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이후 당대총서 7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강문구 옮김 / 당대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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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 일어난 공산주의(또는 현실 사회주의) 정권의 도미노 식 붕괴 혹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투항은 하나의 사건을 넘어서 그동안 세상을 휩쓸었던 맑스(마르크스)와 레닌주의의 폐기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자유주의의 승리’로 요약하고,

이로 인하여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세계가 영원이 이어질 것이라는 얼치기 헤겔주의가 주류를 이루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붕괴 이후의 상황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위와 같은 전망이 얼마나 낙관적이고 한심한지 잘 알고 있다.

세상은 더 혼란스러워졌고, 어두워졌다.

 

뒤늦게 읽은 월러스틴의 ‘자유주의 이후’는 이런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흐름에 대해서 적절한 비판을 하고 있고, 자유주의에 대한 혹은 근대사회의 주요 사상적 흐름인 ‘보주수의-자유주의-사회주의’라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그의 의견은 때로는 과감하고, 때로는 의문스럽게 다가오게 되지만 분명 의미 있는 의견이고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그의 주저인 ‘근대세계체제’와 같이 철저하게 학문적이기 보다는 보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학문적인 느낌보다는 에세이와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물론, 읽게 된다면 이게 무슨 에세이냐고 반문을 하겠지만...

 

그는 ‘자유주의 이후’에서 ‘자유주의의 승리’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그동안 우리가 서로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세 가지의 이데올로기가 결국 자유주의 하나로 수렴될 수 있고, 세 가지 변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결국 자유주의라는 것은 기술의 민주주의와(예컨대 자본주의의 세계화나 기술로 인한 근대화 등) 해방의 민주주의(말 그래도 전면적인 민주주의) 중 기술의 민주주의만 실현하려고 하고 있고, 해방적인 부분에서는 최대한 점진적인 혹은 부분적인 민주주의만을 이루게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자유주의라는 것은 진정으로 변혁을 혹은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는 세력 혹은 계급들에 대한 순응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론일 뿐이라는 것이고, 1989년의 사건은 이러한 자유주의 프로그램이 더 이상 자신의 프로그램으로는 모든 것을 머뭇거리게 만들지 못하게 되어버린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가 이제 종언을 고한다고 해서 그는 새로운 시대에 대해서 낙관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1989년의 사건으로 인해서 결국 우리는 다시금 근대시대 초기의 혼란기와 동일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지금 이 시기(그는 1968년 혹은 1989년부터 시작해서 50년간의 기간이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에 우리가 어떤 선택과 실천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새롭게 시작할 시대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되도록 보다 민주적이고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최대한 해결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몇 가지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기 보다는 다양한 문제의식을 혹은 시각을 제공하는데 머무르고 있다. 그는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모습인 직접적인 방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보다 안정적인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붕괴되었다고 해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보다 더 첨예한 대립과 문제점들을 양산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는 냉전 이후의 전세계적인 문제점과 (특히) 아프리카의 문제점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고, 자유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위해서 세 가지의 이데올로기를 논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유주의라는 것이 그리고 세 가지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근본적인 해방과 민주주의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지배계급의 수사일 뿐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보다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회의적으로 생각하게 된 맑스의 시각과 분석을 다시금 검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맑스의 시각 중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을 수 있는 시각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전망함으로써 자본주의가 그리고 자유주의가 극복시킬 수 없는 모순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논의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헤게모니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두 개의 사례로 말하는 이란의 호메이니와 이라크의 후세인에 대한 그의 논의는 꽤 흥미로운 시각이었다.

 

기본적으로 월러스틴은 브로델과 맑스의 시각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세계체제론의 입장에서 전체적인 논의를 이끌어가고 있고, 자신의 개인적인 전망을 덧붙이고 있다. 각각의 논의들이 독립적이면서도 전체적인 짜임새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꽤나 흥미로운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부터 공산주의 붕괴까지의 일련의 역사적 흐름과 월러스틴 개인의 전망과 시각이 뒤엉키면서 그의 논의가 때로는 복잡하게 다가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일관성을 갖고 있고, 지속적으로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간간히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있다.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논의를 보여주고 있고,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도록 만들어주고 있는 월러스틴의 ‘자유주의 이후’는 앞으로도 꽤 중요한 시선을 제공할 것 같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 같지만...

 

 

참고 : 한국에서는 그의 업적에 비해서 월러스틴에 대한 논의가 그다지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 좀 묻혀있다고 해야 하나? 개인적으로는 그에 대한 논의가 보다 더 활발하게 이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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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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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은

혹은 ‘책과 관련된 이야기들에 대한 책’은

(글이 아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으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글을(혹은 수다를) 읽음으로써 얼마나 자신과 닮았는지 그리고 자신들에 비해서 얼마나 더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극성맞은지를 확인하며 동질감과 함께 책에 대한 애정을 더욱 갖도록 만들고 있다.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 시키기’도 집안대대로 책에 한이 맺힌 사람들만이 있는 것 같은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경험들을 여러 일화들을 통해서 책을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책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써내려가고 있다.

 

그녀가 어떻게 자신이 아끼는 책들을 남편의 책들과 하나의 서재로 꾸미게 되었는지를 시작으로 그녀의 개인적인 책에 대한 애정과 책과 관련된 생각들을 들려주며 그녀의 경험과 그녀의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뒤돌아보게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험하게 책을 다루기 때문에

책을 어떻게 다루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 인상 깊었고,

몇몇 유머들과 책에 대한 인용들이 흥미로웠다.

 

기본적으로 책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읽는 것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녀의 수다에 기분 좋게 동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쁘게 지내는 시간에는 이렇게 책을 갖고 수다를 떠는 글을 읽으며 무난하게 ‘읽기’를 이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방식도,

관리하는 방식도,

사랑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 일 것이다.

 

그녀의 방식을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지만,

그녀의 책에 대한 애정에는 감탄하게 된다.

 

우리는 얼마만큼 무언가에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책에 대해서 갖고 있는 애정을 조금이라도 본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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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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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고,

분류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랭 드 보통을 어떤 작가로 분류하려고 할까?

별다른 생각 없이 판단한다면 수필과 에세이 작가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그가 다루는 주제를 생각한다면 조금은 애매한 입장을 갖게 될 것이다.

 

수필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특별한 형식 없이 편하게 써내려가서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방식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알랭 드 보통이 들려주는 주제들은 보다 일관성을 갖고 있고, 다양한 참고문헌들을 토대로 자신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인문학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는 인문학 특유의 건조함과 분석력 보다는 여러 입장들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여러 입장들을 정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학자의 글이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작가의 위치에서 인문학 적인 방법론으로 논의를 이끌어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다른 글들을 읽지 못해서 다른 작품들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안’에서는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는 불안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분석의 주제를 잡고 있고, 불안에 대한 정의와 어째서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혹은 불안감을 최소화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은 과거 시대들에 비해서 현대인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커지게 된 이유는...

과거(얼마 전의 과거가 아닌 중세 시대나 그 이전의 시대적 과거)에는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이 지금은 누구나 느끼게 된 이유는...

 

알랭 드 보통은 근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의 주된 원인은 민주주의로 인해서 최소한의 평등이 이뤄진 세상과 함께 자본주의 체제로 인한 일반인들의 노동조건의 변화로 인해서 느끼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즉, 상대적 박탈감과 절대적 빈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기본적인 민주주의가 이뤄진 덕분에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 / 사회적인 자유를 느끼게 되었지만 과거의 신분제 사회에서는 아예 비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평등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우러러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려서 그들의 모습을 보며 느끼게 되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감정이 나타나게 되었고, 불안정한 고용조건과 그로 인해서 느끼게 되는 경제적인 긴장감은 이런 불편한 감정을 보다 더 큰 감정인 불안감을 안겨주게 된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고, 이런 진단은 어느 정도는 신선하고 의미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알랭 드 보통은 이런 진단과 더불어 어떻게 하면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해결방안을 내놓고 있는데, 이 해결방안에는 철학, 종교, 예술, 자본주의적 삶으로부터 벗어난 삶 등이 있다.

어떤 부분은 동의하게 되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기도 하는데, 전반적으로는 그럴듯한 분석들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해결방안에 대해서는 조금은 애매한 입장을 갖게 된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하고 있는 해결방안은 기본적으로는 그런 불안감을 잘 해소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고, 혹은 억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보헤미안의 삶과 같이 사회의 지배적인 삶의 방식에서 거리를 두는 방법들도 제시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회체제에 대해서 전복적인 생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사회체제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 혹은 문제점에 대해서도 크게 다루고 있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입장이 지나치게 모범적이거나 문제 자체를 개인의 의지로 벗어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물론, 그가 말하는 해결방안을 통해서 보다 (정신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일종의 진통제와 같은 의미를 갖는 해결책이지 병의 원인 자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는 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견이 그에 대해서 지나친 요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불만스러운 기분을 갖게 되기보다는 나름대로 통찰력 있는 그의 시각과 다양한 일화들과 철학 및 소설들의 인용에 감탄하는 시간이 더 많았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뛰어난 문장가이고 수필가일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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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화 잭 런던 걸작선 3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궁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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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두지배계급을 움직이는 최고 추진력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잭 런던의 ‘강철군화’는 말 그대로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탁월한 분석력을 갖춘 최고의 소설이자 예언서일 것이다. 비록 현실은 시궁창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에 따라서는 즉, 사회주의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갖고 있거나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작품이 ‘악의적인’ 판타지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극단적이고 자기들에게만 유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고, 그들(만)이 원하는 결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판타지이고 악의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 우선 말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신념과 사회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믿음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잭 런던이 보았던 당시의 사회와 그가 그 사회를 통해서 분석하고 예견한 사회가 지금 경제 위기로 인해서 발생하고 있는 현실과 얼마나 유사한지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처럼 혁명은 진행되지 못할지라도,

그의 분석을 통해서 어떤 문제로 인해서 그리고 어떤 집단들의 의도에 의해서 사회가 운영되고 있는지 그리고 불만을 잠재우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맑스(마르크스)에 필적할 지적수준이며,

육체적으로도 건장한 노동계급의 모습인,

철저한 혁명가이면서 이론가인(즉, 현실에서는 딱히 볼 수 없는 존재인... 해설자나 기타 평론가들이 니체의 초인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는데, 과연 1908년에 니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당시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을 무시하는 뜻이 아니라 니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어니스트의 곁을 지켰던 그의 아내이자 동지인 에이비스가 적은 글들을 27세기에 발견되어 당시의 시대를 뒤돌아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은 독특한 구성인 듯 하지만, 책을 읽게 된다면 각주를 읽을 때에만 그런 기분을 갖게 되지 전체적으로는 일반 소설 혹은 르포 문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어니스트라는 캐릭터가 워낙 독창적이고,

잭 런던이 묘사하고 예견하는 당시의 그리고 이후의 시대가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에 읽는 재미를 갖고 있고, ‘맑스의 자본론을 아주 쉽게 이해시키려고 한다면 저렇게 얘기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꿈의 수학’과 같은 에피소드는 단순히 소설로써만 훌륭한 내용이 아니라 사회분석 혹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력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비록 그의 예견대로,

그리고 그의 분석처럼,

세계가 그리고 혁명이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의 분석에서 많은 의미 있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부분들이 많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20세기 초에 발표한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순간적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에 적용해도 크게 틀려질 것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잭 런던의 통찰력은 감탄하게 만들고 있고,

그의 글에서 그의 열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타오를 것 같은 열정을 느끼고, 그와 같은 열정을 갖고 싶으면서도 어니스트가 에이비스에게 피곤하다는 듯이 말하는

 

미래의 환상을 보는 게 지긋지긋해요.

잊고 싶어요.

 

라는 말도 또한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간만에 꽤 흥미 있는 소설을 읽은 것 같다.

날카로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재미를 잃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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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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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문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는...

그렇게 소개되고 있으니 아마도 그러리라 생각되는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는 제목을 통해서는 사회과학적인 느낌을 갖게 되지만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소설을 소개하는 글처럼 미스터리와 로맨스가 적절히 안배되어 있는 소설이다.

 

쉽게 말한다면 위와 같이 미스터리와 로맨스를 적절히 뒤섞은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조금 더 젠체하듯이 말을 한다면 최근의 여러 작가들이 시도하고 있는(혹은 시도하려고 노력하는) ‘텍스트 속의 텍스트’와 ‘텍스트를 둘러싼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다른 실험적인 성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소설가들 또는 남아메리카 작가들의 시도와 같이 보다 급진적인 느낌을 갖기 보다는 일종의 조미료 같은 혹은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시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난데없다는 느낌보다는 이야기에 잘 녹여져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작가의 시도가 실험적이기 보다는 재치 있다는 생각이 더 앞선다고 해야 할까?

 

전체적으로는 늙은 노인 레오와 알마라는 십대 소녀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진행시키고 있지만, 그들과 함께 그들의 추억과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까지 곁들여서 얘기를 하기 때문에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다. 또한 이야기가 진행되며 풀려지는 의문들과 그 의문들을 통해서 앞의 내용들이 어떤 실마리를 갖고 있었는지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어서 꽤나 짜임새 있는 구성을 갖고 있다.

 

숨겨진 진실과

슬픈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색다른 시도와 구성은 참신한 느낌을 갖도록 만든다.

다만, 아쉽게도 개인적으로는 좋은 구성과 시도이지만 흥미롭기는 해도 재미있다는 느낌이 덜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이야기에 신경을 썼더라면... 이라는 아쉬움을 갖게 만들었다.

 

간간히 등장하는 멋진 문장들 덕분에 읽는 것이 후회스럽지는 않았고,

조금은 전형적인 소설들의 이야기들에 질린 사람들에게 그리고 약간은 독특한 구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멋진 로맨스 소설을 기대했다면... 당장 책을 손에서 놓아야 할 것이다.

또한 분석적으로는 텍스트라는 것을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작가의 시도에 관심을 갖을 수 있을 것 같다.

 

 

참고 :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 중에서 내 생일과 동일한 날짜가 나온 책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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