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에서 “칸트가 자신의 강박 노이로제에서 치유되었다면 철학자 칸트는 무엇이 되었을까”라고 한 것처럼 내 몸의 장애를 치유되었더라면 아니 아예 지니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엇이 되어 가고 있을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전혀 종류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또 간질병을 가진 도스또엡스끼가 출생에서 제외되어서야 했다는 주장에 대해 유토피아에서는 건강한 도스또엡스끼의 출생을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라는 반박이 흥미롭다. 미래 사회에서는 병든 천재란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란 전망은 낙관적으로만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우리가 막연히 희구하는 유토피아에선 고난을 통한 영광을 강조하는 성경을 모든 가르침들이 깨우치고 있는 인내나 절제라는 덕목들이 필요없어서 질 것이다. 사람에게 인내나 절제가 없다면 어떤 종류의 사람으로 되어 갈 것일까?

멍청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무런 자극이 없다면. 여하튼 장애란 현실은 자극치고는 너무 심한 자극인 것만은 틈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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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똘스또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가 새로 완역이 되어 나와서 그의 깊은 성찰을 만날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답니다.
<전쟁과 평화>같은 위대한 작품들을 써서 유명해졌지만, 그걸 읽을 수 있는 소수의 귀족들만이 즐길 뿐이란 사실에 회의를 느끼고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대중들을 위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군요.
더욱이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평생 농민의 차림새로 생활하면서 농민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교과서를 쓰고 방 한칸을 교실로 만들어 가르쳤다니 새삼 위인의 삶이 감동을 줍니다.
82세로 죽기 10년 동안 가려 뽑은 동서고금의 지혜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365일의 일기 형식으로 구성해 놓은 금언집인데, 1월 3일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사업을 성취하는 데 있다”고 그리스도는 말했다. 우리에게도 저마다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신이 우리를 통해 이룩할 사업의 전모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2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제7장 21절

3
타오르는 힘, 빛을 발하는 힘이 없다면, 적어도 빛을 가리지는 않도록 하라.

4
지혜의 법칙을 아는 자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보다 못하다. 그것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실천하는 자보다 못하다. 중국 잠언

5
우리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짧은 생애에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낸 이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가? 탈무드

6
나는 괴롭다, 나는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내가 신을 섬겨야 하는 것이지 신이 나를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것을 깨닫는다면 괴로움은 절로 가벼워질 것이다.

7
이 지상과 천상 사이에 심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이 우리에게 준 주거가 영원히 악과 이기주의와 압박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상은 단순한 속죄의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곳이다. 그 진리와 정의에 대한 갈망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 주세페 마치니

8
언젠가 우리는 천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든, 옛날에는 연체동물이었다고 믿고 있든,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그리고 실수 없이 완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존 러스킨

9
인생의 목적을 단순히 일신상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은 견디기 어려운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현이, 그리고 우리의 이성, 우리의 심장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인생이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부터 인생은 끊임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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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와중에 사망해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사학자
김성칠의 6.25 당시의 일기가 10년 전 쯤 출판되
었었던 <역사 앞에서>를 읽으며 조용하고 순박하
다는 성격을 바로 들여 보는 듯 재미있게 읽으며
공감을 많았던 것 같다.

그 때 쓴 일기를 우연히 오래만에 들추다 보니
그 책의 감상문이 나와 있다.

남의 일기를 읽어 본다는 건 재미있다. 게다가
6.25 전후의 역사의 현장을 간접 체험할 수 있
게 해 주고 있다. 그 보다도 내가 쓰는 글 대부
분이 일기인데, 새삼 일기를 어떻게 써야 하는 가를 배우고 싶어
서이다. 한 대목이 가르침을 준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다툰 일이 있을 때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흥분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그리고 싶지 않으며
평상적이 아닌 내 마음으로 평상적이 아닌 저쪽의 자태를 그려서
앞으로 자손의 눈에라도 비칠까 두려워하는 바이며,  또... 그러
한 기록을 통하여 내 사랑하는 사람의 왜곡된 이미지를 문자에
표현하는 과정을 통하여 내 머리 속에 고정화하고 또 그 표현을
시시로 읽음으로 해서 더욱 불순한 환영을 내 가슴 속에 날인함
으로써 공연한 불신과 증오를 조장해서 피차의 생활을 불행에
이끄는 결과가 될 것을 저어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동감이다!

자신만의 글이라는 일기가 출판되어 시대를 뛰어 넘어서 후대에게
교훈을 주며 공감을 일으킨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기도 문학의 한 영역이요, 역사학의 1차 사료가 되고 있으니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이 쯤 되면 하찮은 글이라도 정신 바짝 차려서 써야 되겠다.
역사 앞에서 일기를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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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력 섣달 그믐밤이다.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오래전에 읽었던 노신의 단편 <축복>이 생각나곤 한다. 화자(Speaker)는 세모에 고향에 있는 사숙 집에 와 묵으며 그 집에 식모로 있었던 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두 번 시집을 가서 두 번 다 남편이 일찍 죽고 아들마저 이리에게 물러 죽는 바람에 서서히 폐인이 되어 일을 잘한다고 칭찬받던 그 집에서 쫓겨나 거지 신세가 된다.

 

화자를 우연히 만나자 죽은 사람에게 영혼이 있느냐, 죽으면 다시 만나게 되냐고 묻는다. 난처해 우물쭈물하다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무심코 말해 버린다. 편리한 대답을 했을 뿐인데, 다음 날 그 여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울히 그녀를 회상하는데 폭죽이 터진다.

 

중국의 세모의 풍속인 부엌 신인 조왕신(竈王神)이 승천하는 송조(送竈) 때 엿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며 터트리는 폭죽이다. 그녀의 죽음이 자신의 편리한 대답 때문일 수 있다는 우울한 마음이 폭죽 소리를 들으며 개운해지는 것을 느낀다. 사실 자신으로선 영혼의 유무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제물의 신인 조왕신이 세모에 하늘에 올라가서 옥황상제에게 그 집안일을 보고한다는 것이다. 나쁜 일을 많이 한 집에선 조왕신이 입을 열지 못하게 부뚜막에 엿을 발라 놓는 풍속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는데 비슷한 것 같다.

 

착하게 산 사람에게 산타가 선물을 준다는 서양 풍속과 일맥상통한 게 아닐까....

 

영혼의 유무를 떠나 어디에서나 착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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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리터러시(cyberliteracy)란 신조어는 최근 번역되어 나온 <거미줄에 걸린 웹>(로라 J. 구락,강수아역, 들녘)의 원제이다.

요즘 뉴스를 보고 있으면 인터넷에서는 온갖 더러운 못된 짓거리만 행하는 것 같이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인터넷은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해 쓰이는 편리하기 그지없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기에 근본적으로 사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리터러시(literacy)란 읽고 쓰는 능력을 일컫는 말이다. 예전에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을 문맹(文盲)이라고 한 것을 빗대어 요즘은 컴퓨터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을 컴맹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말하는 사이버리터러시(cyberliteracy)란 컴퓨터를 쓸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즉, 비판적인 인터넷 사용 능력을 말하고 있다.

인터넷에서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익명성이다. 자신이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 현실 세계에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장난을 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야기되는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이책의 2장에서 다루고 있는데, 인터넷에서의 익명성 - 그 허와 실을 시사 만화 두 컷으로 극명하게 보여 보여 주고 있다.


인터넷 익명성의 그
허와 실

 

디지털 정체성은 전자상거래와 연관된다. 오늘날의 익명으로 남기란 초기 시절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뉴요커) 만평의 속편이 2070년 봄 디트로이트 신문에 실렸다(그림). 이 만평은 아무도 당신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에도, 백그라운드 소프트웨어가 (특히 전자상거래 사이트에서) 당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러므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정체를 왜곡할 수 있다고 해도, 바로 그 순간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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