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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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근 일본경제가 장기침제의 늪에서 빠져나오려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일본경제에서 버블이 빠지고 십년간이나 계속된 불황의 긴 터널덕분에(?) 반도체나 가전분야에서 일종의 반사이익을 보게 된 한국기업들은 어느 정도 일본기업들과 대등한 위치에 까지 올랐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일본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상대입니다. 작년만해도 삼성을 배우는 소니가 뉴스에 종종 오르내렸지만, 요즘 한국기업들 사이에 부는 도요타 열풍은 심상치 않습니다.

한국기업들은 도요타웨이(Toyota way)니 just in time이니, 가이젠(改善)같은 도요타의 혁신활동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장기불황에도 높은 순이익을 내면서 지방의 작은 방직기 공장에서부터 시작해 GM이나 포드 같은 굴지의 자동차회사를 앞지르는 경영성과를 내는 자동차회사로 성장한 도요타는 어쩌면 한국기업들의 롤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도요타웨이가 모든기업들이 가야할 길일까요?

노동의 종말을 이제서야 뒤늦게 읽으며 최근에 부는 도요타바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노동의 인간화에 대한 고려없이 생산성만을 고려한 도요타의 정신이 모든 한국기업의 벤치마킹대상이 된다는 것은 어쩐지 저자가 예언한 노동의 종말로 한발 더 다가가고 있지 않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종말로 치닫는 줄도 모르고 마른 수건을 짜고 또 짜내는 노동자들의 모습말입니다.(블루칼라 뿐 아니라 화이트칼라도 예외는 아니지요)
 
이미 10년전에 쓴 책에서 정확히 예언하고 있듯이(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를 읽는 기분입니다.)  2004년 대한민국 기업에서는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되고, 생산성향상으로 얻어진 이익은 재분배과정없이 자본가와 엘리트 지식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거나 더 높은 생산성을 얻어낼 방법을 연구하는데 쓰여질 뿐입니다. 생산성 향상 덕에 줄어든 노동은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자의 수고를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고용인원을 감소시킬 뿐이고, 실업률은 매년 늘지만, 고액연봉자의 수 역시 그와 비례하여 매년 늘어 사회의 빈부의 격차역시 점점 그 간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실업자를 흡수하던 서비스시장과 도소매시장의 몰락도 병행되어 노동시장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도 산업은 점점 커지는 기형적인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죠.

저자는 노동의 종말을 막을 수 있고 기업과 노동자가 공생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3부분, 예를 들자면 NGO같은 영역에서 고용창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은 그리 밝아보이진 않습니다. 자본가와 실리콘 칼라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쉽게 포기할 리도 없고, 파이 나누기에 관심있는 공공부문에서의 사업이 파이 키우기에 혈안이 된 일반기업들과의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아..써놓고 보니 비관적이고 암울한 미래로군요.

결국 살아남는 방법은 자본가나 실리콘 노동자가 되는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앉게 될 소수의 선택받은 그룹에 포함될 가능성이 없다면 일치감치 포기하고 도요타의 노동자들처럼 종신고용을 담보로 근무시간엔 화장실에도 가지말고 타이트하게 일하고, 자발적인 잔업은 기본이고, 임금인상요구나 파업은 꿈도 꾸지말고 열심히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요. 허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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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10-05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감사히...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빈대처럼 살 거라는 전망엔 변함이 없는 거군요. 흑흑...
추천하고 사라지렵니다.

Fox in the snow 2004-10-06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머쓱~^^)
전 바람구두님의 포스팅 속도에 따라가기도 벅찬데, 코멘트까지 달아주시다니..

바람구두 2004-10-06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수다장이예요. 저란 인간은....

Fox in the snow 2004-10-06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 역시 부지런하시군요. 수다장이란 말 참 좋아요. 그쵸? 바람구두님의 다작을 볼때면, 감지되는 모든 사물과 사건과, 순간에 트리거링되어 구두님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들이 떠올라요.제글에까지 반응해주신건 역시 감격할 만한 일이예요.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전집 12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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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네이버 지식인을 보다 이런 질문을 보았습니다. "책(Book)과 텍스트(Texte)의 차이가 뭐죠?" 질문자가 선택한 답변은 이런거였습니다.

"북은 말 그대로 책이죠, 글구 텍스트는 문자입니다..텍스트를 적절하게 편집해서 종이에 찍으면 책이 되는 겁니다..."

처음엔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지만, 그러는 나는 텍스트의 개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이르러서는 웃음을 거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무식하긴 마찬가지라는 뜻) 어찌보면 텍스트를 문학의 질료로 파악한 답변자는 상당한 기호학의 고수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한 고수는 따로 있는법, 저렇게 단순한 질문일수록 명쾌한 답변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프랑스기호학자의 도움을 얻는수 밖에요. 난해해도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입니다. 롤랑 바르트가 텍스트란 개념을 만들어낸 당사자니까요.

바르트는 텍스트란 개념을 만들어내면서 저자의 죽음을 선고하고 독자의 탄생을 선언하였습니다. 고전적 의미에서 전능한 작가의 위치는 텍스트를 해독하는 독자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작품이란 작가가 완성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며 독자들이 접하는 순간 저자의 손을 떠나 새로운 텍스트가 된다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던시대의 작가는 창조자가 아니라 거대한 사전에서 글쓰기를 길어올려 인용부호없는 인용문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필사자의 역할에 머무릅니다.

텍스트는 다각적이고 물질적이며 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비의 대상인 작품과 구분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바르트는 혁명적으로 글쓰기와 글읽기의 간극을 없앤 것인데, 이 개념은  아마추어가 많았던 고전시대의 연주와 감상간에 별 차이가 없었던데 반해 부르조아 청중들의 등장으로 연주자에게 더 많은 역할이 주어진 것에 비유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즉, 연주자는 일종의 공저자로 악보를 표현한다기보다 완성하는 위치에 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죠.

이미 몇년전 1차시기에 실패한 책읽기지만, 이번만큼은 적어도 저자의 난해함에 압도당하거나 주눅들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것은 모두 제대로 이해하는데 실패했지만, 텍스트에 관한 한 읽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 만큼은 정확하게 이해했으므로  이 텍스트는 내게 즐거움(plaisir)과 유희의 대상이 아니라 즐김(jouissance)과 권태의 대상이었을 뿐이며, 내가 책읽기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독자 꼬시기(draguer)에 실패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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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어문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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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데, 나는 이책을 인내심을 가지고 두 번이나 읽었지만 단 한줄의 문장도 제대로 아니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마전 인터넷의 한 신간 안내코너에서 이책이 새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내 방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을 이 책을 생각해내었습니다.그리고 몇 년 전 이책을 읽었던 당시의 당혹스러움도 함께 떠올렸습니다. 단 한줄도 읽어 낼 수가 없었던 기억.

 

나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설마 내 지적능력이 몇 년동안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기대로) 이 책을 다시 읽어보기로 하였습니다. 후훗..역시..이번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네요.

 

감당못할 책을 왜 샀느냐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굳이 변명하자면 비극적으로 요절한 천재 재미 예술가가 주는 묘한 기대치도 있었고(전혜린의 그것), 페미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아방가드르니 하는 지적허영심을 자극하는 홍보문구에도 혹했었고, 무엇보다 ‘소설’이라는 이름이 떡하지 붙어 있어서 안심하고 샀던 것이죠.

 

이책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실험적인 작가의 퍼포먼스에 가까운 책입니다. 3대에 걸쳐 모국어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작가의 어머니와 외할머니, 작가의 이야기, 받아쓰기를 연상시키는 문장과 웅얼거리듯 부자연스런 문체, 오래된 사진과 글씨, 불어와 영어의 혼용 등은 억압된 언어에 대한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유관순을 통해 일제에 억압받는 한국의 식민지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어느새, 억압의 대상은 잔다르크와 테레사수녀를 통해 계급으로서의 여성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그토록 다양한 하이퍼 텍스트의 변주가 수렴하는 지점이 어느 곳인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책 곳곳에서 새삼 낯설게 보이는 단어와 문장을 통해 막연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모국어가 아닌 언어에 대한 공포를 마주치기는 했으나, 나는 울리는 메아리 속에서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책을 내던지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비평가들에게 수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문제적 소설을 나도 읽어 보기는 했다는 정도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지요..-_-;;

 

낮은 별점은 나 같은 유치한 수준의 독서능력을 가진 독자들의 흥미를 만족시키는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혹시나 이책에 매료된 분들은 오해없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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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6-1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오년전에 꽤 유명했던 화제작이었어요. 저도 읽었었는데 눈 속의 여우님 말씀에 공감한다면 이거 저도 유치한 수준의 독서능력을 간증해 버리고 마는 거인가요. 크하하하...생각난 김에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안에 낡은 흑백사진도 있고 그랬었쟎아요. 암튼, 찾아보겠어요, 지금.

Fox in the snow 2004-06-15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이야..설마..저 같았겠습니까?^^

chaire 2004-06-1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의외입니다. 이 심란한 책을 읽은 분이 두 분이나!...^^ 저도 무척 끙끙매며 읽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아, 전, 절대, 다시 읽고 싶지 않아요...^^ 아, 그렇다고 이 책의 가치를 폄훼하는 건 아니구요, 전, 차학경의 삶에 대해서는, 말도 못할 어떤 경이로움 같은 걸 갖고 있어요. 하지만, 이 텍스트는, 정말루 난해, 난해...^^ 앗,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지는군요...^^

비로그인 2004-06-16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기를 내어 다시 재독합시다!! 나만 빼구..@.@;;
 
스위트피 (Sweetpea) - 하늘에 피는 꽃 + 달에서의 9년 EP
스위트피 (Sweetpea)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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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7년전인가요? 대학로 한 소극장에서 델리스파이스의 공연을 처음 보았을때가 기억이 납니다. CD를 구입하긴 했지만 밴드에 대한 아무 정보가 없던 친구와 나는 의심반 기대반으로 작고 음습한 지하 공연장의 계단을 멈칫거리며 내려가다 들려오는 노래소리에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비오는 오후에 멀리서 들려오는 옆집 소녀의 피아노 소리처럼 불안정하면서도 동시에 편안한 느낌. 어떤 날의 ”오후만이 있던 일요일”을 리메이크해서 연습하던 소리가 공연장 밖으로 흘러 나온 것이었는데, 그 날 이후 우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델리스파이스의 팬이 되버렸죠.(팬이래봤자, 고작 CD를 꼬박꼬박 사주는 것 밖에 하는 일이 없지만요)

 

소심한 뮤지션 만큼이나 그날의 관객도 소심해서 박수소리 한번 우렁차게 터진 적이 없었지만, 노래사이의 어색한 침묵이나, 몇 안되는 좌석, 그나마 반 이상 비어있던 자리에도 불구하고  무대와 관객사이에 흐르던 그 친밀한 자장이 아직도 생생이 기억됩니다.

 

그 이후로 한국 록씬에선 나름대로 탄탄대로(?)를 달려온 델리스파이스는 공연마다 헤드뱅잉을 하는 열성팬들을 몰고 다닐정도로 인기를 얻었고 징징거리는 한국 모던 록을 대표하는 밴드가 되었지만, 전 아직도 그날의 조곤조곤했던 포크 쪽에 맘이 기우는게 사실입니다.

 

사실, 저뿐 아니라 적잖이 많은 사람들, 특히 김민규 자신도 밴드의 프론트맨으로서가 아닌 혼자만의 비밀스런 일기 같은 음악을 원했고, 그 독자적인 정체성을 담은 프로젝트가 바로 스위트피였습니다.

 

스위트 피 1집은 정말 소량만 찍힌 바람에 실제로 제가 델리스파이스 공식홈피에 “사례는 달라는 대로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라는 도발적인 문구까지 넣어 올렸던 CD구함광고에도 불구하고 팔겠다는 단 한통의 메일도 받지 못했을 정도로 매니아들의 위시리스트에 오른 희귀앨범이 되버렸죠. 이번 앨범엔 보너스로 이 희귀앨범이 특별부록으로 딸려있답니다.물론 새로 피쳐링한 거지만요.

 

굳이 오래 전 기억을 끄집어 내는 이유는 스위트피 2집에 여전히 건재하는 김민규의 사춘기 소년적인 감수성과, 찰랑대는 기타리프와 장식없이 소박한 상처받기 쉬운 목소리 얘기를 하고 싶어서 입니다. 델리스파이스 1집 이후 전 참 많이도 변했는데 그의 음악은 여전히 그대로군요.

 

중얼중얼대는 가사도 좋고, 산뜻하고 명징하지만 어딘지 우울함이 느껴지는 멜로디도 좋고, 자기 방안에서 녹음했다는 Lo-Fi 사운드도 들을만하군요. 초등학교 때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연주하던 멜로디언의  건반이 꾹꾹 들어가는 소리를 발견하는 기쁨도 있구요.

 

단조로운 곡구성과 리메이크 남발등의 이유로 혹자는 매너리즘에 빠진 것 아니냐고도 묻지만, 전 뮤지션의 음악적 변신이나 테크닉의 발전도 좋지만 데뷔앨범에서의 진정성을 유지하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곡 한곡 트랙을 듣고 있자니 그 여리고 맑은 노래 사이로 대학로의 공연장에 뻘쭘히 앉아 낯선 음악을 경청하던 젊은 시절의 나와, 친구, 우리들의 꿈 그리고 지금의 무기력해진 우리들, 그 사이의 긴 거리가 오롯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다행이건 7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우리를 위로해주는 음악이 있다는 사실이죠.

 

참, 다행이야. 그게 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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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 다나카
구로다 다쓰히코 지음, 김향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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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이란 의례껏 세계유수의 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했었는데,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비범해보인 일본의 샐러리맨이 받았던 재작년의 수상결과는 적잖이 충격이었습니다. 

저런 사람도 노벨상을 탈 수 있다니..월급장이 엔지니어라니 나랑 별반 다를 것도 없잖아. 실험의 우연성에 기인한 수상이라니 단순히 운이 좋았다는건가?

어쨌거나 이례적으로 한해에 2명의 수상자를 낸 일본의 또 다른 수상자인 동경대의 명예교수보다는 시마즈제작소라는 낯선 회사의 만년주임에게 세계는 더 큰 갈채와 관심을 보였습니다. 학사출신에 비전공자인 회사원이 노벨상을 탔다는 단순한 화제성 때문에 박수를 친 사람도 있을테지만, 제 경우엔 꽤 오랫동안 기업체에 근무한 경험상 그의 수상이 얼만큼 어려운일이지를(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일이죠) 잘 알기 때문에 수상자에게 개인적 관심이 더욱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발과 양산으로 이어져 회사의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혹은 창출할 가능성이 적은) 기초연구에 투자한다는 것 자체가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에선 용납되지 않는 일이고, 그런 논리로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들이 사업타당성 검토결과  날라갔는지를 봐왔기 때문에 중소규모의 회사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배경이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장기적인 기술발전의 seed보다는 당장 눈앞의 이익을 찾는게 기업현실이니까요.이런 이유로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다나카란 샐러리맨보다도 그를 만들어낸 회사가 더 놀라왔습니다. 연구원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그로부터 사회에 공헌하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회사라니..너무 이상적인 회사이지 않습니까?

이런 수상자와 시마즈 제작소에 대한 관심으로 책을 읽게 되었는데, 역시 회사와 연구원 모두 남다르더군요. 연구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을 가진 엔지니어와, 그를 지원해주는 회사. 그러나, 책 속에 나타난 모습이 전부는 아닐테지만 회사에 대한 기대감은 조금 실망감으로 바뀐 부분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회사입장에서도 연구원 입장에서도 노벨상 수상은 소뒷걸음 치다가 쥐잡은 것 만큼이나 연구활동에 매진하게 한 시스템적인 측면보다는 단순한 행운이 많이 작용한 것도 같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죠.

단백질분석기를 개발하고 회사로부터 받은 보상금이 달랑 만엔이랍니다. (이 부분에서 뜨끔하더군요.왜 그런지는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자의 창의성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이런 회사에서 조차 연구성과의 가치를 이렇게 평가하다니..하는 의문이 남더군요. 연구전문직이 없어, 연구를 하려면 승진을 포기해야 하는 시스템도 말이 안되구요.우리나라랑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노벨상 수상은 회사의 배려와 지원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다나카 개인의 열정이 낳은 결과물인 것으로 보여집니다.그래서 더 값진 것인지도 모르지만요.

이 책안에는 봉급장이 연구원 다나카외에도 화학실험을 좋아하던 어린 다나카와, 평범하면서도 성실한 학창시절, 연구실에 파묻혀지내던 도호쿠대학시절등의 숨겨진 다나카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자는 학창시절 내내 1등 한번 한적 없는그를 평범하지만 성실함에 기인한  비범한 구석이 있는 견실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 뭐라해도 제겐 다나카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연구를 천직으로 알고, 그 길에서 곁눈 질 한번 안하고 정진하는 자세는 저자의 표현대로 일본 장인정신 그대로입니다. 수재가 아니라서, 대학에 남지 못해, 대기업에서 근무하지도 않는데, 연구보단 잡일이 많아서, 전공분야가 아니고 학위가 없어서.. 등등의 변명거리가 얼마나 안일한 변명인지 생각해봅니다만...^^..게으른 저로선 그저 나같은 샐러리맨중에서도 저런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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