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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기 좋은 날 - 제136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아오야마 나나에 지음, 정유리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 문단의 신인이라 할 수 있는 아오야마 나나에의 『혼자 있기 좋은 날』을 읽었다. 「2007년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이라는 거대한 문구가 관심을 끄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 문학이 쓰나미처럼 한국 도서계를 강타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리 크게 부각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고 하겠다. 다만 무라카미 류와 이시하라 신타로를 위시한 일본 문단의 거물들과 일본 평단, 독서꾼들의 찬연한 찬사의 평이 끊이지 않는 점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아오야마 나나에를 수식하는 이러한 이례적인 현재성이 내가 그녀의 작품을 만날 수 밖에 없는 의무를 결정짓게 만들었다.
200 페이지가 채 안되는 하드커버의 앞 표지에 고독한 표정으로 사색에 잠겨 있는 한 여인의 얼굴이 담겨있다. 표지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거꾸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하는 여인의 표정은 우울하면서도 목마르고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마치 누가 나를 알아줬으면 좋겠어, 하는 외로움과 두려움의 내면상태를 보여주려는 듯 양장본의 첫 표지를 넘기는 데 몇 분여의 시간을 소요케 한 묘한 비쥬얼이었다.
엄마와 단둘이 살다가 갑작스런 엄마의 중국 교환 유학으로 인하여 이별하게 되고 먼 친척 할머니 집에서 얹혀 살게되는 1년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소 무뚝뚝하고 표현을 절제하는 할머니 깅코 씨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스무 살 치즈의 만남, 더욱이 50년이 넘는 상이한 세대의 만남은 불편하고 쉽지 않은 것이었다. 일상의 관계에서 매번 상처를 겪어왔던 치즈는 타인에 대한 겁과 두려움의 각을 세우며 살아가는 아이다. 지하철 플랫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교제한 후지타와의 만남도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두려움이 교차되면서 치즈를 압박한다. 우려했던 이별은 현실 앞에 직면하게 되고 매번 겪었던 일이지만 실연의 아픔은 크고 무겁기만 하다.
나이가 갖는 공력은 절대적인 것인가? 70세가 넘는 할머니 깅코 씨의 삶은 언제나 소소하고 평온하다. 사교댄스를 배우기도 하고 남자친구를 사귀기도 한다. 치즈의 일상이 불안정하고 두렵고 냄비 같은 젊은 날의 초상이라면 깅코 씨의 일상은 안정적이고 평온한 인생의 득도 수준이다. 치즈와 깅코 씨와의 소소한 대화는 많은 것을 얘기하지 않는 최대한의 절제미로 표현된다. 발렌타인 데이, 사교댄스, 크리스마스 등의 젊은 날의 소유물이라 여겼던 것에 대한 깅코 할머니의 적극적인 영위와 자기만족은 치즈에게 요상스러운 질투심을 유발하는 동시에 정작 치즈 자신에게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치즈의 소소한 도둑질은 관계의 한 방법으로 묘사된다. 치즈는 깅코 씨의 인형, 호스케 씨의 은단, 후지타의 담배 등 얌채스런 손버릇으로 모은 이것저것들을 자신 만의 신발상자에 보관한다. 신발상자 속의 자잘한 것들은 치즈의 일상을 함께 하는 자들과의 사회성을 간접적으로 충전할 수 있게 한 소중한 보물이자 안식처와 같은 것이다. 치즈는 마지막 깅코 씨의 집을 떠날 때 어떤 물건은 제자리에 돌려 놓고 어떤 것은 자신의 방을 두르고 있던 고양이 사진 액자 뒤로 숨겨 놓는다. 자신의 존재감이 죽지 않도록, 그리고 개성이 상실되지 않기를 원하는 최소한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관계가 주는 아픔과 상처에 번민하며 약한 자로 살아야 했던 치즈.. 깅코 씨의 집에서의 1년여의 관계에 대한 인생수업을 통해 혼자서 회사의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는 버젓한 어른으로의 한 걸음을 내딛는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삶의 기쁨이자 또 다른 도전이다. 데이트를 위해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가던 중 건너편 어린 아이의 소소한 모습이 관찰된다. 신발을 벗고 지하철 창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어린 아이를 엄마가 성가시게 나무라면서 돕고 있다. 간신히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아이의 포니테일을 나부끼는 모습을 바라보는 치즈의 소설 속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치즈는 어린 아이를 관조하면서 바로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시간대를 현재에 통합하고자 했던 것을 아닐까?
소설의 각 장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설정하고 있다. 사계절의 풍경과 등장인물의 일상을 오묘한 담채화처럼 그린 묘사, 문체의 절제미, 뚜렷하고 분명한 표현, 인간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문구와 주옥같은 장면. 지하철역과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하는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1년간의 이야기는 한달음의 진도로 완독할 수 있는 집중력을 제공한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 개인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변화되는 것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인간의 절제된 내면을 담백하게 그려낸 이 작품에 나는 평점 4개 반을 부여하는 용단을 보였다. 미래가 없어도 끝이 보여도 어쨌든 시작하는 건 자유다, 라고 외치는 주인공 치즈의 관계에 대한 상처와 치유, 회복을 담담하게 그린 『혼자 있기 좋은 날』을 '혼자 있기 좋은 날'을 즐기는 이들에게 '혼자 있기 좋은 날'에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책장을 덮은 뒤 얼마 전 당뇨로 쓰러진 외할머니를 생각했다. 지난 주말 병문안으로 대전에 다녀왔는데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외손주를 쳐다보는 외할머니의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까지 외할머니는 항상 나를 볼 때마다 10만원을 주셨다. 단 한 번도 거르시지 않았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그 외의 어떤 만남에서든지 언제나 10만원짜리 봉투를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그리고 여느 친척 어르신들과는 달리 어떤 충고나 인생의 조언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내 얘기를 들어주시고 철저히 거기에만 반응하셨다. 그러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시며 대견해하셨고 기뻐하셨다. 외할머니에게 나라는 존재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쁘고 흐뭇한 존재였던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혜안이 부족하여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어떨 때는 수백 마디의 말과 위로보다는 한 번의 웅숭깊은 침묵과 기다림이 더욱 많은 것을 전해줄 때가 있다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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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다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