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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 터키편, End of Pacific Series
오소희 지음 / 에이지21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어른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바라보는 대상의 차이는 물론이요,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도 확연하게 구별된다. 아이는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어른들은 나름대로의 때묻고 주관화된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만 아이들은 객관적이며 덜 변질된 순수한 시선으로 세상을 천착한다. 그리고 관찰하는 대상에 대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다. 어른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의지를 함양한다 하더라도 생래적으로 비본질보다 본질을 우선하는 득도의 눈을 가진 어린 아이를 따라가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터키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겪은 이야기를 담은 오소희씨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를 읽었다. 언제나 여행에세이를 만날 때는 기대와 흥분의 색깔이 특별나다. 저자가 직접 보고 경험하고 깨달았던 당시의 시공간속으로 나 자신이 침투되는 느낌을 기대하면서 흥분한다. 거기에다 29년의 인생을 살면서 이 자그만 반도를 넘어서지 못했던 개인적 콤플렉스가 뒤섞여 엄청난 앎과 지혜와 도전의 덩어리로 내게 밀려오곤 한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도 이런 내 기대감을 만족감으로 승화시키는 데 일체의 부족함이 없는 소중한 양식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생소한 나라 터키라는 공간에 저자가 아들과 함께 여행했던 3년 전의 한달동안의 시간속으로 나를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이자 강점은 관찰자의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함께 여행했던 세 살배기 아들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의 관찰자적 시선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다. 그 두 가지 시선이 이 책의 흐름을 정리해 나가고 있다. 이미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어른과 아이의 일반적인 시선 프레임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저자는 터키라는 관찰대상을 한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관찰하되 자신이 볼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아이의 눈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비록 단순한 시선이지만 어린 아이의 순수한 관찰을 통하여 여행이라는 인생수업이 주는 다양한 앎과 지혜를 1.5배 이상의 학습효과로 얻어 가고 있다.
아이는 아이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내가 그림을 볼 때 개미를 보고, 해협의 별장을 볼 때 그 옆을 지나가는 기차를 본다. 때로는 같은 것을 보고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아이는 나와 다른 것을 '선택'한다. 나는 그 사실을 여행 초반부에 알게 되어 기뻤다. 그것은 곧 '엄마, 나는 나름대로 여행을 즐기고 있어요.' 하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는 마치 선물처럼,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아이가 그 옛날 술탄의 삶에 관심이 없듯 오늘 구석에 핀 들꽃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생생하게 현재를 좇는 아이의 눈은 죽은 자의 흔적을 따라가느라 치열하게 피어나는 생의 에너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런 일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일어났따. 아이의 보폭은 좁고 일정은 늘어졌지만 아이는 그렇게 걷지 않았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것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작고 조용하고 낡은 것들이었다.
- 본문 중에서
터키라는 나라는 어떤 곳인가? 위풍당당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후예이자 한국전쟁 당시 전투병을 파병하여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던 우정의 나라.. 2002년 한일월드컵때 그 우정을 재확인하려는 듯 3,4위전에서 보여준 멋진 경기 외에는 별다른 배경지식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서 터키의 남다른 매력을 알 수 있었는데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권이며 그 처절했던 모슬렘과 기독교와의 오랜 전쟁의 중심지이자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대륙의 정 중앙에 위치한 특이한 유럽국가라는 상식수준의 정보는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정작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터키사람들이 느리고 순진하며 친절한 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매우 소소한 일상이 펼쳐지는 평범함 속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나라라는 점이다. 터키인들은 노동하는 하루 열 시간이 비즈니스 아워가 아니라, 그냥 삶의 일부로 여기며 살아간다고 한다. 비지니스 아워를 살 때는 경제적 행위만을 극대화하지만 삶을 살 때에는 모든 것이 그 안에서 공평해진다는 저자의 언급대로 여유와 안정감의 미학이 있는 터키인들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저자는 그 어떤 곳보다 올림포스라는 곳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톱카스 궁전, 블루 모스크, 그랑바자르, 아야 소피아 등으로 대변되는 이스탄불의 공인된 유명세보다는 올림포스에서의 소소한 일상과 사람들과의 만남에 더 큰 여행의 기쁨을 발산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올림포스 이전의 여행은 올림포스로 밀려가는 것처럼 보이고 그 이후는 다시 올림포스로 회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책의 1/3 이상의 분량이 올림포스에서의 생활을 다루고 있다. 저자 자신도 올림포스를 떠난 이후 자기 안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결락되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없어질 정도로 자신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올림포스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행의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정도다. 그 어떤 문화재나 건축물, 관광지보다 올림포스가 선물한 잔잔한 인간미와 드넓게 펼쳐진 지중해, 다양한 인간상들과의 호흡이 훨씬 더 소중했던 것이다. 이는 저자 자신이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는 여행의 정의이자 참맛을 바로 올림포스에서 웅숭깊게 느꼈기 때문이리라.
나는 이 책이 여행에세이로 구분된다는 것이 다소의 불만이다. 물론 도서의 물리적인 구분에 따른다면 응당 세계여행기로 불리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이 제공하는 화학적인 가치를 목도할 때면 무리하게나마 다른 구분 또한 가능하다. 아들의 여행 관찰 시점을 시종일관 조명하는 동시에 아이의 멋있는 미래를 소망하는 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야기, 즉 러브스토리로 말이다.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후 저자가 고백한 아들의 현재의 모습과 미래를 향한 설렌 기대감은 너무 아름답게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아이가 세돌 무렵에 처절하게 배낭여행을 했다고 해서 제 친구들과 부쩍 다르게 행동하느냐 하면 그건 물론 아니다. 토마스에 열광하고, 사소한 일에 울고 웃으며 정확히 제 나이에 기대되는 행동반경을 유지한다. 다만, 몇 가지 사소한 차이점은 존재한다.
처음 어린이집에 보냈을 때, 그곳에 있는 선생님이 조금 놀라운 듯이 내게 말했다.
"중빈이가 통이 참 커요. 다른 아이들은 소꿉놀이할 때 자동차 타고 이마트 갔다 온다고 하는데, 중빈이는 비행기 타고 베트남에 다녀오겠다고 해요."
아이는 이 세상에 한 가지 인종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 한 가지 언어, 한 나라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숙지하고 있다. '나'라는 것 외에 '너'가 있는 '우리'를 인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경계를 설정하는 일인 동시에 그 경계 너머를 꿈꾸는 일이다.
그렇다. 한 사람의 멋진 미래는 IQ가 결정하지 못한다. 의지력이나 집념도 아니다. 부모의 교육열은 더더욱 아니다. 우주라는 연극무대에서 배우로서의 개런티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항아리의 크기와 정확하게 비례한다. 크고 단단한 항아리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이 이 세상의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항아리는커녕 종제기와 같은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다시말해서 인류는 극히 소수의 항아리들에 의해 절대다수의 종제기들이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큰 항아리 안에 '나'를 품고 '너'를 품고 '우리'를 품고, 더 나아가 자연과 이 지구와 온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질 때에 바로 거기에 희망이 있고 천국이 있다. 이 땅의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영어 단어나 피아노 수업으로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항아리의 가치를 깨달아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을 삶은 물론이요, 자신들이 만든 작은 천국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위대한 항아리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