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1890~1940
임석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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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관련된 책들을 조금씩 접하면서 임석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만 실제로 접하기는 뒤늦은 것 같다. 이름만 접했을 뿐 실제로 접하지는 않고 있었으니 항상 그렇듯이 게으름 때문인 것 같다.

 

건축과 미술이라는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 드는 두 분야를 연결하여 서로를 바라보도록 만들고 있는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1890~1940’는 근대 초기부터 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의 유럽과 미국의 미술과 건축의 흐름을 통해서 시대적인 변화로 인해서 그리고 각 국가별 입장에 따라서 어떤 미술과 건축적 입장을 보였고 상호간에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다루고 있다.

 

어쨌거나 건축학자이기 때문인지 건축과 미술을 동등하게 바라보려고 애쓰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건축적 흐름에 미술의 경향들을 보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거기에 역사적 / 정치적 / 사회적인 변화를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에 종합적이고 다양한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은 장점이면서도 조금은 더 파고들지 못해서 아쉽다는 느낌도 들게 된다.

 

대략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탁월하겠지만 더 파고들기 위해서는 각자의 노력을 필요로 할 것 같다.

 

건축과 미술의 흐름에 서로의 유사성과 동시대성을 보여주고 있고, 거기에 사회적인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건축과 미술 그리고 사회를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전공 서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보다 다양한 관점을 갖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미국과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혁명기의 러시아와 소련의 건축과 미술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외의 국가 출신의(혹은 그 외의 국가에서 활동한) 건축가와 미술가들은 비중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가령 스페인 출신의 가우디는 살짝 이름만 언급된다). 정치 / 사회적 흐름과 미술까지 연관시켜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략한 것 같은데... 조금은 아쉽다.

 

시리즈로 출판된 책인데, 아쉽게도 다른 시대와 관련된 책들은 구하지 못하고 있어서 읽기를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생각보다 다양한 자료와 분야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미술과 건축에 관한 입문서로서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참고 : 임석재는 프로이트에 대해서 약간은 오해를 하고 있거나, 너무 편협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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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파이돈 향연, 문예교양선서 30
플라톤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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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라고 말하기 보다는 ‘대부분’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아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보다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크라테스가 어떤 과정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말들을 하였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그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기만 할 뿐이다.

 

플라톤이 써낸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함께 수록된 그 외의 글들은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만 있을 뿐인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생각과 말을 했던 사람인지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고, 읽다보면 알고자 하는 의욕을 꺽기에도 충분한 방법일 것이다.

 

‘변명’과 ‘크리톤’ 그리고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어떤 주장을 펼쳤고, 어떤 오해를 받았고 그에 대한 반박을 했는지 그리고 재판에 대한 결과에 따라 죽음을 맞기 전까지 자신의 생각을 정돈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그의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는지를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인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논의를 전달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고, 그 대화 속에 소크라테스와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그들은 논리적이고 모순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는 논리적이지 않고 모순이 있으며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반박하며 자신들의 생각과 입장을 전달하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허구를 들춰냄으로써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제로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있고 이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고 있다.

 

아쉽게도 소크라테스의 입장은 매우 논리적이고 상대방이 갖고 있는 논리의 모순과 허구를 들춰내는 것에는 성공적이지만 그 방식이 의도와는 다른 불편함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불만을 가진 이들에게 감정적인 반응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는 걸맞지 않은 고발을 당하고 판결을 받게 되는 것 같다.

 

그는 그렇게 허구를 들춰내고 모순을 지적함과 함께 반대로 모순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매우 논리적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의견은 수긍하게 되면서도 어쩐지 논리를 갖고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도 하고, 그의 입장과 생각에 접근하기도 하지만 플라톤의 글은 다수의 그릇됨과 소수의 올바름에 대해서, 국가와 사회적 합의에 대한 존중과 거부에 대해서, 질서와 안정 그리고 변화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읽혀나가다가도 생각에 잠기게 만들게 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이 진보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한 사람들의 글을 접한다면 보다 그에 대해서 보다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 이상으로 양면적인 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가 얼마나 아테네를 사랑했는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변명’을 통해서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논리적 반박을 하고,

‘크리톤’을 통해서 자신의 철학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다.

‘파이돈’은 논리성과 주체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전달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향연’을 통해서 에로스라는 주제를 갖고 다양한 관심을 엿보여주고 있다.

 

조금은 어렵기도 하고, 논리를 따라가다가 논리 속에서 길을 잃게 되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생각과(그리고 플라톤의 생각과) 그 생각에 따른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깨닫고 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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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유로 세대
안토니오 인코르바이아.알레산드로 리마싸 지음, 김효진 옮김 / 예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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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46304450

 

 

 

2007년에 발표되어 한국 사회에 큰 화제를 뿌렸고 영향을 끼쳤던,

현재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데 큰 생각과 시각의 틀을 제공했던 ‘88만원 세대’라는 책과 신조어가 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좀 더 이른 시기에 유럽에서도 이와 유사한 ‘천 유로 세대’라는 신조어가 얘기되기 시작했고, 둘은 차이점 보다는 유사점이 큰 용어였고 둘 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구성되어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20 - 30대 비정규직 젊은이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소모품처럼 다뤄지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소속될 수 없는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슬픈 낙인이었다. 비참하고 서글프기만 한 의미를 갖고 있는 ‘88만원 세대’와 ‘천 유로 세대’에 대한 뚜렷한 사회적 해결 방안은 도출되지 않고 있고, 누구나 의미 있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점점 더 깊어지고 그렇게 깊어져만 가는 문제가 언제 터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은 그저 문제가 커지기만 할지도 모른다.

 

이런 세대를 위한 많은 말들과 의견, 더 지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하기만 할 뿐인 ‘담론’들이 들리기는 하지만 실제 그 세대들이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그들을 분석하고 파악하려는 이들에 의해서만 그들은 다뤄지고 논의되고만 있을 뿐이었었다.

 

이런 좌절의 세대에 대한 책들 중에서 안토니오 인코르바이아와 알레산드로 리마싸의 ‘천 유로 세대’는 그렇기 때문에 보다 의미를 갖고 다뤄져야 하는 책일 것이고 자신들에 대한 솔직한 고백담일 것이다.

 

네명의 천 유로 세대 젊은이들의 내용으로 담겨져 있고, 그들의 애환과 고달픔 속에서도 젊은이들의 경쾌함을 잃지 않고 있는 내용을 담은 ‘천 유로 세대’는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매달을 근근히 살아가고 있고, 그렇게 겨우 삶을 꾸려나가는 와중에도 현실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것과 자신이 획득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 사이에서 항상 계산하고 선택해야만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네명의 젊은이 중 중심인물인 클라우디오를 통해서 이들의 일상과 삶의 모습 그리고 그 삶을 통해서 그들의 고뇌와 좌절 그리고 고난을 엿보게 하고 있고, 그들의 생활과 삶을 통해서 지금을 살아가는 젊음과 좌절만 갖고 있는 좌절의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후반부는 이런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에 대해서 그들보다 더 좋지 않은 형편에 놓인 노숙자 노인을 통해서 그들을 위로하고 있고, 지금의 현실에 안주할 수 밖에 없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들이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 좀 더 진취적이고 주눅이 들어 좌절만이 남은 삶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긍정적인 시각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한 시대의 중심 세대에 대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 세대를 분석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보다는 가볍고 경쾌한 청춘소설과 같은 글쓰기를 통해서 보다 그들을 직접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다가가게 되는 것 같다.

 

작가가 인터뷰를 통해 얘기했듯이 좌절할 권리는 없는 자신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지기를 꿈꾸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저 좌절하기만 했을 뿐인 내 삶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더 부족하고 불안하기만 한 자신들의 삶을 그들은 조금은 즐기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삶을 살아감으로써 내가 놓쳤던 그리고 잃었던 것들을 잠시 깨닫게 해주고 있다.

 

재미난 대중소설이면서,

지금 세대를 잠시 생각해보기도 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이었다.

자신에 대해서 당당하게 얘기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국은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어떤 대중소설이 있는지 혹은 있었는지 잠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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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의 구조변동 - 부르주아 사회의 한 범주에 관한 연구 나남신서 42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한승완 옮김 / 나남출판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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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읽었던 책이기도 하고,

처음 읽었을 때도 다시금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던 책이었는데,

요즘 하도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글들과 말들을 자주 접하게 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세상이 변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말하는 이들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읽어보게 되었고, 역시나 잘 모르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며 읽고 있는 것 같은 마음에 불만만 쌓이게 되고, ‘소셜 네트워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도 역시나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될 것에 관심을 갖게 되어 시간 낭비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불만을 듣고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에 대해서 좋지 않은 시각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첫 번째 저작이라고 볼 수 있는 ‘공론장...’은 쉽게 지나칠만한 내용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버마스는 근대사회 혹은 부르주아 사회의 공론장의 특성에 관해 논의하며 이전 사회와 어떤 차이와 특성을 갖고 있는지와 함께 그 특이점이 어떻게 사회적인 변화를 야기하게 되었는지와 변화를 보이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며 앞으로의 사회에서 공론장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하는지를 논하며 사회의 변화와 긍정성을 모색하고 있고, 이런 ‘무언가에 대해서 논의하고 의견을 제시한다’는 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의사소통...’까지 이어지게 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의 관심이 단순히 잠시 갖게 되었던 관심이 아니라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첫 번째 저작인 ‘공론장...’에 대해서 다시금 관심과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에서 과거 근대 이전의 중세 시대의 공론장 혹은 공공성을 간략하게 다루며 이후의 근대 사회와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 분석하고 있고, 이 공공성 그리고 공론장의 변화를 중심으로 사회의 변화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처음에는 문화와 관련된 내용이 주로 논의되던 공론장의 어떻게 정치적인 논의까지 이뤄지게 되었는지와 읽기 능력이 가능하게 된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이를 통해 커피하우스, 살롱 등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토론이 이뤄지게 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그리고 관심이 확산되었고 이것이 이후의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는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충분히 변화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힐 수 있으리라고 하버마스는 판단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공론장의 의미와 정치적 기능을 분석하고 있고, 그 분석 이후 칸트와 헤겔 그리고 맑스(마르크스)의 시각을 통해서 그 의미와 이념 / 이데올로기와 한계를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한계를 파악함으로써 변증법 적인 극복이 가능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긍정성과 함께 그 한계 그리고 사회의 변화와 발전으로 인해서 변질되는 공론장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데, 그는 자본주의와 대중문화, 복지국가로의 변화가 공론장의 변화에 가장 큰 중심을 이루고 있고, 이런 변화가 공론장의 긍정적인 기능을 붕괴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개선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하버마스의 긍정적인 시각이 조금은 섣부른 시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개선되는 점도 있기는 하지만 점점 더 악화되는 부분이 더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하버마스가 공론장의 기능을 저해하게 되는 요인으로 꼽은 요소들이 더욱 커져만 가고 있고, 이로 인해서 공론장의 기능은 거의 사라지게 된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의 예측은 많이 빗나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공론장의 역할을 하리라 기대되는 ‘소셜 네트워크’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되리라 생각되기 보다는 수없이 다양한 의견들이 엇갈리고, 연결되고, 논의되기 보다는 서로 자신의 생각을 떠드는 것에 급급하기만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더 앞서기만 하고 더 빨리 새로운 소식을 전하기에만 몰두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만을 하게 된다.

 

이것 또한 너무 이른 판단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며 변화를 바라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좀 더 적절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책 한두권을 읽고는 무리일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보기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첫 시작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내용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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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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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데 이유가 필요하나?

 

라며 퉁명스럽게 반문하게 되는 제목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국내에서도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알랭 드 보통의 첫 번째 작품이고 최근의 작품들과는 조금은 다른 방식의 글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첫 번째 작품부터 그다운 글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 작품이다. 또한 약간은 뻔하게 느껴지는 제목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해서 역시 알랭 드 보통이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기도 하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사랑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 끝 이후의 새로운 시작까지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고, 그렇게 담겨진 내용 속에서 알랭 드 보통의 이후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관심들(여행, 건축, 안정을 찾으려는 심리 등)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할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마련이고, 많은 부분은 동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모든 것을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소설의 형식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저 주인공의 독백과 대사 그리고 생각을 단상으로 적듯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달하고 있고, 그 감정을 깊이 있게 음미하고 탐색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평가인 것 같은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는 남성 주인공을 통해서 그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클로이라는 여성과의 관계와 그 관계로 인해서 사랑을 느끼고, 그렇게 느끼게 되는 과정과 그 과정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다양한 상념들, 그리고 깊어지는 사랑과 관계로 인해서 변해가는 감정과 행동, 주변과 일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을 내밀하고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고, 그 깊이 들여봄으로 인해서 우리 자신들도 그동안 겪었던 사랑들 속에서 우리도 그와 그녀처럼 느꼈지만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느낌들을 기억하게 만들고 다시금 환기시키도록 만들고 있다.

 

우연한 만남과

그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느껴지게 된 사랑

그렇게 다가온 사랑에 빠져 들어가는 과정들과

그 과정으로 인해서 더욱 깊어지는 사랑

그 사랑에 대한 다양한 비유와 은유 그리고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통찰력 까지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그와 관련된 그리고 그로 인한 수많은 것들을 이 작품은 정교하게 담고 있고, 그렇게 담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뜨겁고 감미롭던 사랑이 얼마나 차갑고 고통과 상처를 만들어내기도 하는지를 그 모든 것의 끝을 어떻게 향하게 되는지를 집요할 정도로 파고들기도 하고 있다.

 

아름답기만 하던 사랑이 점점 이전과 달라지고, 그 달라진 사랑에 당황스러워하는 모습과 함께 변해버린 사랑으로 인한 슬픔까지 따라가며 그 끝 이후의 새로운 사랑으로 향하는 과정까지 찾아가고 있는 이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이면서 사실적인 작품은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건조하게 사랑을 분석하고 바라보고 있기도 한 것 같다. 물론, 그러면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냉소하기 보다는 충분히 옹호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하지만 그 솔직함과 정교함에 조금은 거부감을 갖게 되기도 하기 때문인지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선호하게 되지도 않고 매도하게 되지도 않는 것 같다. 사랑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목적이 성공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성공함으로써 오히려 사랑스럽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생각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경험했던 사랑이 좋은 결말을 맺었던, 그렇지 않던 사랑이든...

어쨌거나 사랑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랑일 뿐일 것이다.

 

모든 것에 관심이 시들어지는 요즘이기 때문인지 이렇게 사랑에 대해 충실한 분석을 하고 있는 작품을 읽으면서도 작품의 재미보다는 지루함을 더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충분히 좋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루한 마음에 끝까지 읽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작품을 작품으로서 읽기 보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비춰보며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읽기 보다는 잃은 것들을 읽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좋은 내용이고 흥미로운 글이라는 생각보다 짜증스럽게만 만드는 것 같다.

 

 

 

참고 : 알랭 드 보통이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고, 흔히 말하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는 그 지식과 교양 중에서 유독 맑스(마르크스)에 대해서만 오해를 하고 있거나 지나치게 혐오를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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