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의심스러웠다. 처음 있는 일. 몇 달을 이용한 버스인데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대여섯 살로 보이는 스무 명쯤의 아이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다. 그 재잘거림과 여과되지 않은 웃음과 팡팡 터지는 에너지가. 아이들 주변을 떠도는 공기조차 내가 속한 세상과 다르게 보였다. 내가 타고 가던 버스가 흑백의 세상이었다면 아이들이 서 있는 버스 정류장은 온통 칼라의 세상이었다. 그저 놀랍다.

아이들이 버스에 올랐다. 서울숲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이름표에는 얼굴처럼 예쁜 이름들이 쓰여있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자리에 앉는다. 버스는 갑자기 동화책처럼 알록달록. 나는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찬찬히 본다. 리암 니슨이 같은 버스에 타고 있었다 해도 이렇게 울렁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담하건데. 뭔가 알 수 없는 에너지에 나는 멀미를 하듯 울렁거렸다.

그때다.

내 앞자리에 앉은 소녀가 고개를 정말 휙 돌려 나를 본다. 웃는다. 그리고 말을 건다.

 

총명탕같이 생긴 소녀 : "말 잇기 알아요?"

나 : "응, 그럼"

총명탕같이 생긴 소녀 : "거북이"

나: "이주민"

총명탕같이 생긴 소녀 : "이주민"이 뭔데요?

나: ..............(아...창피해)

총명탕같이 생긴 소녀 : "에이, 다시 기회를 줄께요. 거북이!"

나: ..... ......

 

소녀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휙 돌려 친구와 재잘거린다.

내 머릿속은 갑자기 안개다. "이"로 시작하는 수백의 단어가 어딘가로 숨어버린 것 같았다.

소녀의 에너지에 내가 졌다. 그것도 기쁘게.

그리고 생각난 시 한 구절.

 

별똥

 

고은

 

옳거니 네가 나를 알아보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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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6-15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보 ^^

"이름표에는 얼굴처럼 예쁜 이름들이 쓰여있었다" 라고 생각했다면서 .. ㅋㅋ
이름표..
했으면 표로 시작되는 단어는 많지는 않아서 .. 어찌 되었을지 ..^^
이주민은 몰라도 이름표는 ^^
<농담이야...ㅋㅋ>

하긴 소녀의 에너지에 네가 져 준..

그리고 저 예쁜 세 단어와 구절..

하기야

그것이면 되었지..
여기서 무얼 더 바라겠누..



어여쁘다.. 네가
그 시간 저 단어들을 생각하다니..

별똥. .고은.. 옳거니 네가 나를 알아보누나 라니..

굿바이 2012-06-18 21:0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인정!!!! 그날 완전 바보였어~

야ㅡ 진짜 이름표를 생각못했어, 역시 그대는 영민하오^^

다락방 2012-06-15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앞에 장면들이 펼쳐지는 것 같아요, 굿바이님. 알록달록한 아이들과 뒤를 돌아보고 굿바이님께 말 거는 소녀와 난처해하는 굿바이님, 모두가요.

굿바이 2012-06-18 21:06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다락방님이었으면 어찌 하셨을지 궁금해요!!!!!
그나저나 잘 지내시죠?

2012-06-19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9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2-06-15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굿바이 2012-06-18 21:07   좋아요 0 | URL
와ㅡ 치니님이시다!!!!
제가 하고 다니는 짓이 늘 이렇습니다 ^_________^
아참! 요즘 그곳은 어떤가요? 눈부시겠죠?!

Alicia 2012-06-15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눈부시네요.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저희 아빠님은 그런 아이들을 '눈쟁이'라고 불러요- :)

굿바이 2012-06-18 21:08   좋아요 0 | URL
오~! '눈쟁이'라는 말이 있군요. 예쁜데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겠죠. 참...아련합니다^^

2012-06-19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2-06-16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그런 꼬맹이들 만나고 싶어요. 그리고 저도 굿바이님 같은 분 만나고 싶어요! 응, 그럼- 하고 대답하는, 또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과 이야기하면 참 좋을 것 같아요 :)

굿바이 2012-06-18 21:10   좋아요 0 | URL
어린이집 주위를 어슬렁거려 보세요!!! ㅎㅎㅎ

그나저나 오다가다 언젠가 한 번은 만나지 않을까요? (이거 무슨 작업 멘트 같아요, 시적으로 말하려고 한건데요 ^________^)

風流男兒 2012-06-17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쁘고, 좋아요. 하핫 ;)

굿바이 2012-06-18 21:10   좋아요 0 | URL
나는 그대가 더 예쁘고, 좋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