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 카페거리엔 실존주의 향수가…
탄생100주년 맞아 사상 재조명 학술대회 열기
"대안문화 선봉" "한물간 사상가" 평가 엇갈려
글·사진/파리=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입력 : 2005.06.23 17:58 23' / 수정 : 2005.06.23 18:03 47'


▲ 사르트르의 단골카페 '되 마고' 카페를 장식한 '두 개의 중국 도자기 인형'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이 카페에서 1940년대 후반 사르트르는 왕성하게 글을 썼다.
“사르트르? 한마디로 말하기에는 복잡하지만, 그는 사상사에서 최후의 공룡이었다고나 할까요….”

프랑스에서 대학 위의 대학으로 불리는 그랑제콜인 시앙스 포에서 정치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에마뉘엘 비레. 파리 13구에 위치한 국립도서관(BNF)에서 공부하는 이같은 젊은 세대에게 오늘날 사르트르는 한물간 사상가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런데 국립도서관에서는 20세기 프랑스 문학과 철학의 스타였던 장 폴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을 맞아 특별 전시회(3월 9일~8월 21일)가 열리고 있었다.

“인간은 부단히 자기 밖에 있는 것이며 자기 밖으로 스스로를 투사(投射)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며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의 시대를 주도했던 사르트르의 육필 원고와 저서들의 초판본, 사르트르의 생애와 20세기 주요 사건을 엮은 사진과 동영상 자료 전시 등으로 꾸며진 이 유료 전시회는 석 달 만에 1만2000여명의 관람객을 동원했다. 1980년 사르트르의 장례식에 3만여 명의 군중이 몰렸던 장면이 기억의 갈피를 헤집고 솟아나왔다. 그리고 “죽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다. 어느날 내 삶이 멈추겠지만, 내 죽음이 내 삶을 규정하지 않고, 내가 늘 생의 충동이기를 바란다”고 사르트르는 말하지 않았던가.

정치학도 에마뉘엘 비레는 사르트르의 사상사적 사망을 재확인하는 젊은 지식인의 호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사르트르처럼 모든 문제와 운동에 참여하는 총체적 지식인의 시대는 갔다”며 “요즘 프랑스 젊은이들은 고교 시절에 교과 과정의 일환으로 사르트르의 책 몇 권을 읽을 뿐”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지식인은, 푸코가 말했듯이, 전문 분야의 지식으로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특수한 지식인이고, 사실 요즘 프랑스에서 지식인의 종말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100번째 생일이었던 지난 21일이 도래하기 전 연초부터 프랑스 언론과 출판계는 올해를 사르트르의 해로 선포했다. 사르트르가 창간을 주도했던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70쪽이 넘는 특집호를 마치 단행본처럼 팔고 있다. 사르트르의 활동 무대였던 소르본 대학 앞의 서점들에는 ‘사르트르 희곡전집’을 비롯해 ‘사르트르―21세기를 위한 사상가’ ‘카뮈와 사르트르―우정과 전투’ 등등 새로 나온 전기서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사르트르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 대회가 연중 내내 전국 각 도시에서 열리고 있는 중이다. 사르트르의 공과(功過)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사르트르 전문가인 아니 코앙-솔랄(캉대학 교수)은 “예언자, 전복자, 시민 사회 신봉자였던 사르트르는 사후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대안(代案) 문화의 선봉장”이라며 “20세기의 사상가였던 그는 21세기에도 유효한 사상가”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알바니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 중인 세계적인 소설가 이스마일 카다레는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을 지지했던 사르트르의 수치스러운 현실 참여에 대해 느꼈던 공포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나의 도덕적 의무”라며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의 맹목주의와 정신분열증을 납득할 수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역사학자 미셸 비노크는 “분명히 공산주의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 자유의 철학자는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 사회주의와 자유를 합일시키는 데 실패했다”면서도 “그는 알제리 독립 지지와 베트남 전쟁 반대에서 옳은 편에 섰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사르트르의 생애에 대한 평가가 크게 갈리지만, 정작 그의 실존적 흔적은 파리 센강의 좌안(左岸) 지역에만 집중되어 있다. 파리 16구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외조부 밑에서 컸다가 어머니의 재혼과 함께 라 로셀로 내려갔지만, 파리의 명문 고교 앙리 카트르에 입학한 뒤 지식인들이 몰려 살았던 생 제르망 데프레의 카페 거리, 팡테옹 광장 부근, 몽파르나스 지역을 전전했다. 특히 그는 1946~1949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유대인 문제에 관한 성찰’ ‘더러운 손’ 등등을 왕성하게 펴냈다. 그가 문학비평의 고전이 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쓴 것은 1947년이었다.


▲ 사르트르가 사춘기 시절을 보냈고, 작가·사상가로서 활동했던 파리5구 대학가를 대표하는 팡테옹 광장 거리
이 무렵 사르트르는 계약 결혼의 동반자 보부아르와 함께 단골 카페 되 마고에 매일 나와 글을 썼다. 오늘날 이 카페 앞은 ‘사르트르-보부아르 광장’으로 불린다. 광장이라고 하지만 도로 한 귀퉁이에 불과한 작은 공간이다. 카페 되 마고 옆에 있는 또 다른 카페 드 플로르는 1950년대에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실존주의자들의 본거지였다.

개인의 자유를 외치면서 기성 질서에 대한 반항이 넘쳐났던 이 거리의 고풍스러운 카페들에는 사르트르나 카뮈의 사진 한 장 붙어 있지 않다. 화려했던 실존주의는 이미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카페 거리를 무한한 상상과 향수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르트르의 단골 카페들은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현실 속에 숨어 있는 과거의 섬처럼 거기를 가려는 사람들을 늘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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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는?

문학의 현실참여 천명
좌·우 넘어선 제3의 길
박해현기자
입력 : 2005.06.23 18:00 44'


 


▲ 사르트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듯이 순수 예술과 공허(空虛) 예술은 동일한 것이며, 예술적 순수주의는 지난 세기의 부르주아들의 교묘한 호신술에 불과했다.”

사르트르(1905~1980)는 1947년 발표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순수 예술을 비난하면서 문학의 현실 참여를 천명했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오자마자 사르트르는 좌우파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에 비판적이었던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가들이 민중을 위한 창작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공산당을 지지하는 문인들로부터 당과 노동 계급을 배반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또한 사르트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격렬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우파로부터 “왜 공산당에 들어가지 않는 거요”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냉전 시대의 본격적 개막을 앞둔 좌우 대립 구도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정의를 아우르는 제3의 문학을 지향했다. 그래서 그는 “만일 글쓰기가 단순히 선전이나 오락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사회는 무매개적인 소굴로, 다시 말해서 날파리나 연체동물과 같은 기억 없는 삶으로 빠져들 것”이라며 오늘날도 유효한 경고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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