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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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소설을 읽을 때에는 독서의 흥미가 배가된다. 바로 이 땅, 같은 공간을 차지했던 과거 선조들의 시계에 작가의 상상력을 불어넣은 한국역사소설은 우리것에서 오는 정서적 공감대와 역사의식을 잘 비춰주기 때문이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그랬고, 신경숙의 『리진』이 그랬으며, 황석영의 『바리데기』가 그랬다. 한국을, 한국 소설가에 의한, 한국 독자들을 위한 한국의 역사소설은 언제나 굵직한 깊이로 내게 읽혀졌다.

 

  김경욱이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의 신작 장편소설 『천년의 왕국』을 읽었다. 책을 읽기 전 '천년의 왕국'이라는 제목에서 신라를 떠올렸으나 정작 소설의 배경은 380년 전의 조선이다. 일본으로 가는 길에 배가 표착되어 낯선 땅 조선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간 네덜란드인들의 이야기이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되었던 역사적 사실인 하멜표류기에서 소설의 소재를 삼았다. 하멜에 앞서 1627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들의 기록에 역사는 인색했고 작가는 이방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가난한 상상을 불어넣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김훈의 『남한산성』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문장이 짧고 강렬하게 몰아치는 김훈의 문체와 비슷했고, 시대적 배경 또한 인조반정 이후 타타르(청나라)와의 긴장관계가 펼쳐지고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오욕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45일간의 남한산성에서의 수성을 그리고 있다면 김경욱의 『천년의 왕국』은 벨테브레라는 한 네덜란드인의 1인칭 주인공의 시점으로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을 거쳐 국왕이 교체(효종 즉위)되고 하멜 일행이 도착하기까지의 26년간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조선의 일상에 녹아드는 세 명의 중심인물에 내면적 상상력을 깊이 불어넣었다. 역사의 인색함에 의해 이방인의 내면을 발굴하지 못했기에 복원이 아닌 철저한 창조로 세 인물의 영혼을 완성했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벨테브레의 내면에는 언제나 주님(기독교에서의 예수님)으로 가득차 있다. 조선을 관찰하는 시점에서도, 하루하루의 일상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지향하는 가치에서도 기독교적인 그의 사고는 중요한 기둥으로 서있다. 에보켄은 보다 여유가 넘치는 인물이다. 말하기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며 여자도 좋아하는 긍정 지향적인 인물이다. 또한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도 뛰어나 처음 생활하는 이교도의 나라에서 문화와 언어, 사상과 법도를 넘어선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다. 유머와 조소와 삶의 깊이가 뒤섞인 그의 말과 행동은 벨테브레와 더불어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청년 데니슨은 가장 심각한 인물이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사랑과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독으로 일관한다. 그 고독과 번민의 최절정에서 사신으로 온 타타르 신하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용기를 보이지만 실패로 불발하여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3명의 인물이 각기의 기질과 가치관과 시선을 갖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자 이교도의 나라인 조선을 각기의 방법대로 탐구하는 것이다.

 

  국왕 인조의 자상하고 자애로움이 많이 부각되는 것이 흥미롭다. 김훈의 『남한산성』에서의 인조는 고독과 번민에 빠진 무능력한 왕으로 묘사되었다면, 『천년의 왕국』에서는 자애롭고 관용 있는, 그리고 열정적인 인간미의 소유자로 그려졌다. 신식 대포의 개발에 대한 열정, 두 번의 탈출을 시도한 벨테브레에 대한 관용, 권위와 격식보다 따스한 인간애의 발동 등 김경욱이 묘사한 인조는 자애로운 왕이었다. 동일한 역사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통찰을 발견할 때면 언제나 즐겁고 흥미로움에 취해있는 내 자신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제목 '천년의 왕국'의 의미를 생각했다. 소설의 시대배경 기준, 건국된 지 150년도 되지 않았고, 종국엔 500년만에 생을 마감한 조선이라는 왕국을 생각하면 어찌 천년의 왕국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타타르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에보켄의 마지막 유언은 "선장... 부디... 두려워..."의 완성되지 않은 세 단어였다. 에보켄이 남기려 했던 말은 완성되지 않은 채 영원한 침묵으로 봉인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벨테브레는 깨닫는다. 그리고 에보켄의 죽음을 자신의 영혼의 전쟁의 시작으로 교체한다. 남겨진 자, 즉 벨테브레 자신의 생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며 의지를 불태우는 소설의 마지막은 대체 무엇을 얘기하는 걸까? 머리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여러가지 생각이 일렁인다. 소설 속에서 그의 영혼의 중심으로 일관되게 비춰졌던 주님의 나라를 완성한다는 건가.. 인류 최후 아마게돈의 혼란을 연상시키면서.. 그리고 천년왕국의 건설로 귀결되는 모호한 세상의 마지막을 향한 희망과 몸부림처럼.. 온 세상을 덮는 적이 물러나도 나의 전투는 쉬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볼테브레의 마지막 강렬한 의지와 목적의식의 표출은 책을 덮은 내게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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