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서평은 영화 <오두막> 개봉을 기념해 소설을 다시 읽은 후 과거에 올린 서평을 수정 편집해서 쓴 것임을 밝힌다. 소설의 내용과 메시지를 감안할 때 전적으로 기독교 관점의 서평일 수밖에 없다. 읽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길 바란다.

 

   하나님을 안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여기서 '안다'의 의미는 인격적인 교제까지를 포함한다. 내가 언급하는 '하나님'이라 함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즉 삼위일체의 신神을 말한다. 여섯 살 때 교회에 속해 있는 유치원에 다니면서 하나님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그후로 오랫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 또한 서리집사의 직분으로 교회에서 이런저런 봉사와 헌신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해 완벽한 인식이 가능하겠는가. 하나님은 온전한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성과 절대성을 실존 자체에서 본인 스스로 내재하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력 부족은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세계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지금 이 순간 고민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나는 한 가지 뚜렷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질문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인간의 행복을 원하시는 사랑의 신이라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악한 사람이 승리하고 선한 사람이 패배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발생하는 곳이다. 선과 승리, 악과 패배 사이의 방정식이 정방향이 아니라 역방향으로도 굴곡되어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사회 곳곳에서 엄연하고 다양하게 일어나는 불가해하기만 한 '불공평' 혹은 '부정의'라는 테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 신앙을 흔들어 왔는지 모른다. 선의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왜 선하게 사는 사람이 핍박을 받고 악하게 사는 사람이 승리를 한단 말인가. 이게 과연 공의의 하나님과 부합할 수 있는 일인가. 깊은 사념이 내 신앙을, 아니 어쩌면 우리 세계의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도전을 가해온 것이 사실이다.

   소설 『오두막』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당신은 어디 계신가요,라는 강렬한 문장을 띠지로 두르고 있는 이 소설은 악과 양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을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작가 윌리엄 폴 영(이하 '윌리')은 자신의 첫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노련한 필력으로 개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소설은 윌리가 자신의 친구인 매켄지 앨런 필립스(이하 '맥')의 고백을 대필해나가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맥의 막내딸 미시가 캠핑장에서 유괴되어 살해된 사건을 통해 맥이 겪는 슬픔과 분노, 기적과 회복,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맥이 딸의 죽음을 현실적으로 확인한 '오두막'이라는 공간은 맥의 '거대한 슬픔'을 완전한 평화의 길로 인도하는 치환적 시공간이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결국 이 소설의 제목 '오두막'의 상징성을 내밀하면서도 함축적이게 하는 요인으로 드러난다.

   맥이 시각적으로 목도한 하나님의 형상은 기존의 인간적 상상력을 전복한다. 성부 파파는 흑인 여자의 모습으로, 예수는 중동계 남자의 모습으로, 성령 사라유는 아시아계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왠지 수염이 있고 연세가 있으며 백인의 형상을 띨 것이라는 쓸 데 없는 인간의 과도한 상상력에 조소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3차원 과학에서 조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불가한 존재다. 단 우리 삶 곳곳에 각기 다양한 의도와 모습으로 역사하시며 섭리하실 뿐이다.

   소설의 간절한 메시지를 단순화하자. 이 소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성人性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 관계성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밀도감 있게 접근한다. 주인공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인간 형상들은 하나님의 인성을 아주 잘 보여준다. 제도와 규칙이 아닌 관계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과 호흡하려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야기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상처받은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위로를 건네려는 하나님의 수고를 '오두막'이라는 표상의 시공간적 장치를 통해 작가는 아름답게 녹여놓는다.

   작가는 하나님의 존재성을 삼위의 신으로 완벽하게 소개한다.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파파, 예수, 사라유는 그대로 성부, 성자聖子, 성령의 하나님과 연결된다.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인 하나님 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의를 끌어내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길 원하는 신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게 풀이한다. 오두막에는 삼위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셨다. 서로 토의하고 기도하시며 맥의 구원을 성취시키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요함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선연히 구분되는 고유특질을 드러낸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인간이 먼저 신을 찾아나섰다. 오직 기독교만 신이 먼저 인간을 찾았다. 갈대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먼저 선택하셨고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을 먼저 찾아나섰다. 무엇보다 신의 차원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직접 들어오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요한 인간 쫓기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사상이 종내 '사랑'이라는 거대한 선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고결함을 이끌어낸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다.

   오두막에서 맥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에 눈물을 짓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밀하고 실재적이며 파워풀하다. 악의 승리는 하나님 역사의 사실성에 대한 증거 불충분 요건이 아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악은 선의 결핍일 뿐이다. 하나님은 분명 맥의 딸을 살릴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분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 하셨다. 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는 이 아이러니한 하나님의 고민은 철저히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인간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게 될 때 비극이 시작된다. 몰이해에서 야기된 의심과 불신이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짓는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

   인간은 신의 차원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절대 고차원의 하나님이 저차원의 인간을 향해 발산하는 사랑의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하고 오묘하기 때문에 인간의 낮은 차원에서는 완전히 읽어내기 힘든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신을 이해하려 할 때 신의 차원을 전제하지 않을 경우 상당한 손실의 사유적 상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에 단언한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관계에서는 가깝고 차원에서는 멀다.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가 신과 인간인 것이다. 이 소설은 신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과 상치성을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통해 아름답게 들려줌으로써 재미와 감동을 모두 확보했다.

   이야기 전체적으로 소설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야기 자체도 감동적이지만 작가가 의도한 서사의 구조 또한 감동을 배가시킨다. 작가는 뒷 이야기를 통해 소설이 철저히 자신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픽션임을 고백한다. 맥은 실존인물이 아니며 모두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딸을 잃은 한 남자가 오두막에서 며칠동안 삼위의 하나님과 대면하여 지낸다는 이야기가 황당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기적은 믿음 안에서 현실이 된다. 작가의 가공인물인 맥의 고백을 작가 자신이 대필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이 소설이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부담없이 읽힐 수 있는 넓은 공간성을 확보하는 부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처를 받고 위로를 얻고자 한다. 인간의 고통과 신의 위로가 만나는 오두막이라는 상징적 공간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바로 그곳인 것이다.  

   어떤 소설은 별 다섯 개로도 부족하다. 『오두막』은 별 만땅으로도 호평이 차지 않는 소설이다. 감동적인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말 좋은 소설, 소름이 돋도록 감동을 주는 소설은 흔치 않다. 또한 이를 평가하는 잣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오두막』은 매우 잘 쓴,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소설이다.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의 본질적이고 난해한 교의를 다양한 독자들이 받아들이기에 편안하고 부담없도록 상징화한 부분이 돋보인다. "상처와 치유라는 상반된 성질의 것이 결국 동일한 곳에서 치환된다"는 거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 깊은 감동의 모멘텀이다. 

   이런 소설은 혼자 읽기에 아깝다. 최근에는 영화로까지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치유를 선사하고 있다. 감동의 파장은 타자과 함께 나눌 때 지수적이 된다. 좋은 소설은 반드시 추천되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야 한다. 『오두막』은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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