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작가 황석영을 좋아한다. 그에 대한 나의 사모는 거의 맹신 수준이다. 오래전부터 그의 활자는 내게 문학을 읽는 시금석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임을 알려준 최초의 잠언이었으며, 현재적 삶의 고찰과 미래의 생명수를 소원하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데리다의 말처럼 텍스트 바깥은 없다. 텍스트 바깥도 안이어서 안팍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말이다. 황석영의 텍스트는 황석영 자신의 존재가 안과 밖의 경계를 오롯이 허물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응당 작가는 그래야 한다.

  오늘날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으뜸은 단연 황석영이다. 감히 누가 황석영의 문학적 아우라에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내가 읽은 그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모두 찬란하고 위대했다. 그의 기념비적인 걸작 『객지』는 황석영의 문학적 성취가 어떠한 것인지를 찬연히 드러낸다. 리얼리즘 미학의 극치를 보여준 『객지』의 단편들은 각 작품마다 빛나는 문학적 의미를 제시한다. 또한 10부작 대하소설 『장길산』을 비롯한, 더욱이 그가 문단 복귀 후 쏟아낸 『오래된 정원』, 『심청』, 『손님』 모두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압도적인 찬사를 받았다. 작년에 출간된 『바리데기』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관통한 20세기 굴곡진 현대사를 굿의 형식으로 그려낸 '생명수' 메타포와 결합시킨 걸작이다. 그렇기에 그의 신작이 출간된다는 소식은 내게 조국통일 못지 않은 빅뉴스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인내하며 또 인내했다. 참고 또 참았다. 한국문학의 에이스 황석영이 『바리데기』의 다음 작품을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연재 형식으로 올린지 어느덧 여섯 달이 지났다. '황석영'이라는 이름 석 자에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는 내 자신의 평소 모습과는 배리되도록 나는 단 한 번도 황석영의 블로그에 접속하지 않았다. 그의 신작이 어떤 작품인지의 강렬한 호기심을 훗날 책장을 넘기며 한자리에서 '완독'하리라는 기대와 여망으로 승화시켰다.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편리가 아무리 좋다손 치더라도 종이 위에 담겨진 활자를 읽는, 그것만의 웅숭깊은 맛을 나는 결코 멀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는 왔고, 내 여망은 기대했던 대로 이뤄졌다. 여섯 달을 기다린 황석영의 신작 『개밥바라기별』은 그렇게 내 손과 머리와 가슴으로 들어왔다.

  『개밥바라기별』은 성장소설이다. 황석영과 성장소설은 언뜻 생각하면 그로테스크한 부조화를 풍기는 듯하다. 하지만 기우였다. 역시나 글 잘쓰는 거장에겐 소재의 벽이란 존재치 않는다. 『바리데기』를 내놓고 나서 전혀 새로운 젊고 어린 독자들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작품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작가 황석영. 그의 이러한 야심은 작심하고 쓴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자전적 일대기를 투영시키면서 무게감 있는 한 권의 성장소설을 탄생시킨다. 요컨대 그의 신작 『개밥바라기별』은 황석영 자신의 십대 시절의 방황기가 녹아있는 바로 그 시대, 그 젊은이들의 자화상이다.

  소설의 시점은 시종 1인칭으로 일관된다. 하지만 시점을 추동하는 '나'라는 화자는 수시로 이동 교체되면서 다양한 시각을 만들어낸다. 전체적 이야기의 주인공격으로, 더욱이 황석영 자신으로 투영된 유준이 서사의 거대 본류를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준이의 친구 영길, 인호, 상진, 정수, 선이, 미아는 각기 또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각 인물들의 시점 교체가 반복되면서 동년배들의 사춘기 시절의 생생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꿈과 사랑, 실패와 좌절, 모험과 도전 등 견디기 버겁기만 한 그 시절의 '경험'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성숙해가는 인간상들이 잘 그려졌다. 더욱이 준이를 위시한 그들네의 삶의 방식은 기존의 전통과 제도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함으로써 일탈을 꿈꾸는 데 있다. 무엇이 되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삶의 철학을 기치로 하는 그들의 방황은 바로 그 시절의 '내' 모습과 '우리' 모습을 담아냈기에 공감적이다.

  황석영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낸 유준이라는 인물의 존재성이 특별하다. 유준만이 갖고 있는 방향성이 있다. 그것은 우정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도 아니며, 꿈과 희망을 향한 목적도 아니다. 그 방향성의 본질은 바로 나 자신이다. 항상 자기 자신으로 열려있는 유준의 머리와 가슴은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방황 시절의 자아상을 잘 보여준다. 이야기의 뒷부분, 대위 장씨를 통해 겪는 수많은 사람들과 경험들은 나 자신만을 접사화했던 방향성의 특질이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화하며 보다 높은 단계로의 '성숙'을 이뤄내는 계기가 된다.

  소설 제목이 참 이쁘다. '개밥바라기별'은 금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태양계에서 두 번째로 가깝게 태양을 공전하는 금성은 새벽 동쪽에 나타날 적에는 '샛별'이라고 부르지만 저녁에 나타날 때에는 '개밥바라기'라 부른다. 식구들이 밥을 다 먹고 개가 밥을 줬으면 하고 바랄 즈음에 서쪽 하늘에 나타난다 해서 그리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젊은 시절에 방랑하면서 저녁 무렵 해가 지자마자 서쪽 하늘에 나타나던 하나의 별을 보며 정다운 나의 별로 불렀던 것을 기억한다고 황석영은 고백한다. 어쩌면 '개밥바라기별'은 황석영 자신이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젊은 시절의 방랑을 전체적으로 표상하는 상징적 메타포이자, 누구나 겪을 그 시기를 가슴에 잘 안착시키길 기원하는 생명력 있는 호소의 메시지일 것이다.

  황석영 문학의 변화를 감지한다. 그가 오랜 수감생활을 마감한 후 창조한 작품들에는 일관된 흐름이 있다. 『오래된 정원』, 『심청』, 『손님』, 『바리데기』는 모두 한반도의 문제를 세계의 무대로 이슈화시키며 고민한 작품들이다. 같은 민족이면서 총과 칼을 맞대고 싸우는 한반도의 아이러니한 비극적 현재상에 대한 황석영의 무게감 있는 작가의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개인보다는 국가와 사회와 이념을 향해 쏟아냈던 황석영 문학에서 『개밥바라기별』이 갖는 상징적 위치는 응당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는 『개밥바라기별』이 작품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문학적 연대기의 기술에서 하나의 새로운 표지석이 될 것이라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앞으로 그의 문학이 어떻게 진화될 것인지를 예견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을 곁에서 지켜봤을 때도 이미 집단의 시대, 조직의 시대는 갔고 개인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내 문학도 그간 사회와 이념의 문제에 치중하느라 개인의 상처는 땜질하고 지나갔던 것 같습니다."   - 황석영

  사춘기부터 스물한 살 무렵까지의 길고 긴 방황의 이야기를 그려낸 이 작품은 읽는 이마다 독특한 기호의 공감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든다. 시대는 변했고, 사춘기 시절의 사회상도 급변했다. 하지만 질풍노도의 시기에 경험하며 고민하는 내적 번민들의 본질적 속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기 직전까지의 자신의 청소년기를 투영시킨 작가 황석영의 기백과 투혼이 생명력 있게 녹아있는 역작이라 평할 만하다.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 황석영의 과거를 엿보고, 현재를 천착하며, 미래까지 가늠해볼 수 있는 신작 『개밥바라기별』에 나는 별 다섯 개를 아낌없이 선사한다. 그리고 누구나 겪었을 그 시절에 대한 읽는 이마다의 다양한 공감을 보증하며 이 한 권의 장편을 자신있게 추천한다. 역시 황석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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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8-0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셨네요. 담아갑니다.^^

다윗 2008-08-0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더운데 평온하신지요. 개인적으로 최고로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출간되자마자 바로 질렀답니다. 혜경님도 곧 만나보실 예정이시군요. 멋진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
 
붉은 비단보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여류작가들의 글솜씨는 하나같이 찬연하다. 몇몇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페미니즘의 클리셰(Cliche)에 함몰되었다거나 지나친 공주병에 빠져 있다는 조소를 받기도 하지만, 각기 뛰어난 필력으로 한국 문단을 주도하는 그녀들의 활력이 나는 좋다. 공지영의 대중성과 신경숙의 섬세한 문체, 은희경의 냉소주의와 심윤경의 문학적 진화, 정이현의 동시대적 공감성과 전경린의 연애 서사 등은 한국 문단을 빛내는 여류작가들의 대표적 아이콘들이다. 바로 그 연장선상에 권지예가 있다.

  1997년 단편 「꿈꾸는 마리오네트」로 등단한 후 2002년 이상문학상과 2005년 동인문학상을 수상, 한국 문단에서 가장 권위있는 양대산맥을 동시에 석권한 권지예의 외연적 존재성은 그녀의 활자 곳곳에 내면을 증명하듯이 배어 있다. 그녀와는 2002년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뱀장어 스튜」라는 단편으로 처음 만났다. 권지예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뱀장어 스튜」는 일상 속에 존재하는 권태와 애증,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의 욕망과 바깥의 낭만적 로맨스, 환상적 도발이 허무의 확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정교하게 엮고 있는 작품이다. 뛰어난 포스트 모더니즘 기법이 돋보이는 이 짧은 단편소설은 체질적으로 단편과 거리가 먼 내 자신에게 단편만이 가질 수 있고 단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치의 문학적 만족을 내게 안겨주었다. 권지예는, 나에게 그리 기억되는 작가다.

  권지예의 신작 장편소설 『붉은 비단보』는 그녀의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배경에서 펼쳐지는 서사다. 권지예는 시간의 무대를 조선의 어느 한 시대로 되돌려 여성의 삶과 사랑과 예술을 처연하면서도 찬란하게 그려냈다. 종당에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밖에 없는 우주의 내면적 속성을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48년간의 삶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작중화자 항아恒我의 꿋꿋하면서도 담대한 삶은 거대한 서사의 맥으로서 웅숭깊게 그려진다.

  작가는 세 명의 여인을 배치한다. 1인칭시점의 주인공 화자 항아恒我는 뛰어난 자색과 화려한 춤 솜씨를 갖춘 초롱草籠, 총명하며 지혜로워 문필 신동이라 불리는 가연佳然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다. 각기 독특한 성정과 능력을 갖고 있는 동갑네 세 여인의 우정이 서사의 초반부를 이끌어가는 씨줄이다. 여기에 초롱의 친오라비 준서와 항아의 애틋하면서도 절제된 사랑이 날줄로 엉켜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조합된다.

  서사의 흐름 속에서 항아와 준서의 사랑은 농밀해져만 간다. 하지만 둘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역모 혐의로 초롱과 준서의 집안은 몰락하고, 준서는 항아와 훗날에 다시 만나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한 후에 금강산으로 피신한다. 여동생 초롱은 한양으로 팔려가 기생이 된다. 가장 뼈대가 튼튼한 사대부 가문의 자녀였던 가연이 제일 먼저 혼사를 치르기 위해 떠나고, 항아는 준서가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부모의 거짓계략으로 준서가 죽은 줄만 알았던 항아는 사랑하지 않는 남정네와 혼사를 치르면서 일평생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 준서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의 세월로 들어가게 된다.

  기나긴 세월이 흐르면서 항아와 초롱과 가연의 삶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다. 시댁의 핍박과 계속된 유산으로 삶의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던 가연은 목매달아 자살함으로써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한편 항아는 기생이 된 초롱과의 연락이 요원하기만 하다. 그리고 훗날 알게 되는 준서와 관련된 진실들. 하지만 항아의 삶에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을 속인 부모에 대한 한과 준서를 향한 원망만이 존재할 뿐. 훗날 항아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식하고 일평생 자신의 한과 사랑과 그리움이 내밀하게 깃들어 있는 붉은 비단보를 불에 태우려고 한다. 과거 흔적들을 하나씩 태우면서 항아는 다른 세상으로 떠나간다.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이 소설에는 명징한 두 가지의 본류가 흐르고 있다. 하나는 항아와 준서의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며, 다른 하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한 여성의 예술가로서의 번민과 열정이다. 항아에 대한 준서의 끈질긴 사랑과 준서를 향한 항아의 애절한 그리움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흐름이다. 항아가 준서와의 추억을 기억하며 봉인한 '붉은 비단보'의 존재는 종국까지 멸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고결한 정신적 사랑의 극치를 담아낸 메시지가 되고 있다.

  또한 예술을 향한 항아의 꿈과 긍정의 부여는 이 소설의 존재 가치가 된다.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어느 하나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간 한 여인의 웅숭깊은 삶의 여정 속에는 그녀 자신의 예술적 자아가 발현되면서 더욱 찬란한 빛을 뿜어낸다. '여성의 예술'을 인정치 않았던 시대에 태어나서 자신의 예술이 곧 점잖치 못한 '끼'로 재단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그 시대 모든 여성들의 고뇌와 몸부림이 문장 속에 오롯이 배어 있기에 처연하다.

  예술과 사랑은 어떤 함수 관계일까. 세계의 수많은 고전들은 예술 속에서 사랑을 천착하며, 사랑을 통해 예술을 발현시켜 왔다. 소설의 제목 '붉은 비단보'는 한 여인의 마음속에서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일렁였던 사랑의 그림자와 자신의 전생애를 지탱하며 실존케 했던 예술에 대한 열정이 만나 현존存되어진 메타포다. 요컨대 붉은 비단보 안에 봉인된 글과 옷과 그림들은 이 소설의 본류로 작동했던 사랑과 예술의 혼합이 일구어낸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독특한 시각이 있다. 다섯째 아이 빈彬에 대한 항아의 특별한 사랑이다. 소설의 시작과 말미는 항아의 1인칭시점의 이야기를 빈이 중심이 된 전지적시점의 이야기가 감싸서 두르고 있다. 빈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영특했다. 항아는 빈을 통해 마치 자신의 어렸을 적 모습을 보는 듯했고, 무지하고 무능했던 남편과 비견되면서 옛사랑 준서를 떠올리기도 했다. 즉 빈은 항아 자신의 예술적 자아가 투영된 거울이자 꿈이요 희망이었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이 현현된 준서의 또 다른 부활이었으리라.

  나는 인간의 삶을 잘 그려낸 서사에 최고의 찬탄을 선사한다. 문학은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공복을 느끼며, 인간은 문학을 통해 인간 본연의 내면을 더욱 천착한다. 이러한 인간과 문학의 방정식에 동의한다면, 인간을 얼마나 잘 조명했고 성찰했는지에 따라 문학적 평가가 가름된다는 논리에 동의하게 된다. 작가 권지예가 빚어낸 항아라는 여인의 삶과 사랑, 불타는 예술혼이 선사하는 감동의 빛깔은 지극히 찬란하며 눈부시다. 너무 잘 담아냈고 흠이 없는 완전한 서사로 그려냈다. 이런 소설이 있기에 독자의 머리는 잠시 정지할 수 있고, 가슴은 농밀한 감성으로 차오를 수 있다. 미국에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있다면 한국에는 『붉은 비단보』가 있다. 정말 잘 쓴 '완벽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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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7-30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여름은 더 적절한 계절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도 전 이래저래 책을 오래 손에 잡지 못하고 이러구 있네요.
늘 꾸준히 읽고 쓰는 일을 즐거이 하시는 다윗님^^ 좋은 리뷰 또 보고 갑니다.

다윗 2008-07-31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더운 날씨에 평온하시지요. 피서 계획은 세우셨는지요. 그리고 독서 컨디션은 어떠하신지요. 간만에 혜경님의 덧글을 만나니 시원해집니다. 평온하세요. ^^

뒷북소녀 2008-09-2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에 반한 분이 계셔서 선물하려구요... 땡스 투~ 날립니다. :)

다윗 2008-10-04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 뒷북소녀님, 언제나 관심과 격려 고맙습니다.^^
 
저녁놀 지는 마을
유모토 카즈미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일본소설을 그리 즐겨읽는 편이 아니다. 많은 작품을 접하진 못했지만 대부분의 일본소설은 뚜렷한 전형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제와 소재는 다양하지만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과 구도는 철저하게 스토리텔링에 기반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은 발군이지만 보다 무게감있고 깊은 세계를 건드리지 못하는 게 작금의 일본작가들이 아닌가 한다. 어쩌면 가라타니 고진이 오에 겐자부로 이후 일본문학은 종언을 맞이했다고 단언했던 배경에 순수·본격문학으로서 최소한의 무게감이 결락된 일본 대중문학의 현주소가 깔려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가는 일본소설들이 꽤 있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다 슈이치를 제일 좋아한다. 하루키의 존재감은 거론할 필요가 없겠고, 슈이치의 경우 뛰어난 동성적 감각으로 타자는 흉내낼 수 없는 발군의 감수성을 그려내는 데 천재적 소질을 보이는 작가다. 뛰어난 이야기꾼보다 독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가 나는 좋다. 그렇기에 체질적으로 좋아하지 않은 일본 현대문학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다 슈이치를 선망하고 있는 것일 게다.

  개인적으로 강한 신뢰를 갖고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던 『저녁놀 지는 마을』은 앞서 언급한 문학에 대한 내 독서관에 부흥하길 기대하는 마음에서 선택한 소설이다.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스토리 위주의 일본소설과는 다르게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조금은 어려운 소설, 이라고 소개한 모 인터넷서점의 책소개는 꽤 인상적이었다. 일차원적 '재미'보다는 삼차원적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 예견하며 양장본의 첫 장을 넘긴다.

  소설 속 화자는 어린 남자아이다. 이혼한 엄마와 단둘이 살고있는 집에 어느날 갑자기 외할아버지가 등장한다. '짱구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외할아버지의 행색은 초라하며 존재감이 없어 보인다. 뜻하지 않은 짱구영감의 출현으로 두 모자의 생활 리듬은 변화를 겪는다. 좁은 방에서 항상 웅크리고 앉아있는 짱구영감은 자신의 딸에게 그리 반가운 손님이 되지 못한다. 소설은 두 모자로부터 받아들일 수 없고 불편하기만 한 존재로 짱구영감을 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길지 않은 서사 속에서 짱구영감과 딸 사이의 긴장과 불신의 벽은 서서히 무너진다. 짱구영감이 온 이후, 오히려 예전보다 아이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은 더욱 평온하고 안정감 있어 보인다. 할아버지의 출현 이후 밤마다 형광등 아래서 손톱을 깍던 엄마의 행동은 정지된다. 얼굴에는 미소가, 삶에는 활력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어린 남자아이의 차원에서는 불가해한 현상이다. 그토록 엄마가 원망하고 증오했던 외할아버지가 눈 앞에 실존하면서 일어나는 두 모자의 작으면서도 큰 변화는 이 소설이 던져주고자 하는 의미를 잘 메타포한다.

  소설의 말미, 죽기 전에 잠자고 있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는 짱구영감과 이를 목도하는 아이, 그리고 잠에서 깨어 상황을 인식한 엄마의 모습은 소설의 전 서사 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장면이다. 모든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이고, 부녀간의 오롯한 사랑이 확인되는 순간이며,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대답하는 순간이다.

  작가는 이 짧은 소설에서 군더더기 없는 절제된 문장으로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질문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선적 서사가 아니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을 포착화하여 독자에게 전달한다. 1인칭 화자인 남자아이의 기억과 현실과 대화를 극히 절약된 활자로 담아내면서 한 의미 한 의미를 전달하는 작가의 서술이 인상깊다. 굳이 많은 문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간결하고도 담백하게 가족과 사랑의 의미를 잘 그려냈다.

  우리들은 소위 가정이 파괴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결혼한 세 쌍 중에서 두 쌍이 이혼하며, 그로 인한 편부모 자녀들의 증가는 결코 녹록지 않은 실정이다. 모성과 부성의 동시적 공급이 다음 세대의 안정된 성장을 위한 가장 소중한 전제임을 인정한다면,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른 사회상 속에서 진지한 가족의 의미를 질문하는 작업은 응당 고귀하다. 과연 진정한 가족이란 어떤 것일까. 철저하게 '가정예찬론'을 부르짖는 나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은 깊은 사유를 보증하면서 한 단계 성숙한 인간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힘이 된다.

  부끄러움이 존재하지 않고 극히 평범한 것이 특별함으로 중무장되는 곳, 작은 것에서 꿈과 긍정을 보고 동일한 방향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위안과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 작은 웃음이 개그콘서트가 되고 지칠고 힘들 때 비타민과 에너지를 공급받는 곳, 푸른 초장이자 쉴만한 물가가 되는 곳, 바로 그곳이 진정한 가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불과 한 시간이면 완독할 수 있는 이 한 권의 얇은 소설이 가족에 대한 깊이있는 의미를 질문하고 있음을 내가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기에, 이 소설은 내 가슴속에 잘 안착한 듯 보인다. 군더더기나 기름기 없는, 참 깔끔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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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k 2008-08-08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
또 올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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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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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난감하다.

  서평을 쓸 때 반갑지 않은 책들을 간혹 만나곤 한다. 비문학보다 문학에서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매우 뛰어난 걸작이 그러하고, 아주 조악한 졸작이 그러하며, 이도 저도 아닌 밋밋한 작품이 그러하다. 더욱이 가장 힘든 건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강력한 찬사를 받은 명작임에 불구하고 내 자신이 그들의 평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럴 때 서평 쓰는 자의 번민은 깊게 마련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굳이 나쁠 건 없다. 동일한 책을 읽은 후 나와 다른 느낌과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로부터 얻는 다양성 획득이라는 가치는 독서라는 우주의 폭과 깊이를 팽창시킨다는 차원에서 반가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에 요구하는 가장 일차적 기능으로 '감동'을 꼽는다. 감동의 발현 방식은 소설마다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감동적인 소설은 어떤 종류의 감동으로든지 독자의 가슴속 한 켠에 소중히 남아 책읽기에 대한 보람과 희열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감동이 없는 소설은 죽은 소설이며,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논하기 어렵다 하겠다. 활자가 눈과 머리를 지나 가슴에 안착될 때에 비로소 '좋은 소설'로서의 최소한의 자격요건이 성립된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문학의 감동을 위해 활자는 굳이 난해할 필요가 없고, 무게잡을 이유가 없으며, 작가 자신의 나르시시즘에 빠질 필요는 더욱 없다. 어려운 문장이 곧 수준 높은 문학이 아니며, 철학적 문구가 많다고 해서 무게감 있는 활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좋은 문장이 좋은 문학인 것이다. 심원한 척 하면서 뭔가 있는 듯한 기교로만 조합되어진 활자로 인해 독자는 속고 종이는 낭비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작가로 잘 알려진 소설가 코맥 매카시는 저명한 평론가인 해럴드 블룸으로부터 상찬을 받은 세계적인 작가이다. 묵시록적인 걸작이라 평가받는 그의 대표작 『로드』는 '2007년 퓰리처상 수상', '아마존과 뉴욕 타임스 베스트 1위',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선정', '스티븐 킹이 뽑은 올해의 소설 1위' 등 다양한 수식어구를 두르고 있는 화제작이다. 더욱이 '미국 현지에서 감히 <성서>에 비견되었던 소설'이라는 책 표지의 강렬한 문구는 기독교의 권위에 도전할 만큼의 강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 코맥 매카시는 대재앙으로 파괴된 황폐한 지구를 배경으로 희망을 찾아 걷고 또 걷는 두 부자父子의 이야기를 극도의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로 그려냈다. 한밤중에 밤의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 두 부자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사의 구도와 흐름은 단순하다. 일관되게 음울하다. 마지막 단 세 페이지를 제외한 전 서사는 고통스럽고, 어두우며, 우울하고, 절박하다. 따옴표, 쉼표, 숫자 등의 기호들이 일체 누락된 채 오직 건조한 문장으로만 서사는 조합된다. 작가는 활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치의 어두움으로 인류 최후의 암울함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굳이 언급할 만한 이 소설의 특징은 딱 거기까지다.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고, 내 사유를 비틀어 보다 높은 세계 위로 견인해주지 못했다. 마지막 구원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너무나 지루한 문장을 감내해야 했다. 시종일관 지속되는 심원한 철학적 문장과 암울한 미래상의 스케치는 결과적으로 이 정도 수준의 묵시록을 만드는 데 사용된 '오버'로밖에 인지되지 않는다. 신과 자아에 대한 성찰은 『연금술사』보다 못하고, 인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흥미 수준은 『파피용』보다 못하며, 인류의 희망과 구원에 대한 질문과 접근방식은 『바리데기』보다 못하고, 암울한 미래상에 대한 묵시록적 그림은 『생존자의 회고록』보다 못하다.

  그들(아버지와 아들)이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목적과 대상에 대해 작가는 일언반구 없이 묵묵하기만 하다. 남쪽으로 길을 따라 계속해서 걷기만 하는 단선적 플롯은 마지막 구원의 빛을 향해 쏠려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작가가 제시한 '희망'은 서사 속에서 작은 이야기 전복에 불과하며, 시원한 해답을 주지 못한 채 고통의 또 다른 연장을 의미할 뿐이다. 세계의 시작과 마지막을 명징하게 제시하면서, 인류를 인간이 상상하기 힘든 차원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의 맥락으로 쓰여진 <성서>와 비견된다는 이 책의 홍보문구는 코미디와 같다. 이야기의 풍성함, 제시한 질문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문학적 진수에 있어서도 이 책은 <성서>와 비교할 수 없는 저차원이다.

  이 정도의 감동을 얻기 위해 굳이 매카시의 문장을 읽을 필요는 없다. 엇비슷한 주제로 코엘료는 더욱 다양하고 깊이있는 주관적 언론을 선사한다. 이 정도는 정이현의 산문으로도 충분하다. 헤럴드 블룸과 오프라 윈프리가 극찬했다고 해서 내 자신까지 경도될 필요는 없다. 내 돈 주고 직접 산 책이다. 솔직한 평에 대한 권리는 응당 내게 있다. 지루하고, 별 것 없고, 외연적으로 요란하기만 한 활자에 대한 호오는 바로 '내'가 판단하는 것이다. 

  시간이 아까웠다. 정말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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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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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에 물들다 1 - 흔들리는 대지
아라이 지음, 임계재 옮김 / 디오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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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면적의 여섯 배에 달하지만 인구는 300만도 채 안 되는 티베트 자치구에 대해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브래드 피트 주연의 한 편의 영화를 통해서였다. 대학 재학시절 꽤 좋아했던 영화감독 장 자끄 아노가 최고의 스타 브래드 피트와 함께 작품을 만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시 내 가슴은 심하게 설레였었다.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은 세계적인 유명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가 티베트에서 13세 어린 나이의 달라이 라마를 만나면서 겪는 영적인 성숙과 인생의 변화를 담고 있다. 험난한 정치적 격변기를 관통하는 티베트에서의 7년여 세월을 그림으로써 당시 티베트의 역사적 고충을 담담히 담아냈다. 실존했던 인물들의 실화를 아름다운 영상과 감동적인 이야기로 그려내 아직까지도 내 가슴속에 진중히 자리잡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티베트라는 곳은 내 관심 밖의 공간이 되어 왔다. 그러다가 금년에 발생한 티베트 사태를 계기로 티베트 민족이 갖는 지난한 고통의 역사를 반추하게 되었다. 소수민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형편, 독립하고자 하는 처절한 열망, 인권의 참혹한 사각지대에서 겪는 고통과 절규 등은 타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관심도를 재단하기에는 너무나 냉혹한 현실이다.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 권위 '마오둔 문학상' 수상작, 이라는 솔깃한 홍보문구의 띠지를 두르고 있는 『色에 물들다』는 티베트 작가 아라이의 두 권으로 된 장편소설이다. '투스'라 명명되는 티베트 내의 독특한 영주제도를 뼈대로 펼쳐지는 그들 민족의 문화와 종교, 삶과 풍속, 신화와 전설, 번영과 쇠락의 이야기를 흥미있으면서도 처연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 아라이는 특유의 독특한 문체로 중국과 티베트의 암울한 현대사를 한 투스 가문의 흥망성쇠를 통해 잘 그려냈다.

  소설의 이야기는 투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마이치 투스 가문의 둘째 아들인 '바보'의 일인칭 시점으로 흘러간다. 바보이면서도 바보가 아닌 것 같은 '바보'의 말과 행동은 이야기를 이끄는 근본 주체가 된다. 작가는 바보라 불리면서도 똑똑한 사람 이상의 비범함을 발휘하는 소설 속 화자인 바보를 매우 매력적인 인물로 창조했다. 순진무구하고 정과 의리가 있으면서도, 어떨 때에는 나름의 냉철함과 이성으로 차기 투스로의 발군의 자질을 보여주는 바보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소설 속에서 바보가 많은 여자에게 사랑받는 인물로 그려지는 점이 흥미롭다. 자신의 수발을 드는 시녀 촐라로부터 여자와의 육체적·정신적 첫사랑을 경험한다. 촐라가 하인인 세공장이에게 시집을 간 이후 또 다른 시녀와 사랑을 나누고, 아버지의 경쟁자였던 롱꽁 투스의 딸인 타나와는 한 눈에 반해 결혼한다. 기나긴 서사 속에는 바보로 인해 마음이 일렁이는 여자들의 모습과 반대로 그 여자들로 인해 행복과 상처가 교차하는 바보의 순진한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다.

  차기 투스를 놓고 벌이는 형과 동생의 무언적 긴장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 형은 누가 봐도 똑똑한 장남이었지만 바보스러운 동생과 견주어 차기 투스로서의 존재감을 우위에 올려놓지 못한다. 아버지 투스의 명령으로 각기 변방에서 활약하게 되는 두 형제의 대결은, 결과적으로 둘째 아들의 특출한 비범을 드러내며 아버지와 백성들로부터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다. 자객에 의해 칼부림을 당한 형이 죽기 직전 동생에게 "네가 두려웠다"고 말하는 최후의 고백은 바보였지만 바보가 아니었던 동생의 존재적 권위를 명징히 드러낸다.

  그랬다. 바보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그의 비범함은 '기다림'이라는 위대한 기질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매사에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바보의 모습은 어눌한 말투와 엉뚱한 생각과는 묘한 아이러니를 이루며 흥미있는 군상을 만들어낸다. 바보는 시종일관 흥분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악랄하지 않다. 돈이든 권력이든 여자든,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을 향해 의지적으로 쫓아가는 게 아니라 방향만을 잡은 채 묵묵히 한걸음 두걸음 나아가는 한 인간상의 모습이 심히 매력적이다. 마지막 자객에 의해 순응적인 피살을 당하기까지 소설 전체에 흐르는 바보의 아우라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돈과 여자와 권위 등 권력자로서 당연히 누리는 것들에 대한 인간의 상념과 태도를 작가 아라이는 한 지역과 민족의 굴곡진 시대상을 관통하면서 무겁지 않고 편안하고 유머있게 서술했다. 만약 작가의 문장과 독자 접근법이 지나친 무거움으로 일관했다면 그리 매력적인 소설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지만, 결코 무겁지 않게 태연하고 재치있는 문장으로 한 시대를 담아낸 작가의 기교가 돋보인다. '경련 같은 전율을 일으켜 놓은 작품'이라고 표현한 책 뒷면의 수식어구가 결코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근자에 들어 제3세계 문학을 간혹 만나고 있다. 세계 문단계를 주도하고 있는 영미권과 유럽권의 활개로 인해 3세계 문학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지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랍(중동)은 이제 더 이상 역사 흐름의 변방이 아니다. 가장 많은 인구와 세계적 이슈가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최근 이곳에 대한 관심과 조명은 결코 녹록지가 않다. 문학이 시대와 지역과 인간의 역동을 담아내는 거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들 세계의 문학을 천착하는 일은 당연히 소중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소설의 배경이 된 당시 티베트의 시대상을 곱씹는다. 주류 다수민족의 거대한 움직임 앞에서 요동할 수밖에 없는 소수민족의 처절한 비애가 가슴에 와 닿는다. 문학은 한 시대의 의식과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운명과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떠한 형태든 문학은 그 시대의 휴머니즘에 기여하는 주관적 언론이며 동시에 창조적 자유의지이다. 따라서 문학의 궁극적인 기능은 '대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우상적 질서를 흔들고 참된 삶을 '질문'하는 데 있다. 이 소설이 배경으로 삼은 한 시대의 고통이 21세기 현재의 시공간에서도 연장되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참다운 삶을 질문하는 문학적 언론의 진수를 엿본다.

  아라이가 장장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창조한 장대한 서사 『色에 물들다』는 평범하면서 정교하고, 초연하면서 태연하며, 잘 읽히면서도 무거운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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