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에 물들다 1 - 흔들리는 대지
아라이 지음, 임계재 옮김 / 디오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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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면적의 여섯 배에 달하지만 인구는 300만도 채 안 되는 티베트 자치구에 대해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브래드 피트 주연의 한 편의 영화를 통해서였다. 대학 재학시절 꽤 좋아했던 영화감독 장 자끄 아노가 최고의 스타 브래드 피트와 함께 작품을 만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시 내 가슴은 심하게 설레였었다.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은 세계적인 유명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가 티베트에서 13세 어린 나이의 달라이 라마를 만나면서 겪는 영적인 성숙과 인생의 변화를 담고 있다. 험난한 정치적 격변기를 관통하는 티베트에서의 7년여 세월을 그림으로써 당시 티베트의 역사적 고충을 담담히 담아냈다. 실존했던 인물들의 실화를 아름다운 영상과 감동적인 이야기로 그려내 아직까지도 내 가슴속에 진중히 자리잡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티베트라는 곳은 내 관심 밖의 공간이 되어 왔다. 그러다가 금년에 발생한 티베트 사태를 계기로 티베트 민족이 갖는 지난한 고통의 역사를 반추하게 되었다. 소수민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형편, 독립하고자 하는 처절한 열망, 인권의 참혹한 사각지대에서 겪는 고통과 절규 등은 타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관심도를 재단하기에는 너무나 냉혹한 현실이다.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 권위 '마오둔 문학상' 수상작, 이라는 솔깃한 홍보문구의 띠지를 두르고 있는 『色에 물들다』는 티베트 작가 아라이의 두 권으로 된 장편소설이다. '투스'라 명명되는 티베트 내의 독특한 영주제도를 뼈대로 펼쳐지는 그들 민족의 문화와 종교, 삶과 풍속, 신화와 전설, 번영과 쇠락의 이야기를 흥미있으면서도 처연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 아라이는 특유의 독특한 문체로 중국과 티베트의 암울한 현대사를 한 투스 가문의 흥망성쇠를 통해 잘 그려냈다.

  소설의 이야기는 투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마이치 투스 가문의 둘째 아들인 '바보'의 일인칭 시점으로 흘러간다. 바보이면서도 바보가 아닌 것 같은 '바보'의 말과 행동은 이야기를 이끄는 근본 주체가 된다. 작가는 바보라 불리면서도 똑똑한 사람 이상의 비범함을 발휘하는 소설 속 화자인 바보를 매우 매력적인 인물로 창조했다. 순진무구하고 정과 의리가 있으면서도, 어떨 때에는 나름의 냉철함과 이성으로 차기 투스로의 발군의 자질을 보여주는 바보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소설 속에서 바보가 많은 여자에게 사랑받는 인물로 그려지는 점이 흥미롭다. 자신의 수발을 드는 시녀 촐라로부터 여자와의 육체적·정신적 첫사랑을 경험한다. 촐라가 하인인 세공장이에게 시집을 간 이후 또 다른 시녀와 사랑을 나누고, 아버지의 경쟁자였던 롱꽁 투스의 딸인 타나와는 한 눈에 반해 결혼한다. 기나긴 서사 속에는 바보로 인해 마음이 일렁이는 여자들의 모습과 반대로 그 여자들로 인해 행복과 상처가 교차하는 바보의 순진한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다.

  차기 투스를 놓고 벌이는 형과 동생의 무언적 긴장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 형은 누가 봐도 똑똑한 장남이었지만 바보스러운 동생과 견주어 차기 투스로서의 존재감을 우위에 올려놓지 못한다. 아버지 투스의 명령으로 각기 변방에서 활약하게 되는 두 형제의 대결은, 결과적으로 둘째 아들의 특출한 비범을 드러내며 아버지와 백성들로부터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다. 자객에 의해 칼부림을 당한 형이 죽기 직전 동생에게 "네가 두려웠다"고 말하는 최후의 고백은 바보였지만 바보가 아니었던 동생의 존재적 권위를 명징히 드러낸다.

  그랬다. 바보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그의 비범함은 '기다림'이라는 위대한 기질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매사에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바보의 모습은 어눌한 말투와 엉뚱한 생각과는 묘한 아이러니를 이루며 흥미있는 군상을 만들어낸다. 바보는 시종일관 흥분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악랄하지 않다. 돈이든 권력이든 여자든,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을 향해 의지적으로 쫓아가는 게 아니라 방향만을 잡은 채 묵묵히 한걸음 두걸음 나아가는 한 인간상의 모습이 심히 매력적이다. 마지막 자객에 의해 순응적인 피살을 당하기까지 소설 전체에 흐르는 바보의 아우라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돈과 여자와 권위 등 권력자로서 당연히 누리는 것들에 대한 인간의 상념과 태도를 작가 아라이는 한 지역과 민족의 굴곡진 시대상을 관통하면서 무겁지 않고 편안하고 유머있게 서술했다. 만약 작가의 문장과 독자 접근법이 지나친 무거움으로 일관했다면 그리 매력적인 소설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지만, 결코 무겁지 않게 태연하고 재치있는 문장으로 한 시대를 담아낸 작가의 기교가 돋보인다. '경련 같은 전율을 일으켜 놓은 작품'이라고 표현한 책 뒷면의 수식어구가 결코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근자에 들어 제3세계 문학을 간혹 만나고 있다. 세계 문단계를 주도하고 있는 영미권과 유럽권의 활개로 인해 3세계 문학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지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랍(중동)은 이제 더 이상 역사 흐름의 변방이 아니다. 가장 많은 인구와 세계적 이슈가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최근 이곳에 대한 관심과 조명은 결코 녹록지가 않다. 문학이 시대와 지역과 인간의 역동을 담아내는 거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들 세계의 문학을 천착하는 일은 당연히 소중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소설의 배경이 된 당시 티베트의 시대상을 곱씹는다. 주류 다수민족의 거대한 움직임 앞에서 요동할 수밖에 없는 소수민족의 처절한 비애가 가슴에 와 닿는다. 문학은 한 시대의 의식과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운명과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떠한 형태든 문학은 그 시대의 휴머니즘에 기여하는 주관적 언론이며 동시에 창조적 자유의지이다. 따라서 문학의 궁극적인 기능은 '대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우상적 질서를 흔들고 참된 삶을 '질문'하는 데 있다. 이 소설이 배경으로 삼은 한 시대의 고통이 21세기 현재의 시공간에서도 연장되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참다운 삶을 질문하는 문학적 언론의 진수를 엿본다.

  아라이가 장장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창조한 장대한 서사 『色에 물들다』는 평범하면서 정교하고, 초연하면서 태연하며, 잘 읽히면서도 무거운 비극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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