽃이기 때문에 슬픈 아름다움의 잔영이다.

생텍쥐페리의 동상은 어디론가 가다가 지구라는 별에 불시착한 채 먼 곳에서 올 구조대를 기다리는 비행사를 형상화한 듯하다. 하지만 어린 왕자가 바로 곁에 있기에 그는 외롭지 않다. 그가 아름다운 침묵의 도시라고 부른 고향에 영원한 침묵의 깊이를 선사한 생텍쥐페리의 동상을 좀 더 오랫동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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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 휴머니즘 원초적 순수 그려

박해현기자
입력 : 2005.06.09 18:30 43'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일 거야….”

소행성 B612호에서 홀로 살다가 여러 별을 거친 여행 끝에 지구의 사막에 떨어진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는 어린 시절의 순수를 잊어버리고 어른이 되어야 하는 인간에 대한 연민 끝에 어른과 어린이가 모두 읽을 수 있는 책 ‘어린 왕자’를 썼다. 1943년 4월 6일 미국 뉴욕에 체류 중이던 생텍쥐페리가 발표한 이 작은 책은 오늘날 120개 언어로 번역된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이 됐다. 한국에서도 30종이 넘는 번역본이 나왔고, 젊은 날 누구나 한 번씩은 읽고 넘어가는 ‘마음의 고전’이 됐다.

생텍쥐페리(1900~43)는 ‘야간 비행’ ‘인간의 대지’ 등의 소설을 통해 자유의 본질적 가치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인간의 희망을 표현했다. 그의 휴머니즘은 이론이 아니라 행동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어린 왕자’는 그 휴머니즘의 원초적 순수를 아름답게 보여주었다.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럽고, 그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지.”

“무엇인가를 길들이지 않고서는 그걸 정말로 알 수는 없어. 사람들은 이젠 뭔가를 진정으로 알게 될 시간이 없어졌어. 그들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물건을 가게에서 살 뿐이거든. 그런데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으니까 이제 그들은 친구가 없는 거지.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줘!”

“아주 간단한 건데… 그건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어린 왕자’는 이처럼 연인에게 편지를 보낼 때 종종 건네주고 싶은 명대사들로 짜여 있다.

‘어린 왕자’는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착한 심성을 일깨워주는 성스러운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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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이 있어 우리는 행복하다

독일 월드컵 본선진출 주역
쿠웨이트시티=최보윤기자 spica@chosun.com
입력 : 2005.06.10 03:16 05' / 수정 : 2005.06.10 03:21 54'
 

 

여드름 투성이의 스무 살 청년은 거울을 보면 스스로 “못생겼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9일 새벽 잠을 설쳐가며 한국이 독일 월드컵 아시아최종예선에서 쿠웨이트를 4대0으로 꺾는 모습을 지켜본 국민들에겐 축구대표팀 막내 박주영은 그 누구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 '소년의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됐다. 지난 1996년 대구 반야월초등학교 5학년이던 박주영(가운데 10번)이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한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상대 선수들을 제치고 드리블 하고 있다. /스포츠하우스 제공
◆ 무뚝뚝한 골잡이

경기가 끝난 뒤 한국 선수들끼리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고 깡충깡충 뛸 때, 일등공신 박주영은 그 자리에 없었다. 경기 MVP로 뽑혀 상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상품을 손에 들고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얼굴은 예의 그 무표정 그대로다.

“기분 좋고요. 골 넣은 거보다도 월드컵 나갈 수 있게 된 게 무엇보다 좋았고요. 꼭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는데요. 수비 뒷공간으로 파고든 게 먹힌 거 같고요….”


▲ 자전거를 타고 있는 '꼬마' 박주영. /조선일보 DB
그의 말대로라면 정말 뛸 듯이 기뻐, 목소리라도 들떠야 하는데 이거 참 담담하다. 선배들이 덥석 껴안으며 토닥거리고, 코칭 스태프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해도 처진 눈인사로 살짝 답례를 할 뿐이다. 야스퍼트 피지컬 코치는 뭐가 그리도 예쁜지 냉큼 달려가서 ‘굿잡(good job)’이라며 그를 얼싸안기까지 한다. 이번에도 역시 살짝 띤 미소가 전부다. 하지만 사석에서 또래들을 만나면 ‘수돗물 쏟아지듯’ 수다를 늘어놓는 게 박주영의 또 다른 일면이다.

그가 환하게 웃을 때는 역시 공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빌 때다. 이제 그렇게도 좋아하는 축구를 또 하게 생겼다. 10일부터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세계청소년(20세 이하) 선수권대회에 참가한다. 박주영은 9일 쿠웨이트에서 곧바로 현지 한국청소년대표팀에 합류했다. “워낙 호흡이 잘 맞는 친구들이라, 경기하는 데는 문제 없을 것 같고요. 대표팀에서 하던 대로 똑같이만 하면 잘 될 거 같은데요.” 박주영이 내던지는 당찬 출사표다.

◆ 부드러움과 스피드로 승부

겨우 20살. 그러나 이미 한국 축구의 미래로 우뚝 서버린 자랑스런 청년. 그에게 공이 가면 안심이 된다. IQ 150의 머리에서 나오는 지능적인 플레이, 표범이 먹이 낚아채듯 기회를 놓치지 않는 능력, 반박자 빠른 슈팅, 성실한 훈련자세…. 이회택, 차범근, 최순호, 황선홍, 최용수 등등 역대 스트라이커들이 체격과 파워를 바탕으로 했다면 박주영은 부드러움과 스피드로 상대를 제압한다. 100m 달리기 기록이 12초. 공격수로서 최상위권은 아니지만, 박주영은 그냥 달릴 때나 공을 드리블하며 달릴 때나 속도가 똑같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1m82, 71㎏의 체격은 가냘퍼 보이기까지 한다. 본프레레 감독이 “훅 불면 날아갈 것 같다”고 발탁을 꺼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박주영은 A매치 2경기 연속 풀타임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며 주위의 우려를 깨끗이 씻어냈다. 불필요한 체력소모를 하지 않는 영리한 플레이가 그 비결이다. 또 하나의 강점은 큰 부상이 없었다는 것. 대표팀 최주영 의무팀장은 “주영이 몸은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하다”고 했다.


▲ 캐리커처=이철원기자
◆ 미니홈피서 싸이질도 열심

1985년 7월 10일생, 축구화 사이즈 265~270㎜, 수면시간 6시간, 자주 가는 곳 PC방, 이상형 ‘기도할 때 모습 예쁜 여자’, 성격의 단점 ‘잘 삐침’, 싫어하는 말 “교회 뭐할라구 가노”….

박주영의 팬이라면 그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를 알아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박주영이 직접 자신의 팬클럽에 100문100답을 통해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두 살 위의 누나가 주는 ‘도토리’를 갖고 자신의 미니홈피(www.cyworld.com/cyp10)에서 ‘싸이질’도 열심히 하는 신세대다.

대구에서 교회를 다닐 때 만난 한 살 연상의 여자친구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 4월 24일 프로축구 대전과의 경기에서 골 세러모니로 속옷에 ‘굼벵이’ 그림을 그린 것에 대해 “별명이 굼벵이인 여자친구에게 사랑고백을 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각종 광고 모델로도 인기가 높은 박주영의 한 달 용돈은 50만원. 그저 이것 저것 사먹는 데 쓰는 정도다. 골을 넣은 뒤 기도 세러모니를 빼놓지 않는 박주영의 장래 희망은 ‘축구 선교사’다.

◆ 박주영 축구의 비밀

대구 반야월초등학교 4학년 때 선수 생활을 시작한 박주영은 자신만의 비법으로 축구를 색다르게 익혀나갔다. 첫 번째 비밀은 ‘맨발 축구’. 축구화를 잃어버려 맨발로 축구를 해야 했던 적이 있는데, 그 덕분에 세심한 볼 터치의 감을 잡았다. 이후로도 가끔씩 맨발 축구로 볼 감각을 점검한다. 두 번째 비밀은 ‘시장통 축구’.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 돌파력을 높이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재래시장에서 드리블 연습을 했다. 세 번째는 ‘놀이축구’. 항상 볼과 함께했던 박주영은 길을 걷다가도 벽에 붙여진 포스터에 축구공을 명중시키는 놀이로 슈팅의 정확도를 길렀다. 초등학교 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지금껏 빠짐없이 쓰고 있다. 박주영은 A4 용지 반만한 크기의 일기장에 신앙과 축구로 가득찬 하루하루를 정리해가고 있다.

 

’마침내 터진 아름다운 발의 축포’

’순둥이’ 박지성이 본프레레호 데뷔골을 작렬하며 독일행 축포에 대미를 장식했다.

박지성은 9일 새벽 쿠웨이트시티 가즈마스타디움에서 열린 쿠웨이트와의 2006독일월드컵 아시아지역 A조 최종예선 5차전에서 후반 16분 팀 승리에 디딤돌을 놓는 4번째 골을 작렬하며 독일행 진출을 자축했다.

특히 박지성이 기록한 본프레레호 마수걸이골은 지난 2002년 박지성이 포르투갈을 격침시킨 결승골을 연상시키는 그림 같은 골.

당시 박지성은 페널티지역 오른쪽에서 포르투갈의 미드필더 콘세이상을 제치고 트레핑, 강력한 오른발 슛으로 그물을 출렁이며 한국의 16강행을 결정지은 바 있었다.

전반 초반에 다소 몸이 덜 풀린듯 움직임이 밋밋했던 박지성은 전반 중반 이후 특유의 빠른 발과 다이내믹한 몸동작으로 상대 수비수를 농락하며 한국 공격을 조율해 나갔다.

도우미로서 강철체력을 과시하던 박지성이 가장 빛나던 순간은 후반 16분.

박지성은 빠른 발을 이용해 상대 오른쪽 진영을 돌파 수비수 한 명을 가볍게 제치고 페널티지역 오른쪽 구석에서 중앙에 있던 이동국에게 패스하는 듯 하다가 오른발로 슈팅, 네트를 갈랐다.

최근 잉글랜드 명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부터 공식적인 이적 제의를 받은 박지성은 이날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움직임으로 국내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

특히 네티즌들로부터 ’굳은살로 가득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발’이란 찬사를 받으며 최근 ’발’로 화제의 주인공이 된 박지성은 그 굳은살 가득한 발로 가장 아름다운 슛을 터뜨리며 본프레레호 마수걸이 골이라는 그림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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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지상의 양식' 앙드레 지드

알제리 제밀라·비스크라에서
야자수의 바다엔 지드의 관능이 숨쉬고…
신혼때 묵었던 호텔·호화 아파트 폐허로
'생명의 빛' 발견한 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글·사진=김화영 고려대 교수·불문학
입력 : 2005.06.02 19:05 37' / 수정 : 2005.06.02 19:12 22'

앙드레 지드의 자취를 찾아가는 남쪽 여행은 알제 동쪽 300킬로미터, 제밀라를 거쳐 가는 긴 우회의 길이었다. 세티프 평원 북쪽의 메마른 산악지대에 위치한 이 거대한 로마 유적 제밀라, 그리로 가는 ‘꼬불꼬불한 길’의 풍경은 보기 드문 절경의 구릉지대로 온갖 봄꽃들과 연두색 밀밭으로 채색된 양탄자 조각보였다.

이 인적 없고 바람 드센 폐허에서 오후를 다 보내고, 찾는 이 없는 박물관의 관장에게 카뮈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책상 맞은편 벽에 붙여 놓은 인용문을 가리켜 보일 뿐.

“여러 사람들과 여러 인간사회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가 스러졌다. 정복자들은 이 고장에다가 졸병(卒兵)급 문명의 자취를 찍어 놓았다. 그들은 위대함에 대하여 저속하고 우스꽝스러운 관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정복한 땅의 넓이로 제국의 위대함을 가늠했다. 신기한 것은 그들 문명의 폐허가 그들의 이상(理想)의 부정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이다.”(‘제밀라의 바람’)


▲ 앙드레 지드의 소설 '배덕자'의 무대가 된 도시 비스크라
이튿날 나는 거만한 문명의 ‘부정’과도 같은 ‘사막의 열쇠’ 비스크라를 향해 남으로 수백 킬로를 달렸다. 지드는 카뮈가 태어나기도 전인 1893년에 11월에 처음으로 알제리를 방문한 이래 근 반세기에 걸쳐 이곳을 되풀이하여 찾았다. 그 자취는 소설 ‘배덕자’, 감동적 산문시 ‘지상의 양식’, 회고록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그리고 여행 노트 ‘아민타스’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남았다. 남으로 내려갈수록 초원지대는 사라지고 엉겅퀴만 드문드문 먼지를 쓰고 웅크린 사막. 문명에 대한 집요한 부정.


▲ 김화영 교수가 알제리의 사막에서 만나 아이들.
지드가 “마침내 바위가 열린다. 이것이 문이다”라고 말했던 엘 칸타라의 협곡을 통과. 첫 오아시스 마을이다. 엘 우타야의 소금 산과 은빛 소금의 호수를 지나면 곧 비스크라. 200만 그루의 야자나무가 광막한 바다를 이루는 도시. 지드의 문학 속에서 가장 이국적 매혹을 자아내는 곳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빈속을 채울 겸 시내로 나섰다. 길가에서 오래된 느낌의 어느 공원 하나를 발견. 이곳이 혹시 ‘배덕자’에서 주인공이 머물렀던 호텔 앞의 그 ‘길쭉한’ 공원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지금은 앙드레 지드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 도시에서 우연은 나를 문득 그의 문학의 한 심장부로 곧장 인도했다. 그 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온실처럼 덥다. 그 한쪽 우거진 숲에 묻힌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겉만 교회일 뿐 도서관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배덕자’의 첫머리에서 주인공 미셸과 그의 아내 마르슬린이 묵었던, 아니 지드와 그의 신부 마들렌이 묵었던 호텔이 그 공원 건너편에 그대로 있다고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그 도서관의 사서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거의 다 죽다시피 된’ 병든 몸으로 비스크라에 도착한다.

주인공이 든 아파트는 “거의 한 개의 테라스에 지나지 않았다. 그 테라스! 거기에 내 방과 마르슬린의 방이 있었다. 제일 높은 곳에 이르면 눈 아래 집들 너머로 종려나무가 보이고 종려나무 너머로는 사막이 보였다. 테라스의 또 다른 편은 길쭉한 마을의 공원에 접해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 지드가 '지상의 양식'에서 감탄한 엘 칸티라의 바위문
‘배덕자’, ‘지상의 양식’, 그리고 ‘한 알의 밀알…’의 화자는 모두 지드 자신의 한 모습이다. 그는 바로 이 호텔, 이 공원, 이 거리, 이 도시, 이 인근의 여러 오아시스 마을에서 비로소 죽음으로부터 헤어나 싱싱한 생명의 ‘맨발’을 발견한다. 그리고 외친다. “나타나엘이여, 내 너에게 열정을 가르쳐 주마!” 아랍 소년 바시르, “웃을 때에 굉장히 흰 이빨이 드러나 보였다. 그는 장난으로 피 흐르는 상처를 핥았다. 그의 혓바닥은 고양이 혓바닥처럼 장밋빛이었다. 아 아 얼마나 건강한 놈이냐! 이 작은 몸뚱이의 건강.” 이때부터 지드의 관능은 잠을 깬다.

동성연애자 지드는 소년에게서 생명의 빛을 보고 절규한다. “중요한 일은 죽음의 날개가 나를 스쳤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대단히 놀라운 일로 되었다는 것이다.”


▲ 김화영 고려대 불문학 교수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원 바로 건너편에 아주 오래된 건물이 하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길과 공원 쪽으로 한껏 멋을 낸 회랑이 나 있고 그 한가운데 정문엔 판자에 못이 박혀 오랫동안 폐쇄된 채인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가까이 가 보니 정문 옆 벽의 검은 대리석 판에 새긴 ‘호텔 뒤 사하라’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버려진 지 20년. 이곳은 원래 ‘백인 신부들의 집’이었다. 2층 테라스 쪽으로 난 세 개의 방은 라비즈리 추기경을 위해 마련한 아파트였으나 오기도 전에 사망하였으므로 지드가 이 호화로운 방들을 쓰게 된 것이었다. 그 추기경의 침대에서 일어난 관능적인 일들을 여기서 자세히 말할 생각은 없다.

나는 비스크라 인근의 오아시스 마을들을 찾았다. 셰트마, 드로흐, 우마슈…. 키 큰 종려나무들과 토담 아래 흐르는 섹히아에 손을 적신다. 물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삶처럼. 인적 없는 골목에서 소년 하나가 나타나 까만 눈으로 쳐다본다. 오아시스의 환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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