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에서 “칸트가 자신의 강박 노이로제에서 치유되었다면 철학자 칸트는 무엇이 되었을까”라고 한 것처럼 내 몸의 장애를 치유되었더라면 아니 아예 지니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엇이 되어 가고 있을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전혀 종류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또 간질병을 가진 도스또엡스끼가 출생에서 제외되어서야 했다는 주장에 대해 유토피아에서는 건강한 도스또엡스끼의 출생을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라는 반박이 흥미롭다. 미래 사회에서는 병든 천재란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란 전망은 낙관적으로만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우리가 막연히 희구하는 유토피아에선 고난을 통한 영광을 강조하는 성경을 모든 가르침들이 깨우치고 있는 인내나 절제라는 덕목들이 필요없어서 질 것이다. 사람에게 인내나 절제가 없다면 어떤 종류의 사람으로 되어 갈 것일까?
멍청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무런 자극이 없다면. 여하튼 장애란 현실은 자극치고는 너무 심한 자극인 것만은 틈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