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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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황지우의 시였는지, 장정일의 시였는지,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여교사에게 같은 학교 남자교사가 어느날 갑자기사랑을 고백하자, 여자는 남자의 뺨을 때립니다.  그리고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렇게 되뇌이죠. "이 남자가 사랑한다는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

여교사는 어쩌면 한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지 않았던 탓도 있었고,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마르크스주의자였을 수도 있겠지만("당신이 지금 나를 사랑한다면 그건 당신이 나의 전체를 보지 못해서"라고 생각했고 그런 상태로 사랑에 빠진다는건 "바보짓"이라고 생각했겠죠) 무엇보다 그 남자가 사랑한다는 대상이 정말 자신인지가 의심스러웠을 겁니다.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남자의 고백은 그 남자가 그녀에게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혹은 만들어서 보았다는 반증이며,클로이식으로 말한다면 그남자가 사랑하는 건 그의 수퍼에고지 여교사가 아니었을테니까요. 저 역시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믿지 않습니다.  낭만적 운명론이 개입한다면 이런 "맥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 영화처럼 운명적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거란 개연성은 인정하지만, 자신의 수퍼에고를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전무하다시피한 제 미천한 연애 이력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의 최초의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남자들이 말하던 사랑이 정말 "사랑인지 단순한 망상인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이라는 것"을, 진작 간파했더라면 저 여교사도 저도 에로스의 축복을 좀더 받을 수 있었을텐데요..이런 의미에서 알랭 드 보통을 이제서야 만나다니 정말 불운이로군요.

결국, 사랑이란 대상에 내재된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하는 주체의 인식속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여서 사랑한다면 사랑이란 무조건 반사에 다름 아닐테니 말입니다.

드라마 '아일랜드'의 중아는 "내가 왜 좋아?"라고 묻는 대신 강국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불쌍해서 좋은가요? 좋아서 불쌍한가요" 그가 대답합니다. "처음엔 불쌍해서 좋았고, 지금은 좋아서 불쌍합니다" 

주인공 역시 그녀가 매력적이라 생각해 사랑에 빠졌지만, 나중엔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클로이의 벌어진 이빨조차 아름답다고 느꼈고, 그 아름다움을 찾아낸 자신을 스스로 대견해합니다.

대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든 이상화하든, 사랑이란 철저하게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화자가 클로이를 가장 사
랑한다고 느끼는 순간은 바로, 그녀에게서 자신과의 유사성을 확인하거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미묘한 감정을 그녀가 정의해주었을때 ("너 또 길잃은 고아같은 표정을 하고 있네")처럼, 그녀에게서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자신의 불완전함을 채워줄 나와 다른 상대에게 끌리기 마련이지만 차이는 동시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작가는 사랑을 거울에 비유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은 모습을 비춰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혹은 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사랑이라는게 상대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 모습을 확인하는 거라면, 내 자신의 불완전성은 불멸의 사랑을 기약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되는거겠죠.

양희은은 사랑을 쓸쓸함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장 빛나고 아름답고 행복해야할 순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쓸쓸합니다. 아무리 눈부신 사랑이라도 두 사람은 결코 태초의 자웅동체로 돌아갈 수 없으며, 유효기간을 만년으로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주인공은 클로이의 통굽구두에서 두사람은 독립된 개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클로이는 스페인 여행 길에서 행복의 정점에서는 내려가는 길 밖에 없다는 예고된 이별을 감지하고 현기증을 느꼈던 거겠죠.

사랑의 가장 쓸쓸한 지점은 배신이나 실연같은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사랑은 언젠가 망각되어지거나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된다는 사실입니다.주인공역시 클로이의 부재보다도 언젠가부터 그 부재에 태연해진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소스라칩니다. 소설 전체에서 클로이란 이름을 레이첼로 바꾸어도 결국 똑같은 기승전결을 가진 스토리를 만나게 될테죠.

p.s. 책을 다 읽은 시점에서도 사랑에 대한 제 "맥빠진 냉소주의"는 치유되지 못했군요. 결국 알랭 드 보통을 읽든, 읽지 않았든 제가 에로스의 특별한 축복을 받을 일은 없었던 겁니다.

p.s. 제가 아는 사람에게 모두 일독을 강권하고 있는 중입니다.이 책을 읽은 누군가와 잘근잘근 되씹고픈 문장이 한두개가 아니네요. 잘보이는 곳에 꽂아두고 "요긴"하게 써야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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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x in the snow 2005-05-23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분에 넘치는 칭찬이세요.

협객 2005-05-27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봤습니다. 예술이네요. ^-^;
어떻게 같은 책을 읽어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ㅡㅡ^

Fox in the snow 2005-05-27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오늘 날씨 참 좋네요^^

울보 2005-05-28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이주의 마이리뷰당선되신것을...
글 잘 읽고갑니다,
저도 꼭 읽어보고 싶은책입니다,,

로드무비 2005-06-0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들어진 리뷰입니다.
인사드려요.^^

2005-06-01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ptrash 2005-06-01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저도 참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는데, 리뷰도 멋지네요. 반갑습니다. ^^

Fox in the snow 2005-06-03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 poptrash님 감사합니다. 음냐..상품권으로 무엇을 살지..행복한 고민중이랍니다.
로드무비님...반영해서 수정했습니다. 늘 쓸때마다 헷갈렸는데, 이제는 덕분에 확실히 알았네요.

Phantomlady 2005-06-03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늦었지만 축하드릴게요. '대체 그가 사랑한다는 그 여자가 누군지 궁금했어요' 찾아보니 장정일의 시 '프로이드식 치료를 받는 여교사, 4'네요. 그리고 닉네임은 벨 앤 세바스찬의 fox in the snow 인가요? 문득 궁금함..

Fox in the snow 2005-06-03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nowdrop님/장정일이었군요.^^. 닉은 벨앤세바스찬의 노래에서 따온 게 맞습니다.그렇게 물어봐주셔서 고마와요. 아무도 제 닉에서 벨엔세바스찬을 알아봐준 사람이 없었거든요.ㅎㅎ

Fox in the snow 2005-06-03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nowdrop님/그런데 서재 제목이 저랑 같네요? 괜히 반갑네요

Phantomlady 2005-06-04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그러네요 반가워요 (악수~!)

비로그인 2005-07-13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눈님! 햐..너무 늦어부렀구만요. 알라딘을 뜸하게 하다 보니..캬..감축, 감축 드리옵니다. 사실 이 리뷰 읽을 때부터 뭔가 조짐이 보였다구요!! 이 달의 우수 리뷰로 당선될 거 같다고, 그때 말씀 드렸어야 하는데..음..이러다 저 작투 타고 입으로 물 뿌리는 왕꽃선녀님 되는 거 아닙니꽈? 예? 흐흐..
 
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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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상 지방 출장이 잦아, 서울역에 자주 가는 편입니다. 역에 갈 때 마다 꺼림칙했던 것이서울역 대합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숙자들이었습니다. 특히 서울역사가 새단장 한 이후로는 가히 최첨단 역사의 옥의 티라 할 정도로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습니다.(실은 시각보다도 후각의 고통이 더 심했습니다만..) . 대부분의 노숙자는 구걸하는 걸인들과 다르게 동정을 구하는 얼굴이 아니라, 자신들을 거리로 내몬 세상을 저주하는 얼굴이기 때문에 연민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대상이었거든요.

나 같은 사람들이 꽤 많았던지 언제가부터 서울역사내의 노숙자 출입을 차단하더니, 아예 광장에서조차 노숙자들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물론 그들이 노숙자 생활을 청산하고 사회인으로 복귀했을리는 만무고, 강제수용되거나 혹은 다른 쉼터를 찾아 떠난 것이지요. 그 와중에 한두명의 노숙자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아 노숙자와 공안요원들과의 충돌이 있었고, 영등포역이 서울역의 고민을 떠안게 되었긴 했지만 어쨌거나 서울역은 노숙자 천국의 오명을 벗게 되었습니다. 밤늦게 역에 도착할 때면, 신변의 위험까지 느낄 정도로 우굴거리던 노숙자들이 일거에 사라지자 제일 좋아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이 아마 저일겁니다. 한달에 한두번이나마 역사를 이용할 때 제가 느끼는 쾌적함에 비하면 비바람을 막아줄 최소한의 생존장치마저 빼앗긴 그들의 안위에 대한 염려쯤은 아무것도 아니었구요.

게다가 그들은 멀쩡한 사지육신가지고도 일하기 싫어 놀고 먹는 게으른 인간들, 대낮부터 술에 취해서 지나가는 행인을 쏘아보며 자신이 자초한 불행을 화풀이할 대상을 찾지만 정작 정면의 시선을 맞서낼 자신이 없는 루저들, 학습된 무력감탓에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의지를 버려 가족에게까지 잊혀진 존재들 ….아닙니까?

실제로 서울시가 노숙자들을 방치해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맘속에서 기대한 노숙자 대책이란, 노숙자들의 사회복귀를 위한 훈련이나, 재교육 같은 진정한 의미의 재활과는 거리가 먼 노숙자 소탕(!)이니까 말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노숙자들이 생활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것이니까요.


여기 오멜라스라는 지상낙원이 있습니다. 모든 이가 행복한 오멜라스의 축복을 담보로 궁극의 비참함 속에 놓인 한 아이를 마주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화를 내며 분노를 느끼고 무력감에 빠져듭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고, 자신의 상대적 행복을 확인하는 장치로 , 연민은 자신의 자식을 대하는 자애로움으로 바뀌게 되고 맙니다. 아이에 대한 죄책감은 자신의 어떠한 행동도 아이의 상황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오멜라스의 행복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 합리화됩니다. 아이의 존재는 오멜라스 사람들이 김빠지고 무책임한 절대적 행복이 아니라, 삶의 고통을 이해하는 고상한 행복을 구가할 수 있은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은 눈물을 거둔 후에, 소리없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도시를 떠나지만 말입니다 .


오멜라스라는 도시가 상상의 도시라는 사실에 안도할 수 만은 없을 겁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도덕률은 서울이라는 도시에도 여지없이 적용되며, 모든이의 행복을 적분해도 한사람의 불행을 막을 수는 없겠지요.

도시에 남은 우리가 하는 일이란, 그들의 존재를 잊는 것 뿐입니다.

P.S.  제게 이런 사회적,정치적, 철학적 고민을 하게 한 이책의 장르는 바로 SF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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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9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 빈치 코드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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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재밌어서일겁니다.재미없다면 금쪽같은 돈과 시간을 책읽기에 투자할 이유가 없겠지요.

본능적인 지적 호기심때문이거나,  타인의 사고로 이루어진 결과물을 통해 대체된 경험과 지식을 습득하고,결과적으로 사고의 지평을 넓힌다고 하는 독서 본연의 목적이야 따로 있겠지만, 결국 내게 있어서 독서는 항상 killing time이었습니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들으면 기겁할 일이지만 시간을 내서 정보와 지식의 습득을 목적으로 독서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말이죠. 대개가 마땅히 할일없는 오후나, 출퇴근시간이나, 잠안오는 밤시간이 주로 내 독서시간대고 책을 고르는 기준 역시 재미가 전부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나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많은 이유와 가치를 책읽기에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위선적인 책읽기를 하고 있었던건지도.

인디애나 존스를 보듯이 재밌게 읽은 책을 막상 덮고 나선 왠지 별점에선 인색해지니 말입니다.

용두사미의 엉성한 구성이나, 미스테리라고 붙이기엔 너무 뻔한 사건전개나, 성배의 진실을 다루기엔 너무 단편적인 접근같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것은 바로 영상(image)때문입니다.활자보단 영상에 더 익숙한 요즈음의 독자들을 서점으로 끌어 모을 수 있었던 비결도 바로 이책이 가진 비주얼때문이겠지요.

모든 페이지는 영화의 콘티처럼 짜여져 있고, 주인공은 해리슨 포드처럼 묘사되며, 심지어 미스테리, 액션, 로맨스의 삼박자를 완벽하게 갖춘 헐리우드 영화의 정점인 해피엔딩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나면 허망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읽는 동안에는 비주얼이 커버했던 그 단점들이 다 읽은 후엔 오롯이 살아나는 이유가 뭘까요?

미국작가에게 '장미의 이름'을 기대한 게 무리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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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e 2005-04-2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아직 안 읽어봤지만, 읽는다면 동감일 거 같아요. 그래서 추천! ... 하여, 저는 성혈과 성배를 읽어야겠다 싶었는데, 그책은 넘 비싸서 고민중이어요..:)

Fox in the snow 2005-04-2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크리스피 크리미 넘 맛있겟어요..먹고싶어라..미나미님의 근황이 궁금하네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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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리뷰쓰기를 미뤄왔는데 한해가 가기전에 털어야 할 숙제처럼 찜찜한 마음에 잠시 틈을 내봅니다.

사실 이 소설은 읽고나서 한동안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할 은밀하고도 두려운 비밀같아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몰라 몇차례 망설이곤 했습니다. 가벼운 성장소설이겠거니 하고 받아든 조악한 표지의 책속에서 감히 상상도 못할 삶의 어둡고 잔인한 단면을 마주쳤거든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의 행간에서 읽어내는 슬픔과 고통은 그 어떤 수식어보다도 가슴아픕니다. 희노애락의 감정에 무감각해지기위해 단련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울부짖는 아이보다 훨씬 비극적입니다. 작가는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과 행동에 상처받고 아파하는 건 오히려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았지만 전 오하려 읽는 내내 아이들의 고통이, 절규가 들리는 듯 해서 괴로왔습니다.

차라리 아이들이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아파했다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을텐데.(슬픔도 힘이 되니 말입니다. )이 아이들은 슬픔도 아픔도, 사랑도 모르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사진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데 불과하다는 수잔 손택의 말처럼, 결국 타인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일 수 밖에 없나 봅니다. 그 어떤 전쟁의 기록보다도 잔인하고 섬뜩한 이야기속에 담겨진 진실조차도 결국 제겐 이야기거리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면..안되는데 말입니다.

화려한 수식어도 없이 인간과 삶과 전쟁의 어두운 진실을 어떻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담담하게 기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작가가 직접 체험한 어린시절의 전쟁의 기억을 바탕으로 했다는 설명으로 단번에 풀렸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문장가라도 허구로만 소설을 썼다면 결코 이런 감동을 주지는 못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이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다른 문체와 시점의 세권의 소설이 모두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마지막권으로 가면서 내성이 생길법도 한데..)을 다루면서도 인간 본성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일정한 문학적 완성도와 처녀작만이 가질 수 있는 신선함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서 작가의 내공이 느껴집니다.

"밀란 쿤데라에 버금가는"이라는 선전문구하나만 믿고 고른 책이었지만, 올해 건진 큰 수확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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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뻐?
도리스 되리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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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노희경의 거짓말에서 초로의 엄마 윤여정은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늙는다는 건 참 불쾌하고 서글퍼. 얼굴에 생긴 주름이 서글픈게 아니라, 이왕 늙을거면 몸도 마음도 함께 늙지, 마음은 어릴때 그대로 라는게.."

30살이 되기 전 나는 무슨 속세를 떠나기로 결심한 수도승이라도 되는 양 20대의 나와 작별을 고했지만 (그즈음에도 도리스 되리의 파니핑크를 보았더랬습니다) 정작 30대가 되어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혼란도 그대로고 욕심도 그대로고 불안정한 상태도 그대로고, 달라진 건 피부의 수분함유량 정도였죠.

그러니까 30살에도 손님없는 잔치는 계속되더란 말입니다.
어느 여배우가 했다는 30대 예찬은 위선이거나 안스러운 자기최면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 30대는 확실히 20대보다 불쾌하고 서글프며, 40대는 30대보다 더 불쾌하고 서글플겁니다.

도리스 되리의 소설속 여주인공들도 몸은 늙어가고 있지만, 마음은 세월의 흐름도 상관없이 여전히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 사랑받고 싶은 욕망,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다른삶'에 대한 욕망 속에 갖혀있습니다. 어릴때 바비인형의 분홍색 구두를 훔치며 꾸던 꿈을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겁니다. 다행인지 그녀들의 일상은 그녀들의 욕망을 가둘 수 있을 만큼 견고하지만, 그래서 그녀들의 영혼은 더 외롭게 부유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누구나 같은 속도로 늙지만 아이들이나 남자들이 먹는 나이와 여자들이 먹는 나이는 같은게 아닙니다. 젊은 여자애와 바람난 동갑 남자친구와 헤어진 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늙었고, 혼자고, 그는 젊고 혼자도 아니야" 시간은 여자들에게 더 냉정합니다.

끊임없이 "나 이뻐?"하고 되물어 존재를 확인해야 할만큼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붙잡고 살아가는 여자들이지만, 난 그녀들의 건재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루한 하루 하루의 일상은 그녀들에게 끔찍한 비극인 동시에 삶을 지탱하게 하는 마리오네뜨의 줄일수도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life is go on~!

P.S. 1 : 책의 무게에 비해 나이뻐?란 제목은 너무 가볍습니다. 가벼움을 기대한 독자들은 실망할테고, 무거움을 기대한 독자들은 이 책을 아예 선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P.S. 2 : '훙부인에게 새신을' 이란 에피소드는 노통의 소설, 오후 4시와 상당히 유사한 소재입니다만..훨씬 맘에 듭니다.
P.S. 3 : 여성작가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자의식과잉이나 발육부진의 기미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안보입니다(뜬금없이 일반화시킨 여성작가들에겐 미안하지만). 군더더기없으나 필요한 묘사는 충분하며 문장은 경쾌합니다. 독일문학답게 실용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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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0-26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 절절하게 다가오는 문장들이 많아요. 하루하루를 체념과 희망과 체념과 희망이 서로 교차하면서 일정한 포물선을 긋고 있다니껜요. 사십대에두 역시나 삼십대보다 더욱 슬플 거라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 있는 '문화적인 꺼리'를 찾아야겠습니다. 언젠가 작가 박범신님을 우연히 뵌 적이 있었는데 청바지에 쟈켓 하나 걸치고 연단에 올라서는데 청년같더라구요.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분위기나 사고가 나이에 비해 놀랍도록 젊은 분들 계시던데..모색해봐야지..이거 나이만 먹어가지고 지금보다 더 추잡해지면 안 되는데..ㅠ,.ㅠ

chaire 2004-10-26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좋은 작품 같아요. 여우 님이 소개해주시니 더더욱 그렇고, 쏙쏙 들어오는 리뷰도 넘 좋습니다그려... 읽고 싶지만,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제 몸은 늙고 게을러 그 많은 책을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아, 늙음을 예찬하는 사람들, 저도 당최 이해 못합니다. 아직 마음이 덜 늙어서일까요? 그래도 점점 황혼과 낙엽과 단풍 같은 인생에 대해서도 조금은 행복의 기미를 감지할 날이 오겠죠... 아유, 오늘, 찬바람 몰아치는 거 보니, 올 한해도 거의 같구나, 서글퍼지대요... 에구에구...

Fox in the snow 2004-10-27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아우..복돌님, 카이레님..여러분은 아직 젊어욧..아니 아직 어리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