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비단보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여류작가들의 글솜씨는 하나같이 찬연하다. 몇몇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페미니즘의 클리셰(Cliche)에 함몰되었다거나 지나친 공주병에 빠져 있다는 조소를 받기도 하지만, 각기 뛰어난 필력으로 한국 문단을 주도하는 그녀들의 활력이 나는 좋다. 공지영의 대중성과 신경숙의 섬세한 문체, 은희경의 냉소주의와 심윤경의 문학적 진화, 정이현의 동시대적 공감성과 전경린의 연애 서사 등은 한국 문단을 빛내는 여류작가들의 대표적 아이콘들이다. 바로 그 연장선상에 권지예가 있다.

  1997년 단편 「꿈꾸는 마리오네트」로 등단한 후 2002년 이상문학상과 2005년 동인문학상을 수상, 한국 문단에서 가장 권위있는 양대산맥을 동시에 석권한 권지예의 외연적 존재성은 그녀의 활자 곳곳에 내면을 증명하듯이 배어 있다. 그녀와는 2002년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뱀장어 스튜」라는 단편으로 처음 만났다. 권지예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뱀장어 스튜」는 일상 속에 존재하는 권태와 애증,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의 욕망과 바깥의 낭만적 로맨스, 환상적 도발이 허무의 확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정교하게 엮고 있는 작품이다. 뛰어난 포스트 모더니즘 기법이 돋보이는 이 짧은 단편소설은 체질적으로 단편과 거리가 먼 내 자신에게 단편만이 가질 수 있고 단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치의 문학적 만족을 내게 안겨주었다. 권지예는, 나에게 그리 기억되는 작가다.

  권지예의 신작 장편소설 『붉은 비단보』는 그녀의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배경에서 펼쳐지는 서사다. 권지예는 시간의 무대를 조선의 어느 한 시대로 되돌려 여성의 삶과 사랑과 예술을 처연하면서도 찬란하게 그려냈다. 종당에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밖에 없는 우주의 내면적 속성을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48년간의 삶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작중화자 항아恒我의 꿋꿋하면서도 담대한 삶은 거대한 서사의 맥으로서 웅숭깊게 그려진다.

  작가는 세 명의 여인을 배치한다. 1인칭시점의 주인공 화자 항아恒我는 뛰어난 자색과 화려한 춤 솜씨를 갖춘 초롱草籠, 총명하며 지혜로워 문필 신동이라 불리는 가연佳然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다. 각기 독특한 성정과 능력을 갖고 있는 동갑네 세 여인의 우정이 서사의 초반부를 이끌어가는 씨줄이다. 여기에 초롱의 친오라비 준서와 항아의 애틋하면서도 절제된 사랑이 날줄로 엉켜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조합된다.

  서사의 흐름 속에서 항아와 준서의 사랑은 농밀해져만 간다. 하지만 둘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역모 혐의로 초롱과 준서의 집안은 몰락하고, 준서는 항아와 훗날에 다시 만나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한 후에 금강산으로 피신한다. 여동생 초롱은 한양으로 팔려가 기생이 된다. 가장 뼈대가 튼튼한 사대부 가문의 자녀였던 가연이 제일 먼저 혼사를 치르기 위해 떠나고, 항아는 준서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부모의 거짓계략으로 준서가 죽은 줄만 알았던 항아는 사랑하지 않는 남정네와 혼사를 치르면서 일평생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 준서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의 세월로 들어가게 된다.

  기나긴 세월이 흐르면서 항아와 초롱과 가연의 삶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시댁의 핍박과 계속된 유산으로 삶의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던 가연은 목매달아 자살함으로써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한편 항아는 기생이 된 초롱과의 연락이 요원하기만 하다. 그리고 훗날 알게 되는 준서와 관련된 진실들. 하지만 항아의 삶에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을 속인 부모에 대한 한과 준서를 향한 원망만이 존재할 뿐. 훗날 항아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식하고 일평생 자신의 한과 사랑과 그리움이 내밀하게 깃들어 있는 붉은 비단보를 불에 태우려고 한다. 과거 흔적들을 하나씩 태우면서 항아는 다른 세상으로 떠나간다.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이 소설에는 명징한 두 가지의 본류가 흐르고 있다. 하나는 항아와 준서의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며, 다른 하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한 여성의 예술가로서의 번민과 열정이다. 항아에 대한 준서의 끈질긴 사랑과 준서를 향한 항아의 애절한 그리움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흐름이다. 항아가 준서와의 추억을 기억하며 봉인한 '붉은 비단보'의 존재는 종국까지 멸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고결한 정신적 사랑의 극치를 담아낸 메시지가 되고 있다.

  또한 예술을 향한 항아의 꿈과 긍정의 부여는 이 소설의 존재 가치가 된다.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어느 하나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간 한 여인의 웅숭깊은 삶의 여정 속에는 그녀 자신의 예술적 자아가 발현되면서 더욱 찬란한 빛을 뿜어낸다. '여성의 예술'을 인정치 않았던 시대에 태어나서 자신의 예술이 곧 점잖치 못한 '끼'로 재단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그 시대 모든 여성들의 고뇌와 몸부림이 문장 속에 오롯이 배어 있기에 처연하다.

  예술과 사랑은 어떤 함수 관계일까. 세계의 수많은 고전들은 예술 속에서 사랑을 천착하며, 사랑을 통해 예술을 발현시켜 왔다. 소설의 제목 '붉은 비단보'는 한 여인의 마음속에서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일렁였던 사랑의 그림자와 자신의 전생애를 지탱하며 실존케 했던 예술에 대한 열정이 만나 현존存되어진 메타포다. 요컨대 붉은 비단보 안에 봉인된 글과 옷과 그림들은 이 소설의 본류로 작동했던 사랑과 예술의 혼합이 일구어낸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독특한 시각이 있다. 다섯째 아이 빈彬에 대한 항아의 특별한 사랑이다. 소설의 시작과 말미는 항아의 1인칭시점의 이야기를 빈이 중심이 된 전지적시점의 이야기가 감싸서 두르고 있다. 빈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영특했다. 항아는 빈을 통해 마치 자신의 어렸을 적 모습을 보는 듯했고, 무지하고 무능했던 남편과 비견되면서 옛사랑 준서를 떠올리기도 했다. 즉 빈은 항아 자신의 예술적 자아가 투영된 거울이자 꿈이요 희망이었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이 현현된 준서의 또 다른 부활이었으리라.

  나는 인간의 삶을 잘 그려낸 서사에 최고의 찬탄을 선사한다. 문학은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공복을 느끼며, 인간은 문학을 통해 인간 본연의 내면을 더욱 천착한다. 이러한 인간과 문학의 방정식에 동의한다면, 인간을 얼마나 잘 조명했고 성찰했는지에 따라 문학적 평가가 가름된다는 논리에 동의하게 된다. 작가 권지예가 빚어낸 항아라는 여인의 삶과 사랑, 불타는 예술혼이 선사하는 감동의 빛깔은 지극히 찬란하며 눈부시다. 너무 잘 담아냈고 흠이 없는 완전한 서사로 그려냈다. 이런 소설이 있기에 독자의 머리는 잠시 정지할 수 있고, 가슴은 농밀한 감성으로 차오를 수 있다. 미국에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있다면 한국에는 『붉은 비단보』가 있다. 정말 잘 쓴 '완벽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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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7-30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여름은 더 적절한 계절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도 전 이래저래 책을 오래 손에 잡지 못하고 이러구 있네요.
늘 꾸준히 읽고 쓰는 일을 즐거이 하시는 다윗님^^ 좋은 리뷰 또 보고 갑니다.

다윗 2008-07-31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더운 날씨에 평온하시지요. 피서 계획은 세우셨는지요. 그리고 독서 컨디션은 어떠하신지요. 간만에 혜경님의 덧글을 만나니 시원해집니다. 평온하세요. ^^

뒷북소녀 2008-09-2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에 반한 분이 계셔서 선물하려구요... 땡스 투~ 날립니다. :)

다윗 2008-10-04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 뒷북소녀님, 언제나 관심과 격려 고맙습니다.^^
 
저녁놀 지는 마을
유모토 카즈미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일본소설을 그리 즐겨읽는 편이 아니다. 많은 작품을 접하진 못했지만 대부분의 일본소설은 뚜렷한 전형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제와 소재는 다양하지만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과 구도는 철저하게 스토리텔링에 기반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은 발군이지만 보다 무게감있고 깊은 세계를 건드리지 못하는 게 작금의 일본작가들이 아닌가 한다. 어쩌면 가라타니 고진이 오에 겐자부로 이후 일본문학은 종언을 맞이했다고 단언했던 배경에 순수·본격문학으로서 최소한의 무게감이 결락된 일본 대중문학의 현주소가 깔려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가는 일본소설들이 꽤 있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다 슈이치를 제일 좋아한다. 하루키의 존재감은 거론할 필요가 없겠고, 슈이치의 경우 뛰어난 동성적 감각으로 타자는 흉내낼 수 없는 발군의 감수성을 그려내는 데 천재적 소질을 보이는 작가다. 뛰어난 이야기꾼보다 독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가 나는 좋다. 그렇기에 체질적으로 좋아하지 않은 일본 현대문학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다 슈이치를 선망하고 있는 것일 게다.

  개인적으로 강한 신뢰를 갖고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던 『저녁놀 지는 마을』은 앞서 언급한 문학에 대한 내 독서관에 부흥하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선택한 소설이다.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스토리 위주의 일본소설과는 다르게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조금은 어려운 소설, 이라고 소개한 모 인터넷서점의 책소개는 꽤 인상적이었다. 일차원적 '재미'보다는 삼차원적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 예견하며 양장본의 첫 장을 넘긴다.

  소설 속 화자는 어린 남자아이다. 이혼한 엄마와 단둘이 살고있는 집에 어느날 갑자기 외할아버지가 등장한다. '짱구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외할아버지의 행색은 초라하며 존재감이 없어 보인다. 뜻하지 않은 짱구영감의 출현으로 두 모자의 생활 리듬은 변화를 겪는다. 좁은 방에서 항상 웅크리고 앉아있는 짱구영감은 자신의 딸에게 그리 반가운 손님이 되지 못한다. 소설은 두 모자로부터 받아들일 수 없고 불편하기만 한 존재로 짱구영감을 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길지 않은 서사 속에서 짱구영감과 딸 사이의 긴장과 불신의 벽은 서서히 무너진다. 짱구영감이 온 이후, 오히려 예전보다 아이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은 더욱 평온하고 안정감 있어 보인다. 할아버지의 출현 이후 밤마다 형광등 아래서 손톱을 깍던 엄마의 행동은 정지된다. 얼굴에는 미소가, 삶에는 활력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어린 남자아이의 차원에서는 불가해한 현상이다. 그토록 엄마가 원망하고 증오했던 외할아버지가 눈 앞에 실존하면서 일어나는 두 모자의 작으면서도 큰 변화는 이 소설이 던져주고자 하는 의미를 잘 메타포한다.

  소설의 말미, 죽기 전에 잠자고 있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는 짱구영감과 이를 목도하는 아이, 그리고 잠에서 깨어 상황을 인식한 엄마의 모습은 소설의 전 서사 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장면이다. 모든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이고, 부녀간의 오롯한 사랑이 확인되는 순간이며,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대답하는 순간이다.

  작가는 이 짧은 소설에서 군더더기 없는 절제된 문장으로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질문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선적 서사가 아니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을 포착화하여 독자에게 전달한다. 1인칭 화자인 남자아이의 기억과 현실과 대화를 극히 절약된 활자로 담아내면서 한 의미 한 의미를 전달하는 작가의 서술이 인상깊다. 굳이 많은 문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간결하고도 담백하게 가족과 사랑의 의미를 잘 그려냈다.

  우리들은 소위 가정이 파괴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결혼한 세 쌍 중에서 두 쌍이 이혼하며, 그로 인한 편부모 자녀들의 증가는 결코 녹록지 않은 실정이다. 모성과 부성의 동시적 공급이 다음 세대의 안정된 성장을 위한 가장 소중한 전제임을 인정한다면,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른 사회상 속에서 진지한 가족의 의미를 질문하는 작업은 응당 고귀하다. 과연 진정한 가족이란 어떤 것일까. 철저하게 '가정예찬론'을 부르짖는 나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은 깊은 사유를 보증하면서 한 단계 성숙한 인간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힘이 된다.

  부끄러움이 존재하지 않고 극히 평범한 것이 특별함으로 중무장되는 곳, 작은 것에서 꿈과 긍정을 보고 동일한 방향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위안과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 작은 웃음이 개그콘서트가 되고 지칠고 힘들 때 비타민과 에너지를 공급받는 곳, 푸른 초장이자 쉴만한 물가가 되는 곳, 바로 그곳이 진정한 가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불과 한 시간이면 완독할 수 있는 이 한 권의 얇은 소설이 가족에 대한 깊이있는 의미를 질문하고 있음을 내가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기에, 이 소설은 내 가슴속에 잘 안착한 듯 보인다. 군더더기나 기름기 없는, 참 깔끔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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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k 2008-08-08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
또 올꼐요^^
 
마지막 강의
랜디 포시.제프리 재슬로 지음, 심은우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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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섬기기 시작한 교회를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중간에 흔들린 적도 있었지만 끝내 이탈하지 않고 한 교회를 섬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담임목사님의 영향이 컸다. 평소 목사님의 목회관과 인간미에 강한 매료를 느낀다. 우리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로서 설교관이 자못 인상적인데, 현재 선포하는 설교가 자신의 마지막 설교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훗날을 기약하며 아껴두는 설교가 아니라 지금 현재에 충실한 '마지막' 설교. 목사님의 설교관이 이렇기에 성도들의 마음가짐 또한 특별하다. 오늘이 아니면 목사님의 설교를 다시는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전심을 다해 듣는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신념으로 최선을 다하는 설교가와 지금 듣는 설교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경청하는 성도들. 이러한 전파와 수용의 아름다운 조화를 기반으로 우리 교회는 소소하면서도 모범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인간으로부터 강한 감성을 불러 일으킨다. 마지막 여행, 마지막 식사, 마지막 사랑, 마지막 파티 등 '마지막'이라는 세음절의 어휘가 주는 어감은 특별하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여태까지 지속되어 왔던 것의 중단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젠 더 이상 실행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현재적 상황을 강조할 때 사용되지만, 미래에 맞닥뜨리게 될 상실을 전제한다는 차원에서 '슬픔'을 내포한다. 근원적으로 '마지막'은 슬픈 단어다.

  『마지막 강의』는 췌장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후 인생의 마지막 강의를 실행한 카네기멜론대학 랜디 포시 교수의 강연을 정리한 책이다. 저자 랜디 교수는 가족을 남겨두고 죽음 앞에 직면한 한 남자의 우울한 현재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힘있는 긍정으로 꿈과 희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꿈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요소들에 대해 강의하는 저자의 목소리에는 긍정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한 인간군상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1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의 동영상을 시청했고, 오프라 윈프리 쇼와 ABC 등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 책은 결국 자기계발서의 전형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진실하라", "최선을 다하라", "열정을 가지라", "포기하지 마라", "겸손하라" 등. 이런류의 주문들은 이미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접하지 않았던가. 별반 다를 것 없는 전형적인 자기계발류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특별한 점은 자신의 세 아이들로부터 훗날 기억되고자 하는 아버지의 여망에 있다. 책 속에서 자주 소개되는 어린 세 자녀에 대한 저자의 사랑 고백은 잊혀질지도 모르는 아버지로서의 근심과 희망이 동시에 드러나 있어 웅숭깊다.

  살아있을 시간이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을 말기 암환자가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꿈과 희망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경이롭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타인을 가르치는 자로 살아온 교육자로서의 의무감이 활자 속에 깊게 배어 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과거를 재료삼아 미래를, 무료한 현실보다 당찬 꿈을 설파하는 랜디 교수의 외침은 감사를 모르고 살아가는, 그리하여 최소한의 꿈과 기회조차 놓치는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들어야 할 목소리일 것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또 들었던 자기계발의 상투적 내용과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다소 아쉽지만 죽음의 직면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가족과 타인에게 꿈과 희망을 얘기하는 랜디 교수의 열정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아내와 세 자녀를 너무 사랑하면서 자신의 제자들과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꿈과 긍정을 전하는 한 중년 교수의 '마지막' 강의.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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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경제의 종말이 시작됐다
마쓰후지 타미스케 지음, 김정환 옮김 / 원앤원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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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미국 경제의 미래를 내다보는 시각은 대략 두가지로 가름된다. 당분간 미국의 헤게모니가 흔들리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하나이며, 조만간 미국 패권주의의 대단원은 막이 내릴 것이라는 게 다른 하나이다. 수많은 경제전문가들과 미래학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며 대립되어온 토론 주제이기도 하다. 일반 대중들 또한 미국 경제의 앞날에 대해 대부분 긍정과 부정으로 나눠 분리되는 분위기다. 과연 미국의 경제 헤게모니는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현재를 보자. 미국 경제의 현재성은 어느 누가 뭐래도 세계 최강이다. 14조 달러에 이르는 GDP 규모는 물론, 주식 시장의 거대한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개발도상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인도 주식 시장의 30배이고,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나이지리아 주식 시장의 5,000배에 달하는 규모다. 작년에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인해 세계 경제는 엄청난 파동을 일으켰으며, 그 여파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미국 경제가 기침을 하면, 일본 경제는 열이 나고, 한국 경제는 자리에 앓아 눕는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은 아닌 것이다.

  물론 미국 경제의 안정성과 건강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은 상황이다. 서두에 언급한 미국 경제 전망에 대한 두가지의 상이한 목소리는 미국 경제 속에 내재된 은밀한 속성과 앞으로 세계 경제의 흐름을 어떻게 천착하느냐에 따라 갈라지기 마련이다. 일본의 투자 전문가 마쓰후지 타미스케는 자신의 저서 『미국경제의 종말이 시작됐다』를 통해 이젠 더 이상 미국 경제의 미래에는 희망이 없음을 선포한다. 저자는 달러와 뉴욕다우지수가 곧 폭락할 것이라 예견하며 거품 경제의 붕괴 이후 건전하고 탄탄한 경제 구조를 만들어왔던 일본 경제야말로 희망이 있는 경제임을 역설한다.

  저자는 'BRICs'로 불리는 신흥 경제 대국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들 신흥 경제대국의 부흥은 일시적인 현상이며 얼마 가지 못해 붕괴될 것이라 예견한다. 그러면서 일본의 경쟁상대는 오직 미국뿐임을 강조한다. 더욱이 세계 제조업의 23%를 장악하며 미국에 맞서는 21세기 경제 패권의 핵, 중국의 존재감을 외면한다. 공산당 정권의 비투명성과 한계를 논거로 하여 세계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무게감을 애써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논지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미국이 1조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국가 부채를 가지면서, 매년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라는 '쌍둥이적자'에 허덕이면서도 굳건히 서나갈 수 있는 배경에 중국의 대미 달러 정책이라는 연원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세계 경제계에 주지된 정설이다. 또한 최근 중국의 GDP 규모는 일본을 앞질러 미국에 이어 세계 2위권에 진입했으며, 금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상해엑스포를 통해 국제적 부흥과 발전을 꾀하고 있는 형국이다. 더욱이 쇼비니즘이 몸에 베어 있는 중국인들의 특성을 감안했을 때 더욱 무섭게 국제사회에서 패권주의를 꾀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러한 중국의 현재적 주소를 재단하면서 일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빈곤할 뿐이다.

  중국에 대한 견해차를 제외하고는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투자에 있어 기존의 상식과 배치된 논리를 주장하고 있어 자못 솔깃하다. 금리가 내리면 주가가 오르는 것은 경제의 상식이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금리가 오를 때 주가도 오른다면서 기존의 경제 질서를 전복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와 분석까지 겸하고 있어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든다. 또한 'GSR(Gold/Silver Ratio)', '빅 픽처(big picture)', HGX(PHIX Housing Sector Index)', '강세 일치(bullish consensus)' 등 왠만한 경제전문가도 알지 못할 비주류 지표들을 소개한다. 더불어 이 지표들을 통해서 주식 시장에 대한 투자 유무를 적용해 볼 수 있음을 제시한다.

  저자는 시장을 파악하는 지표로 5가지를 신뢰한다고 언급한다. GSR, 강세 일채, 금리의 전환기, 빅 픽처, HGX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중에서 GSR 지수와 주식 시장과의 상관관계가 매우 흥미롭다. GSR이란 은시장의 상승세를 가늠할 때 사용되는 지표 중 하나로 금가격을 은가격으로 나눈 지수이다. GSR의 수치가 '100'에 가까워질수록 금이 은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고, 은은 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싸다는 얘기다. 반대로 이 수치가 "50' 이하로 떨어지면 은이 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싸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30년간의 통계에서 GSR 수치에 따라 주식시장에서 이변이 발생할 확률이 높았던 데이타를 소개한 대목은 매우 신선하다. 

  그 외에도 일반적인 투자 관련책을 통해 얻을 수 없는 정보들을 적잖이 소개한다. 주식과 펀드를 위시한 재테크에 관심있는 자에게 좋은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전문적인 용어와 수치를 자주 인용하여 일반인들이 정확히 수용하기에 어려움이 있기도 하다. 너무 일본의 시각에서만 투자를 조명하고 있어 한국의 주식 시장과 경제 환경에 다소 어긋나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금광산업에 대한 자신의 성공 사례를 소개하면서 금·은, 현물, 금광주에 대한 강조만을 일관되게 주장한 부분은 투자 시장의 일반성을 훼손시킨다는 측면에서 성급한 일반화가 아닌지 조심스럽기도 하다.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생각과 판단으로 자산가가 되는 사람은 없다. 저자는 일간되게 설파한다. 상식적으로 행동하다 모두 함께 저 멀리 사라져갈 것임을. 경제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 투자의 세계에서는 비상식이 승리가 되고 상식이 패배가 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특유의 비범한 타이밍 감각으로 인해 굴지의 부자들은 탄생되었다. 조지 소로스, 워렌 버핏, 짐 로저스, 에릿 스프롯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비록 투자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정보를 전달하지 못한 채 주관적 논지 피력에 그친 점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미국 경제의 어두운 미래상에 대한 구체적 조망과 이를 근거로 일본 경제에 희망을 내다보는 저자의 관점이 흥미로운 책이다. 또한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비상식적 사고와 타이밍이라는 점을 곱씹게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필요성은 어느 정도 충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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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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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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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난감하다.

  서평을 쓸 때 반갑지 않은 책들을 간혹 만나곤 한다. 비문학보다 문학에서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매우 뛰어난 걸작이 그러하고, 아주 조악한 졸작이 그러하며, 이도 저도 아닌 밋밋한 작품이 그러하다. 더욱이 가장 힘든 건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강력한 찬사를 받은 명작임에 불구하고 내 자신이 그들의 평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럴 때 서평 쓰는 자의 번민은 깊게 마련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굳이 나쁠 건 없다. 동일한 책을 읽은 후 나와 다른 느낌과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로부터 얻는 다양성 획득이라는 가치는 독서라는 우주의 폭과 깊이를 팽창시킨다는 차원에서 반가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에 요구하는 가장 일차적 기능으로 '감동'을 꼽는다. 감동의 발현 방식은 소설마다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감동적인 소설은 어떤 종류의 감동으로든지 독자의 가슴속 한 켠에 소중히 남아 책읽기에 대한 보람과 희열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감동이 없는 소설은 죽은 소설이며,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논하기 어렵다 하겠다. 활자가 눈과 머리를 지나 가슴에 안착될 때에 비로소 '좋은 소설'로서의 최소한의 자격요건이 성립된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문학의 감동을 위해 활자는 굳이 난해할 필요가 없고, 무게잡을 이유가 없으며, 작가 자신의 나르시시즘에 빠질 필요는 더욱 없다. 어려운 문장이 곧 수준 높은 문학이 아니며, 철학적 문구가 많다고 해서 무게감 있는 활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좋은 문장이 좋은 문학인 것이다. 심원한 척 하면서 뭔가 있는 듯한 기교로만 조합되어진 활자로 인해 독자는 속고 종이는 낭비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작가로 잘 알려진 소설가 코맥 매카시는 저명한 평론가인 해럴드 블룸으로부터 상찬을 받은 세계적인 작가이다. 묵시록적인 걸작이라 평가받는 그의 대표작 『로드』는 '2007년 퓰리처상 수상', '아마존과 뉴욕 타임스 베스트 1위',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선정', '스티븐 킹이 뽑은 올해의 소설 1위' 등 다양한 수식어구를 두르고 있는 화제작이다. 더욱이 '미국 현지에서 감히 <성서>에 비견되었던 소설'이라는 책 표지의 강렬한 문구는 기독교의 권위에 도전할 만큼의 강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 코맥 매카시는 대재앙으로 파괴된 황폐한 지구를 배경으로 희망을 찾아 걷고 또 걷는 두 부자父子의 이야기를 극도의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로 그려냈다. 한밤중에 밤의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 두 부자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사의 구도와 흐름은 단순하다. 일관되게 음울하다. 마지막 단 세 페이지를 제외한 전 서사는 고통스럽고, 어두우며, 우울하고, 절박하다. 따옴표, 쉼표, 숫자 등의 기호들이 일체 누락된 채 오직 건조한 문장으로만 서사는 조합된다. 작가는 활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치의 어두움으로 인류 최후의 암울함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굳이 언급할 만한 이 소설의 특징은 딱 거기까지다.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고, 내 사유를 비틀어 보다 높은 세계 위로 견인해주지 못했다. 마지막 구원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너무나 지루한 문장을 감내해야 했다. 시종일관 지속되는 심원한 철학적 문장과 암울한 미래상의 스케치는 결과적으로 이 정도 수준의 묵시록을 만드는 데 사용된 '오버'로밖에 인지되지 않는다. 신과 자아에 대한 성찰은 『연금술사』보다 못하고, 인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흥미 수준은 『파피용』보다 못하며, 인류의 희망과 구원에 대한 질문과 접근방식은 『바리데기』보다 못하고, 암울한 미래상에 대한 묵시록적 그림은 『생존자의 회고록』보다 못하다.

  그들(아버지와 아들)이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목적과 대상에 대해 작가는 일언반구 없이 묵묵하기만 하다. 남쪽으로 길을 따라 계속해서 걷기만 하는 단선적 플롯은 마지막 구원의 빛을 향해 쏠려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작가가 제시한 '희망'은 서사 속에서 작은 이야기 전복에 불과하며, 시원한 해답을 주지 못한 채 고통의 또 다른 연장을 의미할 뿐이다. 세계의 시작과 마지막을 명징하게 제시하면서, 인류를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차원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의 맥락으로 쓰여진 <성서>와 비견된다는 이 책의 홍보문구는 코미디와 같다. 이야기의 풍성함, 제시한 질문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문학적 진수에 있어서도 이 책은 <성서>와 비교할 수 없는 저차원이다.

  이 정도의 감동을 얻기 위해 굳이 매카시의 문장을 읽을 필요는 없다. 엇비슷한 주제로 코엘료는 더욱 다양하고 깊이있는 주관적 언론을 선사한다. 이 정도는 정이현의 산문으로도 충분하다. 헤럴드 블룸과 오프라 윈프리가 극찬했다고 해서 내 자신까지 경도될 필요는 없다. 내 돈 주고 직접 산 책이다. 솔직한 평에 대한 권리는 응당 내게 있다. 지루하고, 별 것 없고, 외연적으로 요란하기만 한 활자에 대한 호오는 바로 '내'가 판단하는 것이다. 

  시간이 아까웠다. 정말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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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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