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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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근처 하천을 달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움츠렸던 몸이 하천변에 핀 벚꽃처럼 화사하게 깨어났다. 겨울 동안 쉬었던 뻣뻣한 몸도 시원한 봄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하얀 꽃잎이 되었다.
  오래전에 읽다가 포기한 책이 있었다. 미국의 대표하는 소설이라 할만큼 문학적 가치와 대중적인 인기를 동기에 받고 있는 고전으로 그리 두꺼운 책도, 어려운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상하게 읽어내기가 어려웠던 책이다.
  새봄을 맞아 묵은 옷을 정리하듯 오래전에 묵혀두고 정리하지 못했던, 읽어낼 수 없었던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펼쳐든다.

  하지만 역시 종잡을 수 없었다. 뭐랄까, 이야기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꾸 끊어지는 느낌이랄까. 하나의 이야기에 빠질만하면 전체상황과 동떨어진,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문장에 난감해졌다. 원작의 느낌도 이런 것이었을까? 어쩌면 번역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전체의 흐름보다는 문장의 구조에만 집착한 단편적인 번역이 미국을 대표한다는 고전을 난해하게 만들었지 싶다. 더욱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1910년대 후반의 미국, "무너져가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더 책읽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법, 인터넷을 뒤져 개츠비의 줄거리를 찾아본다. 그러자 막혀있던 내용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런 내용이 있었는데 난 왜 몰랐을까. 등장인물이 헛갈려서인가? 아니면 조금은 난해한(사실이 그렇다) 번역에 신경을 쓴 나머지 줄거리의 흐름을 놓쳐버린 것인가?" 아무튼 이제야 본 괘도에 올라온 느낌이다. 흑흑, 1/3 가량 읽은 책이 아깝긴 하지만 다시 첨부터 봐야겠다. 나야말로 소소한 번역문에 집착하지 말고 이야기와 그 속내에 집중하며 읽어야겠다.

  내(닉 케러웨이)가 이사 간 집 옆에는 개츠비라는 젊은 거부가 살고 있다. 그는 매일같이 파티를 열지만 정작 그는 술을 마시지도 않을 뿐더러 파티에 한발 비껴선 모습이다. 그의 이런 모습이 세간의 흥미를 자극했지만 사실은 5년 전에 헤어졌던 여인,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고 화려한 파티를 통해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톰 뷰캐넌이라는 사람의 아내였기에 데이지와 친척관계인 내가 중간에서 만남을 주선하게 된다.
  개츠비와 만난 데이지는 돌아온 옛사랑, 그것도 거부가 되어 돌아온 개츠비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의 남편(톰 뷰캐넌)이 이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발생한 사고를 통해 개츠비의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개츠비는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이는 자신을 떠나간 그녀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인 동시에 사랑을 지킬 수 있는 열쇠가 되리라 굳게 확신했다. 개츠비는 그렇게 그녀를 찾은 듯 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면에 감추어진 질투는 개츠비의 금빛 차양을 거침없이 파괴해버렸다.
  인간의 사랑, 하지만 돈과 권력에 의지한 사랑은 늘 질투와 좌절을 불러왔다. 우리를 둘러싼 물질문명은 언제 사그라질지 모르는 신기루였기에 이를 붙잡기 위해선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권력이 필요했다. 결국 커져버린 배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개구리처럼 인간의 그릇된 욕망에 순수했던 사랑도 죽어버렸다.
  개츠비는 한창 산업화와 주식시장의 급증으로 호황을 누리던 20세기 초의 미국사회에 닮아 있었다. 무일푼의 젊은이에서 순식간에 대부호로 성장했고 연일 파티를 열며 자신의 부를 과시했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사랑마저도 살수 있다고 믿었던 세상이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대공황으로 산산 조각나 버렸듯이 개츠비의 꿈도 이네 사그라져버렸다. 


  아침 출근길에 바닥에 쌓인 하얀 꽃잎들을 본다. 봄 햇살을 받으며 화사하게 빛나던 벚꽃은 휘몰아친 광풍에 쓸려가 마른 가지만 남아버렸다. 영원할 것 같은 화려함은 한순간의 꿈이었나 싶게 사라져버렸다.
  <위대한 개츠비>는 인간의 욕망과 물질문명의 허상을 사랑이라는 코드로 노래했기에 아직도 읽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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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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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말로 소설을 시작된다. 생일잔치를 위해 시골서 올라온 아버지는 함께 올라온 어머니를 서울역에서 놓쳐버린다. 그렇게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 아들과 딸, 아버지는 서울 시내를 이 잡듯 뒤지고 다닌다. 큰아들이 서울로 올라와 처음 자리 잡은 동네에서부터 그들이 살았던 곳을 거쳐 가며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보지만 어머니를 봤다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질 못한다. 
 
  소설은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가족들의 시선을 통해 그녀의 잊혀졌던 과거를 하나씩 끄집어낸다. 자식과 남편의 뒷바라지에 몸 편할 날이 없었던 어머니는 자신의 욕망을 가슴 속에 묻어둔 체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한 명의 여자였던 것. 너무나 평범했던 나머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네들의 삶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되짚고있다.
  어머니, 그 이름 속에는 세상의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따뜻함과 어떤 상황에서도 기꺼이 반겨줄 포근함이 묻어있었다. 어떤 투정도 다 받아줄 것 같고 어떤 부탁도 거절 없이 들어줄 것 같은 마법의 상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우리는 이 보금자리를 처음부터 늘 그곳에 있어왔던,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 그곳에 있을 것처럼 여기며 무시하고 외면해버렸다. 
  이렇듯 자식과 남편을 위해 반평생을 살아온 대가치고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결과였지만 우리들의 어머니는, 당신과 나의 어머니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빌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한 번의 투정이나 불평도 없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워지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대학 보내 달라, 결혼시켜 달라, 집 사 달라, 얘 봐 달라, 학원비 보테 달라며 늘 손만 벌리는 내 모습에 비해 뭐 하나 제대로 해드린 것이 없다. 어제의 안부를 묻는 말에도 건성으로 말해버렸고, 피곤해하는 어머니를 보더라도 선뜻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이제는 바꿔야겠다. 나의 안위를 부탁하기에 앞서 그녀의 건강을, 즐거움을, 행복을 부탁해야겠다. 나에게, 그리고 어머니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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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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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진기행> (1964)
  잘나가는 처가의 도움을 받으며 그럭저럭 제약회사에 다니던 윤희중은 전무 승진을 앞두고 무진으로 휴양을 온다. 그의 고향이었지만 별다른 특색 없는, 아니 자욱한 아침 안개가 유달리 인상 깊은 무진에서 이곳 생활의 답답함을 호소하는 음악선생을 알게 되고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급한 회의가 있다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서둘러 상경하게 된다.
  1964년  발표된 김승옥 님의 대표작으로 고향에서 만난 낯선 여자와 중년 남자의 사랑을 그린 '불륜'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끌고 있다. 1964년이라는 시대를 감안한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지만 무진이라는 갑갑한 공간과 의미없던 서울 생활의 묘한 교차로 인해 그리 외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창 진행되던 산업화에서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던 우리들의 아버지, 60년대 중년들의 소외감을 무진이라는 습기찬 풍경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서울 1964년 겨울> (1965)
  고등학교 졸업 후 구청 병사계에 일하는 나, 부잣집 장남에다 대학원생이던 안, 그리고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아 받은 돈을 오늘 밤에 다 써버리려 작정한 서적외판원, 이렇게 셋이서 서울의 밤거리를 헤맨다. 술을 마시고, 불구경을 하고, 여관에서 잠을 청한다. 하지만 다음날 나와 안은 서적외판원이 자살한 것을 알고는 서둘러 여관을 도망 나온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단절된 체 살아가는 서울, 단지 그곳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원죄를 범하는 것일까? 어떤 평론가는 이 단편을 두고 "한국 시민사회의 자화상"이라 표현했건만, 그 스산한 분위기 속에 감추어진 '무엇'을 발견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생명연습> (1962)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김승욱 님의 등단작으로 형과 어머니, 성직자, 예술가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과의 싸움, 극기(克己)를 재구성한다. 
  치열한 그 무엇을 향해가는 꿈틀거림, 절규 같다고나 할까. 미완성인데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모순투성이의 우리 인생을 보는 것 같다.
 
  <건(乾)> (1962)
   간밤에 있었던 빨치산의 습격으로 마을은 엉망이 되었고 계획되있던 형의 무전여행도 무산되었다. 나는 등굣길에 윤희 누나를 통해 '빨갱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반 친구들과 함께 묘한 흥분 속에서 구경을 했다. 그날 오후, 아버지와 형, 형 친구들과 함께 '빨갱이'의 시체를 묻고 오는 길에 윤희 누나를 마주친다. 형과 그의 친구들은 그녀를 겁탈할 계획을 세우지만 나는 이런 계획을 알면서도 은근히 돕기까지 한다.
  사람의 죽음마저도 한낱 유희거리로 전락해버리던 시절이니 여고생 하나쯤 유린하는 것이 무슨 대수랴!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우리는 너무 잔인해졌다. 죽음마저도 무덤덤하게 지켜보는 우리는 이미 공범자들이었다.
 
  <역사(力士)> (1963)
  판자촌에서 함께 하숙을 했던 서씨 아저씨는 대단한 힘의 소유자였다. 어느 날 밤, 동대문의 벽돌을 옮겨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스스로 증명한다. 하지만 판자촌에서의 생활은 옛 기억이 되었다. 새로 옮긴 하숙집은 쓰러져가는 판잣집이 아니라 깔끔하게 지어진 양옥이었다. 더구나 가풍을 세운다는 집안 어른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빛의 세계였다. 
  카인의 징표를 놓고 고민하던 싱클레어를 보게 된다. 어둠 속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자유의 즐거움이랄까. 온갖 규제와 질서로 갑갑해진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차나 한 잔> (1964)
   일간신문에 연재하던 만화가 며칠째 실리지 않았다. 신문사로 찾아간 나는 "차나 한 잔 하러 가실까요?"라고 문화부장의 뒤를 따라 찻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예상했던 데로 해고 통지를 받았다. 다른 신문사를 찾아가봤지만 상황은 마찬가지. 아침부터 따라다닌 설사처럼 그의 삶도 쓰라리기 시작했다.
  차나 한 잔 하자는 단순하면서도 일상적인 말 한마디, 그 속에는 사과, 아부, 부탁, 거절과 같이 쉽게 표현하기 힘든 우리의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커피의 달콤함으로도 무마하기 힘든 쓰디쓴 인생이여~
 
  <다산성> (1966)
 상당히 길고, 상당히 모호하다. 야유회에서 잡아먹을 돼지와 연극에서 등장하는 토끼, 그리고 어느 날 사라져버린 노인은 하숙집 숙이와의 비밀스런 사랑과 함께 <다산성>이라는 제목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다. 다산성? 무엇을 다산(多産)한다는 말이지?
  한 블로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무기력하고 왜소한 주변인의 일상을 통해 인간소외 문제를 생각케하는 세태풍자소설"이라 했지만 어디에서도 '풍자'를 느끼진 못했다. 나의 얕은 문학성을 원망하는 수밖에...
 
  <염소는 힘이 세다> (1966)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염소 고기로 국을 끓여 팔자 생활은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고깃국을 먹으려 드나들던, 승합 운전수를 감시하던 아저씨에 의해 누나는 강간당한다. 나는 그 아저씨가 죽도록 미웠지만 승합차 안내양으로 취직시켜준 것밖에 모르는 할머니는 그를 고맙게만 여긴다. 
  힘의 논리에 저항할 수 없는 소시민의 모습이 안쓰럽다. 육체적인 힘은 물론 돈과 권력이 힘, 그리고 취업의 힘까지. 염소로 대변되는 정의는 힘의 논리 앞에 무색해져 버렸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 
 
  <야행> (1969)
  사내 결혼을 숨기며 살아가는 현주는 휴가 마지막 날, 자신을 손목을 잡아끄는 이름 모를 남자와 함께 여관에서 동침을 한다. 숨기고 싶은 기억이었지만 불현듯 다시 그런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한 남자의 손에 이끌려 호텔 앞까지 갔지만 자신의 얼굴을 힐긋 돌아보던 남자가 갑자기 혐오스러워졌다.
  일회적이며 우연적인 남자들의 일탈과 결혼마저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우리 사회가 바라는 '여성의 정조'는 무엇이며, 여자이기에 숨겨야했던 욕망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서울의 달빛 0장(章)> (1977)
  유명 여배우와 결혼한 나는 그녀의 의심스런 과거와 문란한 현재를 확인하고는 이혼을 했다. 그리고 살던 집을 팔아 최고급 차를 사고 나머지는 통장에 넣어 그녀에게 주려했다. 하지만 뭔가 새로 시작될 것 같은 기대는 찢어진 통장처럼 산산 조각나 버렸다.
  성적인 가십거리로나 등장하는 연예인을 통해 사랑과 결혼, 가족의 숨은 의미를 들춰본다. 점점 개방되어가는 성문화 속에서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는가, 상품화된 성을 욕하기에 앞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직도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믿는 것은 아닐까...   
  
 
변명의 여지도 없는 완전한 참패랄까. 도시화, 상업화와 같은 시대상황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우리 소시민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신과 이웃, 돈과 명예, 사랑과 욕망 등 궁색하게 고립된 우리들의 아픈 과거를 흔들어 깨우며 잃어버렸던 인간애를 되돌아보게 한다.
  김승옥 님은 이렇게 까발려진 우리들의 민얼굴을 통해 현재를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을 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50여년이 지난  지금, 물질적으로 풍족해진 변화 외에는 그리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가슴 속에는 여전히 높은 벽으로 막혀 있는 것 같다. 
  '서울, 2012년 겨울'의 모습은 어떠할지 자문하게 된다...

  그리고 단편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덧붙이자면, 잘 이해되지 않는 내용도 있었지만 평론가나 블로거의 글을 찾아 읽다보니 그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어렴풋이 머릿속에 남아있던 생각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면서 모호하게만 느껴졌던 단편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런 눈 맛에 다시금 단편을 찾게 되는 것 같다.
  모호한 단편에 대한 정보를 찾던 중 그의 작품으로 진행되는 인터넷 수능 강의를 봤다. 작품을 등장인물과 시점, 배경과 사건으로 구분해 도식화하고는 명쾌하게 설명했다. 물론 이런 분석이 문학을 이해하는 올바른 모습이라 보기는 힘들지만 내용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 예술작품에 대한 '분석'을 '작품의 폭넓은 해석'을 막는 걸림돌로만 생각하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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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2012-03-14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숙제로 잘 쓰겠습니다 ^^

프리즘 2012-03-14 23:00   좋아요 0 | URL
선생님은 다 알아요~ ^^
 
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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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키호테'라고 하면 어린 날에 봤던 만화영화(1983, KBS) <돈키호테>가 떠오른다. "달려라 달려 돈키호테~ 정의의 기사 돈키호테~" 하는 후렴구가 생각나는 이 만화에서 늙어빠진 로시난테를 타고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또한 학창시절에 읽은 <돈키호테>도 기억난다. 독서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내가 책 읽기에 관심을 붙여볼 요랑으로 구입해 읽은 책이었는데 수월하게 넘어갔다는 것 외에는 별로 기억나진 않는다.
  아무튼 <돈키호테>에 대한 기억은 기괴하고 무모한 모험담을 그린 코미디의 모습으로 다가왔으며 누구나 쉽게 재미나게 읽을 만한  청소년용 도서라는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서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훨씬 의미 있고 값어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완역본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공사에서 나온 <돈키호테>를 발견하게 되었고, 내가 놓쳐버렸던 그 무엇을 찾아보기 위해 구입했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쉬 손이 가지는 않았다. 7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함에다 빈약할 것 같은 내용 때문에 읽기를 미뤄 왔었다. 그러다 며칠간 병원에 입원해야 할 일이 생겨, 넘쳐나는 시간을 어찌해볼 요량으로 꺼내들게 되었다.
 

  <돈키호테>는 대부분 알고있다시피 기사소설에 광적으로 집착한 노인의 모험담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 정하고 늙고 병든 자신을 말을 '로시난테'라 명한 후 길을 떠난다. 아 잠깐, 그리고 기사 이야기의 빠질 수 없는 것이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던가. 돈키호테는 자신의 연모 대상으로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가상의 여인을 만들어냈고 그녀를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시종, '산초 판사'와 함께 모험을 떠난다.
  기사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돈키호테는 풍차를 괴물로 여기고 돌진하는가하면(1부), 상사병으로 죽은 그리소스토모의 장례식에 참석한다(2부). 양떼를 적으로 오인해 공격하기도 하고(3부), 형벌을 받기위해 끌려가는 죄수를 풀어준다(3부). 그리고 결혼을 미끼로 도로테아를 능욕한, 카르데니오의 연인(루시아)을 가로챈 돈페르난도르를 응징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리고 이들과의 얽히고설킨 인연은 돈키호테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려는 신부와 이발사와 함께 <돈키호테>의 중심 이야기로 등장한다(4부). 

  특히 4부에 포함된 두 편의 액자소설이 인상 깊다. 한편의 일종의 기사소설로 아내의 정절을 시험하고 싶은 남편과 이를 통해 친구의 부인을 사랑하게 되는 내용으로 중세판 '사랑과 전쟁'을 연상케했다. 이는 희극적으로 진행되는 <돈키호테>에 사랑이라는 무게감을 실어주는 듯 했다.
  나머지 한편은 기독교로 개종한 무어 여인(소라이다)이 그곳에 갇힌 죄수를 따라 기독교 국가로 망명한다는, 조금은 정치적인 내용으로 노예생활과 포로생활을 했다는 세르반테스의 경험이 녹아있어 더욱 사실적으로 보였다. 어쩌면 비현실적인 <돈키호테>에게 현실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문득 이상에만 집착하는 돈키호테보다 현실적인 욕구에 주목하는 산초 판사가 더 현명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꿈속을 헤매는 돈키호테를 욕하기에 앞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를 되돌아볼 일이다. 오늘의 일 보다는 내일의 일에, 착실한 노력보다는 대박의 요행을, 자신의 책임보다는 남과 비교되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돈키호테라는 광인을 사이에 두고  암묵적으로 벌이는 집단행동은 오늘날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왕따와 닮아있어 조금 씁쓸했다. 돈키호테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대상으로 한 '짜고 치는 고스톱'은 세상물정 모르는 외톨이를 더욱 고립시켜 버렸다. 하지만 앞으로의 우리사회는 배척보다는 포용을 통해 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편 세상물정 어두운 노인네의 '수난사'를 통해 기독교적 세계관도 엿보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러 온 예수와 이를 못미더워 한 세상 사람들, 결국 그토록 변화시키고자 했던 세상 사람들에게 수난을 당하는 예수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형편없이 망가지고 상처받은 그의 모습에서 경건함마저 느끼게 된다. 어쩌면 그가 당하는 수모보다도 이 후에 벌어지는 오뚝이 같은 끈질김에 경탄을 보내는지도 모르겠다.
  돈키호테와 인간, 예수의 형상이 겹쳐지자 세상을 이끈 여러 인물들이 차차로 겹쳐진다. 잔다르크, 징기스탄, 진시황, 히틀러, 간디, 이순신, 김구... 영웅이나 투사, 독재자라는 타이틀을 떠나 인간 무리를 이끈 '영웅'임에는 틀림없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들은 세상과의 힘겨운 싸움을 끊임없이 벌이지 않았던가. 어쩌면 돈키호테는 세상 속을 살다간 영웅들을 위한 헌사가 아닐까싶다. 비록 과장되고 희극적일 망정 자신의 이상을 위해 끝까지 투쟁했으니 말이다. 
 


  무엇이 돈키호테를 저토록 무모하게 만들었을까? 물론 기사소설에 광적으로 집착한 그에게 첫 번째 원인이 있겠지만 그의 힘과 공상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던 사회도 책임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사회의 돈키호테들에 대처하고 있는가? 다수의 의견과 다르거나 독특한 외모로 인해서, 돈이나 명예, 신체와 정신의 결함여부에 따라 이들을 돈키호테로 몰아세워 왕따 시키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본다. 돈키호테는 결국 미쳐버린 사회를 대변하는 거울일 수도 있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편력 기사가 되고부터 용감하고 공손하고 민첩하고 예의바르고 너그럽고 정중하고 대담하고 정답고 인내심 있으며, 고생도 속박도 마법에도 굴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소. 비록 얼마 전부터 광인으로 취급받아 우리에 갇혀 있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 용기를 내어 하늘이 돕고 운명이 나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근시일 내에 어느 왕국의 왕이 되어 그곳에서 이 가슴 속에 숨겨진 감사함과 관대함을 펼치게 될 것이오." (p688)
  돈키호테는 미쳤다. 하지만 그의 이상에는 언제나 '감사함과 관대함'이 있었다. 우리가 이해타산을 따지며 멈칫할 동안에 그는 이웃을 위해 용감하게 돌진했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상처는 돌보지 않고 불의를 향해 뛰어든 용감한 전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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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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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중의 고전이자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으로 온갖 종류의 필독서, 권장도서, 추천도서에서 맨 위를 달리는 <햄릿>을 편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그 명성을 확인하고 공감해보고 싶었다. 특히 얼마 전에 읽은 <일리아스> 해설서를 통해 다시금 고전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조금 난해하고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시간을 초월해 적용되는 고전만의 범용성을 느꼈다고나 할까.

 

  희곡 형태의 글이라 처음에는 읽기가 어려웠지만 인터넷을 통해 <햄릿>의 줄거리와 배경을 찾아보자 조금은 수월해졌다. 자연히 희곡의 묘미도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았다. 마치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 전체 사건이 하나하나 조각되는 느낌이랄까. 대사라는 블록을 끼워 맞추며 전체그림을 그려보는 것 같았다. 

  또한 페이지를 열 때마다 접혀진 그림이 튀어나오는 팝업북처럼 텍스트 위로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그들의 대화가 들리는 듯 했다. 마치 국립극장의 연극무대에서, 굵은 목소리에 하얀 궁정가발을 쓴 배우들의 연기를 직접 보는 것 같았다.

 

  <오셀로>, <리어왕>, <멕베스>와 함께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이라 불리는 <햄릿>, 엮자(최종철)는 직역의 충실함과 의역의 부드러움 사이에서 전자를 택했지 싶다. 운문과 희곡 형식으로 되어 있는 원문(엄밀히 말하면 이것 또한 번역본이다)을 의역 없이 그대로 번역한 듯 보인다. 그래서 희곡적인 분위기는 제대로 즐길 수 있었지만 글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 국어의 어순이나 문맥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하기에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집중이 필요할 것 같다. <햄릿>의 숨은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해설서를 참조하는 것도 좋지 싶다.


( www.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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