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상에 관한 이런저런 상념을 두서없이 남긴다.

1.  19대 대통령 취임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시의성 때문인지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나라의 진보주의 담론을 대중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신임 대통령에게 국민들은 녹록지 않은 기대를 보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나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진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꽉 막힌 보수꼴통인 내가 그의 정책과 이념을 지지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취임 초기의 여러 신선한 모습에 박수를 아끼고 싶지는 않다. 철학과 진영이 다르다고 해서 잘한 것에 대해 무조건 비판하려는 태도는 부당하다. 지지 여부를 떠나 지금은 힘을 실어주고 격려해줄 때다. 부디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2. 이기주 <언어의 온도>
   이기주 작가의 에세이 <언어의 온도>를 읽고 있다. 베스트셀러 1위에서 쉽사리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눈에 띄는 신작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작가 특유의 따뜻한 위로의 문장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외연을 계속해서 확대해가고 있는 듯하다. 가벼운 맥락의 힐링서적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이기주의 에세이는 신선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최근 말과 글로 인해 상처와 권태를 가진 내 자신의 현재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나의 한계를 유독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나 자신을 비워야 할 때다. 이기주의 말대로, 비우는 행위는 뭔가를 덜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움은 자신을 내려놓은 것이며 자기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3. 책 추천
   아끼는 교회 후배가 연애와 결혼을 준비하며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간만에 서재를 훑었다. 책장 빼곡하게 들어선 책들을 살피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사랑을 책임진다는 것.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 이것들은 그야말로 어렵고 험난한 길이다. 추할 때도 있고 고독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기적의 길이기도 하다. 이 고차함수의 길을 묵묵하게 관통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삶과 사랑과 사람은 동의어'라는 진리에 자신의 현존을 맡길 수 있게 된다. 부디 후배녀석이 뜨겁게 사랑하며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4. 육아
   최근 둘째를 많이 혼냈다. 둘째 특유의 심통기질이 최극단의 지점에 도달한 듯하다. 엄마와도 매일 전쟁을 치른다. 훈육은 엄마의 영역이지만 가끔 아이가 도를 넘어설 때에는 참지 못하고 개입하곤 한다. 인내가 부족했다. 부끄럽다. 물론 두 딸이 너무 예쁘다. 하지만 어떨 때는 한없이 밉기도 하다. 아이는 정말 내 맘대로 크지 않는다. 육아와 훈육은 부모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이미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현실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난 아직 멀었다. 부족한 아빠다.

5. 구분선
   최근 객관과 주관의 철학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사실과 주관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설정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자기만의 주관과 견해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 자체를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명확한 사실을 자신의 주관적 구성물로 대체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몹시 불편하다. 그들은 사실에 관한 명확한 텍스트를 제시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 식의 '악의 평범성'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다. 우리 주변 곳곳에 내밀한 방식으로 숨어 있다.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기각한 논거는 바로 대전제의 오류였다. 대전제가 잘못되면 과정과 결론은 공히 거짓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다양한 건 좋은 것이다. 다양성에 대한 관용은 우리사회가 밝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분선'을 인정하지 않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에릭 홉스봄의 말대로 사실과 허구를 가르는 명백한 구분선은 존재한다. 개인이 분출하는 모든 형태의 다양성도 바로 이 구분선 위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의견은 자유롭되 사실은 신성한 것이다. 고민은, 그 구분선을 지적하는 순간 관계의 균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부분이다.

6. 진정한 남자
   "진정한 남자는 열등감을 갖지 않습니다" 라디오에서 전여옥 작가의 말이 흘러나온다. 정치인은 정치를 그만둘 때 비로소 철이 드는 것 같다. 전여옥도 그렇고 유시민도 그렇고 현실정치를 그만두고 작가라는 지식인의 본업으로 복귀하면서 내공과 매력을 더욱 찬연하게 뿜어내는 듯하다. 한때 거침없는 독설로 주변에 생채기를 많이 남긴 전여옥의 말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인 명언이다. 그렇다. 열등감은 남자의 본성과 양립하지 않는다. 결코 함께 설 수 없다. 형편없는 남자만이 열등감을 가진다. 남자는, 아니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열등하지 않다.

7. 고전 원서
   외국고전을 읽다 보면 작품과 문장이 너무 좋아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우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원서로 읽고 싶은 욕망이 샘솟음치는 것이다. 대표적 언어가 독일어와 러시아어다. 나에게 독일은 괴테의 나라고 러시아는 톨스토이의 나라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독일어 원서로 <안나 카레리나>를 러시아 원서로 읽을 수 있다면, 딱 한 번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 인간의 타락이여. 바벨탑의 비극이여. 나의 무지함이여. 천성의 게으름이여.

8. 인간의 품격
   "품질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 문화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말이다. 이 말을 인간에게 적용해서 다음과 같이 패러디해볼 수 있겠다. "인격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 그렇다. 사람의 품격이란, 과거와 오늘이 없고 보수와 진보가 없다. 인격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훌륭한 인격은 신(神)을 닮아가는 거룩한 여정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거추장스러운 형용수사로 정의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생이란, 선하고 겸손하게,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다.

9. 독서 권태
   요새 들어서 책읽기에 흥미를 잃고 있다. 책읽기에 권태가 생기니 자연스럽게 글쓰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간 많은 책을 읽어왔다고 자부하지만 독서를 통해 얻는 앎과 지혜는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지식이 있다. 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깎이고 떨어져 나가는 지식도 많다. 나이가 들수록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는 깨달음에 봉착하곤 한다. 그럴수록 책더미에서 해방되는 것이 참 지혜를 알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과 나 자신 사이의 적절한 긴장관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책과 지식을 떠나 사람과 신앙을 돌아보자.

  
   삶은 고되지만 참으로 역동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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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서평은 영화 <오두막> 개봉을 기념해 소설을 다시 읽은 후 과거에 올린 서평을 수정 편집해서 쓴 것임을 밝힌다. 소설의 내용과 메시지를 감안할 때 전적으로 기독교 관점의 서평일 수밖에 없다. 읽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길 바란다.

 

   하나님을 안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여기서 '안다'의 의미는 인격적인 교제까지를 포함한다. 내가 언급하는 '하나님'이라 함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즉 삼위일체의 신神을 말한다. 여섯 살 때 교회에 속해 있는 유치원에 다니면서 하나님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그후로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 또한 서리집사의 직분으로 교회에서 이런저런 봉사와 헌신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해 완벽한 인식이 가능하겠는가. 하나님은 온전한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성과 절대성을 실존 자체에서 본인 스스로 내재하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력 부족은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세계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지금 이 순간 고민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나는 한 가지 뚜렷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질문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인간의 행복을 원하시는 사랑의 신이라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악한 사람이 승리하고 선한 사람이 패배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발생하는 곳이다. 선과 승리, 악과 패배 사이의 방정식이 정방향이 아니라 역방향으로도 굴곡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사회 곳곳에서 엄연하고 다양하게 일어나는 불가해하기만 한 '불공평' 혹은 '부정의'라는 테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 신앙을 흔들어 왔는지 모른다. 선의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왜 선하게 사는 사람이 핍박을 받고 악하게 사는 사람이 승리를 한단 말인가. 이게 과연 공의의 하나님과 부합할 수 있는 일인가. 깊은 사념이 내 신앙을, 아니 어쩌면 우리 세계의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도전을 가해온 것이 사실이다.

   소설 『오두막』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당신은 어디 계신가요,라는 강렬한 문장을 띠지로 두르고 있는 이 소설은 악과 양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을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작가 윌리엄 폴 영(이하 '윌리')은 자신의 첫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노련한 필력으로 개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소설은 윌리가 자신의 친구인 매켄지 앨런 필립스(이하 '맥')의 고백을 대필해나가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맥의 막내딸 미시가 캠핑장에서 유괴되어 살해된 사건을 통해 맥이 겪는 슬픔과 분노, 기적과 회복,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맥이 딸의 죽음을 현실적으로 확인한 '오두막'이라는 공간은 맥의 '거대한 슬픔'을 완전한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 치환적 시공간이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결국 이 소설의 제목 '오두막'의 상징성을 내밀하면서도 함축적이게 하는 요인으로 드러난다.

   맥이 시각적으로 목도한 하나님의 형상은 기존의 인간적 상상력을 전복한다. 성부 파파는 흑인 여자의 모습으로, 예수는 중동계 남자의 모습으로, 성령 사라유는 아시아계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왠지 수염이 있고 연세가 있으며 백인의 형상을 띨 것이라는 쓸 데 없는 인간의 과도한 상상력에 조소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3차원 과학에서 조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불가한 존재다. 단 우리 삶 곳곳에 각기 다양한 의도와 모습으로 역사하시며 섭리하실 뿐이다.

   소설의 간절한 메시지를 단순화하자. 이 소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성人性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 관계성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밀도감 있게 접근한다. 주인공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인간 형상들은 하나님의 인성을 아주 잘 보여준다. 제도와 규칙이 아닌 관계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과 호흡하려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야기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상처받은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위로를 건네려는 하나님의 수고를 '오두막'이라는 표상의 시공간적 장치를 통해 작가는 아름답게 녹여놓는다.

   작가는 하나님의 존재성을 삼위의 신으로 완벽하게 소개한다.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파파, 예수, 사라유는 그대로 성부, 성자聖子, 성령의 하나님과 연결된다.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인 하나님 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의를 끌어내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길 원하는 신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게 풀이한다. 오두막에는 삼위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셨다. 서로 토의하고 기도하시며 맥의 구원을 성취시키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요함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선연히 구분되는 고유특질을 드러낸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인간이 먼저 신을 찾아나섰다. 오직 기독교만 신이 먼저 인간을 찾았다. 갈대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먼저 선택하셨고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을 먼저 찾아나섰다. 무엇보다 신의 차원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직접 들어오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요한 인간 쫓기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사상이 종내 '사랑'이라는 거대한 선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고결함을 이끌어낸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다.

   오두막에서 맥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에 눈물을 짓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밀하고 실재적이며 파워풀하다. 악의 승리는 하나님 역사의 사실성에 대한 증거 불충분 요건이 아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악은 선의 결핍일 뿐이다. 하나님은 분명 맥의 딸을 살릴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분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 하셨다. 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는 이 아이러니한 하나님의 고민은 철저히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인간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게 될 때 비극이 시작된다. 몰이해에서 야기된 의심과 불신이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짓는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

   인간은 신의 차원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절대 고차원의 하나님이 저차원의 인간을 향해 발산하는 사랑의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하고 오묘하기 때문에 인간의 낮은 차원에서는 완전히 읽어내기 힘든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신을 이해하려 할 때 신의 차원을 전제하지 않을 경우 상당한 손실의 사유적 상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에 단언한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관계에서는 가깝고 차원에서는 멀다.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가 신과 인간인 것이다. 이 소설은 신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과 상치성을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통해 아름답게 들려줌으로써 재미와 감동을 모두 확보했다.

   이야기 전체적으로 소설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야기 자체도 감동적이지만 작가가 의도한 서사의 구조 또한 감동을 배가시킨다. 작가는 뒷 이야기를 통해 소설이 철저히 자신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픽션임을 고백한다. 맥은 실존인물이 아니며 모두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딸을 잃은 한 남자가 오두막에서 며칠동안 삼위의 하나님과 대면하여 지낸다는 이야기가 황당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기적은 믿음 안에서 현실이 된다. 작가의 가공인물인 맥의 고백을 작가 자신이 대필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이 소설이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부담없이 읽힐 수 있는 넓은 공간성을 확보하는 부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처를 받고 위로를 얻고자 한다. 인간의 고통과 신의 위로가 만나는 오두막이라는 상징적 공간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바로 그곳인 것이다.  

   어떤 소설은 별 다섯 개로도 부족하다. 『오두막』은 별 만땅으로도 호평이 차지 않는 소설이다. 감동적인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말 좋은 소설, 소름이 돋도록 감동을 주는 소설은 흔치 않다. 또한 이를 평가하는 잣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오두막』은 매우 잘 쓴,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소설이다.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의 본질적이고 난해한 교의를 다양한 독자들이 받아들이기에 편안하고 부담없도록 상징화한 부분이 돋보인다. "상처와 치유라는 상반된 성질의 것이 결국 동일한 곳에서 치환된다"는 거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 깊은 감동의 모멘텀이다. 

   이런 소설은 혼자 읽기에 아깝다. 최근에는 영화로까지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치유를 선사하고 있다. 감동의 파장은 타자과 함께 나눌 때 지수적이 된다. 좋은 소설은 반드시 추천되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야 한다. 『오두막』은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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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vs 역사 - 책이 만든 역사 역사가 만든 책
볼프강 헤를레스.클라우스-뤼디거 마이 지음, 배진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점의 정문에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멋진 문장이 적혀 있다. 그렇다. 책은 인간의 지적활동의 산물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수없이 많은 책을 만들어왔다. 좋은 책을 쓰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대단했다. 별 볼 일 없는 책은 기억되지 않고 사라졌다. 위대한 책은 읽고 또 읽히며 시간의 세례를 통과했다. 그래서 고전으로 남았다. 책이 사람을 만들고 시대를 만들었다. 책은 역사와 함께 했다.

   '책이 만든 역사, 역사가 만든 책'이라는 강렬한 부제를 달고 있는 볼프강 헤를레스(클라우스 뤼디거 마이 공저)의 <책 vs 역사>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50권의 고전을 소개한 책이다. 사후세계의 여행안내서인 <사자의 서>에서부터 J K 롤링의 <해리포터>까지 각 시대를 대변하는 여러 명저를 선정해 책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입체적으로 리뷰한다. 

   이 책의 강점은 천편일률적인 기존의 고전리뷰집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역사를 일반적인 구분법인 '고대-중세-근대-현대'의 네 시대로 나눈다. 각 시대가 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서설한 뒤 선정한 책들을 해설한다. 책 자체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각 책이 집필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그 책이 끼친 영향에 대해 자상하게 서술한다. 각 장마다 틈틈히 들어선 사진과 참고자료는 저자의 서술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난잡하지 않은 교과서 형태의 인문서적을 만들어냈다.

   저자가 선정한 책들은 한결같이 인류의 역사를 빛내고 움직인 명저들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경전인 <성경>과 <코란>이 전면에 배치됐다. 수천년 간 동양사상의 뿌리가 된 공자의 <논어>를 수록해 동서양의 균형을 맞추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로 철학적 담론을 소개했고 괴테의 불멸의 소설 <파우스트>를 놓치지 않았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는 경제학을, 왓슨과 크릭의 <DNA의 구조>에서는 자연과학을 논했다. 저자는 정치, 과학, 역사, 문화 등 전 영역의 고전들을 두루 아우르면서 독자를 당시 시대의 한복판으로 이끄는 힘있는 서술을 펼친다.

   이 책에 수록된 50권의 책 중에서는 내가 읽은 책도 있고 안 읽은 책도 있다. 또한 내가 훌륭한 책으로 인정하는 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책도 있다. 예컨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선과 악이 지닌 힘과 검증과정, 즉 권력과 인간성에 대한 위대한 이야기를 어마어마한 판타지에 녹인 불멸의 소설이다. 반면 마오쩌둥의 <마오쩌둥 어록>은 그릇된 경제정책으로 야기된 기근과 대규모 정치테러로 무려 7,000만 명의 사람을 희생시키는데 사용된 지옥의 교과서다. 중요한 건 이러한 책의 양면성이 결국 현재의 우리사회를 더욱 밝게 빛내는 지적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책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에 명저인 것이고, 후자는 책은 쓰레기지만 그것을 통해 명징한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는 점에서 고전인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아쉬운 게 없지는 않다. 저자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독일 고전이 많이 선정된 점과 인문·사상 분야의 책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점은 아쉽다. 문학의 비율이 현저히 낮은 점이 가장 아쉽다. 세계문학의 거대한 산맥이라 할 수 있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빠졌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 <죄와 벌>과 <전쟁과 평화>가 인류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만든 50권의 책에 포함되지 못할 작품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무너진 균형이 아쉽다.

   칼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마지막 태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해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이 다 옳았던 건 아니지만 그의 저 말 만큼은 진실이다. 그렇다. 지식은 반영과 해석을 넘어 변혁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참된 지식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가장 좋은 책은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책이다. 이 명징한 진실을 곱씹게 한 것만으로도 헤를레스의 <책 vs 역사>는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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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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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대전을 다룬 매체ㅡ책,영화,방송,기사 등ㅡ를 만날 때는 한결같이 마음이 아프다. 비단 5천만 명이 사망한 역사상 가장 잔악하고 처참한 전쟁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2차 대전은 세계전쟁 이상의 의미를 가진 지옥의 아이콘이다. 유태인 600만 명 학살뿐 아니라 전쟁 앞뒤의 전개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메커니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대숙청, 스페인 내전, 아프리카의 참상, 공산주의의 만개 등은 2차 세계대전 앞뒤의 참상을 인과적으로 연결짓는 사악한 사례들이다. 

   거대한 참혹성은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가진다. 소재화되고 재구성되어 스토리텔링의 마력을 내뿜는다. 그렇기에 책과 영화를 위시한 거의 모든 매체에서 2차 세계대전은 단골 소재가 됐다. 스필버그는 2차 대전의 한 복판에서 라이언 일병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그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전세계적인 흥행을 이루었다. 권터 그라스는 나치 점령부터 2차 대전 종전 후까지의 파행적인 독일 역사를 그린 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베틀라나 알롁시예비치도 2차 대전 당시 여군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르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로 노벨상을 거머쥐었다. 전쟁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프레드 울만의 중편소설 『동급생』도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1930년대 독일을 배경으로 유대인 의사의 아들 한스와 독일 귀족 소년 콘라딘의 우정을 그렸다. 두 소년의 만남과 이별, 재회를 통해 나치즘과 홀로코스트 시대의 슬픔을 비극적으로 담아냈다. 이 소설에 대해 작가 아서 케스틀러는 '작은 걸작'이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고, '르 피가로'의 주필 장 도르메송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고 상찬했다. 프레드 울만은 70세의 노령에 이 소설을 발표했다. 1971년 출간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977년 아서 케스틀러의 서문과 함께 재출간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두 주인공 소년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서사를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소설의 종국적인 메시지는 '2차 대전의 비극'이다. 참혹한 전쟁을 소설의 시공간 뒷편으로 밀어서 배치한 듯하지만 이야기의 완료시점에서는 2차 대전이 얼마나 잔혹하고 비극적인 전쟁이었는지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고발하고야 만다. 작가의 이 놀라운 전개 기술 덕분에 독자는 막장을 덮은 후 묘한 감동과 전율을 느낀다.

   작가의 기술이 놀랍다.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보여주진 않지만 두 소년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포착하는 것만으로도 잔인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이 소설의 생명력으로 수렴되고 있는 마지막 한 문장에 대해서는 반드시 모르고 읽는 것이 유익하다. 대단한 반전은 아니지만 그 한 문장 속에 두 소년 사이의 우정과 오해, 그리고 2차 대전의 참혹한 비극이 모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동급생』은 중편소설이다. 중편의 분량은 이 소설의 서사 구조와 잘 호흡하는 탁월한 외적 장치이다. 본래 중편은 장편처럼 긴 호흡이나 거대한 드라마를 갖지는 못한다. 또한 삶의 한 테마를 사진 찍듯이 터치하는 단편의 그것과도 궤를 달리 한다. 장편의 구조를 추구하면서도 한달음에 서사를 압축시키는 힘이 중편소설의 매력이다. 만약 작가가 이야기의 전개를 늘어뜨려 거대한 파노라마 한복판으로 끌고가려 했다면 소설의 마지막 한 방은 약했을 것이고 감동과 재미는 반감됐을 것이다. 작가의 노련한 기술이다.

   문학작품에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밀도는 사용하는 언어의 양이나 자극적인 표현의 총량과 무조건 비례하지는 않는다. 작은 네러티브 속에서도,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 구도 가운데서도 작가는 독자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기술이며 실력이다. 그런 차원에서 소설 『동급생』에 대한 긍정은 어렵지 않게 수렴된다.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중편의 외연 속에 '두 소년의 우정'과 '나치즘의 발흥'을 농밀하고 입체적으로 엮어낸 『동급생』은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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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애하는 적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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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갑내기 방송인 허지웅에 대해 나는 여러차례 신랄하게 비판해왔다. 편견에 빠진 무지, 자본주의에 대한 몰이해, 짓까부는식의 소통방식, 나이에 걸맞지 않은 훈계조의 언행 등은 그가 가진 비호감스러운 개성들이다. 정치적 사안뿐 아니라 절반의 찬반을 가진 무거운 주제에 대해 자기 말이 절대적 진리인양 질타하는 그의 어법은 그야말로 밥맛이다. 

   허지웅의 말을 가만히 듣다 보면 내용과 실력은 갖추지 못한 채 이미지로 뜬 전형적인 군상이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어떻게 해서 방송에 자주 출연하게 됐는지 모르겠으나, 지식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헛똑똑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최근 면접방식으로 토론하는 공중파의 모프로그램에서 대선후보 패널로 출연한 이재명 시장에게 넉다운 당하는 그의 모습은 꼴불견 그 자체였다. 면접관이 후보를 심문해야 하는데 논리와 지력이 딸리니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기고 주장하는가. 핏대는 왜 세우는가. 무지는 태도 때문에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허지웅은 그 대표적인 예다.

   허지웅이 신간을 냈다. '한겨례'와 '씨네21'에 기고한 글에 새 글을 보탰다. 나는 이미 그의 전작 『버티는 삶에 관하여』를 읽고 "대책없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시끄러운 소리"라고 혹평한 바 있다. 그는 전작에서 진지한 여러 사안에 대해 정통좌파식 억양으로 "자본주의(시장경제) 자체가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라는 싱거운 논리를 줄기차게 쏟아냈다. 그의 신간 『나의 친애하는 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시기와 소재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간 이런저런 사건을 거치면서 논리와 태도의 변화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의 신간을 집어들었지만 역시나 였다. 

   허지웅의 에세이 『나의 친애하는 적』은 전작 『버티는 삶에 관하여』의 2부이다. 내가 볼 땐 그렇다. 소재와 내용은 다르지만 난잡한 구조와 가벼운 맥락은 동일하다. 논조와 태도 또한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제목 '나의 친애하는 적'은 훼이크다. 제목만을 보자면 자신의 안티에게 온화한 제스쳐를 취하거나 지금까지 대중으로부터 누적되어온 오해의 담론들을 진지하게 탐색할 것이라는 기대를 자아낸다. 하지만 책 내용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다. 달라진 것 없고 새로운 내용도 없다. 전작의 수준 딱 거기에 정지해 있다. 문학동네 정도의 출판사가 왜 이런 책을 출간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평소 저자는 선배세대에 대해 뜨악한 입장을 자주 표출해왔다. 논란이 된 <국제시장> 발언도 그 연장선상이다. 이 책에서도 그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저자는 아버지로부터 등록금 요청을 거절당한 일과 스물두 살 아르바이트 당시 믿었던 부장에게 월급을 뜯긴 일을 글감으로 삼아 책에 소개한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좋은 어른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고 토로한다. 최악의 어른이 늘 갱신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이해할 수 있다. 감정과 인식은 기본적으로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잊고 있는 게 있다. 사람과의 관계는 철저히 상대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가 좋은 어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 어른은 좋은 청년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가 상처받았다는 것은 거꾸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과 동의어다. 사람 간의 문제를 타자만의 문제로 넘기는 그의 오해가 불편하다. 그에게 "이 세상에 좋은 어른은 많다"는 내 경험적 신념을 강요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굳이 조언한다면, 한나 아렌트가 역설한 '악의 평범성'을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책의 뒷부분에서는 최근 불거진 주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국정교과서, 세월호, 최순실 게이트, 촛불 시위, 대통령 탄핵 등 마치 고양이가 생선을 만난 것처럼 호들갑이다. 책의 말미는 다음 세대에게 더 좋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며 끝맺는다. 선배세대가 흘린 피와 땀을 모욕해온 그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을 고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아랫세대를 위한 따뜻한 세상은 윗세대가 물려준 유산을 겸허히 수용하는 것에서부터 만들어진다고 나는 믿는다. 

   책은 전체적으로 가볍고 조잡하다. 균형감각과 목적의식이 결여된 수준 낮은 에세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리뷰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 외에는 전체적인 맥락과 무관한 여러 잡문을 보탰다. 타 매체와 블로그의 글을 짜집기해 이런저런 잡문으로 엮은 난삽한 에세이를 15,000원이나 받는다는 건 불편하다. 저자의 허영인지 출판사의 오만인지는 모르겠으되, 종국적으로 내 지갑이 회개할 일이다. 


   한 문단 더 보태겠다. 저자에게 충고한다. 작가와 방송인은 공인이다. 공인은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산다. 대중을 의식해서 헛소리하는 건 문제지만 대중을 무시하며 개소리하는 것도 문제다. 공부가 많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잘 모르면서 떠드는 무식이 가장 큰 문제다. 무거운 주제에 대해 가볍게 툭툭 던지는 경박한 태도도 문제다. 본인의 경험만으로 선험적 명제를 도출하지 말라. 자신의 프로필을 '글쓰는 허지웅입니다'라고 제시했다면, 무겁고 진지한 주제에 대해 깊이 공부한 뒤 겸손히 말하고 겸허히 쓰라. 그것이 '어른스러운'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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