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날이 있다. 탕탕거리는 소리가 난다. 마음에서 탕탕.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오래된 트럭이 탕탕거리 듯. 그렇게 시큰둥하게 힘을 쓰는 날. 그런 날 나는 외롭기 시작한다. 이것도 버릇처럼 고치기 힘든 일이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냥 견딘다. 이런 날 운이 좋으면 좋은 시를 만나는데 운이 좋다. 이은규의 시집이 곁에 있다.
미간(眉間)
눈썹과 눈썹 사이
미간이라 부르는 곳에 눈이 하나 더 있다면
나무와 나무 사이
고인 그늘에 햇빛 한줄기 허공의 뼈로 서 있을 것
최초의 방랑은 그 눈을 심안(心眼)이라 불렀다
왜 떠도는 발자국들은 그늘만 골라 딛을까
나무 그늘, 그의 미간 사이로 자라던 허공의 뼈
먼 눈빛보다 미간이 좋아
바라보며 서성이는 동안 모든 꽃이 오고 간다
나무가 편애하는 건 꽃이 아니라 허공
허공의 뼈가 흔들릴 때 나무는 더이상 직립이 아니다
그늘마다 떠도는 발자국이 길고
뒤돌아보는 꽃처럼 도착한 안부, 어느 마음의 투척(投擲)
이 당신의 심안을 깨뜨렸다는 것
돌맹이가 나뭇잎 한 장의 무게도 안 되더라는 말은 완성
되지 않았다
온전한 무게에 깨진 미간의 기억이 치명적이었다는 소견,
왜 미간의 다른 이름은 명궁(命宮)일까
사람들이 검은 액자를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화염의 칼날이 깨끗이 발라낸 몸, 뼈가 아직 따뜻한데
직립을 잃은 허공이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눈인사 없이 떠난
그가 나무로 다시 태어날 거라고 믿지 않는 봄날
투척의 자리에
햇빛의 무늬, 밀려가고 밀려오는
아무렇게나 상상한다. 눈썹과 눈썹 사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을 그 눈이 다시 허공을 향하는 마음을. 틀림없다. 시인의 마음도 탕탕거렸을 것이다. 눈을 피하고 나무를 피하고 허공으로 나를 보내는 마음. 걸리지 않는 시동. 그럼에도 애쓰고 싶지 않은 마음. "떠도는 발자국들은 그늘만 골라 딛을까"라고 중얼거리지만 그늘은 오고가는 햇빛의 무늬임을 또 그렇게 알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밀려가고 밀려오는"이라는 마지막 문장이 마음으로 밀려오고 또 그렇게 멀어진다.
아직 별들의 몸에선 운율이 내리고
엄마는 왜 가르쳤을까
자신에게 진실하면 너는 늘 옳다
불가능의 시대에 혁명을 부르짖는 것
혹은 별을 노래하는 것만큼, 허영을 채워주는 일도 드물
다는 당신의 편지를 노려보았다
밤새 가는 실핏줄 터지는 소리
한 혁명가의 꿈을 꾸는 밤
다리를 저는 그녀와 보폭을 맞추기가 어려웠는데
기다리기만 하는 자에세 올바른 순간이란 없다는 목소리
가 들려왔다
더 잘 실패한 후에 맞게 될 적기
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혁명을 과거사라고 믿는 당신에 불과할 것이다
아직 별들의 몸에서 운율이 내리고
당신과 나의 정체는 우리 자신을 앞지르며 밝혀질 것
얼음이 떠다니는 운하 속으로
한 시대가 던져지기 직전, 오고갔다는 문답
정체를 밝혀라
그걸 알아서 결정하시죠
수배자 사진을 보니 틀림없군
당신이 그렇게 말하신다면 그렇겠지요
때로 어떤 대답은 유언이 되고
엄마, 별을 비추기 위해 인간의 눈동자가 만들어졌다는
시구(詩句)를 믿을래
시체가 떠오르기 시작한
운하의 봄을 답신으로 보내는 새벽
뭐든 견딜 만해지는 것이다. "아직 별들의 몸에선 운율이 흐르고"있다면 말이다. 그러니 시동이 걸리지 않는 마음도 견딘다. 무게를 갖지도 않고 서성이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