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호의 고향을 찾아서 ]

‘공상과학 소설의 아버지’ 쥘 베른

프랑스 낭트

루아르江 따라 그의 공상은 여전히 흐르고…
 
“쥘 베른은 우리 고장이 낳은 위대한 작가지요. 제가 다니는 쥘 베른 중학교에서는 ‘80일간의 세계 일주’ ‘지구 속 여행’ ‘해저 2만리’ 등을 학생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쥘 베른 소설을 많이 읽는가요?”

공상 과학 소설의 아버지로 꼽히는 프랑스 작가 쥘 베른(1828~1905년)의 고향 낭트의 시립 도서관에서 만난 중학생 에마뉘엘. 그는 손가락을 들어 “저기 있는 동상이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에 나오는 주인공 미셸 아르당을 묘사한 거예요”라고 말했다.

포탄에 몸을 싣고 지구에서 달나라로 떠난다는 황당무계한 소설의 주인공이 포탄 속에 들어가 동료들을 향해 외치고 있는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었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 이후 무기 개발 명분을 잃어버린 대포클럽 회원들이 포탄을 타고 인류 최초로 달나라로 가는 우주 여행을 시도하는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는 1865년 발표됐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1969년 미국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실제로 달에 착륙함으로써 쥘 베른의 몽상은 위대한 상상력으로 격상됐다.

쥘 베른의 고향 낭트는 물의 도시다. 동양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이때 지혜란 물처럼 흐르는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란 점에서 쥘 베른의 상상력은 물의 도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프랑스 서부에 위치한 낭트는 1598년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가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낭트는 대서양으로 연결되는 루아르강을 품고 있기 때문에 쥘 베른의 성장기에는 선박의 출입이 잦은 상공업의 도시였다. 어린 시절 베른은 먼 바다로 나가는 배들을 보면서 더 넓은 바깥 세상을 향한 동경을 품었다. 그는 11세 때 동갑내기 사촌 누이 카롤린을 사랑한 나머지 그녀에게 산호 목걸이를 선물하기 위해 인도로 가는 원양선에 탔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혀 혼이 났다고 한다. 그 사건 이후 쥘 베른은 “꿈 속에서만 여행을 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는 소설을 쓰면서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공상에 탐닉했다.

낭트의 중심가인 쿠르 올리비에 드 클리송 4번지가 쥘 베른의 생가다. “1828년 2월 8일 소설가이자 현대적 발견의 선각자 쥘 베른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는 동판이 그의 얼굴과 함께 붙어 있다. 고향은 그를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선지자였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난 베른은 과학 기술의 진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베른은 “나는 동생과 함께 해저 여행을 준비했다”며 “우리는 탐험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정리했다”고 성장기를 회상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에 나오는 프랑스인 파스파르투(Passepartout)는 프랑스어로 만능 열쇠라는 뜻인데, 베른이야말로 무엇이든 상상력의 열쇠로 여는 작가였다. 그는 육해공을 넘나들다 못해 우주 공간에까지 상상력의 촉수를 뻗었다. 80일 만에 세계 일주에 성공할 수 있다는 내기를 다룬 이 소설은 인류가 세계라는 공간을 시간 개념으로 파악해 장악하는 100년 뒤의 세상을 미리 내다본 것이었다. 바다밑 모험을 그린 ‘해저 2만리’는 원자력 잠수함의 발명을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 20세기 문명사는 쥘 베른의 상상력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는 쥘 베른 서거 100주기가 된다. 베른의 고향인 낭트와 그가 창작 활동을 왕성하게 펼치다가 숨을 거둔 아미앵이 공동으로 올해의 기념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낭트의 언덕에 위치해서 루아르강을 내려다보는 쥘 베른 기념관은 현재 보수 공사 중이라 잠정적으로 문을 닫은 상태였다.

베른 가문이 전원 주택으로 썼다는 집을 찾아갔다. 생 마르탱 교회를 마주하면서 루아르강을 내려다보는 그 집은 과거에 정원까지 딸린 저택이었지만, 지금은 동네의 개인 병원으로 사용되는 본채만 남아 있다. 베른은 그 집에서 루아르강을 오가는 대형 선박들을 보면서 상상 여행을 떠나곤 했고, ‘지구에서 달까지’와 ‘해저 2만리’를 그 집에서 구상했다고 한다.

오늘날 프랑스 문단에서 베른의 문학적 후계자라면 소설 ‘개미’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단연 꼽는다. 베르베르는 올해 베른의 서거 100주기를 맞아 일간지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해저 2만리’의 주인공 네모 선장을 지목하면서 “그는 이해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꿈을 지켰다”며 자신과 동일시한 적이 있다.

베른의 고향에서 루아르강과는 별도로 에르드르강에는 유람선과 요트가 오간다. 그 배들 중의 하나는 ‘해저 2만리’의 잠수함과 똑같은 이름(노틸러스)을 달고 있다. 보통 배가 아니라 배를 개조해서 어느 사진 작가의 아틀리에로 쓰이고 있다. 비록 항해에 나서는 배는 아니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이 배는 무한한 꿈을 인화하면서 늘 멀리 나가 있는 것이다.

 

 

 쥘 베른은 누구

 
쥘 베른은 비약적인 과학 기술의 진보를 겪었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유럽의 상상력을 대변한 작가였다. 62편의 장편 소설과 18편의 중·단편 소설을 남긴 그는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이 남긴 백과사전의 영향을 크게 받아 세상의 모든 지식을 향한 탐구욕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가였다. 그의 소설은 인간의 과학 기술이 신앙과 미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던 시대의 욕망을 가장 분명하게 반영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그의 소설이 지닌 묘미는 1세기 전 인류의 상상력을 읽으면서 미래의 세계를 나름대로 상상하는 길을 연다는 데 있다.

베른은 성년이 된 뒤 고향 낭트를 떠나 파리의 증권거래소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교양오락 잡지에 틈틈이 소설을 발표했다. 그는 기구를 타고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모험담을 쓰면서 출판업자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그는 1863년 ‘기구를 타고 5주간’을 발표하면서 일약 유명 작가가 됐다. 그는 ‘경이의 여행’ 시리즈란 이름으로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 일주’ 등 대표작을 내놨다.

그는 당대에 이미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로 부와 명성을 누렸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문학성도 인정받았다. 그가 77세로 숨을 거뒀을 때 전 세계에서 조전(弔電)이 답지했다.
 
낭트=박해현기자 (블로그)h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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