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지구환경을 생각해 생활 속에서 이것저것을 가린다면, 그것은 다 우리 조카 귀연이 때문이다.
그 녀석이 자라서 살아가야할 세상에 뭐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랄까. 오로지 그런 마음일 것이다.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하면 잠깐 민망하면 될 일, 그저 그런 연유가 다다.
그런 귀연이가 이제 제법 세배다운 세배를 한다. 아낌없이 세뱃돈을 주는데, 귀연이 눈치가 심상치가 않다. 세배가 끝나고 둘이서 빈대떡을 먹으며 연유를 물으니, 역시나 세대가 바뀌었어도 악습은 그대로인지라 꼬장꼬장 정양이 세뱃돈을 갈취하는 모양이었다.
2.
귀연이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사실관계를 확인하려고 꼬장꼬장 정양에게 정황을 물으니, 귀연이 통장을 만들어 적금을 넣어주는 모양이었다. 동생 하연이도 마찬가지고. 이미 불입한 금액이 백단위를 넘긴 모양이었다. 그돈을 어찌 할 예정이냐고 묻자, 대학교 입학 할 때 줄거라고 한다. 금융기관이 파산하면 예금자보호법이 있어 일정액을 보호받는데, 꼬장꼬장 정양이 혹여 파산을 하면 어찌할꺼냐고 다시 묻자, 꼬장꼬장 정양의 한 말씀. "땅도 녹았는데, 묻히고 싶냐?"
나이를 먹으면 뭣하노, 저리 성질이 더러버서. 여튼 꼬장꼬장 정양이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지 빈말을 하는 여인은 아니니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귀연이의 심정도 이해가 가는 바, 나는 뭔가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3.
작은 방에서 열심히 독서삼매경에 빠진 귀연이를 마당으로 불러 우리집에 새로 온 강아지와 함께 노는 척 하며 제안을 했다.
"귀연아, 이모가 용돈을 줄테니까, 너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
"이모, 엄마에게 들킬텐데."
"야, 너 비상금도 몰라? 숨겨놓고 조금씩 표시 안나게 쓰면 되는거야. 물론, 음주가무에 쓰면 안되고...흠흠"
"어디다 숨기지?"
"음.....집에 숨기면, 네 엄마가 청소환자니까 금방 발각될거야, 음.....필통밑에 숨기자, 이모도 옛날에 종종 필통을 이용하고는 했었지."
"우와, 역시 이모는 똑똑해, 근데 얼마 줄건데?"
"얼마면 되냐?(원빈버전으로) 응?"
"만원(뭔가 배팅을 아는 녀석의 눈치다)"
"고작 만원? 음.. 좋았어, 그럼 이만원을 줄께(가오잡을 게 참 없는 요즘 굿바이다)"
4.
연휴는 끝났고, 일상으로 복귀한 나는 십년은 늙었다. 체력은 바닥이고, 눈밑은 까맣다. 그렇지만 또 어쩌겠는가, 목구멍은 언제나 포도청이라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꼬장꼬장 정양이다.
"너지(살기다)?"
"음, 나야~(일단 웃겨보려는 속셈이었다)"
"너도 참 딱하다. 너랑 나랑 자매인걸 잊었니? 필통이라니...기가막혀. 너 모르지? 예전에 내가 네 필통에 있던 돈 조금씩 가져간거?"
"뭐!!!!! 이런...어째 이상하다 했어. 다 토해내!"
"시끄러!!!! 일단 귀연이가 사고 싶은 책이 있다고 하도 울어대니까 내가 이번만 봐주는거야. 두 번 다시 걸리면 너도 묻어버릴꺼야."
"쳇! 마음대로 해. 이 도둑아!"
5.
귀연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모! 필통은 오래되고 낡은 수법이래."
"그런 것 같다(아~ 쪽팔려)"
"그렇지만, 엄마가 이 돈으로 사고 싶은 책 사도 된다고, 좀 더 보태서 다른 책도 사주신대."
"야~ 니네 엄마 짱이다!!!! 떡국효과가 오래간다야, 좋겠네, 우리 귀연이."
"이모! 그런데 이모가 좋아하는 소설가는 누구야?"
"그건 왜?"
"나도 읽고, 이모처럼 될라고."
"이모처럼 되면 말짱 꽝이야."
"아니야, 나는 꼭 이모처럼 될꺼야."
"안된다니까. 너 바보냐? 이모처럼 되면 인생 꽝인거야."
"몰라. 어떤 소설가를 좋아하는지, 오늘 문자로 찍어죠. 오후에 엄마랑 서점갈꺼야. 그리고 엄마가 그러는데 이모가 좀 허당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았대 ㅋㅋㅋ"
"뭐? 허당? 야야 니네 엄마는 말이다....아니다. 나중에 이야기해 주마..."
"아참, 이모, 나 청소년문고는 다 읽었어. 그러니까 이모가 읽는 소설가를 알려줘"
"야! 벌써 성인물을 보면 되냐? 너 19금 몰라? 여튼, 몰라!"
6.
말로는 안가르쳐 준다고 했지만, 귀연이에게 누구를 좋아한다고 해야 당분간 이모로서 가오를 유지할 수 있는지 고민이다. 음....아......고민이다.
귀연아 그거를 네가 알랑가 모르겠다마는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이렇게 조심스럽다.
네가 차마 알랑가 모르겠다마는 내가 네 이모인 한 나는 네 인질이란다. 그러니 마음껏, 양껏, 애용하기 바란다. 두고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