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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ㅣ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업무상 지방 출장이 잦아, 서울역에 자주 가는 편입니다. 역에 갈 때 마다 꺼림칙했던 것이서울역 대합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숙자들이었습니다. 특히 서울역사가 새단장 한 이후로는 가히 최첨단 역사의 옥의 티라 할 정도로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습니다.(실은 시각보다도 후각의 고통이 더 심했습니다만..) . 대부분의 노숙자는 구걸하는 걸인들과 다르게 동정을 구하는 얼굴이 아니라, 자신들을 거리로 내몬 세상을 저주하는 얼굴이기 때문에 연민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대상이었거든요.
나 같은 사람들이 꽤 많았던지 언제가부터 서울역사내의 노숙자 출입을 차단하더니, 아예 광장에서조차 노숙자들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물론 그들이 노숙자 생활을 청산하고 사회인으로 복귀했을리는 만무고, 강제수용되거나 혹은 다른 쉼터를 찾아 떠난 것이지요. 그 와중에 한두명의 노숙자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아 노숙자와 공안요원들과의 충돌이 있었고, 영등포역이 서울역의 고민을 떠안게 되었긴 했지만 어쨌거나 서울역은 노숙자 천국의 오명을 벗게 되었습니다. 밤늦게 역에 도착할 때면, 신변의 위험까지 느낄 정도로 우굴거리던 노숙자들이 일거에 사라지자 제일 좋아했던 사람 중의 한 명이 아마 저일겁니다. 한달에 한두번이나마 역사를 이용할 때 제가 느끼는 쾌적함에 비하면 비바람을 막아줄 최소한의 생존장치마저 빼앗긴 그들의 안위에 대한 염려쯤은 아무것도 아니었구요.
게다가 그들은 멀쩡한 사지육신가지고도 일하기 싫어 놀고 먹는 게으른 인간들, 대낮부터 술에 취해서 지나가는 행인을 쏘아보며 자신이 자초한 불행을 화풀이할 대상을 찾지만 정작 정면의 시선을 맞서낼 자신이 없는 루저들, 학습된 무력감탓에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의지를 버려 가족에게까지 잊혀진 존재들 ….아닙니까?
실제로 서울시가 노숙자들을 방치해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맘속에서 기대한 노숙자 대책이란, 노숙자들의 사회복귀를 위한 훈련이나, 재교육 같은 진정한 의미의 재활과는 거리가 먼 노숙자 소탕(!)이니까 말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노숙자들이 생활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것이니까요.
여기 오멜라스라는 지상낙원이 있습니다. 모든 이가 행복한 오멜라스의 축복을 담보로 궁극의 비참함 속에 놓인 한 아이를 마주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화를 내며 분노를 느끼고 무력감에 빠져듭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고, 자신의 상대적 행복을 확인하는 장치로 , 연민은 자신의 자식을 대하는 자애로움으로 바뀌게 되고 맙니다. 아이에 대한 죄책감은 자신의 어떠한 행동도 아이의 상황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오멜라스의 행복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 합리화됩니다. 아이의 존재는 오멜라스 사람들이 김빠지고 무책임한 절대적 행복이 아니라, 삶의 고통을 이해하는 고상한 행복을 구가할 수 있은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은 눈물을 거둔 후에, 소리없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도시를 떠나지만 말입니다 .
오멜라스라는 도시가 상상의 도시라는 사실에 안도할 수 만은 없을 겁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도덕률은 서울이라는 도시에도 여지없이 적용되며, 모든이의 행복을 적분해도 한사람의 불행을 막을 수는 없겠지요.
도시에 남은 우리가 하는 일이란, 그들의 존재를 잊는 것 뿐입니다.
P.S. 제게 이런 사회적,정치적, 철학적 고민을 하게 한 이책의 장르는 바로 SF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