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기 좋은 날 - 제136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아오야마 나나에 지음, 정유리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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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본 문단의 신인이라 할 수 있는 아오야마 나나에의 『혼자 있기 좋은 날』을 읽었다. 「2007년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이라는 거대한 문구가 관심을 끄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 문학이 쓰나미처럼 한국 도서계를 강타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리 크게 부각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고 하겠다. 다만 무라카미 류와 이시하라 신타로를 위시한 일본 문단의 거물들과 일본 평단, 독서꾼들의 찬연한 찬사의 평이 끊이지 않는 점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아오야마 나나에를 수식하는 이러한 이례적인 현재성이 내가 그녀의 작품을 만날 수 밖에 없는 의무를 결정짓게 만들었다. 

  200 페이지가 채 안되는 하드커버의 앞 표지에 고독한 표정으로 사색에 잠겨 있는 한 여인의 얼굴이 담겨있다. 표지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거꾸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하는 여인의 표정은 우울하면서도 목마르고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마치 누가 나를 알아줬으면 좋겠어, 하는 외로움과 두려움의 내면상태를 보여주려는 듯 양장본의 첫 표지를 넘기는 데 몇 분여의 시간을 소요케 한 묘한 비쥬얼이었다.

  엄마와 단둘이 살다가 갑작스런 엄마의 중국 교환 유학으로 인하여 이별하게 되고 먼 친척 할머니 집에서 얹혀 살게되는 1년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소 무뚝뚝하고 표현을 절제하는 할머니 깅코 씨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스무 살 치즈의 만남, 더욱이 50년이 넘는 상이한 세대의 만남은 불편하고 쉽지 않은 것이었다. 일상의 관계에서 매번 상처를 겪어왔던 치즈는 타인에 대한 겁과 두려움의 각을 세우며 살아가는 아이다. 지하철 플랫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교제한 후지타와의 만남도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두려움이 교차되면서 치즈를 압박한다. 우려했던 이별은 현실 앞에 직면하게 되고 매번 겪었던 일이지만 실연의 아픔은 크고 무겁기만 하다. 

  나이가 갖는 공력은 절대적인 것인가? 70세가 넘는 할머니 깅코 씨의 삶은 언제나 소소하고 평온하다. 사교댄스를 배우기도 하고 남자친구를 사귀기도 한다. 치즈의 일상이 불안정하고 두렵고 냄비 같은 젊은 날의 초상이라면 깅코 씨의 일상은 안정적이고 평온한 인생의 득도 수준이다. 치즈와 깅코 씨와의 소소한 대화는 많은 것을 얘기하지 않는 최대한의 절제미로 표현된다. 발렌타인 데이, 사교댄스, 크리스마스 등의 젊은 날의 소유물이라 여겼던 것에 대한 깅코 할머니의 적극적인 영위와 자기만족은 치즈에게 요상스러운 질투심을 유발하는 동시에 정작 치즈 자신에게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치즈의 소소한 도둑질은 관계의 한 방법으로 묘사된다. 치즈는 깅코 씨의 인형, 호스케 씨의 은단, 후지타의 담배 등 얌채스런 손버릇으로 모은 이것저것들을 자신 만의 신발상자에 보관한다. 신발상자 속의 자잘한 것들은 치즈의 일상을 함께 하는 자들과의 사회성을 간접적으로 충전할 수 있게 한 소중한 보물이자 안식처와 같은 것이다. 치즈는 마지막 깅코 씨의 집을 떠날 때 어떤 물건은 제자리에 돌려 놓고 어떤 것은 자신의 방을 두르고 있던 고양이 사진 액자 뒤로 숨겨 놓는다. 자신의 존재감이 죽지 않도록, 그리고 개성이 상실되지 않기를 원하는 최소한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관계가 주는 아픔과 상처에 번민하며 약한 자로 살아야 했던 치즈.. 깅코 씨의 집에서의 1년여의 관계에 대한 인생수업을 통해 혼자서 회사의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는 버젓한 어른으로의 한 걸음을 내딛는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삶의 기쁨이자 또 다른 도전이다. 데이트를 위해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가던 중 건너편 어린 아이의 소소한 모습이 관찰된다. 신발을 벗고 지하철 창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어린 아이를 엄마가 성가시게 나무라면서 돕고 있다. 간신히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아이의 포니테일을 나부끼는 모습을 바라보는 치즈의 소설 속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치즈는 어린 아이를 관조하면서 바로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시간대를 현재에 통합하고자 했던 것을 아닐까?  

  소설의 각 장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설정하고 있다. 사계절의 풍경과 등장인물의 일상을 오묘한 담채화처럼 그린 묘사, 문체의 절제미, 뚜렷하고 분명한 표현, 인간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문구와 주옥같은 장면. 지하철역과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하는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1년간의 이야기는 한달음의 진도로 완독할 수 있는 집중력을 제공한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 개인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변화되는 것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인간의 절제된 내면을 담백하게 그려낸 이 작품에 나는 평점 4개 반을 부여하는 용단을 보였다. 미래가 없어도 끝이 보여도 어쨌든 시작하는 건 자유다, 라고 외치는 주인공 치즈의 관계에 대한 상처와 치유, 회복을 담담하게 그린 『혼자 있기 좋은 날』을 '혼자 있기 좋은 날'을 즐기는 이들에게 '혼자 있기 좋은 날'에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책장을 덮은 뒤 얼마 전 당뇨로 쓰러진 외할머니를 생각했다. 지난 주말 병문안으로 대전에 다녀왔는데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외손주를 쳐다보는 외할머니의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까지 외할머니는 항상 나를 볼 때마다 10만원을 주셨다. 단 한 번도 거르시지 않았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그 외의 어떤 만남에서든지 언제나 10만원짜리 봉투를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그리고 여느 친척 어르신들과는 달리 어떤 충고나 인생의 조언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내 얘기를 들어주시고 철저히 거기에만 반응하셨다. 그러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시며 대견해하셨고 기뻐하셨다. 외할머니에게 나라는 존재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쁘고 흐뭇한 존재였던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혜안이 부족하여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어떨 때는 수백 마디의 말과 위로보다는 한 번의 웅숭깊은 침묵과 기다림이 더욱 많은 것을 전해줄 때가 있다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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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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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인간은 불가분의 함수관계이다. 문학은 인간에 갈증하고 인간은 문학을 창조한다. 문학은 끊임없이 인간을 탐구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시간인 시대와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인 사회를 관찰하며 조명한다. 마치 X-Ray가 육체의 내부를 촬영하듯, 문학은 X-Ray로 인간의 감정과 이성을 감찰하고, 자기공명검사로 인간의 내면을 단층 단층 샅샅히 파헤친다. 문학의 존재목적이 종국에는 인간이라는 만물의 영장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이러한 함수관계에서 문학은 인간에게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다. 여러가지 문학의 기능 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는 데, 교화적 기능과 쾌락적 기능이 그것이다. 쉽게 말해서 문학은 인간에게 교훈과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정이현의 신작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을 읽었다. 워낙 글을 잘 쓰는 소설가이자, 최근 한국문단에서 부각받고 있는 여류작가이기때문에 그녀의 신작 소설집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출간 이후부터 첫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 온갖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점철되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제 1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고 『타인의 고독』으로 제 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 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한 이력은 그녀가 한국문학의 차세대 작가임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달콤한 나의 도시』는 나와 정이현의 첫만남이었다. 신문연재라는 연속성의 한계에서 완독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뛰어난 현재적 감각과 도시적 삶의 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날카롭고 경쾌한 필치는 꽤 인상적인 것이었다. 책 구입 시 미니북으로 증정되어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다시 한번 읽어볼 계획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번 그녀의 신작 소설집은 『타인의 고독』과 『삼풍백화점』을 위시한 총 10개의 단편소설을 소개하고 있다. 동시대인들의 초상을 전면에 내세우며 현재성이라는 그녀만의 탁월한 시간감각을 녹여놓고 있다. 누구나 한 번 쯤 고민했을 내용들을 도시적이고 현재적인 배경으로 안내한다. 서사의 하나하나가 현실적이다. 마치 일기장을 넘기는 기분으로 도시민들의 일상을 만날 수 있다. 냉소적이고 싸늘하기도 하며, 유머러스한 그녀의 문체는 뛰어난 스토리텔링과 조합되어 읽는 이에게 한달음의 속도로 읽을 수 있는 독서스피드를 지원하고 있다. 

 

  『삼풍백화점』은 가장 뛰어난 단편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그대로 소설 속에 재현해 놓고 있으며 그 시공간 속에 '나'와 친구 R의 일상을 결합시킨다.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친구 R의 죽음은 정작 필요할 때만 돌아보았던 친구에 대한 죄의식을 수면 위로 불러내었다. 그곳을 떠난 뒤에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고 말하는 '나'의 마지막 고백은 계속해서 사라지지 않을 마음 속의 친구 R의 존재감을 암시한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독특하다. 정이현의 소설에서 낯설다 할 수 있는 반전의 반전(?)이 펼쳐지며 섹스리스 부부 사이의 미묘하고 특별한 긴장관계를 날카롭게 그리고 있다. 살인사건의 범인은 소설 속에서 끝내 침묵으로 봉인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부의 일상도 바뀐 것은 없다. 굳이 바뀐 것이 있다면 여자 화자의 사고방식 하나 뿐이다. 지난한 희생의 과정을 거쳐야만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되며 완전한 가정을 이루려면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다, 는 노인들의 충고를 인정하며 반드시 임신을 해야한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의 변화가 가정이라는 소중한 공동체의 파괴를 차단하고 있다.

  『익명의 당신에게』도 소재의 추출이나 접근방식의 독특함에서 『어두워지기 전에』와 맥을 같이 한다. '종합병원 항문외과 새벽 항문 촬영 사건'이라는 독특하고 자극적인 설정을 통해 연애하는 두 남녀의 심리를 그렸다. 남자가 괴로워할 때는 아무것도 캐묻지 말고 무조건 위로해주어라, 라는 남자의 두뇌구조를 꿰뚫는 진리에 가까운 연애법칙이 인용된다. 익명의 당신에게 보내는 연희의 편지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믿음에서 연유한 걸까?, 아님 관용에서 온 걸까? 병원장을 못 만난다면 부원장을, 병원의 모든 보직 교수들을, 아니면 B대학 총장이라도, 국무총리라도, 대통령이라도, 그 누구라도.. 그녀의 용기는 진정한 사랑일까?

  그 외의 단편소설들도 TV 시트콤과 같은 색상으로, 드라마 단막극과 같은 느낌으로 부담없이 읽혀진다. 하지만 가볍지는 않다.

 

  정이현은 대부분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인물을 택한다. 또한 다분히 여성적이다. 여성을,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30대의 젊은 여성들이 그녀의 소설에 열광하는 것도 이러한 정이현 소설의 물리적 특질에서 오는 당연한 인과관계일 것이다. 은희경과의 차이가 여기서 목도된다. 은희경은  남성화자를 많이 택하는 편이다. 은희경은 소설을 쓸 때 방해가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남성화자를 통해 말하려 할 때 객관적인 거리 유지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은희경의 무게감을 생각하면서 정이현의 소설에서 무언가의 결핍을 느낀다면 나만의 생각일까? 아쉬운 부분이다.

 

  모두가 모른 척 해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날카롭고 경쾌하게 그리는 것이 소설가 정이현의 강점이자 매력이다. 동시대인들의 초상을 전면에 배치하며 세태를 읽어가는 뛰어난 감각과 현재성은 당분간 정이현표 브랜드로 굳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문단에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평단과 대중들에게 정이현이라는 소설가는 작금의 한국문학의 위기에 단비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기업이 매년 매출을 증가하여 자기존재를 유지하며 보존하듯이 예술이라는 장르도 한 단계 한 단계씩 발전해야 장수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여기서 문학도 예외일 수 없다. 앞으로 펼쳐질 정이현 문학의 미래가 끊임없이 진보되고 진화되어 서두에서 언급한 문학의 교화적 기능과 쾌락적 기능을 동시에 공급해줄 수 있는 힘 있는 문학으로 서나가길 기대하며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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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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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소설을 읽을 때에는 독서의 흥미가 배가된다. 바로 이 땅, 같은 공간을 차지했던 과거 선조들의 시계에 작가의 상상력을 불어넣은 한국역사소설은 우리것에서 오는 정서적 공감대와 역사의식을 잘 비춰주기 때문이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그랬고, 신경숙의 『리진』이 그랬으며, 황석영의 『바리데기』가 그랬다. 한국을, 한국 소설가에 의한, 한국 독자들을 위한 한국의 역사소설은 언제나 굵직한 깊이로 내게 읽혀졌다.

 

  김경욱이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의 신작 장편소설 『천년의 왕국』을 읽었다. 책을 읽기 전 '천년의 왕국'이라는 제목에서 신라를 떠올렸으나 정작 소설의 배경은 380년 전의 조선이다. 일본으로 가는 길에 배가 표착되어 낯선 땅 조선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간 네덜란드인들의 이야기이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되었던 역사적 사실인 하멜표류기에서 소설의 소재를 삼았다. 하멜에 앞서 1627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들의 기록에 역사는 인색했고 작가는 이방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가난한 상상을 불어넣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김훈의 『남한산성』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문장이 짧고 강렬하게 몰아치는 김훈의 문체와 비슷했고, 시대적 배경 또한 인조반정 이후 타타르(청나라)와의 긴장관계가 펼쳐지고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오욕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45일간의 남한산성에서의 수성을 그리고 있다면 김경욱의 『천년의 왕국』은 벨테브레라는 한 네덜란드인의 1인칭 주인공의 시점으로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을 거쳐 국왕이 교체(효종 즉위)되고 하멜 일행이 도착하기까지의 26년간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조선의 일상에 녹아드는 세 명의 중심인물에 내면적 상상력을 깊이 불어넣었다. 역사의 인색함에 의해 이방인의 내면을 발굴하지 못했기에 복원이 아닌 철저한 창조로 세 인물의 영혼을 완성했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벨테브레의 내면에는 언제나 주님(기독교에서의 예수님)으로 가득차 있다. 조선을 관찰하는 시점에서도, 하루하루의 일상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지향하는 가치에서도 기독교적인 그의 사고는 중요한 기둥으로 서있다. 에보켄은 보다 여유가 넘치는 인물이다. 말하기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며 여자도 좋아하는 긍정 지향적인 인물이다. 또한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도 뛰어나 처음 생활하는 이교도의 나라에서 문화와 언어, 사상과 법도를 넘어선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다. 유머와 조소와 삶의 깊이가 뒤섞인 그의 말과 행동은 벨테브레와 더불어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청년 데니슨은 가장 심각한 인물이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사랑과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독으로 일관한다. 그 고독과 번민의 최절정에서 사신으로 온 타타르 신하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용기를 보이지만 실패로 불발하여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3명의 인물이 각기의 기질과 가치관과 시선을 갖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자 이교도의 나라인 조선을 각기의 방법대로 탐구하는 것이다.

 

  국왕 인조의 자상하고 자애로움이 많이 부각되는 것이 흥미롭다. 김훈의 『남한산성』에서의 인조는 고독과 번민에 빠진 무능력한 왕으로 묘사되었다면, 『천년의 왕국』에서는 자애롭고 관용 있는, 그리고 열정적인 인간미의 소유자로 그려졌다. 신식 대포의 개발에 대한 열정, 두 번의 탈출을 시도한 벨테브레에 대한 관용, 권위와 격식보다 따스한 인간애의 발동 등 김경욱이 묘사한 인조는 자애로운 왕이었다. 동일한 역사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통찰을 발견할 때면 언제나 즐겁고 흥미로움에 취해있는 내 자신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제목 '천년의 왕국'의 의미를 생각했다. 소설의 시대배경 기준, 건국된 지 150년도 되지 않았고, 종국엔 500년만에 생을 마감한 조선이라는 왕국을 생각하면 어찌 천년의 왕국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타타르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에보켄의 마지막 유언은 "선장... 부디... 두려워..."의 완성되지 않은 세 단어였다. 에보켄이 남기려 했던 말은 완성되지 않은 채 영원한 침묵으로 봉인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벨테브레는 깨닫는다. 그리고 에보켄의 죽음을 자신의 영혼의 전쟁의 시작으로 교체한다. 남겨진 자, 즉 벨테브레 자신의 생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며 의지를 불태우는 소설의 마지막은 대체 무엇을 얘기하는 걸까? 머리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여러가지 생각이 일렁인다. 소설 속에서 그의 영혼의 중심으로 일관되게 비춰졌던 주님의 나라를 완성한다는 건가.. 인류 최후 아마게돈의 혼란을 연상시키면서.. 그리고 천년왕국의 건설로 귀결되는 모호한 세상의 마지막을 향한 희망과 몸부림처럼.. 온 세상을 덮는 적이 물러나도 나의 전투는 쉬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볼테브레의 마지막 강렬한 의지와 목적의식의 표출은 책을 덮은 내게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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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왕 이야기 - 양장본
진 에드워드 지음, 허령 옮김 / 예수전도단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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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와서 "가장 감명 깊에 읽은 책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주저없이 답변할 수 있는 준비태세가 되어있다. 『세 왕 이야기』라는 내 인생 최고의 책이 흔들리지 않고 내 중심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 생일 당시 교회 후배의 선물로 처음 접하게 된 이 책은 나에게 신앙, 권위, 인내, 리더쉽, 용기, 겸손에 이르는 굵직한 삶의 본질적 요소들을 비춰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이자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제외하고는 내게 절대 불변의 지혜의 보물로 각인 되어왔던 것이다.

 

  『세 왕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3명의 왕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 두 번째 왕 다윗, 그리고 반역의 왕 압살롬.. 세 왕의 기질과 특성, 그리고 무엇보다 권위에 대한 그들의 상이한 이해와 행동을 보여주는 책이다. 책이 두껍지 않고 어린 아이들도 읽을 수 있는 평이한 문체여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동화라고나 할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종류의 '창'을 만난다. 인류의 아픈 역사의 내면에는 공격성과 이기성으로 중무장한 '창'의 던져짐이 있다. 국가, 가정, 이웃, 학교, 회사, 친구, 동료 등에서도 '창'은 다양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상대를 향해 던져진다. 크게는 국가간의 전쟁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소소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창'의 질주는 인류역사의 한 흐름이 되어 있다. 사랑과 절제, 희생의 인류의 절대가치를 부서뜨리고 도발하는 '창'은 상대를 향해 날라가서 상대의 가장 아픈 곳에 박혀 크고 작은 상처의 흔적을 남기곤 한다. 그리고 '창'을 맞은 상대방은 그 상처에 아파하며 치유와 회복의 번민에 빠져 애통한다.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 이스라엘의 한 남자의 삶에도 날라오는 '창'에 자유롭지 못했다. 그를 시기하고 언제나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던 국왕의 '창'은 언제나 서슬 퍼랬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자신의 권위를 '창'으로 대변하며 '창' 던지는 일에 몰두했다. 왕의 '창' 던지기 제일의 목표였던 다윗은 날라오는 '창'을 감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매우 중요한 관찰이 필요하다. 사울의 '창' 던지기 실력보다 다윗의 '창' 받는 실력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다윗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 날라오는 '창'에 대해 어떠한 비판과 반격을 하지 않았다. '창'을 던지는 자와 던지는 행위에 대한 비판권과 재판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존재에 있다는 진리를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인식과 행동이 종국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고차원적 축복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권위에 대한 다윗의 올바른 이해는 언제나 그의 삶에서 풍성한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해주었다. 사울의 '창'을 피해 도망다닐 때에는 권위의 주인이자 원천인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원수같은 사울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도 모든 결정권을 그분에게 돌려드렸다. 또한 압살롬의 반역의 '창'이 던져질 때도 그는 감내하기만 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수많은 '창'이 자신에게 던져질 때마다 그는 그것을 주워 다시 되던지지 않았다. 그리고 중심을 잃지 않았다. 이 놀랍고 경이로운 다윗의 '창' 받기 실력은 그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자,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사상 초유의 닉네임을 선사받은 주인공이자, 메시야가 그의 직속 혈통에서 오게되는 영광의 계보의 중심에 서 있게된 동기가 되었다.

 

  다시 시공간의 초점을 3,000년이 지난 작금의 우리 자신으로 맞춰보자. 우리는 과연 우리 앞에 놓여진 수많은 권위에 대해 어떤 행동들을 취했던가? 날아오는 '창'을 방패로 막기에 급급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창'의 주인을 비난하는 동시에 죄를 논하는 재판관으로 서있지 않았는가? 어쩌면 내 자신이 '창' 던지는 자로서 상대방의 마음과 영혼을 유린하는 주체가 아니었던가? 다윗의 삶이 보여준 권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참된 권위에 대한 철저한 순종은 인간의 유한성과 오류, 불완전한 속성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지를 알려주는 지혜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하지 못하는 것. 내가 해야하는 것과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몰이해는 자신이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자신의 주권영역이 아닌 곳에도 손을 뻗쳐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 나아가 본질과 비본질의 우선순위의 헷갈림 속에서 영혼이 황폐해지며 패배자로 추락하는 삶을 살게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겸손한 자신감만이 가능을 입증할 수 있다. 다윗은 이미 3,000년 전에 이 이치를 깨달았고 현재의 감정보다 미래의 축복을 기대하는 믿음이 있었기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창'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권위에 대한 득도의 안목을 가져 를 올려다 보는 동시에 '창' 앞에서는 겸허할 수 있는 그릇이 되기를.. 그리고 내면의 상처와 아픔을 되돌아올 미래의 축복과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승리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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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 터키편, End of Pacific Series
오소희 지음 / 에이지21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어른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바라보는 대상의 차이는 물론이요,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도 확연하게 구별된다. 아이는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어른들은 나름대로의 때묻고 주관화된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만 아이들은 객관적이며 덜 변질된 순수한 시선으로 세상을 천착한다. 그리고 관찰하는 대상에 대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다. 어른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의지를 함양한다 하더라도 생래적으로 비본질보다 본질을 우선하는 득도의 눈을 가진 어린 아이를 따라가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터키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겪은 이야기를 담은 오소희씨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를 읽었다. 언제나 여행에세이를 만날 때는 기대와 흥분의 색깔이 특별나다. 저자가 직접 보고 경험하고 깨달았던 당시의 시공간속으로 나 자신이 침투되는 느낌을 기대하면서 흥분한다. 거기에다 29년의 인생을 살면서 이 자그만 반도를 넘어서지 못했던 개인적 콤플렉스가 뒤섞여 엄청난 앎과 지혜와 도전의 덩어리로 내게 밀려오곤 한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도 이런 내 기대감을 만족감으로 승화시키는 데 일체의 부족함이 없는 소중한 양식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생소한 나라 터키라는 공간에 저자가 아들과 함께 여행했던 3년 전의 한달동안의 시간속으로 나를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이자 강점은 관찰자의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함께 여행했던 세 살배기 아들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의 관찰자적 시선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다. 그 두 가지 시선이 이 책의 흐름을 정리해 나가고 있다. 이미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어른과 아이의 일반적인 시선 프레임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저자는 터키라는 관찰대상을 한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관찰하되 자신이 볼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아이의 눈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비록 단순한 시선이지만 어린 아이의 순수한 관찰을 통하여 여행이라는 인생수업이 주는 다양한 앎과 지혜를 1.5배 이상의 학습효과로 얻어 가고 있다.
  아이는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내가 그림을 볼 때 개미를 보고, 해협의 별장을 볼 때 그 옆을 지나가는 기차를 본다. 때로는 같은 것을 보고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아이는 나와 다른 것을 '선택'한다. 나는 그 사실을 여행 초반부에 알게 되어 기뻤다. 그것은 곧 '엄마, 나는 나름대로 여행을 즐기고 있어요.' 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는 마치 선물처럼,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아이가 그 옛날 술탄의 삶에 관심이 없듯 오늘 구석에 핀 들꽃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생생하게 현재를 좇는 아이의 눈은 죽은 자의 흔적을 따라가느라 치열하게 피어나는 생의 에너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런 일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일어났따. 아이의 보폭은 좁고 일정은 늘어졌지만 아이는 그렇게 걷지 않았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것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작고 조용하고 낡은 것들이었다.
- 본문 중에서


  터키라는 나라는 어떤 곳인가? 위풍당당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후예이자 한국전쟁 당시 전투병을 파병하여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던 우정의 나라.. 2002년 한일월드컵때 그 우정을 재확인하려는 듯 3,4위전에서 보여준 멋진 경기 외에는 별다른 배경지식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서 터키의 남다른 매력을 알 수 있었는데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권이며 그 처절했던 모슬렘과 기독교와의 오랜 전쟁의 중심지이자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대륙의 정 중앙에 위치한 특이한 유럽국가라는 상식수준의 정보는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정작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터키사람들이 느리고 순진하며 친절한 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매우 소소한 일상이 펼쳐지는 평범함 속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나라라는 점이다. 터키인들은 노동하는 하루 열 시간이 비즈니스 아워가 아니라, 그냥 삶의 일부로 여기며 살아간다고 한다. 비지니스 아워를 살 때는 경제적 행위만을 극대화하지만 삶을 살 때에는 모든 것이 그 안에서 공평해진다는 저자의 언급대로 여유와 안정감의 미학이 있는 터키인들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저자는 그 어떤 곳보다 올림포스라는 곳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톱카스 궁전, 블루 모스크, 그랑바자르, 아야 소피아 등으로 대변되는 이스탄불의 공인된 유명세보다는 올림포스에서의 소소한 일상과 사람들과의 만남에 더 큰 여행의 기쁨을 발산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올림포스 이전의 여행은 올림포스로 밀려가는 것처럼 보이고 그 이후는 다시 올림포스로 회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책의 1/3 이상의 분량이 올림포스에서의 생활을 다루고 있다. 저자 자신도 올림포스를 떠난 이후 자기 안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결락되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없어질 정도로 자신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올림포스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행의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정도다. 그 어떤 문화재나 건축물, 관광지보다 올림포스가 선물한 잔잔한 인간미와 드넓게 펼쳐진 지중해, 다양한 인간상들과의 호흡이 훨씬 더 소중했던 것이다. 이는 저자 자신이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는 여행의 정의이자 참맛을 바로 올림포스에서 웅숭깊게 느꼈기 때문이리라.

  나는 이 책이 여행에세이로 구분된다는 것이 다소의 불만이다. 물론 도서의 물리적인 구분에 따른다면 응당 세계여행기로 불리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이 제공하는 화학적인 가치를 목도할 때면 무리하게나마 다른 구분 또한 가능하다. 아들의 여행 관찰 시점을 시종일관 조명하는 동시에 아이의 멋있는 미래를 소망하는 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야기, 즉 러브스토리로 말이다.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후 저자가 고백한 아들의 현재의 모습과 미래를 향한 설렌 기대감은 너무 아름답게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아이가 세돌 무렵에 처절하게 배낭여행을 했다고 해서 제 친구들과 부쩍 다르게 행동하느냐 하면 그건 물론 아니다. 토마스에 열광하고, 사소한 일에 울고 웃으며 정확히 제 나이에 기대되는 행동반경을 유지한다. 다만, 몇 가지 사소한 차이점은 존재한다.
  처음 어린이집에 보냈을 때, 그곳에 있는 선생님이 조금 놀라운 듯이 내게 말했다.
  "중빈이가 통이 참 커요. 다른 아이들은 소꿉놀이할 때 자동차 타고 이마트 갔다 온다고 하는데, 중빈이는 비행기 타고 베트남에 다녀오겠다고 해요."
  아이는 이 세상에 한 가지 인종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 한 가지 언어, 한 나라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숙지하고 있다. '나'라는 것 외에 '너'가 있는 '우리'를 인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경계를 설정하는 일인 동시에 그 경계 너머를 꿈꾸는 일이다.

 

  그렇다. 한 사람의 멋진 미래는 IQ가 결정하지 못한다. 의지력이나 집념도 아니다. 부모의 교육열은 더더욱 아니다. 우주라는 연극무대에서 배우로서의 개런티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항아리의 크기와 정확하게 비례한다. 크고 단단한 항아리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이 이 세상의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항아리는커녕 종제기와 같은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다시말해서 인류는 극히 소수의 항아리들에 의해 절대다수의 종제기들이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큰 항아리 안에 '나'를 품고 '너'를 품고 '우리'를 품고, 더 나아가 자연과 이 지구와 온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질 때에 바로 거기에 희망이 있고 천국이 있다. 이 땅의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영어 단어나 피아노 수업으로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항아리의 가치를 깨달아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을 삶은 물론이요, 자신들이 만든 작은 천국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위대한 항아리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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