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놀 지는 마을
유모토 카즈미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일본소설을 그리 즐겨읽는 편이 아니다. 많은 작품을 접하진 못했지만 대부분의 일본소설은 뚜렷한 전형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제와 소재는 다양하지만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과 구도는 철저하게 스토리텔링에 기반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은 발군이지만 보다 무게감있고 깊은 세계를 건드리지 못하는 게 작금의 일본작가들이 아닌가 한다. 어쩌면 가라타니 고진이 오에 겐자부로 이후 일본문학은 종언을 맞이했다고 단언했던 배경에 순수·본격문학으로서 최소한의 무게감이 결락된 일본 대중문학의 현주소가 깔려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가는 일본소설들이 꽤 있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다 슈이치를 제일 좋아한다. 하루키의 존재감은 거론할 필요가 없겠고, 슈이치의 경우 뛰어난 동성적 감각으로 타자는 흉내낼 수 없는 발군의 감수성을 그려내는 데 천재적 소질을 보이는 작가다. 뛰어난 이야기꾼보다 독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가 나는 좋다. 그렇기에 체질적으로 좋아하지 않은 일본 현대문학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다 슈이치를 선망하고 있는 것일 게다.

  개인적으로 강한 신뢰를 갖고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던 『저녁놀 지는 마을』은 앞서 언급한 문학에 대한 내 독서관에 부흥하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선택한 소설이다.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스토리 위주의 일본소설과는 다르게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조금은 어려운 소설, 이라고 소개한 모 인터넷서점의 책소개는 꽤 인상적이었다. 일차원적 '재미'보다는 삼차원적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 예견하며 양장본의 첫 장을 넘긴다.

  소설 속 화자는 어린 남자아이다. 이혼한 엄마와 단둘이 살고있는 집에 어느날 갑자기 외할아버지가 등장한다. '짱구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외할아버지의 행색은 초라하며 존재감이 없어 보인다. 뜻하지 않은 짱구영감의 출현으로 두 모자의 생활 리듬은 변화를 겪는다. 좁은 방에서 항상 웅크리고 앉아있는 짱구영감은 자신의 딸에게 그리 반가운 손님이 되지 못한다. 소설은 두 모자로부터 받아들일 수 없고 불편하기만 한 존재로 짱구영감을 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길지 않은 서사 속에서 짱구영감과 딸 사이의 긴장과 불신의 벽은 서서히 무너진다. 짱구영감이 온 이후, 오히려 예전보다 아이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은 더욱 평온하고 안정감 있어 보인다. 할아버지의 출현 이후 밤마다 형광등 아래서 손톱을 깍던 엄마의 행동은 정지된다. 얼굴에는 미소가, 삶에는 활력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어린 남자아이의 차원에서는 불가해한 현상이다. 그토록 엄마가 원망하고 증오했던 외할아버지가 눈 앞에 실존하면서 일어나는 두 모자의 작으면서도 큰 변화는 이 소설이 던져주고자 하는 의미를 잘 메타포한다.

  소설의 말미, 죽기 전에 잠자고 있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는 짱구영감과 이를 목도하는 아이, 그리고 잠에서 깨어 상황을 인식한 엄마의 모습은 소설의 전 서사 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장면이다. 모든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이고, 부녀간의 오롯한 사랑이 확인되는 순간이며,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대답하는 순간이다.

  작가는 이 짧은 소설에서 군더더기 없는 절제된 문장으로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질문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선적 서사가 아니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을 포착화하여 독자에게 전달한다. 1인칭 화자인 남자아이의 기억과 현실과 대화를 극히 절약된 활자로 담아내면서 한 의미 한 의미를 전달하는 작가의 서술이 인상깊다. 굳이 많은 문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간결하고도 담백하게 가족과 사랑의 의미를 잘 그려냈다.

  우리들은 소위 가정이 파괴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결혼한 세 쌍 중에서 두 쌍이 이혼하며, 그로 인한 편부모 자녀들의 증가는 결코 녹록지 않은 실정이다. 모성과 부성의 동시적 공급이 다음 세대의 안정된 성장을 위한 가장 소중한 전제임을 인정한다면,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른 사회상 속에서 진지한 가족의 의미를 질문하는 작업은 응당 고귀하다. 과연 진정한 가족이란 어떤 것일까. 철저하게 '가정예찬론'을 부르짖는 나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은 깊은 사유를 보증하면서 한 단계 성숙한 인간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힘이 된다.

  부끄러움이 존재하지 않고 극히 평범한 것이 특별함으로 중무장되는 곳, 작은 것에서 꿈과 긍정을 보고 동일한 방향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위안과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 작은 웃음이 개그콘서트가 되고 지칠고 힘들 때 비타민과 에너지를 공급받는 곳, 푸른 초장이자 쉴만한 물가가 되는 곳, 바로 그곳이 진정한 가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불과 한 시간이면 완독할 수 있는 이 한 권의 얇은 소설이 가족에 대한 깊이있는 의미를 질문하고 있음을 내가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기에, 이 소설은 내 가슴속에 잘 안착한 듯 보인다. 군더더기나 기름기 없는, 참 깔끔한 소설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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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k 2008-08-08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
또 올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